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5화 (125/402)

역시 형아가 짱.

시간은 빠르게 흘러 5월이 되었다. 바야흐로 온 대학교가 들썩이기 시작하는 축제의 계절이 찾아왔다. 봄기운도 절정에 다다라 캠퍼스에는 신록이 우거졌다. 살랑이는 바람에 학생들의 표정은 밝기만 했다. 강의를 마친 강우가 경영대 건물 복도에 있었다.

덜컹.

강우가 자판기에서 오렌지 주스 캔을 뽑았다. 긴소매를 입고 나온 강우의 이마에는 살짝 땀이 맺혀있었다.

딸칵.

강우가 음료를 단숨에 털어 넣었다. 입안 가득 달콤하고 쌉싸름한 맛이 퍼져나갔다. 강우의 콧잔등에 작게 주름이 잡혔다.

“또 오렌지 주스야?”

강우가 힐끗 옆을 바라보았다. 이재원이 다가와 자판기에 동전을 넣었다.

덜컹.

이재원이 허리를 숙여 음료를 꺼냈다. 역시 오렌지 주스였다. 강우가 피식 웃었다.

“그러는 형은요?”

“난 너 때문에 중독된 거고.”

이재원이 음료를 단숨에 털어 넣었다. 강우가 이재원의 등을 탕탕 두들겨 주었다.

“가요. 시간 늦겠어요.”

“그래, 가자.”

강우와 이재원은 경영대 학생회실로 향했다. 주변을 지나는 경영대 학생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왔다. 가뜩이나 유명했던 두 사람은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덜컥.

학생회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몇 명의 학생들이 모여있었다.

“재원아!”

이재원을 발견한 학생 한 명이 벌떡 일어났다. 이재원도 안면이 있는지 슬쩍 손을 들어 인사했다.

“석현아, 오랜만이다.”

강우가 이재원과 인사를 나눈 학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김석현 선배님.”

“강우도 안녕.”

김석현이라 불린 학생은 경영대 학생회장을 맡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오늘 강우와 이재원을 이곳으로 부른 사람이기도 했다. 남학생의 주변에는 몇 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모두 학생회의 임원들이었다. 강우와 이재원은 나머지 학생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축제 준비는 잘돼 가냐?”

이재원의 질문에 김석현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사실 크게 관심을 못 받는 축제를 준비하는 게 즐겁거나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강우와 이재원이 축제에 도움을 주겠다는 말을 전해왔을 때는 정말이지 화들짝 놀랐다.

“열심히 하고 있지. 그런데 이번에 너랑 강우가 도와준다고 해서 기대 중이다.”

김석현의 말에 다른 임원들의 표정이 상기되기 시작했다. 김석현이 옆에 있는 학생을 향해 말했다.

“준비됐지?”

“네.”

신호를 받은 학생이 한쪽에서 프린트물을 가지고 왔다. 학생회실에 있는 인원 모두가 볼 수 있게 나누어 주었다.

“일단 이번 축제 때 경영대에서 했으면 하는 것들을 정리해 봤다.”

강우가 프린트물을 슬쩍 바라보았다. 전면의 표지에는 ‘1998학년도 경영대 축제 계획’이라고 적혀 있었다. 강우가 조심스럽게 내용을 확인했다.

사라락. 사라락.

강우가 내용을 확인하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묘한 긴장감이 학생회실에 흐르기 시작했다.

‘모의 주식투자에 모의 경영체험 그리고 경영대 주점과 체육대회 정도인가?’

강우가 속으로 짧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축제 바보라는 수식어가 붙을만한 내용이었다. 이윽고 내용을 모두 확인한 강우가 고개를 들었다.

“다 봤어? 어때?”

김석현이 침을 꼴깍 삼켰다. 다른 학생회 임원들과 이재원도 궁금한 표정이 되었다. 강우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일단 늘 그랬듯이 녹두문화제이군요.”

“응, 그렇지.”

1994년 처음 시작된 녹두문화제는 축제의 범위를 서울대 밖으로까지 확장하려는 시도였다. 학교 축제에 주민들을 참여시키고 서울대 근처의 문화를 축제에 녹여낸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처음 의도만큼 활성화되지는 못했다. 그리고 점점 참여 인원이 줄어 작년에는 몇백 명만이 참가했을 정도였다.

‘이래서는 답이 없지.’

강우가 가방에서 프린트물을 꺼냈다. 잘 제본되어있는 프린트물은 두툼한 두께를 자랑했다. 강우가 프린트물을 김석현을 향해 내밀었다.

“이건 제가 생각한 이번 축제계획서에요.”

“그래?”

김석현이 프린트물을 내려다보았다. 전면에는 대진 그룹의 로고가 선명히 박혀있었다. 김석현이 조심스럽게 첫 장을 넘겼다.

사라락. 사라락.

내용을 확인한 김석현이 입을 벌리며 감탄을 뱉어냈다. 옆에 있던 임원들이 궁금해 죽겠다는 듯 프린트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와···. 대박.”

이윽고 김석현이 프린트물을 모두 읽었다. 옆에 있는 임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프린트물을 가져갔다. 다시 감탄들이 터져 나왔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일단 주점은 규모를 키워서 제대로 해보려고요. 대진 그룹에서 전부 지원할 예정이에요. 대신 들어가는 주류랑 음식들은 전부 협찬으로 진행될 거고요. 수익금은 전부 기부될 예정이에요.”

강우의 말에 학생회실의 안의 분위기가 점점 달아오르고 있었다. 강우가 계획한 축제의 스케일은 상상 이상이었다. 강우의 말이 이어졌다.

“축제 개최 장소는 총장 잔디, 자하연, 그리고 아크로 일대까지로 생각하고 있어요. 주점은 세 곳에 모두 설치될 예정이고요.”

“그···. 그래.”

김석현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학과에도 연락해서 주점에 대한 예산과 장비 지원을 해준다고 전해 주세요. 필요한 학과가 있으면 경영대 학생회···. 아니 총학생회에 연락하라고 하면 되겠네요.”

“어어.”

강우가 다음 안건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수 섭외문제에요. 이것도 대진 미디어에서 전액 후원할 예정이에요. 가수 섭외 콘셉트는 라이벌입니다. 지금 가요계에 라이벌리를 형성하고 있는 아이돌 그룹들이 많은데요. 그 그룹들 위주로 섭외할 예정이에요.”

엄청난 스케일에 김석현과 임원들이 벌린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마지막으로 스페이스 크래프트 대회를 열 생각이에요. 장소는 넓은 총장 잔디 쪽에서 개최하는 게 좋겠네요. 부스도 만들고 정식으로 대회 느낌 나게 진행할 예정입니다. 물론 우승 상금과 상품도 있어요. 대회는 1:1 매치부터 4:4 매치까지 전부 네 개 분야로 나눠봤습니다. 예선부터 시작해야 하니 이건 조금 서둘러야겠네요.”

마지막 말을 끝으로 강우가 씩 웃었다. 멍하니 있던 김석현이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대단하다. 역시 기획팀에서 붙으니까 아이디어가 장난이 아니네.”

김석현의 말에 이재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 전부 강우 아이디어야.”

김석현과 임원들이 다시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는 강우를 바라보며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특히 김석현은 강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강우야, 너 학생회에서 일해볼 생각 없어?”

강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정중히 거절했다.

“죄송해요. 제가 시간이 없어서요.”

김석현과 임원들이 아쉬움에 탄식했다.

* * *

축제 준비는 일사천리였다. 강우가 기획한 계획안은 총학생회에 전달됐다. 총학생회의 반응도 폭발적이었다. 이번 총학생회의 목표 중 하나가 서울대 축제의 개혁이었다. 그런데 강우와 이재원이라는 존재가 나타났으니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했다.

탁. 타타탁.

강우가 방 안에서 열심히 키보드를 누르고 있었다. 오른손에 쥐어진 마우스는 그야말로 빛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우와~”

강우의 옆에는 강용이가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모니터에서는 그야말로 우주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강우에게 이길 수가 없었다. 강우는 지도 대부분을 장악한 상태였다. 여러 개나 먹은 멀티에서는 막대한 자원이 쏟아져 들어왔다.

펑. 퍼펑.

공성 탱크가 적의 병력을 말 그대로 갈아버렸다. 자극제를 먹은 해병들은 화려한 움직임으로 적을 제압했다. 강용이가 두 손에 땀을 쥔 채 강우를 응원했다.

“형아 이겨라!”

강용이가 반짝이는 눈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용이에게 강우는 게임의 신이었다. 어떤 게임을 하든지 항상 최고의 실력을 보여줬다. 지금도 눈앞에서 날아다니는 강우의 손놀림은 감탄스러울 뿐이었다.

“후···. 또 이겼다.”

이윽고 강우가 상대방의 항복을 받아냈다. 지도는 온통 강우의 색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상대방이 마지막으로 치고 나간 채팅에 강우가 화면을 가렸다.

“강용이는 나쁜 욕 보면 안 돼.”

“응, 형아.”

강용이가 눈을 질끈 감았다. 강우가 게임을 끄고는 강용이의 머리를 콕 건드렸다. 강용이가 눈을 번쩍 뜨더니 씩 웃었다.

“나도 형아처럼 게임 잘하고 싶다.”

“강용이도 조금 더 크면 잘하게 될 거야.”

“맞아. 나는 형아 동생이니까.”

강용이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다시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형아 정말 학교에서 게임대회를 해?”

“맞아. 축제 때 스페이스 크래프트 대회를 하기로 했어.”

이번 축제에서 스페이스 크래프트를 열기로 한 것은 강우의 아이디어였다. 요즘 한참 화젯거리인 게임이었다.

‘아무리 공부만 하는 서울대생이라고 해도 이건 하겠지.’

그만큼 국민적인 게임이었다. 그리고 게임 문화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게임이었다. 물론 서울대에서 게임대회를 열겠다니 반대가 있었다. 특히 축제를 감사하는 교수들의 반대가 심했다. 하지만 이재원이 나서서 한 방에 정리했다. 바로 전산실의 컴퓨터를 모두 새 걸로 교체해주기로 했다.

‘물론 원주 아버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신 것도 있지.’

신철민 교수는 신원주와 더 친밀한 부자 관계를 위해 게임을 시작했다. 신원주의 말에 따르면 매일 밤 신철민 교수와 스페이스 크래프트를 즐긴다고 했다.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지.’

강우와 이재원은 학생 식당의 개선에도 들어갔다. 이번 축제를 대진 미디어가 독점으로 후원하는 조건으로 학생 식당을 전면 리모델링해 주기로 했다. 이재원은 드디어 악몽 같던 학식을 끊어낼 수 있다며 좋아했다.

“형아, 한 판만 더 해라.”

“응? 게임?”

강우가 상념에서 벗어나 강용이를 바라보았다. 강용이는 게임 구경하는 걸 참 좋아했다. 강우가 강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지 말고 강용이 한판 해볼래?”

“아니, 나는 구경하는 게 재밌어.”

“그래, 알겠어.”

강우가 다시 게임을 켰다. 강우가 다시 접속해서 랭크를 올리는 모드에 접속했다. 강용이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우와~ 우리 형아 1등이네.”

강우는 스페이스 크래프트의 온라인상에서 유명인이었다. 전 세계 랭크 1위에 마크된 실력자였다. 강우가 두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풀었다.

띠. 띠. 띠.

게임의 시작을 알리는 카운트다운과 함께 다시 치열한 전쟁이 시작됐다. 강용이가 의자를 바짝 붙여 화면에 집중했다. 그때, 어머니가 방문을 노크했다.

“아들~”

“네, 엄마.”

문이 열리고 어머니가 들어왔다. 어머니의 손에는 과일이 담긴 쟁반이 들려 있었다. 어머니가 강우의 책상으로 다가와 모니터를 힐끗 보았다.

“게임 해?”

“네.”

강우가 잔뜩 집중한 채 대답했다. 어머니가 강우를 보더니 입을 가리고 웃었다. 잔뜩 찌푸려진 콧잔등에 주름이 잡혀있었다. 그 모습이 아버지가 집중할 때와 영락없이 닮은꼴이었다. 어머니가 책상 위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먹으면서 해. 쉬엄쉬엄.”

“네, 엄마.”

어머니가 이번에는 강용이를 바라보았다. 강용이 역시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어머니가 강용이의 땀을 쓱 닦아주었다.

“우리 막내는 숙제 다 했어?”

“아···. 맞다.”

강용이가 혀를 삐죽 내밀더니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책을 펴고 숙제를 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강우와 강용이를 번갈아 보더니, 방을 나갔다.

“으아···.”

강용이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아직 초등학생인 강용이였지만, 학년이 올라가고 있었다. 서서히 공부의 압박이 시작되고 있었다. 어느새 초반 러쉬로 게임을 끝낸 강우가 의자를 드르륵 끌어 강용이에게 다가갔다. 슬쩍 바라보니 강용이는 책에 낙서하고 있었다.

“강용이 공부하는 거 싫어?”

“응. 별로 안 좋아.”

강우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미래의 기억 속에도 강용이는 공부에 큰 관심이 없었다. 사실 강용이의 재능은 다른 쪽으로 충분히 넘치고 찼다.

“강용이는 그럼 커서 뭐 하고 싶어?”

강우의 질문에 강용이가 망설임 없이 답했다.

“나는 영화감독 아니면 소설가.”

“그렇지?”

강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미래의 기억 속 강용이의 직업이 언급되었다. 강용이가 잔뜩 신이 나서 말했다.

“응, 영화도 만들어보고 싶고 재미있는 소설도 써보고 싶어.”

“음···. 그럼 두 개 다 하면 되지.”

강용이가 이마를 탁 하고 쳤다.

“아! 그러면 되겠네. 역시 형아가 짱.”

“하하.”

강우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강용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래의 기억과는 달리 건강한 강용이였다. 늘 몸이 아파 자신의 재능을 꽃피우지 못한 미래는 이제 없었다.

“그래, 우리 강용이 하고 싶은 거 다 해. 그런데 영화감독도 소설가도 지금은 공부해야 할 수 있으니까. 힘들어도 꾹 참고 할 수 있지?”

“알겠어! 나 공부한다.”

강용이가 결의를 다지며 눈을 빛냈다. 그 귀여운 모습에 강우가 어쩔 줄을 모르며 양 볼을 쭉 늘어트렸다. 강용이도 강우의 손길이 싫지 않은 듯 배시시 웃었다.

“우리 강용이 형아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줄게.”

“형아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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