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5화 (145/402)
  • 한바탕 난리가 나겠네요.

    딸칵. 치이익.

    맥주캔이 뜯어지는 소리와 함께 하얀 거품이 치솟아 올랐다. 아버지가 후루룩 맥주를 마셨다.

    “아빠, 땅콩!”

    옆에 앉아있던 강용이가 아버지의 입에 땅콩을 넣어주었다. 아버지가 흐뭇한 표정으로 강용이의 머리를 넘겨주었다.

    “이것도 드세요.”

    강우가 간단한 안주를 만들어 왔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소시지야채볶음이었다. 이재원이 소시지를 하나 찍어서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거 왜 이렇게 맛있지?”

    강우가 말없이 픽 웃었다. 이재원이 강우의 눈치를 슬쩍 보며 말했다.

    “안 힘들어? 오늘 바빴다며? 나라도 그냥 집에 가 있을까?”

    강우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 있다가 굶어 죽으려고요?”

    “4박 5일 만에? 성인 남성 기준으로 일주일은 버틴다던데.”

    이재원의 말에 강우가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이재원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볼을 긁적였다.

    “우리 아들, 엄마 여행 가있는 동안 괜찮겠어?”

    “엄마는 매일 하던 건데요 뭐···. 그리고 강용이가 많이 도와줬어요.”

    강용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손을 내밀며 ‘V’ 자를 그렸다. 아버지와 이재원이 또 좋다고 웃었다.

    “우리 강용이 착하다.”

    “헤헤.”

    강우가 스르륵 웃으며 자신의 몫으로 놓인 맥주캔을 땄다. 그리고 단숨에 한 모금 마셨다. 시원한 맥주의 목 넘김에 하루 동안의 피로가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그나저나 에어컨 있으니까 진짜 시원하네.”

    “그러게요. 아버지 진작 살 걸 그랬어요.”

    아버지와 이재원이 거실 한쪽에 설치된 에어컨을 보며 말했다. 강우가 지금쯤 이런 더위를 즐기고 있을 어머니를 떠올렸다.

    “엄마는 잘 계시다 오겠죠?”

    “죽고 못 사는 세아랑 둘이 갔으니 얼마나 신나겠어.”

    아버지가 살짝 부러운 표정이 되었다. 이재원이 맥주를 홀짝 마시며 물었다.

    “같이 못 가셔서 섭섭하시죠?”

    “아니, 괜찮아. 나야 외국 출장 자주 가니까 상관없다.”

    강우가 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다음에는 꼭 두 분 같이 보내드릴게요.”

    “그래, 회사 좀 안정되고 나면.”

    동양 무역은 지금 매우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중국으로 떠나기 전 김 사업의 전반적인 부분을 마무리 짓고자 했다. 지금은 한국의 해안가를 돌며 김 양식장과 계약을 맺으로 다니고 있었다.

    “아버지, 양식장은 많이 확보하셨어요?”

    “응, 양식장은 많이 확보했다. 이제 이차 가공할 공장이랑 포장업체 만나고 다니고 있어.”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어머니 오면 제가 마무리 지으면 되니까요.”

    “그래도 아빠 중국 가기 전에 최대한 마무리 짓고 가보마.”

    강우와 아버지의 대화를 이재원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슬쩍 물었다.

    “그러지 말고 저희 대진 식품 쪽이랑 같이 진행해 보시는 건 어때요?”

    강우와 아버지가 이재원을 바라보았다. 이재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저희 쪽에도 식품 부서가 있기는 하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그룹 사업 방향을 미디어 쪽으로 틀면서 식품 부서가 좀 붕 떠버렸어요.”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의 기억에서도 대진 그룹의 식품부는 그리 큰 주목을 받는 곳은 아니었다. 딱하나 떠오르는 것은 쌀로 만든 음료가 그나마 히트상품이었다.

    “저희 쪽 협력업체 중에 포장공장도 있고요. 이차 가공도 가능한 공장들 많아요. 그쪽이랑 연결해드릴게요.”

    “좋지. 그런데 정말 괜찮겠어?”

    아버지가 슬쩍 물었다. 이재원의 성격상 어떤 대가를 바라고 말을 꺼낸 것은 아닐 것이다. 김 사업은 전망이 밝았으니 동양 무역이 일방적 도움을 받는 게 부담스럽기도 했다.

    “아버지, 큰아들 섭섭하게 그런 말을 하세요. 저희가 법인만 따로지 같은 회사나 다름없죠. 강우 거가 제 거 제거가 강우 거 아닙니까?”

    “그런가?”

    아버지가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강우는 대진 미디어에도 투자해놓은 상태였다. 아직 상장 전에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게 어떠냐는 이재원의 제안이었다. 대진 미디어가 강우의 예상대로 커진다면 지금의 투자는 엄청난 이익을 가져와 줄 것이었다.

    “네, 그럼 내일 출근해서 식품부에 연락해 놓겠습니다. 동양 무역 쪽 실무자한테 연락해주라고 해주세요.”

    “알겠어. 강종민 과장이 연락할 거야.”

    “네, 아버지.”

    이번에는 강우가 이재원을 향해 물었다.

    “제가 말한 영화 투자 쪽은 어떻게 되고 있어요?”

    “아. 그것도 지금 제작사랑 콘택트 중이야. 아마 무리가 없이 투자할 수 있을 거 같아.”

    강우는 엔터 사업부를 통해 여러 영화 제작에 투자를 시작했다. 미래의 기억으로 흥행작을 알고 있으니 투자는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이번 하반기에 오픈하는 영화관에서 일단 독점으로 개봉하는 조건은 반드시 달아야 해요.”

    “그건 걱정하지 마라. 상영 영화관 확보해준다니까 반색하더라.”

    “그리고 저희는 투자만 할 뿐이에요. 엔터 사업부에 꼭 전해주세요. 영화 제작에는 일절 터치가 없어야 한다고요.”

    “그래, 알겠어.”

    이재원이 알겠다고 답했다. 그리고는 생각났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아 그리고 춘배는 촬영 잘하고 있다냐?”

    “네, 요즘 아주 신이 났어요.”

    오디션에 캐스팅되고는 잔뜩 흥분해서 소리치던 김춘배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그 영화 제목이 뭐라더라···. 무슨 물고기 이름이었는데.”

    강우가 툭 영화 제목을 말했다. 그러자 이재원이 손뼉을 ‘탁’ 쳤다.

    “맞아. 그거야.”

    “북한 쪽 공작원 역할이죠.”

    강우와 이재원이 서로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김춘배의 얼굴을 떠올리니 그런 찰떡 캐스팅이 없었다. 강우가 다시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한국 영화의 흐름을 바꾼 영화이니 춘배야 노력 열심히 해봐라.’

    물론 조연이니 큰 관심은 못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영화의 조연 출신 중에서도 한국영화계의 스타가 많이 나왔다.

    “형, 다큐멘터리는 정상적으로 방송 날짜 잡혔어요?”

    “어, 이번 주말에 첫 방송이야.”

    강우와 이재원 그리고 동아리원들이 중국에서 찍은 다큐멘터리가 곧 방영을 앞두고 있었다. 처음에는 대진 미디어가 소유한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하려 했었다. 하지만 국민적인 관심도가 올라가고, 공영방송 채널 중 한 곳과 계약을 맺고 방영하기로 결정됐다.

    -대한민국 임정 그 발자취를 따라서.-

    곧 방영될 다큐멘터리의 제목이었다. 국민적 관심이 높아진 지금 이 다큐멘터리로 인해 더 큰 관심이 쏠릴 것이 분명했다.

    “한바탕 난리가 나겠네요.”

    “맞아. 좋은 쪽으로 난리가 나겠지.”

    강우와 이재원이 동시에 씩 웃었다. 아버지가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할아버지와 최준의 방문은 열려있었다. 두 분은 역시 사람은 자연의 바람이 최고라며 밤공기를 쐬러 나가셨다.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너무 알아본다고 그러시더니 매일 나가시네.”

    “사람들이 너무 알아봐서 힘들지는 않으실까?”

    이재원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의 관심이라는 게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언론과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이재원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괜찮으실 거예요. 두 분 모두.”

    강우가 오전의 일을 떠올리며 씩 웃었다. 할아버지와 최준은 사람들의 관심을 크게 부담스러워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그리고 강우는 이것이 좋은 현상이라 생각했다. 그만큼 독립유공자들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는 계기가 될 것이 분명했다.

    덜컥.

    그때, 문이 열리고 할아버지와 최준이 돌아왔다.

    “할아버지!”

    강용이가 할아버지와 최준을 향해 후다닥 달려갔다. 할아버지와 최준의 손에는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다.

    “아이코 우리 강아지.”

    “할아버지, 이거 뭐예요?”

    강용이가 비닐봉지의 안을 궁금해했다.

    “이거? 우리 강아지 주려고 할아비가 치킨 사 왔지.”

    “아싸!”

    할아버지와 최준이 자리에 앉았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와 최준의 잔에 막걸리를 따라드렸다.

    “산책은 잘하고 오셨어요?”

    “그럼, 사람들이 하도 인사를 해서 같이 인사해주느라 혼나기는 했지만 말이야.”

    할아버지의 말에 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조금 일찍 들어오긴 했지.”

    아버지와 이재원이 서로를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부드럽게 웃었다.

    “걱정하지 말아라. 관심이라면 젊었을 적에는 더 받았었으니까.”

    “맞지. 물론 일본 순사들의 큰 관심이었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야.”

    할아버지와 최준의 말에 강우와 아버지 그리고 이재원이 웃음을 터트렸다. 강용이는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일본 순사들이 나쁜 놈들 아니었어요? 그 사람들이 할아버지들을 왜 좋아해요?”

    강용이의 말에 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강용이가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남자들만 가득한 집 안에 웃음꽃이 피었다. 여섯 남자는 밤새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오순도순 이야기하며 밤을 보냈다.

    쏴아아-

    남자들의 진한 회합은 새벽이 되어서야 끝났다. 강우는 한바탕 벌어진 파티의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이윽고 이재원이 강우의 방에서 나왔다. 강우가 설거지하며 물었다.

    “강용이 자요?”

    “어, 지금 막 잠들었다. 옛날이야기 세 번 만에 잠드셨다.”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강용이는 옛날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는 것을 참 좋아했다. 그리고 오늘의 이야기꾼으로 간택받은 것은 이재원이었다.

    “아버지는?”

    “내일 일찍 나가신다고 주무시러 들어가셨어요.”

    “그래? 요즘 지방 돌아다니신다고 피곤하신가 보다.”

    “네.”

    이재원이 식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리가 끝나갈 때쯤이었다.

    덜컥.

    할아버지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강우와 이재원에게 손짓했다.

    “둘 다 이리로 와보거라.”

    “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거실의 소파로 가서 앉았다. 강우와 이재원이 할아버지의 앞쪽으로 앉았다. 강우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할아버지의 옆쪽에는 작은 상자가 놓여있었다.

    “이제 밖에 바람이 많이 시원해졌을 게야. 에어컨은 끄고 창문을 좀 열자꾸나.”

    할아버지가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역시나 시원한 바람이 집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강우가 에어컨을 끄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한번 보거라.”

    할아버지가 옆에 가지고 있던 상자를 내밀었다. 강우가 상자를 열어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편지네요? 엽서도 있고요.”

    “진짜네?”

    이재원도 관심을 드러냈다. 강우가 슬쩍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이재원도 엽서 하나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

    “.....”

    편지와 엽서를 읽어내려가는 강우와 이재원의 표정이 알 수 없게 변했다. 두 사람은 깊은 침묵을 한 채 계속해서 하나하나씩 읽어내려갔다. 이윽고 강우가 마지막 편지를 내려놓았다. 이재원은 긴 숨을 뱉어냈다. 할아버지가 그런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보여주고 싶었다. 강우 네가 하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말이야.”

    “이건 전부 어떻게 받으신 거예요?”

    강우가 읽은 편지들의 내용은 모두 강우의 도움을 받은 유공자 본인과 후손들이 보낸 것이었다. 특히 그중에서 꼬불꼬불 쓰여있는 편지가 강우의 마음을 울렸다.

    “모두 회사로 보내졌다고 하더구나. 아범이 틈틈이 가져다주었다.”

    편지는 모두 할아버지와 최준에게 쓰인 것이 대부분이었다. 할아버지가 강우와 이재원을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나와 형님 걱정은 하지 말아라. 이제 다 늙은 우리가 얼굴이라도 팔아서 많은 걸 바꿀 수가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아니 오히려 이런 기회를 준 너희 둘에게 고맙다고 하고 싶구나.”

    강우와 이재원의 얼굴이 크게 흔들렸다. 두 사람의 눈에 담긴 할아버지의 모습은 참으로 크고 거대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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