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8화 (148/402)
  • 너 정말 멋진 남자야.

    늦은 저녁. 강우 가족의 넓은 거실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거실 바닥에 앉아있던 강우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소파에는 할아버지와 최준이 앉아있었다. 두 분의 얼굴에는 옅은 긴장감이 떠올라 있었다.

    “시작이구나.”

    할아버지의 말에 강우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정면에 있는 텔레비전에서 웅장한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자막이 떠오르자 거실에 탄성이 차올랐다.

    “강우야, 진짜 기대돼.”

    “재밌을 거야.”

    강우의 옆에 앉아있는 이나은은 유독 기대감에 차 있었다. 중국에 함께 가지 않았으니 더 궁금한 것이다.

    “아빠! 엄마! 빨리요!”

    할아버지들 사이에 숨듯이 앉아있던 강용이가 주방을 향해 소리쳤다. 주방에서 아버지와 이재원이 커다란 상을 번쩍 들고는 거실로 왔다. 그 뒤로는 어머니와 김세아가 앞치마를 풀고 뒤를 따랐다.

    “우와~ 맛있는 거 엄청 많아.”

    아버지와 이재원의 거실의 중앙에 상을 내려놓았다. 상 위에는 어머니와 김세아가 준비한 간식들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엄마, 빨리 앉으세요 시작했어요.”

    강우의 말에 어머니와 김세아가 이나은의 옆쪽으로 앉았다. 이나은이 포크로 과일을 집어 어머니와 김세아에게 내밀었다.

    “고마워.”

    어머니와 김세아가 싱긋 웃으며 과일을 받았다. 그사이 다큐멘터리는 계속됐다. 시작은 할아버지와 최준의 인터뷰로 시작됐다.

    -사실 우리가 이렇게 나서는 것을 한참 고민했습니다.-

    텔레비전 속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그와 동시에 강우가 족의 분위기도 낮게 가라앉았다.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저는 낮은 사람입니다. 나라를 위해 더 큰 희생을 하고 목숨을 던지신 많은 순국선열이 있습니다. 제가 감히 이렇게 얼굴을 드러내야 하는지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할아버지의 말에 모두가 숙연해졌다. 할아버지는 혹여 다른 독립투사의 명예에 누가 될까 걱정하는 것이었다. 오랜 세월 자신을 내려놓고 지낸 세월에 대한 자조도 섞여 있었다. 인터뷰는 계속 이어졌다. 먼저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임시정부에 대한 기억을 물었다.

    -저는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만주로 투입됐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강우 가족이 익히 알고 있는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이윽고 화면이 바뀌고 강우와 SLAM의 동아리원들이 나타났다.

    “형아다!”

    강용이가 몸을 쭉 빼며 화면을 가리켰다. 강우와 동아리원들의 공항에서부터 시작된 인터뷰와 장소를 이동하는 모습이 나왔다. 화면은 곧 바뀌어 상해 임시정부를 보여주었다.

    “저기구나. 나도 꼭 한 번 가보고 싶어.”

    이나은이 눈을 빛내며 강우를 향해 말했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다음에 한번 같이 가자.”

    “응.”

    다큐멘터리의 내용은 대학생들의 시선으로 본 임시정부의 현 모습과 앞으로의 보존 방법 등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중간중간 할아버지와 최준의 인터뷰와 함께 옛 영상들이 나오기도 했다. 모두 한국에는 남아있지 않은 귀한 영상이었는데, 위진오가 중국에 있던 자료들을 찾아준 것이었다.

    ‘저 영상들은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최초공개라고 했지.’

    강우와 이재원이 만든 다큐멘터리는 재미도 그리고 역사적인 가치도 듬뿍 담긴 것이었다. 그렇게 거실 모두가 숨을 죽여 다큐멘터리를 감상했다. 때로는 웃긴 장면도 또 다음에는 엄숙한 장면도 나왔다.

    “아…….”

    “와…….”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장면에 거실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강우가 옛 광복군사령부에서 장부를 찾는 모습과 유해를 수습하는 장면 그리고 광복군사령부를 강우의 중국회사에서 사들인 것과 앞으로 개보수할 계획까지 나왔다.

    “장하다. 우리 아들!”

    아버지는 다시 봐도 감격인 듯 강우를 보며 대견해했다. 할아버지와 최준은 주름진 서로의 손을 마주 잡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이 이어진 다큐멘터리가 끝났다.

    “우와!! 진짜 재밌어요.”

    강용이가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며 좋아했다.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인 분위기였다. 강우와 이재원이 서로를 보며 씩 웃었다.

    “시청률은 얼마나 나왔으려나.”

    아버지가 시청률을 궁금해했다. 이재원이 아버지의 궁금증에 답했다.

    “시청률 집계하는 데 일주일 정도 걸리니까 나중에 나오면 알려드릴게요.”

    “그래, 알겠다.”

    뚜르르. 뚜르르.

    그때, 거실에 있는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누구지?”

    어머니가 고개를 갸웃하며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는 대번에 미소를 지었다.

    “어머? 원주 엄마.”

    전화가 온 것은 원주 어머니였다. 원주 어머니는 방송 잘 봤다며 어머니와 한참을 통화했다.

    “네, 그래요. 조만간 우리 한번 뭉쳐요.”

    친구 아버지들에게 모임이 있듯 어머니들도 모임을 만든 상태였다. 어머니는 친구 어머니들과도 가끔 만나기도 했다.

    뚜르르. 뚜르르.

    전화기에 불이 났다. 방송이 끝나고 축하 전화와 안부 전화가 밀려들었다. 어머니는 아예 전화기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강우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미래의 기억 속 어머니는 인간관계가 그리 넓지 못했다.

    ‘집도 어려웠고. 사실 사람들을 잘 챙겨주시지만, 사교성이 좋으신 편은 아니었지.’

    하지만 지금 어머니의 모습은 완전 달랐다. 아마 바뀌어 버린 환경과 자신감이 어머니를 변화시켰을 것이었다. 강우는 그게 참 좋았다.

    “강우야.”

    강우가 상념에서 벗어나 시선을 돌렸다. 이재원이 강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공사는 언제부터 시작이야?”

    이재원은 광복군사령부의 복원공사에 관해 물었다. 이재원의 말에 과일을 드시던 할아버지와 최준도 큰 관심을 드러냈다.

    “아버지가 중국 들어가시면 바로 시작이에요.”

    “오? 그래? 생각보다 훨씬 앞당겨졌네?”

    강우는 중국 법인의 자본을 이용해 광복군사령부 건물이 있는 땅을 임대했다. 중국 부동산의 특성상 임대지만, 이제 중국 법인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강우는 위진오의 도움을 받아 충칭시의 전폭적인 협력도 끌어냈다.

    “네, 일단 복구가 불가능한 부분은 철거하기로 했고요. 다른 거는 전부 복원할 계획이에요. 안쪽에는 전시실도 만들고요. 사람들이 자유롭게 와서 볼 수 있게 할 생각이에요.”

    “대단하다. 대단해. 이게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니.”

    이재원이 탄성을 뱉어냈다. 복원에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고 들었다. 물론 충칭시에서도 도움을 주기로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강우는 복원될 광복군사령부를 무료로 개방하겠다고 하고 있었다. 강우가 씩 웃었다.

    “양부님이 도움을 많이 주셨죠. 진짜 양부님 없었으면 생각도 못 했을 거예요.”

    “맞아. 진짜 대단하신 분이지.”

    강우와 이재원의 대화가 이어졌다. 그런 두 사람을 할아버지와 최준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형님, 젊었을 적 저와 형님 같지 않습니까?”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군.”

    강우와 이재원이 대화를 하는 사이 김세아와 이나은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나이 차이는 크게 나지만, 중앙대 선후배인 두 사람이었다. 연기 이야기로 할 이야기가 많았다.

    “선배님, 다음 연극은 언제 시작하세요?”

    “지금 연습 중이야. 한번 구경하러 올래?”

    “정말요?”

    “응, 연습실로 한번 와. 나 연습하는 거도 보고 우리 맛있는 것도 먹자.”

    “좋아요.”

    두 사람의 대화에 강우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연기 이야기 삼매경인 이나은은 정말 즐거워 보였다. 그때, 어머니의 마지막 통화가 끝났다. 어머니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화가 너무 많이 와서 코드라도 뽑아놔야겠어요.”

    어머니의 말에 가족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머니가 자리로 돌아오자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다들 고맙다. 오늘 이렇게 다 같이 모이니 정말 좋구나.”

    할아버지가 가족 구성원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췄다. 가족들도 미소를 지으며 흐뭇해했다.

    “할아버지, 아~”

    강용이가 과일을 집어서는 할아버지의 입에 넣어드렸다. 그리고는 최준의 입에도 과일을 가져다 댔다.

    “할아버지도요 아~”

    할아버지와 최준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가족 시사회가 끝나갔다. 늦은 시간이라 이재원과 김세아는 자고 가기로 했다. 강우는 이나은을 집으로 데려다주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한여름의 뜨거운 공기가 강우와 이나은의 얼굴을 덮쳤다.

    “가자.”

    “응.”

    강우와 이나은이 차에 탔다. 강우의 집에서 이나은의 집은 그리 멀지는 않았다. 달리는 차 안에서 이나은이 강우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강우야.”

    “응?”

    강우가 정면을 주시한 채 답했다. 이나은이 스르륵 미소를 지었다.

    “너 정말 멋진 남자야. 그거 알지?”

    “응?”

    강우가 얼굴을 붉혔다.

    “저번 축제도 그렇고 이번 다큐멘터리에서 나온 내용도 그렇고. 정말 멋져. 나는 네가 지금처럼 많은 사람을 위해서 사는 남자가 됐으면 좋겠어.”

    “응, 노력해 볼게.”

    이나은이 강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포근한 손길에 강우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 * *

    다음 날, 강우의 핸드폰도 불이 났다. 친구들과 학교 동기들 그리고 선배들의 전화가 줄을 이었다. 결국, 강우는 집을 나서 학교로 향했다.

    부우웅.

    학교 주차장에 주차한 강우가 곧장 동아리방으로 향했다.

    덜컥.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잔뜩 상기된 표정의 동아리원들이 있었다. 강우를 발견한 동아리원들이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강우야!”

    강우가 안으로 들어갔다. 동아리원들이 강우를 중심으로 빙 둘러앉았다. 그리고는 앞다투어 입을 열었다.

    “우리 부모님 난리 나셨어. 좋은 일 한다고 엄청 칭찬해 주셨다.”

    “내 주변 친구들은 너 만나보고 싶다고 난리야.”

    동아리원들의 말에 강우가 씩 웃었다.

    “그 말 하려고 집에 있는 사람 불러냈어요?”

    강우의 말에 동아리원들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때, 채보라가 나섰다.

    “그건 아니고 오늘 우리가 너한테 보여줄 게 있어서.”

    채보라가 동아리원들을 한 차례 쓱 훑어보았다. 채보라와 시선이 닿은 동아리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채보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에 있는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서랍을 열어 두툼한 종이 뭉치를 꺼내 들었다.

    “이거 한번 봐봐.”

    강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종이 뭉치를 받았다.

    사라락. 사라락.

    종이를 넘기던 강우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강우가 종이 뭉치를 다 읽고는 동아리원들을 바라보았다. 동아리원들이 마치 칭찬을 바라는 아이처럼 강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대단하네요. 이걸 전부 나 몰래 계획한 거예요?”

    강우가 종이 뭉치를 다시 한번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방학 동안 동아리원들이 자원봉사를 나가기로 한 곳의 명단이 있었다.

    “응, 일단 우리 동아리원들이 이런 경험이 없잖아. 그래서 홀로 지내시는 독립운동가분들이랑 후손분들에게 선풍기를 나눠주는 거로 자원봉사를 시작해 보려고 해. 그다음부터는 주거 개선을 위해 자원봉사를 시작할 거야.”

    채보라의 말에 동아리원들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강우가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이렇게 자발적으로 모금까지 한 거예요?”

    종이 뭉치에는 동아리원들이 자신들의 학과와 주변에서 모금한 금액도 적혀있었다. 적은 액수였지만, 강우를 조금이라도 돕겠다는 동아리원들의 생각이 엿보였다.

    “별거 아니야. 강우 네가 그렇게 나서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안 그래?”

    채보라의 말에 동아리원들이 맞다며 크게 소리쳤다. 강우가 그런 동아리원들을 보며 스르륵 웃었다. 강우가 뿌린 작은 씨앗이 이제 그 꽃을 피우기 시작하고 있었다.

    “좋아요. 그럼 이제 제대로 시작해 보죠.”

    강우가 씩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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