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3화 (143/402)
  • 꼭 대배우 만들어주세요.

    강우가 회사 건물로 나왔다. 일요일인 오늘 회사 건물 앞은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딸랑.

    일 층에 있는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향긋한 커피 냄새가 느껴졌다. 강우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카페 사장이 강우를 알아보고는 반겼다.

    “아이고~ 우리 강우 이사님 아니십니까?”

    “안녕하세요. 장사 잘되네요.”

    카페 안에는 손님들로 가득했다. 특히 외국인 손님들이 많았다.

    “이게 다 강우 이사님 덕분이죠.”

    “그냥 메뉴판이랑 주문 매뉴얼 만들어 드린 것뿐인데요.”

    “그거 때문에 외국인 손님들한테 소문이 퍼져서 손님이 많아진 겁니다.”

    강우가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계산대의 상단에 걸려있는 메뉴판은 모두 중국어 일본어 그리고 영어판으로 자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모두 카페를 위해 강우가 신경을 써서 만들어준 것들이었다.

    “효과가 좋다니 다행이네요.”

    “하하! 감사합니다. 아 뭐 드릴까요? 항상 그렇듯이 동양 무역 직원분들에게는 무료입니다.”

    강우가 씩 웃으며 메뉴를 골랐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석 잔 주세요. 테이크아웃으로요.”

    “네, 금세 만들어 드릴게요.”

    이윽고 커피를 받은 강우가 회사 건물의 입구로 들어섰다. 보안장치를 풀고 안으로 들어선 강우가 단숨에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회사는 단 한 명의 직원도 없었다. 동양 무역의 원칙 중 하나가 바로 주말 잔업 금지였다.

    뚜르르. 뚜르르.

    잠시 후, 강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강우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강우야 나야 춘배. 지금 회사 앞에 왔다.-

    “어, 나 사무실에 있어 올라와.”

    -오케이.-

    통화가 끊기고 건물의 아래쪽에서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가 들렸다. 강우가 방에서 나와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의 아래쪽에서 김춘배와 김성현의 모습이 나타났다.

    “강우야!”

    김춘배가 강우를 보며 반가워했다. 김춘배의 뒤에 있는 김성현은 멋쩍은 표정이었다. 김성현을 살핀 강우의 눈에 안타까움이 떠올랐다. 예전에 봤을 때보다 한참이나 말라버린 김성현이었다. 표정도 좋지 못한 게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듯했다.

    “안녕하세요. 매니저님.”

    “아…. 강우야. 반갑다.”

    오랜만에 보는 강우의 모습에 김성현이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울컥했다. 한참이나 어린 강우에 의지하고 싶을 만큼 김성현은 약해져 있었다.

    “들어오세요.”

    강우가 사무실의 안으로 두 사람을 불렀다. 김춘배와 김성현이 강우의 방으로 들어와 앉았다. 강우가 책상 위에 있던 커피를 두 사람에게 하나씩 놓아주었다.

    “고맙다.”

    김성현이 고맙다고 하며 커피를 두 손으로 잡았다. 강우가 입을 열려다가 망설였다. 김성현의 표정에 잘 지냈냐는 질문도 할 수 없었다.

    “그…. 매니저님이 오늘 진짜 고맙다고, 직접 너 보고 싶다고 해서 온 거야.”

    김춘배가 분위기를 읽고는 말문을 열었다. 그러자 김성현이 강우를 보며 정말 고맙다는 표정이 되었다.

    “강우야, 진짜 나를 취직시켜줄 수 있는 거야? 그것도 대진 그룹에?”

    “네, 정확히는 대진 미디어에요. 이번에 새로 엔터테인먼트 사업부를 만들었거든요. 실무자들은 채워놓았는데 현장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부족해요.”

    김성현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자신이 매니저로 이 바닥을 구른 게 벌써 십 년이 넘었다. 현장 경험이라면 충분하다고 자부했다.

    “현장 경험이라면 충분하지.”

    “네, 그래서 매니저님을 스카우트하려는 거에요.”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런 강우의 미소에 김성현의 눈에 자신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열심히 할게. 나한테 맡겨만 줘!”

    어느새 잃었던 미소까지 짓는 김성현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김춘배가 속으로 감탄을 했다. 역시 내 친구 강우는 해결사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일단 이력서는 준비해주세요. 인사 담당자한테 전해 줄 필요는 있으니까요.”

    “이력서?”

    김성현이 머리를 긁적였다. 대기업에 이력서를 넣는다고 하니 어색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강우가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냥 입사 절차예요. 절차. 부담 갖지 말고 준비해주세요.”

    “그래, 알겠어. 진짜 고맙다 강우야.”

    강우가 말없이 웃었다. 그러자 김춘배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거봐요 매니저님, 제가 뭐라고 했어요. 우리 강우가 다 해결해 준다고 했죠?”

    “그러게 말이야….”

    김성현의 얼굴에 미소가 짙어졌다. 중요한 이야기를 끝낸 강우가 슬쩍 물었다.

    “그런데 정말 나인 엔터테인먼트에서 매니저님 취업을 방해한 거예요?”

    “음….”

    김성현이 긴 숨을 뱉어냈다. 그리고는 그동안 겪었던 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김성현이 나인 엔터테인먼트와 척을 지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말하면 연기자들에 대한 대우 때문이었다.

    “말이 안 되는 거지. 아무리 가수 중심의 기획사라고 해도. 그렇게 불평등하게 대우하는 법이 어디 있어?”

    김성현이 화난 얼굴로 말했다. 90년대 후반부에 들어오며 아이돌 그룹의 열풍이 시작됐다. 가수 중심의 기획사인 나인 엔터테인먼트는 연기자 지망생인 연습생들에게 강제로 가수 데뷔를 권했다. 물론 그중에는 기획사의 권유를 받아들여 가수로 전향하겠다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김춘배와 같이 정말 연기자를 꿈꾸는 연습생들이 문제였다.

    “연기자 사업부를 접는 건 좋다 이거야. 그럴 거면 기존의 연기자 지망생들은 자유롭게 풀어주든지 해야지 계약을 빌미로 묶어두기만 하면 어쩌자는 거야? 그렇다고 제대로 된 지원을 해줄 것도 아니면서.”

    강우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미래의 기억 속에도 대형 기획사들의 불공정 계약이야 유명한 이야기였다. 아직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으니 그 횡포가 얼마나 심할까 싶었다.

    “그랬군요….”

    “응, 문제는 아이돌을 할 외모가….”

    김성현이 아차 싶은 표정을 지으며 김춘배를 힐끗 바라보았다. 김춘배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런 김춘배의 모습에 강우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얼마 전 배우의 꿈을 포기하겠다는 김춘배의 말에는 이런 배경도 있었다.

    “그러니까 아이돌을 하기에는 자신들의 기준에 부적절한 연기자 지망생들이 문제가 된 거군요?”

    “그래, 말 그대로 방치하면서 계약도 안 풀어주고. 정말 악덕한 짓이었지. 그래서 내가 기자들 몇 명한테 이 사실을 알리려고 했지.”

    가만히 듣고 있던 김춘배가 한숨을 푹 쉬었다.

    “매니저님은 나랑 몇몇 연기자 지망생들을 위해 나서시다가 그 사실이 알려져서 해고당하셨어. 그 뒤로 다른 회사에 가시려고 했지만, 나인 엔터테인먼트에서 무슨 손을 썼는지 가는 곳마다 면접도 거절하더란다. 이게 다 나 때문이지.”

    “춘배야! 그게 무슨 말이야. 그게 왜 너 때문이야.”

    김성현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그리고는 김춘배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그런 생각 하는 회사가 나쁜 거야. 그리고 까짓거 블랙리스트에 올랐으면 어때? 덕분에 이렇게 더 좋은 곳에 자리를 얻게 됐잖아.”

    “매니저님….”

    김춘배가 끝내 고개를 떨궜다. 강우가 김성현을 보며 눈을 빛냈다.

    “김성현 팀장님.”

    “티…. 팀장님?”

    김성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진 그룹 엔터 사업부에 취직한다고만 들었지 직책까지 팀장일 줄을 상상도 못 했다.

    “지금 그 마음 꼭 잊지 마시고 앞으로 대진 엔터에 소속될 연예인들 그리고 많은 연습생을 돌보고 이끌어 주셔야 합니다.”

    “아….”

    김성현이 탄성을 뱉어냈다. 지금 눈앞의 강우는 뉴스에서 보았던 모습들 그대로였다. 늘 정의롭고 많은 사람을 생각하는 강우의 모습 말이다. 그리고 김성현은 그런 강우가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저희는 다양한 방면에 진출할 겁니다. 영화, 음악, 예능 그리고 드라마까지요.”

    김성현이 입을 떡하니 벌렸다. 대기업이 엔터 사업에 진출하니 그 스케일부터 달랐다.

    “올해 하반기에는 멀티플렉스 시설에서 영화관도 오픈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이미 케이블 방송사도 하나 인수했고요.”

    김성현이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이 기존에 있던 나인 기획사는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의 사업 계획이었다.

    “다만 기존 연예기획사들의 반발이 심할 겁니다. 사실 현장 경험이 있는 인력을 수급하는데도 애로사항이 많았거든요. 아마 저쪽에서 손들을 쓰고 있는 거 같은데….”

    “그런 거는 또 누구보다 잘하는 사람들이지.”

    김성현이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팀장님의 역할이 제일 중요합니다. 엔터 사업은 인재가 재산이고 밑바탕이니까요. 팀장님이 가지고 있는 연예인의 재목을 보는 안목으로 많은 인재를 발굴해 주세요.”

    “알겠어. 절대 실망하게 하는 일 없을 거야.”

    김성현이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미래의 기억 속에서도 김성현의 인재 보는 눈은 알아주었었다.

    ‘미래와는 달리 대진 미디어 소속이 됐지만, 그만큼 대우를 많이 해드릴게요.’

    커다란 기획사를 세워 연예계의 한세대를 풍미했던 김성현이었으니까 말이다. 강우가 이번에는 김춘배를 보며 씩 웃었다.

    “대진 엔터에서 처음으로 영입하는 연기자 지망생은 춘배가 될 겁니다. 앞으로 영화와 연극 오디션에 계속 도전을 시킬 생각이에요. 그것도 팀장님이 잘 담당해 주세요.”

    “춘배를?”

    김성현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김춘배가 강우를 보며 어버버한 표정을 지었다. 오디션을 보라는 말은 들었어도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도울 줄 몰랐다.

    “강우야, 아니야. 나는 아직 부족한데….”

    “춘배야, 누구나 처음부터 완벽한 사람은 없어. 다 부족해. 하지만 경험을 쌓다 보면 그 부족함을 메울 수 있겠지. 그리고 네가 내 친구라서 막 밀어주는 거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난 너한테서 재능을 봤고, 그래서 투자하는 거야. 만약 시간이 지나도 결과가 없으면, 그때는 나도 더 못 도와줘.”

    강우의 말은 일견 딱딱해 보였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친구를 향한 진심을 김성현과 김춘배는 느낄 수 있었다. 김춘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야야! 그러지 마라. 네 스타일 아니거든?”

    강우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김춘배가 소매로 눈가를 쓱 닦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는 예의 밝고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좋아. 미래의 대배우님에게 투자한 것 후회하지 않게 만들어주마.”

    “그래, 이게 김춘배지.”

    강우가 씩 웃었다. 김성현이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뭉클한 감정을 느꼈다. 진정한 우정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일까도 싶었다.

    “우리 춘배 잘 부탁드려요. 꼭 대배우 만들어주세요.”

    “나한테 맡겨줘. 춘배야, 우리 꼭 나인 엔터테인먼트 보란 듯이 성공하자!”

    김성현이 김춘배에게 손을 ‘척’ 하고 내밀었다. 김춘배가 김성현의 손을 ‘꽉’ 잡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매니저님.”

    “그래, 나도 잘 부탁한다.”

    서로를 보며 씩 웃은 김성현과 김춘배가 동시에 강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두 사람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시계를 힐끗 보니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강우가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배고프죠? 요 앞에 맛있는 칼국숫집 있는데 가실래요?”

    김성현과 김춘배가 단번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지, 오늘같이 좋은 날에는 칼국수지.”

    김성현의 말에 김춘배가 무슨 소리냐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런 말은 또 어디에 있는 말이에요?”

    “여기 내 말.”

    강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참 잘 어울리는 매니저와 연기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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