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2화 (122/402)
  • 이 순간이 중요한 거지.

    이나은이 강우의 집에 발을 디뎠다. 순간 강우가 묘한 기분을 느꼈다. 노란 원피스를 입은 이나은이 집에 들어오자 사방이 밝아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이나은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어서 와라. 만나서 반갑다.”

    “안녕하세요.”

    이나은이 꾸벅 인사를 했다. 아버지의 얼굴에 주체할 수 없는 흐뭇함이 떠올랐다. 아들의 여자친구가 집에 오다니 특별한 일이었다. 강우의 나이대의 아이들은 연애해도 집에 데려오는 경우는 드물었으니 말이다.

    “아버지, 이거 나은이가 사 온 거예요.”

    강우가 손에 들린 선물꾸러미를 내밀었다. 아버지가 살짝 놀라며 이나은을 바라보았다.

    “학생이 뭐 이런걸 사 왔어. 그냥 맛있는 밥 한 끼 먹이려고 부른 건데.”

    “아니에요. 이거 저희 어머니가 준비해 주셨어요. 강우가 집에 왔을 때 선물을 많이 사 왔었거든요.”

    이나은의 말에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아들 하나는 바르게 키웠다고 생각했다.

    “그래, 고맙다. 그리고 부모님께도 꼭 고맙다고 전해드리거라.”

    “네, 알겠습니다.”

    이나은이 이번에는 거실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와 최준이 연신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강우가 이나은과 함께 할아버지와 최준의 앞에 갔다.

    “안녕하세요. 이나은입니다.”

    이나은이 꾸벅 인사를 했다. 할아버지와 최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반갑다.”

    “우리 강우 친구가 아주 참하구나.”

    할아버지들의 칭찬에 이나은이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텔레비전에서 볼 때마다 항상 존경하고 있었어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나은의 말에 할아버지와 최준이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고맙구나.”

    아버지와 어머니도 연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강용이가 쪼르르 달려와 할아버지들의 사이에 앉았다.

    “누나, 배고프겠어요. 우리 빨리 밥 먹어요.”

    다소 진지해질 만한 타이밍에 강용이의 재치가 빛났다. 강우가 강용이를 보며 슬쩍 엄지를 들었다. 강용이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래, 빨리 밥 먹자.”

    어머니가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에는 이미 온갖 요리가 준비되고 있었다. 아버지도 주방에 합세했다. 아들의 여자친구를 위해 직접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바로 마늘 전복 버터 소금구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요리였다.

    치이익.

    아버지가 달궈진 웍에 마늘을 한 움큼이나 부었다. 그리고 올리브유를 붓고 소금과 버터를 추가했다. 마지막으로 잘 손질된 전복이 우수수 들어갔다.

    화르륵. 화르륵.

    가스레인지답지 않은 화력 쇼가 펼쳐졌다. 아버지의 표정은 정말 즐거워 보였다. 강용이가 식탁에 앉아 턱을 괴었다.

    “와~ 우리 아빠가 요리를 하다니.”

    강용이의 말에 아버지가 움찔했다. 그리고는 뒤를 못 돌아본 채 말했다.

    “아빠가 라면은 자주 끓여줬잖아.”

    “라면은 요리 아니에요.”

    강용이의 말에 어머니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나은도 고개를 돌리고 슬쩍 웃었다. 강우가 소매를 걷어붙였다.

    “뭐 도와드릴 거 없어요?”

    “아니야 괜찮아. 그러지 말고 나은이 방 구경시켜줘. 나중에 설거지해 주고.”

    어머니의 말에 강우가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이나은을 보며 멋쩍게 웃었다.

    “내 방 구경시켜줄까?”

    “응? 으응.”

    이나은이 왠지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강우와 이나은이 강우의 방으로 향했다.

    덜컥.

    방문이 열리자 이나은의 얼굴이 상기되기 시작했다. 두 눈에는 진한 호기심이 떠올랐다.

    “와~ 여기가 강우 방이구나.”

    이나은이 슬쩍 안으로 들어서서는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강우가 창문으로 다가가 활짝 열었다. 이나은이 싱긋 웃었다.

    “방에서 좋은 향기 난다.”

    “그래?”

    강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나은이 강용이의 물건들을 발견했다.

    “동생이랑 방같이 써?”

    “응, 원래 따로 쓰다가 얼마 전에 최준 할아버지 오시고 다시 합쳤어.”

    “그랬구나. 둘이 사이가 진짜 좋아 보이더라.”

    강우가 강용이를 떠올리며 웃었다. 강우에게 강용이는 동생 그 이상의 존재였다. 이나은이 강우의 침대에도 걸터앉아 보았다. 푹신푹신한 매트리스의 감촉과 킹사이즈로 넓은 침대에 이나은의 표정이 나른해졌다.

    “와~ 침대 좋다.”

    강우가 이나은의 옆에 털썩 앉았다. 강우와 이나은의 눈빛이 허공에서 닿았다. 순간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강우가 헛기침하며 일어나려던 순간이었다.

    덜컥.

    “형아.”

    강용이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다. 강우와 이나은이 화들짝 놀라며 서로에게서 멀어졌다. 강용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는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방해해서 미안한데 엄마가 밥 먹으러 나오래.”

    강용이의 말에 이나은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강우가 벌떡 일어나며 괜히 목소리를 높였다.

    “흠흠···. 나은아 밥 먹으러 가자.”

    “응? 으응.”

    이나은도 벌떡 일어나 강우의 뒤를 따랐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강용이가 자기 머리를 콕 쥐어박았다.

    “아이고 바보야. 망했네! 망했어.”

    강용이가 알 수 없는 자책을 하며 밖으로 나갔다. 거실에는 어느새 커다란 상이 퍼져 있었다. 이나은이 주방으로 다가가 수저를 놓으려 했다. 아버지가 화들짝 놀라 이나은을 말렸다.

    “가서 앉아있어. 손님이 이러면 안 되지.”

    “네.”

    강우가 이나은을 잡아끌었다.

    “내가 할게. 가서 앉아있어.”

    “응.”

    이나은이 결국 상으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는 할아버지와 최준의 말벗이 되어주었다. 싹싹하고 예의 바른 이나은의 모습에 할아버지와 최준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이윽고 주방에서 음식들이 하나씩 완성되기 시작했다. 해삼, 멍게, 산낙지 등등 싱싱한 해산물이 먼저 나왔다. 그리고는 회도 준비됐다.

    “우와~ 물고기 엄청 많네.”

    강용이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해산물을 안 좋아하지만, 분위기를 띄우려고 참 열심이었다. 강우가 그런 강용이를 쓰다듬어 주었다. 역시 참 착하고 귀여운 동생이었다.

    “자 우리 강용이는 이거 먹으면 되겠다.”

    아버지가 주방에서 특제 전복요리를 가지고 왔다. 강용이가 전복요리를 보며 살짝 망설이는 듯했다. 그러자 아버지가 전복을 한 점 집어 강용이에게 내밀었다.

    “우움···.”

    강용이가 잠시 망설이더니 덥석 전복을 먹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우물거렸다.

    “우와! 맛있어.”

    강용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해산물을 싫어하는 강용이에게 딱 맞는 요리인가 보다. 아버지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자식이 맛있게 먹는 모습만큼 기분 좋은 게 없었다.

    “어때? 맛있지? 그렇지?”

    “응응. 진짜 맛있어 아빠.”

    강용이가 아버지를 향해 엄지를 척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보며 강우가 씩 웃었다. 미래의 기억 속에도 아버지는 종종 강용이에게 이 음식을 해주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여유로운 모습은 아니었다. 힘든 가정형편 덕분에 종종 먹을 수 있는 정도였다.

    “아빠가 자주 해줄게. 많이 먹어.”

    “응.”

    이윽고 상이 모두 차려졌다. 모두가 둘러앉고 식사가 시작됐다. 어머니와 이나은은 멍게를 집중적으로 먹었다.

    “어머? 나은이 멍게 좋아하니?”

    “네, 어머니. 해산물 좋아하는데 특히 멍게를 제일 좋아해요.”

    “정말? 나도 멍게가 제일 좋아.”

    작은 공통점에도 어머니는 참 기뻐했다. 이나은도 싱긋 웃으며 좋아했다. 그렇게 식사가 이어지는 내내 강우 가족의 집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노란 원피스를 입은 이나은이 활짝 웃을 때마다 개나리꽃이 피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강우는 이나은의 옆에 앉아 연신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 나은아 강우가 조금 무뚝뚝하지?”

    어머니의 질문에 이나은이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뚝뚝한 거 같지만 속이 깊어서 잘 챙겨줘요.”

    “그래? 우리 강우가?”

    어머니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평소 감정 표현에 서툰 강우가 걱정됐나 보다. 하지만 어머니의 걱정 이상으로 강우는 이나은에게 다정했다. 하지만 이나은이 어머니가 서운치 않게 현명히 답한 것이다. 강우가 역시 이나은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잘 먹었습니다.”

    식사가 끝나자 어머니와 이나은은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서로의 취미나 좋아하는 것들을 공유했다. 어머니 역시 미대를 나와서인지 예술적인 부분으로 공통되는 분야가 참 많았다.

    “정말? 엄마도 영화 정말 좋아해.”

    “정말요? 그럼 저랑 나중에 영화 보러 가요.”

    “그럴까? 어쩜 아들 여자친구가 아니라 딸이 생긴 거 같아.”

    “그럼 제가 딸 할게요.”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방으로 들어가 큼지막한 앨범을 들고나왔다. 연인의 집에 방문하면 으레 통과해야 하는 의식 중 하나였다.

    “강우 어렸을 때 궁금하지?”

    “네, 진짜 궁금해요.”

    어머니가 강우를 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금단의 비서를 열었다. 이나은이 작게 탄성을 지르며 입을 막았다.

    “어머! 너무 귀여워요.”

    “그렇지? 우리 아들이 아기일 때는 다들 인형이라고 했어.”

    강우가 슬쩍 보니 기저귀를 차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순간 실소가 흘러나왔다. 앨범의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이나은의 눈동자가 더 반짝이기 시작했다.

    “와~ 강우는 어렸을 때부터 키가 컸네요?”

    “그럼, 또래 애들이랑 세워놓으면 항상 머리 하나는 더 있었어.”

    어느새 강우는 소외돼 버렸다. 강우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때, 강용이가 슬쩍 다가와 옆구리를 툭 찔렀다. 강우의 고개가 쓱 돌아갔다.

    “강용이 왜?”

    “형아, 엄마가 형수님 진짜 좋아하나 봐. 나한테는 저 앨범은 아무나 보여줄 수 없다고 했거든.”

    강우가 강용이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형수님이라니 그냥 누나라고 불러.”

    “왜? 영화 보면 동생들이 이렇게 불러줘야 좋아들 하던데?”

    “아···. 그래?”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아버지도 대화에 슬쩍 끼어들었다.

    “강우야, 강용이 말이 맞아. 너희 엄마가 착하고 성격이 좋아도 또 취향이나 이런 거는 확고하거든? 그런데 둘이 정말 잘 맞는 거 같다.”

    “저도 그런 거 같아요. 저러다가 날 새겠어요.”

    강우가 힐끗 고개를 돌리니 할아버지와 최준은 그저 흐뭇한 표정이었다. 특히 최준은 이 순간이 정말 행복해 보였다. 평범한 일상이 가져다주는 행복은 그 어떤 것보다 확실한 행복이었다.

    “아 참 나은아 김세아라는 배우 알아?”

    “어머? 그분이요? 우리 학교 선배세요.”

    이나은이 대번에 김세아를 안다고 했다. 역시 왕년을 주름잡던 스타였다. 이나은이 김세아를 알자 어머니가 호들갑을 떨었다.

    “그래? 아는구나? 세아가 내 친한 동생이거든. 너 이야기했더니 한번 보고 싶다고 하더라.”

    “진짜요? 저도 꼭 만나 뵙고 싶어요.”

    “그래? 그러면 엄마가 시간 잡아서 연락할게. 우리 밖에서 한번 만나자.”

    “네, 좋아요.”

    그렇게 또 여자들만의 약속을 후다닥 잡아버리는 어머니였다. 강우가 이나은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미래의 기억 속 여배우 이나은은 조금 냉정해 보일 정도였다. 지금 눈앞의 인물과 동일 인물이라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말이다.

    ‘연예계 생활을 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원래 성격이 그런 면이 있는 건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미래의 기억이 중요한 정보였지만, 모든 것을 결정짓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강우의 삶은 미래의 기억과는 전혀 달랐으니까 말이다.

    “잠깐만 우리 후식 먹자.”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이나은이 대번에 따라 일어났다. 어머니가 앉아있으라고 했지만, 이번에는 이나은이 승리했다. 결국, 두 사람은 주방에 나란히 앉아 과일을 깎았다.

    “어머? 우리 나은이는 과일도 참 예쁘게 깎네.”

    이미 이나은에게 콩깍지가 씌어 버린 어머니였다. 이나은의 모든 것에 칭찬 일색이었다. 이나은도 이제는 긴장이 풀린 듯 예의 명랑한 모습을 더욱 뽐냈다.

    “내가 매일 칙칙한 아들들만 키우다가 이렇게 나은이가 있으니까 너무 재밌고 좋아.”

    “정말요?”

    어머니의 말에 강우와 강용이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힐끗 보더니 작게 속삭였다.

    “저기 저 아들이 제일 무뚝뚝하고.”

    이나은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아버지가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을 가리켰다. 강용이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니까 아빠 매일 산 만 가지 말고 엄마와도 좀 놀아주라니까.”

    강용이의 말에 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강우가 웃음을 터트리다 문뜩 감정의 파도를 느꼈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행복했다.

    ‘그래,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한 거지.’

    자신의 힘으로 하나씩 하나씩 바꾸어온 미래였다. 강우가 집 안을 쓱 둘러보았다. 모두가 행복한 모습에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 가족을 행복하게 했으니 내가 받은 만큼 세상에 돌려줄 차례인가?’

    강우가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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