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0화 (140/402)
  • 거기 숨어서 뭐 해?

    늦은 밤. 강우와 남재식이 건물에서 나왔다. 강우는 빵빵해진 배를 두들겼다.

    “와…. 진짜 엄청나게 먹었다. 배 봐.”

    “그걸 다 먹은 너도 대단하다. 우리 엄마도 내심 놀랐을 거야.”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강우네 가족이 대식가인 것도 유전이었다. 강우가 남재식의 팔뚝을 만지작거렸다.

    “너는 살 좀 찌워야 해. 이게 뭐야 빼빼 말라서.”

    “먹어도 안 찌는 걸 어쩌냐.”

    강우가 픽 웃었다. 남재식은 대학을 가고 살을 찌운다며 야단법석을 부린 적이 있었다. 그때, 남재식이 먹는 것을 본 강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야식이랍시고 라면 반 개에 초콜릿 두 조각을 먹고 배부르다 하는 남재식이었다. 그렇게 먹으니 살이 찔 리가 없었다.

    “그렇게 먹으니 안 찌지.”

    “그런가….”

    남재식이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때, 좁은 골목 사이로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남재식이 휘청거리더니 살짝 얼굴을 붉혔다. 강우가 짧게 한숨을 쉬더니 남재식을 붙잡았다.

    “가자, 근처 가서 이야기 좀 하게.”

    “어어….”

    강우와 남재식이 근처의 공원으로 갔다. 어둑해진 공원에는 인적이 없었다. 강우와 남재식이 그네에 탔다. 땅을 발로 툭툭 치자 그네가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끼익. 끼익.

    그네의 이음새에서 쇠가 비명을 지르며 공원의 정적을 깼다. 강우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밤하늘에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강우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고맙다. 진짜 너 아니었으면 내 인생 어떻게 흘러갔을지 감도 안 온다.”

    “무슨 인생까지야…. 네가 하고 싶은 게 확실했으니 이렇게 된 거지.”

    남재식이 강우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위기에 빠진 자신을 구해준 슈퍼 히어로인 친구였다. 그리고 항상 자신이 곤란할 때마다 큰 도움을 주는 친구였다. 강우가 자신을 물끄러미 보는 남재식에게 말했다.

    “아버지한테 진작 말해보지. 화끈하게 바로 지원해 주신다고 하시잖아.”

    “그게 다 강우 네가 말해서 그런 거야. 내가 말했으면 또 몰라.”

    남재식이 길게 한숨을 뱉어냈다. 강우가 남재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면 미래의 기억 속 자신도 이 나이에는 남재식과 같았다. 아버지와의 대화법에 서툴고 자신감이 없었다.

    “그건 아닐걸. 아까 너 보는 아버지 표정을 네가 못 봐서 그래. 얼마나 대견하고 흐뭇해하셨는지 아냐?”

    “....그런가.”

    남재식의 한쪽 입꼬리가 실룩였다.

    “그래, 그럼 일단 사무실부터 얻어야겠네. 개발하려면 인력도 구해야 할 거고.”

    “어, 아버지가 제대로 지원해 주신다고 했으니까. 이제 시작해 봐야지.”

    “그래, 사무실 구해지는 대로 연락해. 내가 정리해 놓은 아이디어 노트 줄 테니까.”

    “고맙다.”

    강우가 슬쩍 물었다.

    “그래서 생각해 놓은 게임 장르는 있고?”

    “일단 RPG 게임을 개발할 생각이야. 순수 국산 게임으로.”

    강우가 말없이 남재식을 바라보았다. 현재 국내 게임 개발사들이 주력하는 장르가 바로 RPG 게임이었다. 스페이스 크레프트의 출시로 이제 RTS 즉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개발붐이 온다. 하지만 한국은 항상 한발 늦은 후발 주자였을 뿐이었다.

    “그래, 일단 도전해 보는 거도 나쁘지 않지. 내 아이디어 노트에 RPG 게임에 관한 것도 있으니까 참고해 봐.”

    “진짜 고맙다.”

    남재식이 환하게 웃었다. 강우가 남재식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일단 차근차근 하나씩 개발해서 노하우를 쌓게 만들어야겠어. 그리고 기술력이 어느 정도 쌓이면 그때는….’

    강우가 눈을 빛냈다. 그때는 외국의 유명 개발사들보다 앞서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남재식이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참. 강우야, 너 집에 바로 가야 하냐?”

    “나? 왜?”

    “아…. 어저께 광웅이랑 연락했는데 너 오늘 목동 온다고 하니까 만나고 싶다고 하던데.”

    “광웅이가?”

    “어. 너 오면 연락 달라는 걸 깜빡했네.”

    강우가 반가운 얼굴을 했다. 대학을 간 이후 서로 바빠 연락도 못 하던 박광웅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근황이 궁금했다.

    “광웅이 재수학원은 잘 다니고 있어?”

    “어, 낮에는 아르바이트하고 저녁에는 재수학원 다녀.”

    이상할 정도로 박광웅의 근황에 빠삭한 남재식이었다. 강우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바쁘게 사네.”

    강우가 핸드폰을 꺼냈다.

    “어디로 연락하면 되는데? 집?”

    “응, 잠깐만.”

    남재식이 자신의 핸드폰을 꺼냈다. 얼마 전 새로 산 핸드폰이었다.

    “핸드폰 샀어?”

    “응, 아버지가 사줬지. 선배들이랑 술 먹다가 하도 기절해서 호신용으로. 나 기절하면 선배들이 이걸로 집에 연락해줘.”

    “푸하….”

    강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남재식이 씩 웃더니 어디로인가 전화를 걸었다.

    “지혜야, 재식 오빠야. 광웅이 집에 있어? 아 그래? 학원이라고? 알겠어.”

    남재식이 통화를 끝내고는 그네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강우를 향해 고개를 까닥했다.

    “가자, 지금 학원에 있다네.”

    “오목교?”

    “어, 오목교.”

    강우와 남재식이 건물로 돌아가 차에 탔다. 강우가 차를 몰아 오목교로 향했다. 목동 교육의 일번지인 오목교에는 커다란 종합학원들과 여러 작은 학원들이 밀집해 있었다. 강우가 그중에서 가장 큰 종합학원의 앞에 차를 세웠다.

    “이제 나올 때 됐는데.”

    남재식이 창문을 내리고 학원의 입구를 살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익숙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강우 못지않게 큰 덩치를 가진 박광웅이었다.

    “광웅아!”

    남재식이 크게 소리쳤다. 책을 내려다보던 박광웅이 움찔하더니 남재식을 발견했다. 그리고는 대번에 환한 표정을 지었다.

    “재식아!”

    박광웅이 차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운전석의 강우를 발견했다. 박광웅의 표정이 더 밝아졌다.

    “박강우!!”

    “박광웅!!”

    비슷한 서로의 이름이 오갔다. 강우와 박광웅이 피식 웃었다. 강우가 차의 뒤쪽을 가리켰다.

    “타라.”

    “어.”

    박광웅이 빠르게 뒷좌석에 올라탔다. 강우가 차를 출발시키며 룸미러로 뒤를 힐끗 바라보았다. 곰 같은 박광웅이 강우를 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예전보다 훨씬 편하고 부드러운 박광웅의 얼굴에 강우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공부 잘되냐?”

    “솔직히 어렵다. 고등학교 3년 내내 놀기만 했더니 죽겠어.”

    남재식이 몸을 돌러 뒷좌석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일 년 죽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해라. 남들은 이런 기회도 없잖아.”

    “맞지.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박광웅이 강우의 뒷모습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사실 장학금의 지원이 강우의 도움이라는 것은 밝힌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재원과 강우의 관계 그리고 대진 그룹의 모든 것이 언론에 밝혀진 상태였다. 이제는 모르면 그것이 이상한 것이었다.

    “밥은 먹었냐?”

    “아니, 배고파 죽겠다. 뭐 좀 사줘라.”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군고구마 하나 사주는 것도 자존심 상해 화를 내던 박광웅은 이제 없었다. 오히려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해 보였다. 그 작은 변화에 강우는 뿌듯함 심정을 느꼈다.

    “그럼 가는 길에 김밥에 라면 콜?”

    남재식과 박광웅이 좋다며 동시에 ‘콜!’을 외쳤다. 강우는 차를 몰아 박광웅의 집 근처로 향했다. 주차를 마친 강우와 두 친구는 24시간 하는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아주머니, 라면 세 개랑 김밥 세 줄이요.”

    강우가 주문하는 사이 남재식이 컵에 물을 따랐다. 그리고는 박광웅을 향해 슬쩍 물었다.

    “김밥 몇 개 더 포장해 가.”

    “김밥? 아~ 지혜 거?”

    남재식이 고개를 끄덕하더니 아줌마를 향해 소리쳤다.

    “아줌마, 참치김밥 세 줄 포장해 주세요.”

    “네, 알겠어요.”

    강우가 남재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남재식이 물을 벌컥 마시더니 입을 열었다.

    “지혜가 참치김밥 좋아할걸?”

    “맞아.”

    강우가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그리고는 살짝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너희 둘이 자주 만나나 보다?”

    “어, 자주 만나는 편이지.”

    남재식의 대답에 박광웅이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여기도 단골이야. 재식이가 심심하면 찾아와서 밥도 자주 먹고 가고 그래.”

    “아~ 그랬구나? 그럼 여동생도 가끔 나와서 밥 같이 먹고?”

    강우의 질문에 남재식이 움찔했다. 남재식이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물을 마셨다. 이윽고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강우와 친구들이 일제히 젓가락을 들었다.

    후루룩. 후루룩.

    저녁을 배불리 먹었지만, 라면은 참 신비한 음식이었다. 위장에 빈틈을 교묘히 찾아 끝없이 흡입됐다. 김밥은 박광웅의 몫이었다. 곰 같은 덩치의 박광웅은 김밥을 말 그대로 흡입했다.

    “천천히 먹어라. 누가 쫓아오냐?”

    “아…. 그게 예전에 배달 아르바이트할 때 빨리 먹는 게 버릇이 들어서.”

    강우가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낮에는 아르바이트한다며? 무슨 일하는 건데?”

    “어, 재식이네 건물에 있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한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재식의 아버지가 IMF 때 경매로 사들인 빌딩은 바로 목동사거리의 알짜배기에 있는 건물이었다. 알고 보면 무시할 수 없는 부잣집이 바로 남재식의 집이었다.

    “시간도 잘 배려해주고, 시급도 많이 주셔서 감사하게 일하고 있지.”

    박광웅이 남재식을 보며 씩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김밥에 집중했다. 강우가 남재식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말없이 등을 툭툭 쳐주었다.

    “빨리 먹자. 지혜 줄 김밥 식겠다.”

    남재식이 민망함에 횡설수설했다. 박광웅이 김밥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김밥이 왜 식어?”

    “아 그냥 그래.”

    남재식이 라면에 코를 박고는 후루룩 먹었다.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고등학교 시절 박광웅과 남재식은 상극이었다.

    ‘한 명은 유명한 일진에 한 명은 게임만 하는 비실이.’

    하지만 시간이 흘러 두 사람은 이렇게 마주 앉아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사람의 운명도 그리고 미래도 한 치 앞을 모른다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라면을 먹었다.

    “계산이요.”

    이윽고 강우와 친구들이 분식집을 나왔다. 박광웅의 손에는 동생에게 가져다줄 김밥이 든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다. 박광웅의 집으로 가는 길에 강우는 슈퍼마켓에 들러 아이스크림도 샀다.

    “후식을 잊으면 섭섭하지.”

    강우와 두 친구가 아이스크림을 쪽쪽 먹으며 길을 걸었다. 박광웅이 강우를 보며 말했다.

    “오랜만에 얼굴 보니까 좋네.”

    “그러게. 나 이사하고 한동안 바빠서 찾아오지도 못했네. 그래도 잘 지내는 거 같아서 좋아 보인다.”

    “열심히 살고 있지. 강우 너 발끝이라도 쫓아가려면 죽어라 하고 노력해야지.”

    박광웅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강우가 씩 웃었다.

    “내 발끝을 왜 따라오냐? 다 각자의 삶이 있는 거지. 너는 너대로 열심히 살면 언젠가 제일 앞에 서는 날이 올 거야.”

    “역시 너는 변한 게 없네. 유명해져도 부자가 돼도 인간 박강우는 똑같아.”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박광웅이 말을 이어갔다.

    “나 공부 열심히 해서 전문대 가려고 한다.”

    “전문대?”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학교에 차별을 두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왕 공부했으니 4년제를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박광웅의 생각은 달랐다.

    “어, 솔직히 우리 집 사정에 4년제 다니는 것도 무리고.”

    “장학금 받잖아?”

    박광웅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장학금이야 받지만 나는 빨리 벌어서 우리 엄마 아빠 그리고 동생 호강시킬 거다. 그리고 빨리 졸업해서 꼭 돕고 싶은 사람도 있고.”

    “그래? 무슨 선택을 하든지 응원하마.”

    강우가 주먹을 불끈 쥐며 박광웅을 응원했다. 박광웅이 강우를 보며 씩 웃었다. 그때였다.

    “오빠!!”

    박광웅의 집이 있는 방향에서 박지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재식이 움찔하더니 강우의 옆으로 슬쩍 다가왔다.

    “지혜야, 왜 나와 있어. 위험하다고 했잖아.”

    “나 이제 다 컸거든요? 그리고 방금 나왔다고요.”

    박지혜가 혀를 삐죽 내밀었다. 그리고는 강우를 발견했다.

    “어?! 강우 오빠죠?”

    “안녕? 오랜만에 보네.”

    군고구마를 팔았던 겨울에 본 이후로 강우는 박지혜와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박지혜가 강우의 옆에 있는 남재식을 보더니 반가워했다.

    “재식 오빠! 거기 숨어서 뭐 해?”

    “아…. 지혜야 안녕?”

    남재식이 어색한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박광웅이 박지혜를 향해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이거 참치김밥. 재식이가 너 좋아한다고 포장해왔다.”

    “아싸! 역시 재식 오빠가 짱이야!”

    박지혜가 남재식을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하하.”

    남재식이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그대로 굳어버렸다. 강우가 박광웅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했는지 박광웅은 싱글벙글하였다.

    ‘저 곰 같은 놈….’

    강우가 이번에는 남재식에게 고개를 돌렸다. 돌처럼 굳어버린 남재식은 그야말로 과학연구실에 박제해놓은 해골모형 같았다.

    ‘하…. 재식아….’

    강우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친구의 고달프고 고난한 연애사에 안타까움이 절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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