소설리스트

149화 (149/402)

네, 명심할게요. 그리고 꼭 이루겠습니다.

부우웅.

커다란 트럭 몇 대가 서울대 입구로 모여들었다. 서울대 입구의 앞에는 강우를 비롯해 동아리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강우야, 선풍기는 다 왔고, 이제 생필품만 도착하면 돼.”

채보라가 다가와 말했다. 강우는 이재원과 함께 있었다.

“형, 언제쯤 도착해요?”

“올 때 됐는데….”

오늘은 SLAM의 첫 봉사활동 날이었다. 예정되어 있던 대로 한국에 생존해 있는 독립유공자분들과 어렵게 지내는 후손분들을 찾아가기로 했다. 하지만 강우는 선풍기를 나누어 주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오늘 진짜 신경 써야 해요. 그냥 보여주기식으로 끝나는 건 절대 원하지 않거든요.”

“그럼 그럼. 우리 재단 감사님 말씀이신데 받들어 모셔야지.”

이재원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강우는 이재원의 부탁으로 사단법인 광복의 감사직을 맡은 상태였다. 사실 말이 감사지 거의 전권을 가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재원이 형이 자기는 그룹에 신경 써야 한다고 나한테 일임을 했지.’

이철금 회장도 이재원의 뜻에 찬성했다. 사실 강우에게 선물을 준다고 했을 때부터 염두에 둔 일이라고 했다. 강우는 자신의 꿈을 펼칠 든든한 배경을 얻었다.

‘언젠가는 사단법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잘됐지.’

사단법인의 전권을 가지게 된 강우는 생필품은 물론 여름을 위한 임시 공과금 지원까지 계획했다. 강우는 그렇게 조금씩 더 큰 지원을 해 내갈 생각이었다. 강우가 상념에서 벗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부우웅.

마침 멀리서 또 몇 대의 트럭이 나타났다. 각각의 집에 나누어줄 생필품들이었다. 강우가 신경 쓰고 또 신경 써서 준비한 물건들이었다.

‘봉사활동이라고 보여주기식이 아닌 정말 저분들한테 필요한 거로.’

그렇게 준비된 물건들이 모두 모였다.

“다들 모여보세요!”

강우가 소리치자 동아리원들이 일사불란하게 모였다. 강우가 입을 열려던 차에 신원주가 다가와 확성기를 건네주었다. 강우가 확성기를 받아서는 말을 이어갔다.

“오늘 중요한 날입니다. 우리 동아리가 처음으로 봉사활동을 시작하는 날이니까요. 하지만 또 무거운 마음으로 움직여야 하는 날입니다. 나라를 독립시키려고 싸우신 독립투사분들과 후손들의 현실을 마주해야 하는 날이니까요.”

강우의 말에 동아리원들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분들 앞에서 너무 미안해할 필요 없습니다. 그분들은 나라를 지켰다는 자긍심으로 일생을 사신 분들입니다. 우리의 있는 그대로 모습을 보여주고 옵시다. 우리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거고 그 시작이 너무 늦었을 뿐이니까요.”

강우의 말에 동아리원들이 작게 탄성을 뱉어냈다. 사실 텔레비전에 나오고 주변의 관심이 쏟아지며 우쭐했던 동아리원들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강우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강우가 동아리원들을 쓱 둘러보았다. 지난 축제 이후 동아리원들은 더욱 늘어나 있었다.

“오늘 자기 조는 전부 파악했죠? 오늘 조장은 저 박강우, 이재원, 채보라, 신원주 그리고 연정호….”

강우의 입에서 조장들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오늘은 모두 열 명의 조장이 있었다. 조별로 자신들에게 배정된 곳으로 향할 것이었다. 모두 강우가 보훈청에 문의해 알아낸 정보들이었다.

“이제 조별로 지정된 수량만큼 물건들을 받아 가세요.”

강우의 말에 동아리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트럭에서 물건들을 내리고는 각 조에 배정된 만큼의 수량을 다시 나누어 실었다. 찌는듯한 더위였지만, 모두의 얼굴은 밝았다. 한편으로는 자부심과 사명감마저 엿보였다.

‘좋네….’

강우가 자신의 조원들과 함께 물건을 나르며 스르륵 웃었다. 독립유공자들과 후손들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국민의 관심이었다. 미래의 기억 속에서도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살아온 분들이었다.

‘삼일절이나 광복절 같은 날에나 조금 언급될 뿐이었지.’

강우는 지금껏 열심히 달려왔다. 가족을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일념으로였다. 이제 강우는 독립운동가들과 후손들에 대한 잘못된 현실과 미래를 바꾸고 싶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내 친구들을 내 학교를 그리고 내 주변인을 모두 변화시키겠어.’

강우가 굳은 다짐을 했다. 이윽고 조별로 짐을 나누어 싣는 것이 끝났다. 강우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쓱 닦아냈다.

“출발합시다!”

강우의 출발신호와 함께 동아리원들이 승합차에 탑승했다. 이재원이 강우를 보며 씩 웃더니 손을 흔들었다. 강우도 손을 마주 흔들어 주었다.

드르륵.

강우가 뒷문을 열어 조원들을 확인했다. 강우의 조원들은 SLAM의 농구부원들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한국어가 서툰 커다란 덩치의 이지용도 함께였다. 승합차의 뒤쪽에 웅크리듯 앉아있는 이지용의 모습에 강우가 픽 웃었다.

“괜찮냐?”

“좁지만 괜찮아.”

이지용이 어설픈 한국어로 답했다. 강우가 앞 좌석을 가리켰다.

“앞에 앉을래?”

“사양 안 한다.”

이지용이 좁은 승합차를 비집고 나오기 시작했다.

“야야! 이지용!”

앞에 앉아있던 동아리원들이 던져지듯 차 밖으로 밀려났다. 강우가 또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모두가 승합차에 올라탔다.

“감사님, 출발하겠습니다.”

사단법인에서 나온 직원의 말에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승합차가 부드럽게 출발하고 그 뒤로는 한 대의 화물차가 따라붙었다.

“가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야. 다들 한숨 자.”

강우의 말에 동아리원들이 눈을 끔뻑했다. 사실 오늘에 대한 긴장감으로 전날부터 밤잠을 설친 게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오늘의 목적지는 강원도였다. 아니 대부분 조가 전부 시골 마을을 향해 출발한 참이었다.

‘아직 정부가 인정한 독립유공자는 그 숫자가 턱없이 적다.’

유공자로 인정을 받았다고 해도 본인 혹은 수권자 한 명만이 연금 혜택을 보고 있었다. 그런 혜택에서 벗어난 후손들은 어려운 현실을 살고 있었다.

‘그런 현실을 전부 다 바꿔놓겠어.’

강우가 결의를 다지는 사이 차량은 고속도로로 올라섰다. 슬쩍 주변을 확인하니 동아리원들은 하나둘씩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강우도 잠시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덜컥.

승합차가 심하게 덜컹거렸다. 강우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주변을 둘러보니 승합차는 시골길에 들어서 있었다. 새벽같이 출발한 덕분에 아직 시간은 정오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다 와 갑니까?”

강우의 질문에 운전하는 직원이 답했다.

“네, 조금만 가면 됩니다.”

“잠들어서 미안합니다. 운전하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았죠?”

강우의 말에 직원이 씩 웃었다.

“옆에 지용이가 안 자고 저랑 같이 말벗도 해주고 그랬습니다. 덕분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운전석 옆에서 자는 건 매너가 아니지.”

이지용이 씩 웃으며 강우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차량이 허름한 집의 근처에 다다랐다.

“어? 누가 나와 계신다.”

이지용이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강우가 슬쩍 몸을 앞으로 뺐다. 허름한 집의 대문으로 할아버지 한 분이 서 있었다. 승합차는 집 앞의 공터에 멈춰 섰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강우가 먼저 내렸다. 그리고는 할아버지를 향해 다가갔다. 할아버지가 강우를 보더니 대번에 밝은 표정을 지었다.

“네가 강우구나?”

자신을 단번에 알아보는 할아버지에 강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나 안면이 있는 분인가 싶었다. 하지만 예의 바른 인사가 먼저였다.

“안녕하세요. 박강우입니다. 혹시 김일국 할아버님이세요?”

“그래, 내가 김일국이야.”

할아버지가 여전히 반가운 안색으로 답했다. 그리고는 말을 이어갔다.

“텔레비전에서 보던 거보다 훨씬 잘생겼네. 아주 훤칠해.”

“아….”

강우가 그제야 자신을 바라보던 익숙한 눈빛을 이해했다. 그리고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김일국이 강우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할아버님께서 정말 장한 손자를 두셨어. 정말 장해.”

“감사합니다. 날이 더운데 일단 안으로 들어가세요.”

강우가 잡은 손을 놓지 않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마당으로 들어선 강우가 속으로 탄식을 뱉어냈다. 낡은 대문보다 훨씬 남루한 집의 모습이었다.

“잠시만 대청에 앉아서 기다려들 봐.”

김일국이 부드럽게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이지용과 동아리원들이 강우의 주변으로 앉았다. 주차를 끝내고 들어온 직원이 강우를 보며 감탄했다.

“저분이 저렇게 친절한 분이셨는지 몰랐습니다.”

“네?”

강우가 의아해하자 직원이 씩 웃으며 말했다.

“맨 처음에 이번 방문을 위해 연락을 드렸을 때요. 엄청나게 혼났습니다. 또 때가 됐느냐고 하시면서 평소에는 관심도 없는 것들이 이때만 되면 사람을 귀찮게 군다고.”

“아….”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이제 곧 광복절이었다.

“그런데 저희 사단법인 이름을 말하니까 대번에 감사님 이름을 말씀하시더니 갑자기 그렇게 적극적일 수가 없게 변하시는 겁니다. 꼭 감사님을 만나고 싶다고 자기한테 오게 해달라고 몇 번이나 당부하시던지.”

“그래서 제가 여기에 오게 된 거군요?”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여기뿐만이 아닙니다. 연락을 드리는 분마다 전부 감사님이 직접 오게 해달라고 얼마나 부탁들을 하시는지 저희가 양해를 구하느라 아주 혼났습니다.”

“그랬군요. 제가 시간을 더 내야겠네요.”

강우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직원이 감탄했다는 듯 말했다.

“진짜 요즘 저희 그룹에서 감사님보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슈퍼맨이라고 번쩍번쩍 나타나서 일을 해치워버리는 슈퍼맨이요.”

“오? 그거 듣기 좋은데요?”

그때, 김일국이 돌아왔다. 양손으로 커다란 쟁반을 들고 있었는데 수박이 올려져 있었다. 강우가 벌떡 일어나 쟁반을 받아들었다.

“어르신, 안 주셔도 되는데….”

“아니야. 더운 여름인데 수박만 한 게 없지.”

김일국이 인자하게 웃었다.

쩌저적. 서걱.

수박이 비명을 지르며 갈라졌다. 그리고 먹기 좋게 잘렸다. 김일국이 강우를 향해 수박을 내밀었다.

“하나 먹어봐. 서울에서 사 먹는 거랑은 맛이 달라.”

“감사합니다.”

강우가 꾸벅 인사를 하며 수박을 받았다. 김일국이 이번에는 이지용을 바라보았다.

“체격이 아주 장사 체격이네. 자네는 옛날에 태어났으면 아주 장군감이었겠어.”

“감사합니다.”

이지용이 어눌한 한국어로 감사하다 말하며 꾸벅 인사를 했다. 김일국은 다른 동아리원들에게도 수박을 나누어 주었다.

“이맘때쯤 되면 말이야. 아주 여러 군데서 난리들도 아니지. 기자들도 찾아오고 방송국에서도 찾아오고 연례행사야.”

김일국의 말에 강우가 먹던 수박을 내려놓았다. 김일국이 다시 수박을 들어 강우의 손에 쥐여주었다.

“먹어. 먹으면서 들어.”

“네.”

강우가 다시 수박을 먹었다.

“그런데 말이야. 올해는 아주 기분이 좋아. 강우 네가 이렇게 찾아오니 진짜 내 손자가 온 거 같은 기분이야.”

“감사합니다. 정말 손자라고 생각해주셔도 돼요.”

강우의 말에 김일국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래, 앞으로 그렇게 생각하련다. 너는 독립유공자분들과 우리 후손들의 희망이고 등불이다. 그리고 모두의 손자고 아들이다. 앞으로 네가 세상에 꼭 보여주거라. 독립운동을 하면 삼대가 망한다는 말을 네가 보란 듯이 깨부숴주기 바란다.”

“네, 명심할게요. 그리고 꼭 이루겠습니다.”

강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직원과 동아리원들이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작하자.”

강우와 동아리원들은 먼저 허름한 집 안을 깨끗이 치웠다. 임시방편이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했다. 강우는 집을 치우며 꼭 주거 환경개선에도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쉽지 않은 큰일이니 잘 준비하고 시작해야 했다. 그렇게 집 안 청소를 끝나고 강우와 동아리원들은 선풍기를 가져다 놓고 생필품도 들이기 시작했다.

“아이고~ 뭘 이렇게 많이들 가져왔어.”

집 안으로 들어오는 생필품에 김일국이 고마움을 금치 못했다. 연신 강우의 손을 잡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강우가 손을 마주 꽉 잡았다.

“어르신, 제가 자주 오지는 못할 거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 해주신 말씀 그리고 어르신의 마음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래, 그거면 됐다.”

김일국이 아쉬움에 손을 놓지 못했다. 하지만 강우가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 어서들 가봐. 또 다른 곳에 들려야 하지?”

“네, 건강하세요.”

강우가 꾸벅 인사를 했다. 동아리원들도 꾸벅 인사를 했다. 이지용이 손을 ‘척’ 하고 들려다가 다급히 허리를 숙였다. 김일국은 대문 밖까지 따라 나왔다.

“가보겠습니다.”

“그래, 나중에 시간 나면 또 놀러들 와.”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강우가 승합차에 올라탔다. 직원이 김일국을 슬쩍 보더니 짧게 한숨을 쉬었다.

“많이 외로우신가 봅니다.”

“......”

강우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더는 소외당하고 외로움을 느끼는 독립유공자들과 후손들이 없게 만들겠다고 말이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직원의 말과 함께 승합차가 부드럽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강우와 동아리원들이 멀어져가는 김일국을 돌아보았다. 김일국은 한참이나 손을 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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