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4화 (144/402)
  • 우리 엄마가 슈퍼우먼이었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따사했던 봄이 지나가고 뜨거운 여름이 찾아왔다. 강우는 대학 생활의 첫 학기를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름방학을 맞이했다.

    드르륵.

    강우가 베란다의 창문을 열었다. 뜨거운 여름 햇살이 강우의 얼굴을 덮쳤다. 강우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후…. 이번 여름 덥네.”

    매엠~ 매엠~

    시끄러운 매미 소리가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왔다. 강우가 이마에 맺힌 땀을 수건으로 닦아냈다. 그때, 강용이가 축 늘어진 강아지처럼 방에서 나왔다.

    “더워. 더워.”

    강용이가 냉장고로 가서는 커다란 유리병을 꺼냈다. 강우가 좋아하는 오렌지 주스가 담겨있던 유리병이었다. 지금은 주스 대신 보리차가 들어있었다.

    콸콸.

    강용이가 컵에 물을 따라서는 벌컥 마셨다. 그리고는 주방으로 가서 쟁반을 꺼내고 컵 두 개도 꺼냈다. 쟁반 위에 보리차까지 올려놓은 강용이가 할아버지의 방으로 향했다.

    “할아버지! 시원한 보리차 드세요.”

    강용이가 연 방문 사이로 할아버지와 최준의 모습이 보였다. 두 분은 선풍기 한 대를 놓고 사이좋게 앉아계셨다. 두 분 사이에는 묵직한 바둑판이 놓여있었다.

    “허허…. 형님, 이건 못 물러 드립니다.”

    “아우, 한 번만 물려주게.”

    두 분의 승패는 역시 할아버지의 승리인가 보다. 할아버지는 비상한 두뇌만큼 못 하는 게 없었다. 바둑은 물론이고 장기 심지어 간혹 두는 오목마저 엄청난 실력을 보여주었다.

    “강용아, 시작해 볼까?”

    “응! 형아!”

    강우가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내기 시작했다. 오늘은 강우가 요리사로 나서는 날이었다.

    통통통.

    강우가 능숙한 솜씨로 호박을 잘랐다. 여행을 떠난 어머니가 전수한 된장찌개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강용이는 옆에서 열심히 강우를 도왔다. 자그마한 체구에 어머니의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그건 왜 입었어?”

    “요리사는 다 이런 거 입던데?”

    강우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강용이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이윽고 가스레인지 위의 냄비가 뿌연 수증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보글보글.

    뚜껑을 열자 구수한 된장 냄새가 집 안으로 퍼져 나갔다. 강용이가 슬쩍 냄새를 맡더니 탄성을 뱉어냈다.

    “와~ 일단 냄새는 합격.”

    “그래?”

    강우와 강용이 두 형제가 순식간에 아침상을 준비했다. 상의 중앙에는 된장찌개가 놓였다. 강용이가 냉장고를 벌컥 열었다. 냉장고의 안쪽으로는 밑반찬들이 빽빽이 차 있었다.

    “우와~ 반찬 엄청 많다.”

    강용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강우도 냉장고의 안을 보며 실소를 흘렸다.

    “강용아, 우리 엄마 손 큰 거 봐라.”

    “진짜 대박!”

    오늘 아침 강우의 여름방학이 시작됐다. 그리고 어머니는 해외여행을 떠났다. 바로 강우가 축제에서 획득한 여행 상품권으로 보내드렸다. 물론 어머니는 절대 안 간다고 했었다. 집에 할아버지와 최준을 두고는 아무 데도 못 간다고 했다. 하지만 강우가 반강제로 등을 떠밀었다.

    ‘평생 우리 뒷바라지만 한 우리 엄마.’

    어머니에게도 꼭 오늘 같은 날을 선물하고 싶었다. 미래의 기억 속에서는 단 한 번도 그러지 못했다. 여유가 없었다.

    ‘돈의 여유도 마음의 여유도….’

    강우가 고개를 저어 상념을 벗겨냈다. 이윽고 아침상이 준비됐다. 강우가 강용이를 향해 말했다.

    “강용아, 가서 진지 드시라고 해.”

    “응.”

    강용이가 할아버지 방의 문을 열었다. 이윽고 식탁에 강우와 강용이 그리고 두 할아버지가 자리했다.

    “허허…. 이게 정말 우리 강우가 차려준 밥이야?”

    “우리 강우는 요리도 잘하는구나.”

    할아버지와 최준이 대견하다는 듯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맛이 괜찮은지 모르겠어요. 드셔보세요.”

    강우의 말에 두 할아버지가 먼저 된장국을 먹어보았다. 그리고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똑같구나. 어멈이 끓여준 된장찌개랑 맛이 똑같아.”

    “그러게 말이야.”

    할아버지와 최준은 정말 맛있게 식사를 했다. 강용이도 잔뜩 신이 나서 밥을 먹었다. 자신이 만든 계란 후라이를 와구와구 먹었다. 노른자도 터지고 모양도 엉망이었지만, 맛은 일품인가 보다.

    “잘 먹었습니다! 설거지는 내가 할래.”

    강용이의 말에 강우가 대번에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그런 강우를 말렸다.

    “한번 하게 놔둬 보거라. 스스로가 하겠다고 했으니 맡겨주자꾸나.”

    “네.”

    강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강우가 설거지하기 편하게 그릇들을 정리해 주었다. 강용이가 어디서인가 받침대를 가지고 오더니, 싱크대에 올라섰다. 그 모습이 또 너무 귀여워 강우가 헤실헤실 웃었다.

    쏴아아-

    강용이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강우는 집 안 청소를 했다. 그렇게 강우네 가족의 평온한 아침이 지나갔다.

    딩동. 딩동.

    해가 중천에 떴을 때쯤 초인종이 울렸다. 역시나 강우 가족의 문 열기 담당인 강용이가 벼락처럼 달려 나왔다. 그리고는 잽싸게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네!”

    강용이가 문으로 후다닥 달려가 열어주었다. 현관이 부산스러워지더니 가전제품을 설치하는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강우도 현관으로 마중을 나갔다.

    “어서 오세요.”

    “네! 안녕하세요~ 에어컨 설치 어디다 해드릴까요?”

    설치 기사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강우가 거실의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해주시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온 설치 기사들이 에어컨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강용이는 그새 냉장고로 뛰어가 오렌지 주스를 따르기 시작했다. 설치 기사들에게 줄 음료였다.

    “아저씨들 이거 드시고 하세요!”

    강용이가 쟁반을 들고 낑낑대며 거실로 나왔다. 설치 기사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참 착하고 귀여운 강용이었다.

    “고맙다.”

    설치 기사들이 벌컥 음료를 마셨다. 땀에 흥건히 젖은 옷을 바라보던 강용이가 또 방으로 후다닥 들어갔다. 그리고는 선풍기를 꺼내와 설치 기사들을 향해 틀어주었다.

    “참 착한 동생을 두셨습니다.”

    설치 기사들이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강남 압구정은 부촌이었다. 수많은 집에 에어컨 설치를 다녀도 강용이 같은 아이는 드물었다. 강우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귀엽기도 하죠.”

    “하하! 맞습니다. 참 귀엽네요.”

    이윽고 에어컨 설치가 끝났다. 설치 기사들이 꼼꼼히 설치됐는지 살펴주었다. 강용이가 제공한 시원한 음료 덕분이었다.

    띠띠.

    에어컨 켜지는 소리가 울렸다. 강우가 에어컨 송풍구에 손을 가져다 댔다. 조금씩 시원한 바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여름에 에어컨 없으면 못 사는 시대가 왔네요.”

    “몇 년 전에 엄청 더웠잖습니까? 그때 이후로 에어컨 없는 집이 없죠.”

    설치 기사 중 한 명이 씩 웃으며 답했다. 이윽고 집이 조금씩 시원해지기 시작했다.

    “설치는 다 끝난 거야?”

    집이 시원해지기 시작하자 할아버지와 최준이 방에서 나왔다. 설치 기사들이 두 분을 보더니 화들짝 놀랐다.

    “어? 설마 했는데 혹시 박재봉 님과 최준 님이십니까?”

    할아버지와 최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설치 기사들이 이번에는 강우를 바라보았다.

    “역시 박강우 학생 맞죠?”

    “네? 아…. 네 맞습니다.”

    설치 기사들이 잔뜩 흥분하기 시작했다. 뉴스에서 강우와 할아버지 그리고 최준을 여러 번 봤다며 열변을 토해냈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최준을 향해 연신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이렇게 직접 뵙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정말 존경합니다.”

    강우네 집이 순식간에 팬 미팅 장소가 돼버렸다. 할아버지와 최준은 소파에 앉았고, 그 앞으로 설치 기사들이 공손히 자리했다.

    “잠시만요! 형아, 빨리!”

    강용이는 덩달아 바빠졌다. 할아버지들을 알아본 손님을 그냥 보낼 수 없다며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쩌적.

    강우의 일 검에 여름을 맞아 살이 통통히 오른 수박이 반으로 갈렸다. 강용이는 강우의 훌륭한 보조를 자처했다. 커다란 대접을 가져와서는 사이다와 우유를 콸콸 부었다.

    풍덩. 풍덩.

    강우가 잘게 자른 수박 조각이 대접으로 다이빙을 했다. 순식간에 수박화채가 완성됐다. 강우가 수박화채를 가지고 거실을 나갔다. 할아버지와 최준은 설치 기사들을 향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렇게 알아봐 주니 이 늙은이들이 고마울 따름이지.”

    설치 기사들이 일제히 손을 저었다. 어찌 두 분을 못 알아볼 수 있냐며 잔뜩 흥분했다.

    “자~ 맛있는 수박화채 왔습니다!”

    강용이가 어머니 흉내를 내며 수박 화재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설치 기사들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하지만 걱정을 하는 설치 기사도 있었다.

    “팀장님, 우리 다음 일정은 어떡합니까?”

    “괜찮아. 아직 시간 있어. 오늘 같은 날이 언제 또 오겠어. 좋은 말씀 많이 듣고 가자고.”

    강우가 그 모습을 보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최준의 서훈은 지금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최준은 물론이고 장부에 적혀있는 사람들의 서훈심사 신청이 대거 이뤄지고 있었다. 모두 강우와 아버지가 앞장서서 해낸 결과였다. 유례가 없는 수십이 넘는 서훈 심사자에 보훈처가 발칵 뒤집혔다.

    ‘더군다나 모두 생존자들이시니까.’

    이미 돌아가신 독립투사의 서훈은 유족들을 찾는 작업도 진행 중이었다. 그렇게 서훈심사가 신청된 지 벌서 수개월이 흘렀다.

    ‘최준 할아버지는 1차 공적심사는 넘어갔고, 이제 2차 공적심사를 앞두고 있지.’

    다른 신청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심사 기간은 일 년 가까이 걸렸다. 오래전 있었던 일인만큼 독립운동에 관한 저명한 연구자들이나 학자들 그리고 관련 단체의 심사위원들이 꼼꼼히 검토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심사는 달랐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가 떡하니 나타났으니 말이야.’

    그뿐이 아니었다. 최준의 장부가 모습을 드러내자 다른 유족들의 문의도 폭주했다. 기존에 공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독립투사나 유가족들이 동양 무역으로 연락을 해와 도움을 요청했다.

    ‘장부에 기록이 있는 사람들은 다 도와줬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강우는 최대한 서훈 재심사를 돕겠다는 약속도 했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보훈처에서는 최준의 장부에 적힌 자료를 모두 보내 달라는 요청까지 해왔다. 물론 강우는 거절할 필요를 못 느꼈다. 다만 강우가 끝까지 숨기고 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최준의 장부와 함께 발견한 밀정의 명단과 활동 내용이었다.

    ‘이게 밝혀지면 최준 할아버지의 장부와는 비교도 안 될 엄청난 파장이 불어닥치겠지.’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암호를 모두 해독한 강우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야말로 판도라의 상자가 따로 없었다. 강우는 그 장부는 당장 공개할 생각이 없었다.

    ‘조금 더 힘을 키우고 일단 다른 분들의 서훈 신청부터 끝내 놓고. 그리고서 시작한다.’

    그 이유로 할아버지의 재심사 신청도 미뤄졌다. 할아버지 역시 강우의 생각에 동의하셨다. 자신의 훈격이 높아지는 것보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이 먼저라고 하셨다.

    “어르신, 오늘 정말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꼭 건강히 지내십시오.”

    팬 미팅을 끝낸 설치 기사들이 할아버지와 최준을 향해 허리를 깊게 숙였다. 그리고는 강우를 보며 멋쩍게 웃었다.

    “강우 학생, 응원하고 있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강우가 멋쩍게 웃으며 꾸벅 인사를 했다. 그렇게 한바탕 훈훈한 팬 미팅이 끝났다. 강우가 힐끗 시계를 바라보았다.

    ‘뭐…. 뭐야? 벌써 점심시간이라고?’

    강우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머니가 도대체 어떤 삶을 살고 계셨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강우는 또 점심을 차렸다.

    “으아.”

    또 설거짓거리가 쌓였다. 강용이는 이번에는 참전을 선언하지 않았다. 강우는 설거지하고 또 뒷정리했다. 빨래도 산더미였다. 청소도 해야 했다.

    ‘인제 보니 우리 엄마가 슈퍼우먼이었네.’

    그렇게 폭풍 같은 하루가 지나고 저녁이 되었다. 거실의 창밖으로 땅거미가 지고 금세 어둠이 찾아왔다.

    덜컥.

    문이 열리고 아버지와 이재원이 나타났다. 각자의 회사에서 퇴근한 두 사람이 집 앞에서 만났나 보다.

    “강우야, 아빠 왔다.”

    “강우야, 오늘 저녁은 뭐야?”

    강우가 두 사람을 향해 긴 숨을 뱉어냈다. 그리고는 순간 후회가 막심했다.

    ‘후…….’

    강우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머니는 김세아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사실 부부동반으로 보내드리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너무 바빴다. 그 결과 어머니에게 여행파트너로 선택받은 인물이 바로 김세아였다. 두 사람은 친자매 이상으로 친했다.

    “아버지, 우리 그냥 짜장면이나 시켜 먹죠?”

    눈치가 백 단인 이재원이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아버지가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중국집에 전화를 걸었다.

    “탕수육!”

    강용이는 그저 신이 나서 탕수육을 외쳤다. 강우의 눈앞으로 다섯 남자의 미래가 그려졌다.

    ‘4박 5일…. 해낼 수 있다. 힘내자 박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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