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0화 (130/402)
  • 아직 즐겨야 할 게 많이 남았어.

    서울대의 전통을 자랑하는 밴드 경연 따이빙 굴비. 바로 그 예선 격인 미니따굴은 자하연과 아크로 사이의 잔디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사실 예선은 축제 기간 전에 끝나고는 했다. 하지만 이번 축제에서는 예선부터 성대히 치르기로 했다.

    -자 그럼! 전통을 자랑하는 서울대의 밴드 경연대회 미니따굴을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의 진행멘트와 함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강우와 밴드원들은 무대 옆에 준비된 천막 대기실에서 대기 중이었다. 강우가 무대 앞에 모인 관객들을 보며 씩 웃었다. 지난 따이빙 굴비가 예선을 끝내고 치르는 공연 같은 느낌이라면 이번은 미니따굴부터 시작해 경연의 느낌을 강화했다. 모두 강우의 아이디어였다.

    ‘관객들 많이 오는 거 보니까 대성공인 거 같네.’

    지이잉-

    강렬한 전자기타 소리가 울려 퍼지고 파워풀한 보컬의 목소리가 얹혔다. 강렬한 밴드 사운드가 자하연의 밤하늘을 메우기 시작했다. 잔디밭에 앉아 있는 관객들은 손을 위로 들고 야광봉을 흔들고 있었다.

    “저렇게 야광봉 흔드니까 진짜 볼만하네.”

    “그렇죠?”

    강우와 이재원이 관객들을 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축제하는 동안 곳곳에서 사용될 야광봉을 나누어 주자는 것도 모두 강우의 생각이었다. 서울대의 SNU라는 영문 약자가 예쁘게 새겨진 야광봉이었다.

    “저걸 이런 방식으로 사용할 생각을 하다니 역시 강우 너는 아이디어 뱅크야.”

    “아이돌 팬들이 콘서트나 이런 곳에서 색을 통일한 풍선 같은 거 흔들잖아요. 거기서 아이디어 얻었죠.”

    사실 미래의 기억 속에서 야광봉의 용도를 떠올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이런 용도로 사용할 생각은 못 하고 있었다. 강우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밴드원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제대로 꾸며놓으니까 볼만한데요?”

    “그렇지? 저렇게 다들 훈훈한데 왜들 그리 괴상한 패션들을 하고 다녔는지.”

    이재원이 픽 웃으며 답했다. 강우의 말처럼 밴드원들은 깔끔하게 스타일을 바꾼 상태였다. 기존에 입던 찢어진 청바지와 어설프게 기른 장발 그리고 마치 군대 시절을 못 잊은듯한 칙칙한 장화는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깔끔하고 댄디한 스타일로 꾸며져 있었다. 그야말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바뀌어 있었다.

    “옷이 조금 어색하네….”

    밴드원들이 바뀐 자신들의 모습에 어색해했다. 강우가 밴드원들을 보며 씩 웃었다.

    “우리 선배님들 그렇게 입혀놓으니까 정말 잘 생기셨네요. 여학생들 난리 나겠어요.”

    “진짜?”

    강우의 말에 밴드원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하지만 이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강우야, 사람들이 정말 우리 음악을 좋아할까?”

    “그러니까. 뭔가 예전처럼 막 손맛이 없는 거 같기도 하고.”

    밴드원들이 강우를 향해 물었다. 얼마 되지 않은 연습 기간에 새로운 장르의 노래를 연습했다. 90년대의 인기 밴드는 대부분이 락 발라드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강우도 락 발라드에 기반을 둔 음악으로 밴드 경연에 참여하자고 했다.

    “걱정 마요. 다 좋아할 거에요. 창식 선배님이 작곡한 노래 엄청 좋잖아요.”

    강우의 말에 조용히 앉아 있던 밴드원이 머리를 긁적였다. 두꺼운 뿔테안경을 끼고 있는 밴드원의 이름은 곽창식이었다. 밴드 매니저를 맡은 곽창식은 서울대 경영학과 97학번이었다. 강우보다 1년 선배였다.

    ‘악기도 못 다루고 노래도 못하는데, 워낙에 음악을 좋아해서 동아리원으로 받아줬다고 했지.’

    그런 곽창식에게는 놀라운 능력이 있었다. 바로 작곡 능력이었다.

    “맞아, 창식이한테 그런 재능이 있는 줄은 몰랐네.”

    밴드원들의 말에 곽창식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예전에도 제가 만든 곡 몇 개 가지고 왔었잖아요. 다들 락커는 이런 음악 안 한다고 하셔서….”

    “하하…. 우리가 그랬었나?”

    밴드 선배들의 미안한 표정에 곽창식이 피식 웃어버렸다. 그리고는 강우를 보며 눈을 빛냈다.

    “아무튼, 강우, 네 덕분에 진짜 도움 많이 받았어. 내가 전문 작곡가분들 만나서 배운 거도 많고.”

    “해줄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요.”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강우는 대진 미디어를 통해 곽창식에게 작곡가들을 소개해주었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고 독학을 하던 곽창식은 그야말로 날개를 달았다.

    ‘순식간에 작곡가들의 노하우까지 모두 흡수해버렸지.’

    그렇게 단시간에 곽창식은 몇 개의 곡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강우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미래의 기억이 있는 강우조차 세련되다고 느낄만한 락 발라드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경영대 밴드 ‘이재원과 얼굴들’은 그 노래로 경연에 참여했다.

    “이재원과 얼굴들….”

    천막 안으로 들어온 진행요원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이재원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진행요원이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입꼬리를 통제했다.

    “이재원과 얼굴들 다음 차례입니다. 세팅 준비하세요.”

    진행요원이 바람처럼 천막을 벗어났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죠. 이제 우리 차례네요.”

    강우와 밴드원들이 무대에 올랐다. 관객석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 박강우다!”

    “강우다!”

    밴드명에 나와 있듯이 이재원이 속한 밴드라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강우가 메인보컬이라는 것은 알려지지 않았다. 밴드원들이 악기 세팅을 시작했다.

    지잉- 징징.

    기타 점검 소리에 관객들이 조금 웅성거렸다. 잠깐의 연주로도 상당한 실력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키보드를 치는 이재원에게도 시선이 집중됐다. 밴드 이름이 ‘이재원과 얼굴들’이니 당연했다.

    “안녕들 하세요!”

    이재원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윽고 강우가 마이크 앞에 섰다. 힐끗 관객석을 훑어보니 손을 흔들고 있는 이나은의 모습이 보였다. 강우가 환하게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다. 관객석에서 작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강우가 손 흔들어줬어!”

    사회를 보던 학생회 소속의 인원이 마이크를 잡았다.

    -자 이번 미니따굴 최고 화제의 팀입니다. 이재원과 얼굴들…. 을 환영해 주십시오!-

    잠깐 망설이는듯한 사회자의 멘트가 끝났다.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악기를 세팅하는 동안 관객은 더 늘어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밴드 이재원과 얼굴들의 보컬 박강우입니다.-

    강우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흘러나왔다. 묵직한 중저음에 관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노래 들려드리겠습니다.-

    강우가 뒤를 돌아보며 신호를 보냈다. 드럼을 담당한 밴드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탁. 탁. 탁.

    드럼을 시작으로 기타 소리가 얹어졌다. 이재원이 질세라 건반을 치기 시작했다. 서정적인 느낌의 사운드가 서울대의 밤하늘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강우가 긴장감에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런 무대에 서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강우라도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강우의 목소리가 밴드 사운드에 화룡점정을 찍었다.

    -한참 동안을….-

    강우의 묵직한 저음이 관객들의 고막을 강타했다. 은은하던 밴드 사운드가 점점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그와 동시에 강우의 목에서 폭발적인 고음도 쏟아져 나왔다.

    “와…. 노래 좋다.”

    강우의 노래 실력에 이나은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연극영화과를 다니는 이나은이였다. 연예인을 꿈꾸는 수많은 동기 선후배 중에는 노래로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사람들의 노래 솜씨를 듣기도 참 많이 들었다. 하지만 강우보다 잘하는 사람은 없었다.

    ‘강우는 못 하는 게 없네….’

    이나은이 흐뭇한 표정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공부도 잘하고 심성도 착하고 못 하는 것도 없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너무 자상한 강우였다. 남자친구로는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남자라고 느꼈다.

    “좋다….”

    이나은이 눈을 감고 노래를 감상했다. 강우가 부르는 노래의 가사 하나하나가 자신을 향한 사랑 고백처럼 느껴졌다. 강우의 노래가 절정으로 흘러갈수록 주번의 분위기도 달아올랐다. 서울대를 상징하는 파란색 야광봉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와아아!”

    “대박!”

    노래가 끝나고 폭발적인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강우가 멋쩍게 웃으며 마이크에서 멀어졌다. 예전과는 다른 관객들의 반응에 기존의 밴드원들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 그럼 멋진 무대를 보여준 밴드 ‘이재원과 얼굴들’에게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사회자의 멘트와 함께 다시 환호성이 커졌다. 강우와 밴드원들이 꾸벅 인사를 하며 무대에서 내려왔다.

    -여러분. 이 멋진 무대는 본선인 따이빙 굴비와 축제가 끝나는 날 다시 한번 감상하실 수 있을 겁니다.-

    사회자의 말에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축제 내내 할 일이 많아도 너무 많은 강우였다.

    “강우야, 사람들 반응 봤어?”

    “대박!”

    밴드원들도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늘 예선인 미니따굴조차 통과하지 못했던 경영학과 밴드였다. 하지만 오늘의 반응으로 보아 본선 진출이 확실해 보였다.

    “강우야! 이 복덩어리야!”

    천막에서 김석현이 뛰어나와 강우를 얼싸안았다. 경영학과 밴드의 오랜 염원인 본선 진출이 눈앞이니 기쁠 수밖에 없었다. 강우가 픽 웃으며 김석현을 슬쩍 밀어냈다.

    “선배님, 저 땀 냄새 나요. 그리고 누가 보면 선배님이 제 여자친구인 줄 알겠네요.”

    “아…. 하하….”

    김석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강우에게서 떨어졌다. 강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이나은을 찾았다. 그리고는 대번에 환한 표정이 되었다.

    “강우야.”

    이나은이 한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밤이 되어 어두운 주변이었다. 파란색 야광봉의 빛을 조명처럼 받은 이나은은 정말 예뻤다.

    “나은아, 혼자 심심했지? 미안.”

    “아니야. 노래 듣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 강우 너 진짜 노래 잘한다.”

    이나은의 칭찬에 강우가 헤벌쭉 웃었다.

    “아니야 그냥 조금 부르는 정도지….”

    “가수 해도 되겠던데?”

    이나은이 살짝 붉어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가만히 있던 이재원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이거 솔로들 앞에서 너무하는 거 아닌가?”

    “맞아! 옳다!”

    멍한 표정으로 이나은을 보던 밴드원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났다. 이나은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강우가 이나은의 앞쪽을 가로막았다.

    “선배님들이 매일 이상한 복장 하고 다녀서 그러죠. 이제 인기 많아질 거예요.”

    “그런가?”

    밴드원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흐뭇해했다. 이재원이 강우를 보며 씩 웃었다.

    “그럼 둘이 좋은 시간 보내라.”

    그 말을 끝으로 이재원이 밴드원들을 끌어당겼다. 눈치 없는 밴드원들이 ‘왜?’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재원의 눈빛에 단번에 제압되었다. 그렇게 강우와 이나은이 다시 둘이 되었다.

    “강우야, 축제 분위기 너무 낭만적이다.”

    이나은이 주변을 보며 감상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강우도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음 차례의 밴드가 공연을 시작하고 있었다.

    “배고프지? 우리 뭐 좀 먹을까?”

    이나은이 강우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농구 경기가 끝나자마자 밴드 경연까지 한 강우였다. 이나은의 말에 강우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응…. 조금 배고프네.”

    강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강우와 이나은은 캠퍼스 곳곳을 돌아다녔다. 지난 축제들과는 다르게 곳곳에 간식들도 팔고 여러 가지 소소한 이벤트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서울대 학생들이 캠퍼스의 주요 장소에서 축제를 진행하고, 대진 미디어는 그 외적인 부분을 채워준 것이다.

    “강우야, 아~”

    “아~”

    이나은이 강우의 입에 닭꼬치를 먹여주었다. 강우가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입을 오물거렸다. 이나은이 강우의 입에 묻은 양념을 휴지로 쓱 닦아주었다.

    “하…. 좋다.”

    강우의 말에 이나은이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는 강우를 힐끗 바라보았다.

    “강우야, 안 힘들어?”

    “나?”

    이나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서 하는 거라고는 해도 오늘처럼 바쁘면 지칠 만도 한데. 너는 정말 즐거워 보여서.”

    이나은의 말에 강우가 씩 웃었다. 그리고 이나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주었다.

    “나은아, 나는 해피엔딩보다는 매 순간이 조금씩 조금씩 행복한 게 진짜 행복이라고 생각하거든.”

    “아….”

    강우의 말에 이나은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나은 스스로가 느끼고 있었다. 소소하지만 자잘한 행복들 바로 지금, 이 순간이었다.

    펑. 퍼펑.

    서로를 바라보는 두 연인의 머리 위로 불꽃놀이가 시작됐다. 강우와 이나은이 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 동시에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가 조금 힘들어도 말이야. 이번 축제 때 많은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게 나 때문이라면 더 바랄 것도 없고.”

    강우가 잠시 이나은을 바라보았다. 미래의 기억 속 강우는 이때쯤에는 절망과 방황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부모님에 대한 미움과 스스로에 대한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강우가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곳곳에서 느껴지는 행복의 기운에 강우의 마음이 뿌듯해졌다. 강우가 이나은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나는 지금이 너무 행복해.”

    강우의 말에 이나은이 살짝 얼굴을 붉혔다.

    “나도 너무 행복해.”

    강우와 이나은이 서로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강우가 손을 척 내밀었다.

    “가자. 아직 즐겨야 할 게 많이 남았어.”

    “응.”

    이나은이 강우의 손을 잡았다. 두 연인이 인파를 뚫고 뜨거운 축제의 현장으로 녹아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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