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127/402)
  • 지옥에서 돌아온 경영자들.

    탁. 탁. 탁.

    박자를 재던 스틱이 드럼을 강력하게 내리치기 시작했다.

    지이잉. 징징징.

    때를 기다리던 전자기타의 소리가 강렬하게 울려 퍼졌다. 엄청나게 강렬한 록 사운드가 방음 부스를 휘감을 때쯤이었다.

    “예에에에~~!!!”

    마이크를 붙잡은 김석현의 입에서 찢어질 듯한 고음이 뿜어져 나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강우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옆에 있는 이재원은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밴드 사운드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지잉. 징징. 징징징.

    기타 소리가 폭주하고 보컬이 앞만 보고 내달렸다. 노래가 절정에 이르자 밴드원들의 온몸이 땀으로 흥건해졌다. 이윽고 마지막 샤우팅과 함께 노래가 끝이 났다. 김석현이 거친 숨을 몰아쉬더니 강우를 보며 씩 웃었다.

    “어때? 우리 밴드 좀 하지?”

    멍하게 있던 강우가 고개를 살짝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김석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축제를 준비하며 여러 번 마주쳤던 선배였다. 그때마다 느꼈던 생각은 하나였다.

    ‘전형적인 사무형 인재.’

    일을 처리하는 능숙함과 사무적인 능력이 뛰어난 김석현이었다. 그런 김석현에게 이런 자유분방한 모습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완전 반전이네. 반전.’

    강우가 상념을 멈추고 머리를 긁적였다. 미래의 기억 속에서도 강우는 대중음악을 좋아하는 정도였다. 밴드라니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밴드는 잘 몰라서요. 그런데 노래가 좋기는 하네요.”

    강우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연주를 담당하던 선배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가 아직 뭘 몰라서 그런다. 한번 빠지면 빠져나갈 수 없는 게 바로 롹이라고 롹!”

    선배들이 로큰롤을 상징하는 자세를 취하며 강우에게 강변했다.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짓자 김석현이 황급히 밴드원들을 말렸다.

    “야야! 너희 뭐 하는 거야? 지금 우리 차기 보컬한테.”

    “......”

    마치 잘 짜인 각본대로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에 강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이재원이 픽하고 웃었다.

    “너네 어차피 따이빙 굴비 나가도 맨날 미니따굴에서 탈락이잖아.”

    “재···. 재원아!”

    김석현이 화들짝 놀라며 이재원의 입을 막았다. 이재원이 ‘왜 사실이잖아?’라고 작게 속삭였다. 이재원을 급히 틀어막은 김석현이 강우를 보며 멋쩍게 웃었다.

    “강우야, 내 말 좀 잘 들어봐라. 우리 밴드가 이번 축제 때 따이빙 굴비에 참가하기로 했거든?”

    “네.”

    강우가 고개를 끄덕했다. 강우가 기억났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축제 바보라고 불리는 서울대에도 주목받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따이빙 굴비’라고 불리는 밴드들의 경영이었다. 미래의 기억 속에서도 ‘따이빙 굴비’를 통해 배출해낸 걸출한 밴드들이 많았다.

    “그런데 내가 경영대 학생회장이 되면서 동아리 활동에 좀 뜸해졌어. 아니 제대로 활동하기에는 일도 많고 주변의 시선도 있고 그렇다는 거지.”

    “네.”

    강우가 계속해서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김석현의 얼굴이 점점 다급해졌다.

    “그런데 우리 밴드가 경영학과에서 전통이 있는 밴드인데 맥을 끊을 수는 없지 않겠냐? 그래서 나는 네가 나 다음으로 보컬을 맡아줬으면 한다.”

    “록 음악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직접 해볼 생각까지는 해본 적이 없는대요? 그냥 발라드 정도면 모를까···.”

    강우의 곤란한 표정과 발언에 밴드원들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러자 김석현이 손을 들어 밴드원들을 진정시켰다.

    “강우야, 잘 들어봐. 우리가 롹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롹 음악만 하는 건 아니야. 그리고 너 어차피 축하 무대 해야 하는 상황이잖아.”

    “그런데 선배님.”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김석현이 최대한 자애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강우야.”

    “선배님들의 복장을 보아하니 하드한 록 아니면 안 하실 거 같은데요?”

    강우의 지적에 김석현이 밴드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사나운 복장의 밴드원들이였다. 찢어진 청바지에 목에는 스카프를 두르고 머리는 어설픈 장발. 말 그대로 로큰롤이었다. 잔뜩 사나운 표정은 롹커로서의 자존심이었다.

    “야야. 표정들 풀어. 강우야, 오해다. 얘네들이 얼마나 순둥이들인데.”

    “네···.”

    김석현의 말에 밴드원들의 표정이 순한 강아지상이 되었다. 강우가 슬쩍 고개를 돌리고 실룩이는 입꼬리를 부여잡았다. 김석현이 차분히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강우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잘 들어봐. 어차피 학생투표에서 네가 1등으로 뽑혔어. 네가 축하 무대를 안 한다면 이번 축제의 흥행은 장담할 수 없다.”

    “하아······.”

    강우가 긴 숨을 뱉어냈다. 자신이 기획한 아이디어에 자신이 걸려들었다. 끝까지 발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강우가 이재원을 바라보았다.

    “그래, 강우야. 너 노래 잘하잖아. 그냥 새터 때처럼 노래 한 곡하고 내려온다고 생각해.”

    “대신 조건이 있어요.”

    강우가 손을 들어 이재원을 가리켰다.

    “재원이 형도 같이 무대에 서는 거예요.”

    “강우야?”

    이재원이 화들짝 놀랐다. 김석현이 이재원을 바라보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재원이를?”

    김석현과 이재원은 같은 학번의 동기였지만, 접점이 없었다. 신입생 때의 이재원은 스스로 외톨이로 지냈다. 그렇게 이 학년이 끝나자 김석현은 곧장 군대에 갔고, 이재원은 휴학했다. 그렇게 접점이 없었으니 이재원에 대해 아는 게 없을 만했다. 하지만 강우는 이재원의 A부터 Z까지 모르는 것이 없었다.

    “재원이 형 기타 잘 쳐요.”

    “정말? 재원이가?”

    강우의 폭로에 이재원이 한숨을 푹 쉬었다. 혼자 지내며 이재원은 다양한 악기들을 섭렵했다. 피아노는 물론 기타까지 다루는 악기가 다양했다.

    “네, 어디 보자···. 지금 밴드에 부족한 파트가···. 아. 건반 치면 되겠네요. 건반.”

    “하아···.”

    이재원이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김석현이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서울대 최고 화제 인물인 강우와 이재원이었다. 두 사람이 밴드에 들어온다면 생각만 해도 몸이 짜릿했다.

    “그래, 우리야 대환영이지. 그리고 장르도 우리가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어.”

    김석현이 뒤를 휙 돌아보았다. 살짝 불만인듯한 밴드원들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목에 둘렀던 스카프를 풀고 손에 끼었던 해골 반지를 빼기도 했다. 그리고는 다시 순한 강아지상이 되었다.

    “그럼 그럼. 우리는 음악을 사랑하니까.”

    강우가 픽하고 웃어버렸다. 그리고는 이재원을 향해 어쩔 거냐는 눈빛을 보냈다. 이재원이 짧게 숨을 뱉어냈다.

    “그래, 바늘 가는 데 실이 가야지.”

    “좋아요.”

    이재원의 허락에 강우가 씩 웃었다. 김석현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좋아했다. 이번 밴드 경영에서 가장 화제를 몰고 올 밴드는 바로 경영학과의 밴드 동아리일 것이다.

    “그런데 밴드 이름이 뭐예요?”

    강우의 질문에 김석현이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한 손을 들어 록을 상징하는 모양을 만들었다.

    “지옥에서 돌아온 경영자들.”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재원도 대놓고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강우가 헛웃음을 흘렸다.

    “조건 하나 더 추가요.”

    “응?”

    김석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강우가 물러설 수 없는 심정으로 강하게 말했다.

    “밴드 이름부터 바꾸죠.”

    “밴드 이름을?”

    밴드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밴드 이름의 변경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름 몇 번의 따이빙 굴비 참여로 인지도가 있는 경영대 밴드 동아리였다. 하지만 강우는 단호했다.

    “네, 밴드 이름 안 바꾸면 저 못 해요.”

    강우가 살짝 몸을 떨었다. 듣기만 해도 사람들이 세 발자국은 물러날 듯한 괴이한 밴드명이 아니던가. 이제야 조금 전 봤던 실력에 비해 유명해지지 못한 이유를 알 거 같았다.

    “잠깐만. 우리한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좀 줘.”

    김석현이 살짝 어두워진 얼굴로 밴드원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한참을 상의하기 시작했다. 강우는 한쪽에 앉아 결정이 나기를 기다렸다. 이재원은 이런저런 악기를 만지작거리며 기다렸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김석현이 긴 숨을 뱉어냈다. 나머지 밴드원들이 김석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석현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밴드 이름 바꾸기로 했다. 대신 강우 네가 앞으로 계속 밴드 활동하는 게 우리 조건이야.”

    “제가 시간이 없어서 자주 참석은 못 하는데 괜찮아요?”

    김석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의 사정이야 익히 알고 있었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강우의 스케줄이었다.

    “괜찮아. 어차피 우리도 공부해야 해서 시간이 많이 없거든.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다.”

    “알겠어요. 그럼 수락할게요.”

    강우의 허락이 떨어지자 김석현이 만세를 불렀다. 다른 밴드원들도 김석현을 따라 좋아했다. 얼싸안고 좋아하던 김석현이 문득 생각이 난 듯 강우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밴드 이름은 뭐로 바꾸려고?”

    강우가 이재원을 보며 씩 웃었다. 이재원이 불길한 느낌을 받은 듯 몸을 살짝 떨었다. 강우가 입을 열었다.

    “이재원과 얼굴들 어때요.”

    “으아···.”

    이재원이 신음성을 흘렸다. 강우가 이재원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그리고 미래의 기억 속 유명해지는 밴드를 떠올렸다.

    ‘미안하다. 미래의 후배야. 밴드명 좀 미리 당겨다 쓸게.’

    김석현과 밴드원들의 시선이 이재원을 향해 쏟아졌다. 그리고는 금세 수긍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좋네, 재원이 얼굴이면 어디 가나 먹힐 만하지.”

    이재원이 미간을 좁혔다.

    “보컬이 강우인데? 그냥 강우와 얼굴들로 가자.”

    “오오?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 강우도 한 잘생김 하니까.”

    김석현이 대번에 좋다고 했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선배님들 제치고 어떻게 제 이름을 씁니까. 일단 이재원과 얼굴들로 가시죠. 그리고 선배님들도 다들 한 외모들 하시니까. 얼굴들이라는 표현이 딱 맞습니다.”

    “그런가?”

    김석현과 밴드원들이 헤벌쭉 웃었다. 그리고는 강우의 의견에 동조했다. 이재원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강우가 옆구리를 푹 찔렀다. 이재원이 움찔하더니 강우를 보며 픽 웃었다. 강우가 하지 말라며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그래, 알겠다. 너나 나나 어차피 다 팔린 얼굴인데 뭐···.”

    이재원의 말에 강우도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게 밴드명이 바뀌는 것이 결정되었다. 김석현이 얼굴 가득 만족감을 드러냈다.

    * * *

    늦은 밤. 고속버스 터미널에 강우가 나타났다. 연신 시계를 확인하며 달리는 강우가 고속버스터미널 안으로 들어갔다. 터미널 안에 들어간 강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이내 밝은 표정이 되었다.

    “나은아!”

    강우가 마구 손을 흔들며 달리기 시작했다. 멀리 터미널 안의 의자에 이나은이 앉아있었다. 강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나은의 고개가 단번에 돌아갔다.

    “강우야!”

    그리고는 대번에 밝아진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강우가 이나은의 앞에 도착했다.

    “미안 내가 좀 늦었지?”

    “어? 강우 너 목소리가 왜 그래?”

    이나은이 고개를 갸웃했다. 강우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달리 잠겨있었다. 강우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말이야. 오늘부터 밴드 동아리 하게 됐어.”

    “진짜?”

    이나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리고는 재빨리 말을 이어갔다.

    “밴드? 정말?”

    “응, 보컬 하기로 했어.”

    강우가 민망한 듯 말했다. 이나은이 싱긋 웃으며 좋아했다. 김춘배가 말해준 덕분에 이미 강우의 노래 실력을 알고 있었다. 다만 둘이 노래방을 가본 적이 없어 확인을 못 했을 뿐이었다.

    “우와~ 그럼 강우 너 이번에 축제 때 게임 대회도 나가고 농구대회도 나가고 음악 경연도 나가고 진짜 바쁘겠다.”

    이나은의 말에 강우가 실소를 흘렸다.

    “그러네. 아마 서울대에서 축제 때 가장 바쁜 사람을 뽑으라면 내가 1등일 거야.”

    “그러네?”

    이나은이 입을 가리며 킥 하고 웃었다. 그러자 주변이 환해지듯 밝아졌다. 강우가 싱글벙글하며 웃었다.

    “우리 축제 올 거지?”

    “당연하지. 제일 바쁜 우리 남자 친구 보러 가야지.”

    강우가 바보처럼 웃으며 팔을 척 내밀었다. 이나은이 싱긋 웃으며 강우의 팔짱을 착하고 꼈다.

    “자~ 그럼 집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네, 고마워요~”

    강우와 이나은이 터미널을 벗어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가 잘 맞아가는 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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