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화 (121/402)
  • 천천히 빨리 갈게.

    최준이 집에 온 이후로 강우 가족의 집은 한층 더 사람 사는 냄새로 가득 찼다. 특히 강용이가 가장 신났다. 할아버지가 최준의 호텔에 머문 이후로 부쩍 할아버지를 보고 싶어 했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두 명이나 돌아왔다며 연신 싱글벙글하였다.

    덜컥.

    강우의 방문이 열리고 강용이가 나타났다. 양 볼이 붉게 상기된 강용이가 주방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는 냉장고를 벌컥 열었다.

    “엄마! 양갱 어딨어요?”

    아침을 준비 중이던 어머니가 뒤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거기 아래쪽 칸 찾아봐.”

    “응.”

    강용이가 냉장고에서 양갱을 꺼냈다. 작은 양손에 하나씩 쥐었다. 그리고 최준의 방을 향해 달려갔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강용이가 최준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다가 문턱에 걸려 휘청거렸다.

    “아이코···.”

    “아이고~ 인석아, 넘어져 조심해.”

    방 안에서 신문을 보던 최준이 강용이를 보며 미소 지었다. 강용이가 양갱을 최준에게 척 내밀었다.

    “할아버지 양갱 드세요.”

    “오냐~ 고맙다.”

    최준이 흐뭇하게 웃으며 양갱을 까기 시작했다. 최준은 양갱을 참 좋아했다.

    “있다가 다시 올게요.”

    강용이가 이번에는 할아버지의 방으로 향했다. 할아버지는 마침 최준의 방으로 갈 요량이었는지 문을 열고 나왔다.

    “할아버지도 드세요.”

    “오? 양갱이구나. 고맙다.”

    신기하게도 할아버지와 최준의 입맛은 비슷했다. 좋아하는 음식도 선호하는 옷도 비슷했다. 임무를 마친 강용이가 훌쩍거리던 코를 소매로 쓱 닦았다. 그리고는 주방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엄마, 다 전해드렸어.”

    “그래, 우리 강용이 잘했어.”

    어머니가 흐뭇하게 강용이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강우가 나왔다. 주말부터 늦잠을 잔 강우였다. 어젯밤 최준이 집에 온 첫날을 기념해 밤새 파티를 벌인 탓이다. 물론 어린 강용이는 일찍 잠들었었다.

    “형아!”

    강용이가 강우를 향해 다가갔다. 강우가 강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강용이 일찍 일어났네.”

    “응, 아침에 재원이 형도 내가 보내줬다.”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밤새 같이 있던 이재원은 새벽같이 집을 나섰다. 주말이지만 회사에 볼일이 있다고 했다. 물론 김세아도 이재원과 함께 새벽같이 나갔다.

    “엄마, 저 일어났어요.”

    “그래, 어제 피곤했지?”

    “아니요. 엄마가 힘들었죠. 그런데 아버지는요?”

    강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를 않았다.

    “응, 노량진 수산시장에 갔어.”

    “노량진에요?”

    강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어머니가 싱긋 웃었다.

    “그래, 나은이가 해산물 좋아한다며. 아버지가 맛있는 거 먹인다고 아침 일찍 나가셨다.”

    “아···.”

    강우가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저랑 같이 가시지···.”

    “응, 너 피곤해 보인다고 혼자 나갔어.”

    강우가 식탁에 앉았다. 주말인 오늘은 이나은이 강우의 집에 오기로 한 날이다. 사실 그전에 오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나은은 최준이 집에 온 이후에 방문하겠다고 했다. 할아버지들을 꼭 뵙고 싶다는 이유였다. 강우에게 그 말을 들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감탄하기도 했었다.

    “강우 일어났구나.”

    할아버지가 방에서 나왔다. 그러자 최준도 방에서 나왔다. 두 할아버지가 서로를 보며 미소 지었다. 강우 가족의 집에서 둘째 날인 최준은 아직은 조금 어색한 듯했다.

    “형님, 앉으시죠.”

    “그래, 아우도 앉지.”

    두 할아버지가 식탁에 앉자 어머니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가스레인지 위에 끓고 있는 국을 그릇에 담았다. 어머니가 오늘 끓인 국은 역시나 북엇국이었다. 술을 마신 다음 날에 해장으로는 최고였다.

    “맛있게들 드세요.”

    식탁 위에 풍성한 반찬들에 최준이 꿀꺽 침을 삼켰다. 얼마 만에 먹는 집밥들인지 감개가 무량했다. 강우와 강용이 그리고 할아버지의 시선이 최준을 향했다. 최준이 수저를 들어 북엇국을 한술 떴다. 그리고는 작게 탄성을 뱉으며 눈을 감았다.

    “정말 좋구나···.”

    최준의 감동에 찬 목소리에 어머니가 활짝 웃었다. 할아버지가 흐뭇하게 웃으며 수저를 들었다.

    “자 이제 우리도 먹자꾸나.”

    “네, 할아버지.”

    강우 가족의 식사가 시작됐다. 최준은 어머니의 음식을 정말 맛있어했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모두가 거실에 둘러앉았다. 텔레비전을 틀자 뉴스가 흘러나왔다.

    -대진 그룹은 오늘 재단법인 광복을 세우고 독립유공자들과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업무에 들어간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대진 그룹은 재계 순위···.-

    뉴스가 흘러나오자 할아버지와 최준이 감탄을 했다. 대진 그룹이라면 이재원의 회사인 것을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대견해했다.

    “강우야, 네가 저번에 회장한테 말했다던 바로 그 일이구나.”

    “네, 맞아요.”

    최준도 강우를 보며 대견해했다.

    “잘했다. 잘했어. 우리 강우가 큰일을 했구나.”

    “저 재단을 통해 앞으로 많은 일을 하게 될 거예요.”

    뉴스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화면이 바뀌고 이재원의 얼굴이 나왔다.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이재원은 재단법인의 건물 앞에서 테이핑을 끊고 있었다. 바로 오늘 새벽부터 나가야만 했던 이유였다. 이재원의 옆에는 대진 그룹의 실세들이 함께였다.

    “저분이 이철금 회장님이에요.”

    강우가 화면 속 한 남자를 가리켰다. 이재원의 바로 옆에 있는 이철금 회장이었다. 이철금 회장의 표정은 지난번보다 밝아 보였다. 연신 웃음을 터트리며 이재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강우가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각자의 사정이 있었을 뿐 자식인데 얼마나 눈에 밟혔을까···.’

    강우가 이철금 회장의 집을 방문한 이후로 두 사람의 관계는 많이 개선되고 있다고 했다. 이재원도 오랜 세월 쌓아두었던 응어리를 조금씩 세월에 흘려보내고 있었다.

    -다음 뉴스입니다···.-

    화면이 바뀌고 다른 뉴스가 흘러나왔다. 어머니가 후식으로 전통차와 떡을 준비했다. 최준이 배를 만지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이러다가 살이 엄청 찌는 거 아닌지 모르겠구나.”

    “할아버지, 너무 말랐어요. 조금 살쪄도 돼요.”

    강용이의 말에 최준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강용이가 또 후다닥 달려갔다.

    “아빠!!”

    강우도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다가갔다. 아버지의 양손에는 비닐봉지가 잔뜩 들려있었다.

    “아이고~ 우리 강용이.”

    강용이가 비닐봉지를 몇 개 받아 들었다. 제법 무거웠는지 강용이의 팔이 땅으로 훅 떨어졌다. 강용이가 끙끙대며 비닐봉지를 들었다.

    “우와~ 이거 뭐예요?”

    “아 그거 있다가 먹을 물고기들.”

    물고기라는 말에 강용이가 화들짝 놀랐다. 먹성 좋고 다 잘 먹는 강용이가 유일하게 꺼리는 것이 회나 생선이었다.

    “뭐 이렇게 많이 사 왔어요?”

    어머니가 현관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아버지가 입꼬리를 올렸다.

    “오늘 귀한 손님이 오시는데 이 정도는 사야지. 잠깐만 아직 더 있어.”

    아버지의 말에 어머니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역시 손이 크기는 부창부수였다. 강우가 아버지를 따라 일 층으로 내려갔다. 차의 트렁크에는 커다란 스티로폼 상자가 실려있었다.

    “이거 제가 들게요.”

    강우가 상자를 꺼내 들었다. 묵직한 무게에 강우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이거 왜 이렇게 무거워요?”

    “나은이가 해산물 좋아한다며? 뭐 좋아할지는 몰라서 종류별로 다 사 왔지.”

    아버지가 싱글벙글 웃었다. 그 모습을 보는 강우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미래의 기억 속 아버지는 며느리에게 참 다정한 시아버지였다. 강우와 아버지의 깊었던 갈등의 골도 강우가 결혼하고 나서 조금씩 메워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버지,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하지. 우리 아들이 첫 여자친구를 사귀는데 이 정도는 아빠가 해야지.”

    아버지가 호탕하게 웃으며 집으로 향했다. 강우도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집으로 돌아온 강우는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깨끗이 씻고 나온 강우는 옷도 깔끔히 차려입었다.

    “아들~”

    어머니가 강우의 방으로 왔다. 옷을 다 갈아입은 강우가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네?”

    “방도 좀 치워야지?”

    “아···. 깨끗한데요?”

    강우가 방을 둘러보았다. 강우의 방은 혼자 쓸 때보다 훨씬 깔끔해져 있었다. 모두 강용이 덕분이었다. 강용이는 깔끔에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아이였다. 미래의 기억 속에도 그 깔끔한 덕분에 강우와 간혹 투덕거린 적도 있었다.

    “그러네? 우리 강용이가 다 치웠나 보다.”

    어머니도 대번에 우렁각시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강우가 창문을 열어 환기했다. 그리고 평소에는 뿌리지도 않던 향수까지 뿌렸다. 거실에 있던 강용이가 방으로 와서는 마지막 검열을 했다. 그리고는 팔짱을 끼며 씩 웃었다.

    “좋아. 이 정도면 합격.”

    강용이의 말에 강우와 어머니가 웃음을 터트렸다. 거실로 나가보니 할아버지와 최준이 각자의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두 분 모두 잘 차려입고 계셨다.

    “어머? 두 분 오늘 정말 멋지세요.”

    어머니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할아버지와 최준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도 옷을 잘 챙겨 입은 상태였다.

    “여보는 옷 안 갈아입어?”

    아버지의 질문에 어머니가 싱긋 웃었다.

    “전부 다 신경 쓰고 차려입고 있으면 나은이가 얼마나 긴장하겠어요.”

    “아. 그럼 나도 다시 편하게 입을까?”

    “그냥 입고 있어요.”

    어머니의 말에 아버지가 멋쩍게 웃었다. 아버지가 강우에게 다가왔다.

    “아들 머리를 단정히···.”

    내밀어지는 손을 강우가 쓱 피하며 뒤로 물러났다. 아버지가 아쉬운 표정을 짓더니 강용이를 바라보았다. 강용이가 짧게 한숨을 쉬더니 머리를 쓱 내밀었다. 아버지가 강용이의 머리를 이 대 팔로 만들어주었다.

    “그래, 남자는 이렇게 이마를 내놓고 다녀야 한다.”

    강용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강우네 집이 복작거리던 때였다.

    뚜르르. 뚜르르.

    강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순간, 집 안에 정적이 흘렀다. 모두의 시선이 강우의 핸드폰으로 향했다. 강우가 어색하게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민망함에 자리를 옮기려는 강우를 강용이가 슬쩍 붙잡았다. 강우가 움찔하며 멈춰 섰다. 강용이가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강우가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강우야, 나야.-

    “어, 나은아. 어디야?”

    강우의 입에서 나은이라는 이름이 흘러나오자 할아버지와 최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르는 척했지만, 두 귀는 온통 강우를 향해 열려 있었다.

    “형수님! 형수님!”

    오직 강용이만이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수화기 너머 이나은이 웃음을 터트렸다.

    -강용이야? 안녕 강용아!-

    이나은이 벌써 강용이의 팬이 된 듯했다. 이나은이 말을 이어갔다.

    -나 지금 현대 아파트 입구야. 공중전화 부스에 있어.-

    “그래? 기다려 내가 빨리 내려갈게.”

    -천천히 와.-

    “알겠어. 천천히 빨리 갈게.”

    강우의 이상한 말에 이나은이 또 웃음을 터트렸다. 강우가 통화를 끊고는 바람처럼 현관으로 향했다. 강용이가 화들짝 놀라며 강우의 뒤를 따랐다.

    “형아, 같이 가!!”

    강우와 강용이가 집 밖으로 나왔다. 서둘러 걷는 강우를 따라잡느라 강용이는 뛰어야 했다. 이윽고 강우가 공중전화 부스 근처에 다다랐다. 공중전화 부스의 안에 노란 원피스를 입은 이나은이 있었다.

    “와···.”

    강우가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터트렸다. 오늘따라 더욱 신경 쓴 이나은은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왔다.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이나은을 힐끗힐끗 바라보았다. 역시 미래의 기억 속 대한민국을 주름잡던 여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지금은 그냥 학생이지만 말이야.’

    그때, 강용이가 탄성을 뱉어냈다.

    “와~ 누나, 진짜 예쁘다. 저렇게 공중전화 부스 안에 있으니까 포장된 바비인형 같아.”

    “뭐?”

    아이다운 강용이의 말에 강우가 실소를 흘렸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오늘의 이나은은 특히 더욱더 예뻤다. 강우가 빠르게 공중전화 부스로 다가갔다. 마침 용기 내 이나은에게 말을 걸려던 남성이 있었다.

    “강우야!”

    이나은이 강우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강우도 마주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말을 걸려던 남성이 움찔하더니 가던 길을 다시 갔다.

    “우와~ 누나, 인기도 많다. 우리 형아 피곤하겠네.”

    “이 녀석이.”

    강우가 강용이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강용이를 발견한 이나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늘 동생 이야기를 할 때는 바보처럼 웃는 강우였다. 참 궁금했던 강용이의 존재였다.

    “안녕? 네가 강용이구나.”

    “안녕하세요? 박강용입니다. 우리 형아가 제일 좋아하는 동생입니다.”

    강용이의 이색적인 자기소개에 이나은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강용이가 씩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강우가 이나은의 손을 보더니 황급히 손을 내밀었다.

    “뭐 이런 걸 사 왔어.”

    “우리 엄마가 챙겨주셨어. 부모님 드릴 거랑 할아버지들 드릴 거야.”

    이나은의 손에는 과일 바구니와 작은 선물꾸러미가 들려있었다. 강우가 과일 바구니와 선물꾸러미를 받아 들었다. 이나은의 왼손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확인한 강우가 또 바보처럼 실실 웃었다.

    “좋아 죽네. 우리 형아.”

    강용이가 강우의 등을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이나은이 또 귀엽다며 미소를 지었다. 강용이가 냉큼 이나은의 손을 잡았다.

    “형수님, 빨리 가요. 다들 기다려요.”

    “응, 그래.”

    갑작스럽게 훅 들어 온 형수님이라는 단어에 이나은이 얼굴을 붉혔다. 강우도 괜히 민망해 헛기침했다. 그렇게 세 사람이 현관문 앞에 도착했다.

    “강우야, 나 잠깐만.”

    이나은이 떨리는 듯 크게 심호흡을 했다. 강용이가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

    “그런가?”

    이나은이 또 웃음을 터트렸다. 강우는 픽 웃으며 강용이를 바라보았다. 강용이가 ‘나 잘했지?’라는 표정을 지으며 엄지를 들었다. 강우가 말없이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딩동.

    강우가 굳이 벨을 눌렀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준비할 시간을 줘야 하지 않겠는가. 역시 잠시 정적이 흘렀다. 보지 않아도 안쪽이 부산스러워짐이 느껴졌다. 이윽고 현관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나은이구나? 어서 와. 나는 강우 엄마야.”

    어머니의 모습이 드러났다. 수수하게 입은 어머니의 모습도 새삼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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