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9화 (119/402)
  • 내가 눈썰미가 좋거든.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러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빼고 재밌냐?-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전화를 걸어 온 사람은 이재원이었다.

    “재미있어 죽겠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청춘사업은 방해 안 한다더니.”

    -아. 그게 소식 전해주려고. 너 직함 나왔다.-

    “직함이요? 무슨 직함까지 줘요?”

    -당연히 줘야지. 그럼 설마 너를 그냥 평사원으로 스카우트했을까?-

    강우가 실소를 흘렸다.

    “그럼 어디 들어나 봐요. 직함이 뭔데요? 대리? 과장?”

    수화기 너머 이재원이 픽 웃었다.

    -과장은 무슨 전략본부 전략지원팀 팀장이다.-

    “네?? 그럼 전무급 인사 아니에요?”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팔자에도 없던 대기업 임원이라니 상상도 못 한 직책이었다.

    -그나마 네가 아직 학생이라서 아버지가 임시로 발령낸 거다. 나중에 졸업하고 나면 정식으로 본부장에 올릴 생각이시더라.-

    “그래요?”

    강우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이재원을 도울 생각이 컸으니 적당한 자리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이재원이 대진 그룹을 완벽히 장악하는 데 일조할 생각에 기쁘기도 했다.

    -그래, 조만간 그룹 본사로 한번 찾아와라. 전략지원팀 사람들이랑 안면은 터야지.-

    “네, 알겠어요. 아 참, 형은 어떻게 됐어요?”

    강우가 슬쩍 물었다. 내부적으로 후계자 자리를 계승하고 있을 테니 인사이동이 있었나 싶었다.

    -나? 나야 당분간 변한 거 없지. 그냥 똑같이 출근한다.-

    “그래요?”

    -아무래도 내부적으로 정리할 것도 많기도 하고 대진 미디어는 내가 꼭 실무를 봐야 하니까.-

    “그렇긴 하죠.”

    맞는 말이었다. 강우와 함께 추진 중인 미디어 사업 진출을 위해서는 강우와 이재원의 긴밀한 협조가 필요할 것이다. 다른 인물이 사장 자리에 온다면 절차가 복잡해질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도 첫째 형이랑 둘째 형한테 말할 시간은 드려야지.-

    “이미 내부적으로는 다 알려진 거 아니에요?”

    -그래도, 직접 듣는 거랑은 다르니까.-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철금 회장에게 이재원만 아들이 아니었다. 첫째와 둘째 아들도 아픈 손가락일 것이다. 이재원도 비슷한 생각인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하자. 재밌게 놀아라.-

    “네, 또 통화해요.”

    강우가 통화를 끝냈다. 김춘배와 연정호가 강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야? 재원이 형?”

    “어.”

    그때, 화장실을 갔던 여자들이 돌아왔다. 어딘지 모르게 산뜻해진 얼굴이었다. 다시 즐거운 시간이 시작됐다. 치킨은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어느새 노을이 지고 주변이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슬슬 가야겠네.”

    강우가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나은도 열심히 도왔다. 다른 친구들도 주변을 깨끗이 정리했다. 그렇게 주변 정리를 끝내고 강우가 말했다.

    “올라갈 때는 어떻게 가지?”

    여섯 명의 집은 모두 서울이었다. 그리고 강우의 차에 여섯 명은 탈 수 없었다. 그러자 연정호가 말했다.

    “나는 민정이랑 고속버스 타고 가기로 했다.”

    “그래? 그럼 춘배랑 혜지랑 타고 가면 되겠네.”

    그러자 김춘배도 씩 웃었다.

    “아니야. 우리도 고속버스 타고 갈 거야. 너는 나은이랑 둘이 올라가.”

    “아···. 그래?”

    강우가 내심 고마움을 느끼며 말했다. 연정호와 김춘배가 이해한다는 듯 씩 웃었다.

    “그럼 우리 간다! 오늘 재밌었어.”

    “안녕 강우야. 다음에 학교로 꼭 놀러 갈게.”

    연정호와 조민정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 김춘배와 김혜지도 손을 흔들고 뒤를 따랐다.

    “잘 가~ 다음에 또 볼링 치자.”

    “어, 잘 가.”

    모두가 떠나가고 강우와 이나은이 남았다. 강우가 이나은을 힐끗 바라보았다. 야외에서 한참 있었지만, 흐트러짐 없이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우리도 갈까?”

    “응.”

    이나은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 강우가 손을 척 내밀었다. 이나은이 살짝 수줍은 표정으로 강우의 손을 잡았다. 강우와 이나은이 주차장으로 걸었다. 어느새 어둑해진 캠퍼스를 가로등이 비추고 있었다.

    “캠퍼스 진짜 예쁘다.”

    “그래? 서울에서 멀기는 해도 캠퍼스는 좀 이뻐. 그런데 옛날에는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다고 하더라고.”

    “안성이면 그럴 만했겠지.”

    “그때는 선배들이 캠퍼스 처음 오고 막 울고 그랬대. 너무 황량해서.”

    “진짜?”

    이나은이 혀를 삐죽 내밀었다.

    “과장 조금 보태서.”

    “하하.”

    강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윽고 강우와 이나은이 주차장에 도착했다. 강우가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이나은이 입을 가리며 살짝 웃었다.

    “고마워.”

    이나은이 차에 타고 강우가 운전석에 탔다. 그리고 이나은의 안전띠를 매주었다. 이나은이 살짝 얼굴을 붉혔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출발할게.”

    “응.”

    강우의 승용차가 캠퍼스를 벗어났다. 그리고 곧장 서울로 향했다. 강우가 운전에 집중하자 이나은도 조용히 있었다. 강우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이나은의 시선을 느낀 강우가 운전석의 옆쪽을 뒤적거렸다.

    “노래 들을래?”

    “응? 그래.”

    강우가 손에 잡히는 테이프 중 하나를 카 오디오에 집어넣었다. 재생 버튼을 누르자 팝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얼마 전 보았던 타이타닉의 주제가였다. 이나은이 노래를 들으며 살짝 추억에 잠겼다.

    “노래 좋다. 영화도 진짜 좋았는데.”

    “맞아. 나도 이 근래에 본 영화 중에 제일 좋았어.”

    “영화 자주 봐?”

    이나은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경영학과의 강우와 연극영화과인 자신의 공통점이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이 좋았다. 강우가 씩 웃었다.

    “응, 어렸을 때부터 비디오로도 자주 봤어. 아버지가 홍콩 영화를 좋아하시거든. 그런데 크고 나서는 나도 엄청 좋아하게 됐지.”

    “그랬구나.”

    순간, 강우가 강용이를 떠올렸다.

    “그런데 요즘은 내 동생이 더 좋아해 영화.”

    “그래? 동생이 초등학생이라고 하지 않았어?”

    “맞아. 그런데 영화 엄청 좋아해. 홍콩 영화도 좋아하고 특히 공포 영화 엄청 좋아해.”

    “초등학생이?”

    이나은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스르륵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내 동생이 좀 특이한 면이 있거든. 취미도 좀 남다른 게 많고. 영화나 소설 쪽에 엄청 조예가 깊지.”

    “그래? 초등학생인데 대단하네.”

    이나은이 고개를 갸웃했다. 순간 강우가 아차 싶었다. 강용이 이야기에 신이 나서 자기도 모르게 미래의 기억까지 섞어 말해 버린 것이다.

    “그렇지? 내 동생 대단하지?”

    강우의 입꼬리가 주체할 수 없이 올랐다. 그 모습을 보던 이나은이 싱긋 웃었다.

    “강우, 너는 동생 참 좋아하는구나?”

    “그럼,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동생인데.”

    “나도 언제 한번 만나보고 싶다 강용이.”

    강우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강용이가 너 보고 싶다고 집에 꼭 오라고 했어.”

    “정말?”

    “응, 조만간 우리 집 한번 올래?”

    “좋아. 꼭 가보고 싶어.”

    이나은이 설레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한참을 달린 차가 이나은이 사는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강우가 능숙하게 이나은의 집 앞으로 차를 몰았다.

    “한번 왔는데 잘 기억하네?”

    “원래 길 잘 외우거든.”

    이나은이 배시시 웃었다. 강우도 헤벌쭉 웃었다. 참 별것이 다 좋은 신상 커플이었다. 그렇게 집 앞에 도착하자 이나은의 어머니가 나와 있었다. 아무래도 늦은 시간이다 보니 걱정이 됐나 보다.

    스르륵.

    차가 멈춰서자 이나은이 문을 열고 내렸다.

    “엄마!”

    “나은아.”

    나은 어머니가 이나은에게 다가왔다. 강우가 빠르게 차에서 내려 꾸벅 인사를 했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그래, 강우야, 중국 잘 갔다 왔어?”

    “네, 어머니.”

    나은 어머니가 강우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어느새 이나은을 내버려 두고 강우에게 다가왔다.

    “그래, 우리 강우 참 장한 일을 했어. 정말 대단해.”

    “감사합니다.”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온통 강우에게만 관심을 보이는 어머니의 모습에 이나은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엄마, 나 걱정돼서 나온 게 아니었어?”

    “너 걱정을 왜 하니. 이렇게 반듯한 강우가 옆에 있는데.”

    “와···. 엄마.”

    그때, 강우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어머니, 잠시만요.”

    강우가 차로 가서 트렁크를 열었다. 그리고 커다란 선물꾸러미를 꺼내 들었다. 강우가 나은 어머니에게 선물을 내밀었다.

    “어머니, 선물 사 왔습니다.”

    “어머~ 강우야, 뭐 이런 걸 다 사 왔어?”

    나은 어머니가 말과는 다르게 환히 웃었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에 이나은이 또 킥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중국에서 월병하고 전통차를 좀 사 왔습니다. 그리고 공항에서 어머니 쓰시라고 화장품도 조금 샀고요.”

    “학생이, 뭘 이렇게 많이 샀어.”

    “비싼 거 아닙니다. 그냥 생각이 나서 이것저것 샀습니다. 아 그리고 아버님 선물로 중국 전통주도 조금 사 왔습니다.”

    세심하고 꼼꼼한 강우의 선물에 나은 어머니가 감동한 듯했다.

    “고맙다 강우야.”

    나은 어머니가 강우의 팔을 쓰다듬어 주었다. 강우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강우가 다시 트렁크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작은 선물꾸러미를 꺼내 들었다.

    “저···. 이건···.”

    “강우야, 선물이 무거워서 먼저 올라가 볼게. 둘이 이야기하다 올라와.”

    “네, 어머니. 또 인사드리러 오겠습니다.”

    나은 어머니가 눈치 있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강우야, 고마워. 이렇게 우리 가족까지 다 챙겨주고.”

    “당연한 거지. 어떻게 네 선물만 사와.”

    “그래도···.”

    이나은의 얼굴에 감동이 빛이 떠올랐다. 강우가 작은 선물꾸러미를 쓱 내밀었다.

    “화장품이랑 핸드크림이랑 필요할 거 같은 거 좀 사봤어.”

    “정말? 고마워 강우야.”

    이나은이 환하게 웃었다. 선물꾸러미를 받으며 정말 아이처럼 좋아했다.

    “나 누구한테 이렇게 정성이 담긴 선물 받는 거 처음이야.”

    “정말? 설마···. 인기 많았을 거 같은데.”

    강우가 장난스럽게 묻자 이나은이 손을 마구 휘저었다.

    “아니야. 진짜 처음이야.”

    “그래, 알겠어. 장난이야.”

    이나은이 살짝 눈을 흘겼다. 강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 그리고 이것도.”

    강우가 주머니에 넣어놨던 작은 케이스를 꺼냈다. 이나은이 그 정체를 단번에 알아차리고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강우도 민망한 표정이 되었다.

    딸칵.

    케이스가 열리고 금과 옥으로 예쁘게 만들어진 반지가 나타났다. 이나은의 눈이 동그래지며 탄성을 뱉어냈다.

    “와~ 진짜 예쁘다.”

    “중국에서 유명한 장인한테 부탁해서 만든 거야. 옥이 건강을 지켜주고 하는 일을 잘되게 해준다고 하더라고. 평범한 금반지보다는 이게 더 특별할 거 같아서.”

    강우는 이 반지를 만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 이나은에게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선물은 대성공이었다. 이나은이 너무나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마워···.”

    이나은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 특별히 제작해 만든 커플 반지라니 강우의 정성에 감동했다. 강우가 이나은의 것인 반지를 꺼냈다. 이나은이 수줍게 손을 내밀었다.

    “흠흠···. 이거 처음이라 어색하네.”

    강우가 괜히 헛기침하며 이나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이나은의 손가락에도 딱 맞는 크기였다. 이나은이 또 감탄했다.

    “딱 맞아. 신기하다.”

    “내가 눈썰미가 좋거든.”

    강우가 반지 케이스에서 자신의 것을 꺼내 손가락에 끼웠다. 금과 옥으로 잘 세공된 반지는 특별하고 예뻤다. 두 사람이 손을 겹치듯 포갰다. 두 개의 반지가 서로의 존재를 뽐냈다.

    “고마워. 소중히 끼고 다닐게.”

    “응.”

    강우와 이나은이 얼굴을 붉혔다. 그때, 어디서인가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강우와 이나은이 휙 고개를 돌리자 아파트의 베란다에서 나은 어머니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엄마!”

    이나은이 터질 듯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나은 어머니가 화들짝 놀라며 안으로 몸을 숨겼다. 강우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나은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휴~ 우리 엄마 진짜 못 말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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