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2화 (142/402)

이제 해방이야!

차가 주차된 곳의 근처 공원에 강우와 남재식이 있었다. 남재식은 전봇대를 붙잡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으으…. 토할 거 같아.”

강우가 남재식의 등을 마구 두들겨 주었다. 그때마다 남재식이 헛구역질을 했다. 지나가던 몇몇 행인들이 남재식을 보며 ‘쯧쯧. 젊은 사람이 술을 적당히 먹어야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행인들은 틀렸다. 남재식은 술 한 방울 마시지 않았다.

“그러길래 먹지도 못하는 걸 억지로 먹어.”

“어머니가 주신 건데 어떻게 남기냐.”

남재식이 가슴을 탕탕 치며 미간을 찌푸렸다. 얼굴이 창백한 게 잔뜩 체한 거 같았다.

“빨리 집에 가서 손이라도 따자.”

“어어.”

강우와 남재식이 차가 주차된 곳에 도착했다. 그리고 운전석과 조수석에 올라탔다.

부우웅.

차가 출발하고 남재식이 창문을 내렸다. 시원한 5월의 밤바람이 밀려 들어왔다. 남재식의 창백했던 얼굴이 조금 나아졌다.

“지혜가 그렇게 좋냐?”

“어? 어어?”

남재식이 크게 당황하며 어버버 했다.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어떻게 눈치챘냐고 묻는다면 지혜랑 있을 때 네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서 보기를 권한다. 그걸 눈치 못 채는 게 이상한 거지.”

“그…. 그래? 그럼 광웅이랑 지혜 부모님도 아셨을까?”

남재식이 손톱을 깨물었다. 극도로 불안할 때 나오는 남재식의 습관이었다.

“일단 광웅이는 모르는 거 같고 부모님도 모르시는 거 같고. 아니 모르는 척하시는 걸 수도.”

“아아….”

강우의 짓궂은 장난에 남재식이 머리를 쥐어 쌌다. 그러자 강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지혜가 알고 있는지 아니면 모르고 있는지가 제일 중요한 거 아니냐?”

“아…. 맞네.”

남재식이 큰 깨달음을 얻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서…. 설마. 지혜가 눈치챈 건 아니겠지?”

“음…. 그건 나도 모르겠다. 여자는 알 수 없는 생명체니까.”

남재식이 몸을 시트에 깊숙이 묻으며 ‘망했다. 망했어.’를 연발했다. 강우가 한 손을 들어 남재식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지혜가 이제 고2던가?”

“어, 맞아.”

순간, 강우의 머리가 지끈 아파졌다. 핸들이 살짝 꺾이며 차가 좌우로 흔들렸다.

“야야!”

남재식이 화들짝 놀라며 강우를 불렀다. 강우가 금세 운전대를 고쳐잡으며 정신을 차렸다.

“아아 미안.”

지끈거리던 두통이 사라지고 미래의 기억 중 일부가 스며들었다. 강우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떠오른 미래의 기억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차분히 생각을 정리한 강우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럼 느긋하게 생각해라. 한창 공부할 때니까 방해되지 않게. 정말 좋아하면 기다려주는 것도 필요하지. 그냥 옆에서 맛있는 거 사주고 힘들다고 하면 고민도 들어주고. 좋은 오빠가 되어봐.”

“음…. 그러다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면?”

강우가 남재식을 힐끗 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네가 생각하는 거 이상으로 너는 좋은 남자니까. 진심으로 옆을 지켜주다 보면 꼭 네 마음을 알아줄 거야. 그리고 조금 전에 보니까 지혜도 네가 싫어 보이지는 않더라.”

“진짜?!”

남재식의 표정이 반대차선에서 달려오는 차량의 헤드라이트처럼 밝아졌다.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그래 그러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지혜가 아직 어리니까 차분히 기다려봐.”

남재식이 멍한 표정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너 나은이가 첫 여자친구 아니냐?”

“어? 맞는데?”

“그런데 무슨 연애 박사처럼 말하냐? 너도 첫 연애면서.”

강우가 말없이 웃었다. 그리고는 조금 전 스며든 미래의 기억을 곱씹었다.

“그냥 그런 게 있어. 형님 말 못 믿냐?”

“아니. 네 말이면 무조건 믿지.”

이윽고 차량이 남재식의 집 앞에 도착했다. 짧은 거리를 왔지만, 멀미를 느꼈는지 남재식은 다시 창백한 표정이었다.

“빨리 들어가서 약이라도 먹어. 손도 따고.”

“어, 먼저 들어간다.”

남재식이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는 집으로 급하게 돌아갔다. 혼자 남은 강우가 차를 출발시키려던 때였다.

뚜르르. 뚜르르.

강우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강우야, 너 목동 왔다며?-

김춘배였다. 참 소식도 빠르다 싶었다.

“어, 지금 재식이 집에 올려보내고 집에 가려던 참이다.”

-그래? 하긴 좀 늦기는 했네.-

강우가 다시 사이드브레이크를 올렸다.

“왜 무슨 일인데?”

-성현이 형. 아니 매니저님이랑 연락했다.-

“오? 그래? 아직 일자리 못 구하셨대?”

김춘배의 목소리가 착 잠겼다. 우울할 때 나오는 바로 그 목소리였다.

-어, 목소리가 다 죽어가더라. 네 이야기 하니까 엄청 좋아했어.-

“잘했어. 사람 급할 때는 좋은 소식이 크게 위로가 되는 거니까.”

-그래서 매니저님이 당장 너랑 만나고 싶어 해서 말이야. 아무래도 주말이니까 월요일에 보자고 하는 게 낫겠지?-

“아니, 그럴 거 없지. 내일 명동 우리 회사로 와.”

-진짜?!-

김춘배가 잔뜩 상기된 목소리를 냈다.

“그래, 와서 이야기도 좀 하고 밥도 먹고.”

-오케이. 역시 박강우, 네가 최고다!-

김춘배가 잔뜩 신이 나서 전화를 끊었다. 강우가 핸드폰의 액정을 바라보았다.

PM 11:30.

시간은 흘러 벌써 자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자려나?’

잠시 고민한 강우가 핸드폰의 단축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딱 한 번 울리자 덜컥 통화가 연결됐다.

-여보세요?-

“내 전화 기다렸나 봐요?”

강우의 말에 이재원이 한숨을 푹 쉬었다.

-바빠서 핸드폰 옆에 놓고 일하는 중. 무슨 일이야? 이 야심한 밤에.-

“사무실이죠?”

-어. 오늘 다 야근.-

“지금 사무실로 갈게요.”

-온다고? 뭐…. 그래, 얼른 와라.-

강우가 통화를 끊고 차를 출발시켰다. 이윽고 대진 그룹의 본사가 있는 종로에 강우가 도착했다. 차를 주차한 강우는 근처에 들러 야식을 잔뜩 샀다. 분명 이재원과 사투를 벌이고 있을 직원들이 있을 것이었다.

“아이고! 팀장님, 오셨습니까?”

고요함에 빠진 빌딩 로비를 지키던 경비원이 강우를 알아봤다. 강우가 꾸벅 인사를 하며 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늦은 밤에 고생하십니다. 이것 좀 드세요.”

“아이고~ 매번 이렇게 챙겨주시니 고맙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경비원이 연신 고맙다며 강우의 손을 잡았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아닙니다. 다음에는 더 맛있는 거로 사다 드릴게요.”

“허허….”

경비원이 강우를 보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바르고 착한 청년이라는 생각을 했다. 로비를 지나친 강우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사방이 고요하니 엘리베이터의 기계 소리가 더 잘 들리는 듯했다.

띵.

목적한 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양쪽으로 입을 벌렸다. 강우가 왼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지나 코너를 돌자 밝게 불이 밝혀진 사무실이 눈에 들어왔다. 이재원이 있는 곳이었다.

똑똑.

강우가 노크하자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이재원의 얼굴이 나타났다.

“왔어?”

“이것 좀 먹어요.”

강우가 손에 들린 봉지들을 내밀었다. 이재원이 봉지를 받아들며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너는 사람들의 요구를 너무나 잘 아는 분이셔.”

“식어요. 빨리 먹어요.”

이재원이 사무실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몇 명의 직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일을 하고 있었다.

“자자! 우리 박 팀장님이 여러분을 위해 야식을 사 왔습니다.”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강우를 향했다. 그리고는 탄성을 뱉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우리 팀장님 센스는 알아줘야 합니다.”

“나는 떡볶이 있으면 인정.”

이재원이 테이블 위에 봉지를 내려놓았다. 직원들의 무자비한 손길에 비닐이 벗겨지고 포장이 분해댔다. 강우가 심혈을 기울여 사 온 떡볶이와 튀김 그리고 음료들이 영롱한 자태를 드러냈다.

“역시! 센스 만점!”

한 직원의 말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이재원이 나무젓가락을 툭 하고 뜯더니 입맛을 다셨다.

“자자 금강산도 식후경.”

이재원의 선창에 직원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야근도 식후경.”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그리고 이재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 이 모습이 이재원의 가장 큰 강점이었다. 지금 사무실에 있는 직원들은 이재원을 전혀 스스럼없이 대했다. 그렇다고 이재원을 막 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카리스마 있을 때는 또 장난이 아니니까.’

이재원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그룹 평사원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임원들의 지지도 폭발적이었다. 인간 자체의 매력이 넘치는 것. 그것이 대진 그룹 후계자 이재원이었다. 물론 업무적인 능력도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

강우가 잠시 이재원과 직원들의 야식타임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폭풍 같은 식사가 끝나고 직원들이 강우를 향해 일제히 감사를 표했다.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직원들이 자리로 돌아가 다시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이재원이 강우를 향해 까닥 고갯짓했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재원과 함께 사무실의 안쪽에 있는 이재원의 방에 들어갔다.

“많이 바빠요?”

강우가 소파에 털썩 앉으며 물었다. 이재원이 테이블 위에 놓인 오렌지 주스를 따라락 땄다.

“알잖냐. 지금 다른 대학들 축제 후원이랑 컨설팅 건 때문에 정신없어. 거기다가 네가 제안한 프로리그 수익 모델 검토하고 케이블 새 방송 편성하고….”

이재원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말이야. 이제는 회장님이 아주 나한테 일을 다 맡길 요량인가 봐. 축제 끝나자마자 아주 일이 해일처럼 덮쳐온다.”

“음…. 이거 미안하네요. 전부 제가 벌린 일이라.”

이재원이 픽하고 웃었다. 강우가 이재원을 보며 흐뭇해했다. 그룹의 후계자가 되었지만, 아직도 업무의 최전선에서 사원들과 함께 부대끼는 이재원이었다. 이재원이 강우의 시선을 느끼고는 말했다.

“앞으로 얼마나 나를 부려먹을지 벌써 무섭네요. 전략 팀장님.”

“힘들면 직원들 시키시죠. 사장님?”

“어허! 그건 우리 스타일이 아니죠?”

두 사람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이재원이 강우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이 야심한 밤에 무슨 일이야? 일 도와주려고 온 건 아닌 거 같고.”

“그건 아니었는데 지금 상황을 보니 좀 거들기는 해야겠네요.”

이재원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죽어라 고민을 해보았자 소용없었다. 강우의 한마디면 그야말로 막힌 혈이 ‘뻥’ 하고 뚫렸으니까 말이다.

“으으…. 드디어 구세주가 등장했구나.”

이재원이 방문을 열고 직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여러분! 박 팀장이 일 도와준답니다! 이제 해방이야!”

직원들이 손뼉을 치고 환호성을 질렀다. 강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재원이 방문을 닫자 환호성이 잦아들었다.

“농담 그만하고 내 말 좀 들어봐요.”

“지금껏 듣고 있었는데?”

강우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이재원이 움찔하더니 강우의 맞은편으로 조심히 앉았다.

“자 귀 열었어.”

“대진 엔터 사업부 말이에요. 지금 지원팀 팀장 자리 공석이잖아요. 혹시 마땅한 사람 구했어요?”

이재원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못 구했어. 아무리 조건을 좋게 불러도 다들 고사한다. 마치 우리 회사를 꺼리는 느낌이야.”

“음…. 그래서 말인데요. 저번에 제가 말한 사람 말이에요.”

이재원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그리고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면 그 사람으로 가면 되겠네. 역시 해결사 박강우!”

“아니, 누구인지 듣지도 않고요?”

강우가 실소를 흘렸다. 그러자 이재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네가 추천하는 사람인데 뭐 볼 거 있어?”

이재원의 목소리와 눈빛에는 강우를 향한 절대적인 신뢰가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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