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5화 (115/402)
  • 정말 더 행복해질 거 같아요.

    호텔 방에 강우와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의 앞쪽 탁자에는 중국에서 찾아온 장부가 놓여있었다. 이 장부는 최준과 최경의 항일운동을 증명할 결정적인 증거였다.

    “최준 어르신과 돌아가신 최경 어르신의 서훈 신청 서류는 아빠가 준비할게.”

    “네, 그럼 저는 재원이 형한테 이야기해서 다른 분들 증언 부분을 받아 놓을게요.”

    강우가 장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 안에는 최준과 최경이 독립운동을 위해 사용한 자금의 내용이 상세히 적혀있었다. 그리고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자금 지원 내용도 적혀있었다. 그중에는 억울하게 서훈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이름도 있었다. 바로 지난 모임 때 만났던 서훈을 받지 못했던 분들의 증거가 모두 담겨있는 것이다.

    ‘독립운동을 위해 재산을 다 쏟아붓고 지금은 어렵게 살고들 계셨다.’

    그때, 아버지가 탁자 위의 또 다른 장부를 집었다.

    “할아버지의 훈격 재심사 신청도 하려고 하는데. 강우, 네 생각은 어때?”

    “당연히 해야죠. 할아버지가 인정 못 받은 부분이 많으니까요.”

    할아버지가 밀정으로 활동한 것은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밀정에 대한 정보를 아무렇게나 남겨놓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 이유로 할아버지의 항일운동은 징모처에서의 일만 인정되었었다. 할아버지는 서훈 당시 인정받지 못한 부분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하신 일이지 훈장을 받으려고 하신 일이 아니라고 하셨다지.’

    그나마 돌아가신 할머니가 후손들을 생각하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서훈 절차도 밟지 않을 생각이었다고 했었다. 하지만 강우의 생각은 달랐다.

    ‘자료가 없어서 증거가 없어서 인정받지 못한 항일투사분들이 많다. 할아버지의 재심사 신청은 그분들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는 신호탄이 되겠지.’

    강우가 눈을 빛냈다. 이제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시간이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인정받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독립투사로 인정받은 것 말이다. 강우가 밀정들의 명단과 활동내용이 담긴 장부를 내려다보았다. 그 안에는 그야말로 독립운동사에 지각변동을 가지고 올 만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조금씩 바로 잡아 나가겠어.’

    한 번에 모든 것을 터트릴 수는 없었다. 이미 기득권이 되어버린 자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강우는 조금씩 더 힘을 길러갈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더 유명해지고 더 높은 위치에 가야 할 것이었다.

    ‘일단은 서훈심사 절차부터 차근차근 밟아가자.’

    아버지가 상념에 빠진 강우를 향해 말했다.

    “아 그리고 광일이가 장부 내용을 집중조명하는 특별 기사를 쓰고 싶다고 하더라.”

    “김 기자님이요?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하지만 이 장부의 내용은 당분간 비밀로 하는 게 좋겠어요.”

    강우가 밀정들의 명단이 담긴 장부를 옆으로 쓱 밀었다. 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래, 이거는 그러는 게 좋겠네.”

    그 순간, 호텔 방문이 덜컥 열리고 할아버지와 최준이 들어섰다. 강우와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두 분을 반겼다. 최준이 강우와 아버지를 보더니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그리고는 말없이 침실로 들어갔다.

    탁.

    침실문이 닫히자 할아버지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향해 다급히 물었다.

    “아버지, 어떻게 됐습니까?”

    최준은 친척이라며 연락이 온 사람을 만나고 오는 길이었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었다.”

    강우와 아버지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스쳐 지나갔다. 최준이 점점 매스컴을 타자 여러 사람의 연락이 쏟아졌다. 최준과의 인연이 있다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하지만 그중에 최준의 혈연들은 없었다.

    “많이 힘드시겠어요. 동생분의 일도 있는데···.”

    강우가 말끝을 흐리며 한숨을 뱉어냈다. 친척들이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속내를 알 수는 없었다. 그중에는 정말 친척이라고 착각한 사람들도 있었고, 단순히 재산이 많은 것을 노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괜찮다고는 하시지만 속은 그렇지 않을 거야.”

    할아버지가 긴 숨을 뱉어냈다. 아버지도 안타까움에 한숨을 뱉어냈다. 잠시 상념에 빠져있던 강우가 입을 열었다.

    “우리 집 근처에 집을 얻어서 모시고 오는 게 어떨까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시선이 강우에게로 쏟아졌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호텔 생활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타지에 머무는 것 같은 느낌이고요. 이제 한국에 정착하실 테니까 우리 집 근처에 모시면서 신경을 더 써드리는 게 어떨까 해요.”

    “강우야, 진짜 잘 생각했다.”

    아버지가 좋은 생각이라며 화색이 되었다. 할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워했다. 강우의 시선이 닫힌 침실문으로 향했다. 그 너머로 진한 외로움의 기운이 느껴졌다.

    * * *

    그날 밤. 거실에 강우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가 둘러앉았다. 강용이는 잠이 쏟아진다며 방에 들어갔다. 할아버지는 역시나 최준과 함께 호텔에 남았다.

    사각. 사각.

    어머니는 후식으로 과일을 깎기 시작했다. TV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중국 충칭시는 옛 광복군 사령부터의 복구를 위해 아낌없는 지원을 하겠다는 뜻을···.-

    “우리 아들 장하다. 진짜 대단한 일을 했어.”

    뉴스를 보며 능숙하게 과일을 깎던 어머니가 흐뭇한 표정을 했다. 강우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엄마, 손 다쳐요. 조심해요.”

    “그래 알겠어.”

    이윽고 예쁘게 깎인 과일들이 접시 위에 놓였다. 강우와 아버지가 포크로 과일을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뉴스에서는 최준의 모습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연일 매스컴에 노출되고 있는 최준이었다.

    “여보, 어르신 표정이 너무 안 좋아 보여요. 어디 아프신 거 아니에요?”

    어머니가 화면 속 최준을 보며 걱정스러워했다. 그러자 아버지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최근 벌어지는 일들을 말해주었다. 어머니가 고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어쩜 사람들이 그래요. 자기들은 혹시나 하는 행동이지만, 당사자인 어르신이 얼마나 상처받으시겠어요.”

    “내 말이. 그래서 말인데 강우가 어르신을 우리 집 근처로 모시고 오자고 하더라고.”

    아버지의 말에 어머니가 강우를 보며 싱긋 웃었다. 의젓하고 생각이 깊은 아들의 모습에 그저 행복할 뿐이었다.

    “진짜요? 우리 아들 기특하네. 잘 생각했어.”

    “엄마가 주변 부동산에 이야기를 좀 해주실래요?”

    강우의 말이 끝나자 어머니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강우와 아버지가 어머니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이윽고 어머니의 입이 열렸다.

    “그러지 말고 우리 집으로 모시는 건 어때요?”

    어머니의 말에 아버지가 깜짝 놀라며 포크를 떨어트렸다.

    “여···. 여보? 그게 무슨 말이야?”

    “최준 어르신을 우리 집에서 함께 모시자는 말이에요.”

    강우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어머니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머니가 말을 이어갔다.

    “생각해봐요. 최준 어르신이 어디 남이에요? 우리 강우를 위해 모든 걸 내어 주신 분이잖아요. 그리고 우리 아버님과는 형제 같은 분이고요. 아무리 좋은 집을 얻어 드린다 한들 외로움마저 지워드릴 수는 없잖아요.”

    “하지만 여보···.”

    아버지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와는 다른 경우였다. 냉정하게 말해서 최준은 어머니에게 남이나 다름없지 않던가.

    “집이 이렇게 크고 넓은데 무슨 문제가 있어요? 방이라면 강용이 보고 강우 방에서 같이 있으라고 하면 돼요. 강용이는 오히려 더 좋아할걸요?”

    강우가 강용이의 방을 슬쩍 바라보았다. 틈만 나면 강우와 잔다며 찾아오는 강용이기는 했다. 어머니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가 이렇게 행복하게 지내는 것도 다 아버님 덕분이에요. 그리고 우리나라가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아버님과 최준 어르신 같은 분들의 희생 덕분이고요.”

    “여보···.”

    아버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모실 수 있어요. 아니 모시고 싶어요. 그러면 강우와 강용이에도 좋은 교육이 될 거고요. 저도 정말 더 행복해질 거 같아요.”

    어머니의 말이 끝나자 아버지가 감탄성을 터트렸다.

    “여보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그리고 고마워.”

    “고맙긴요. 다 내가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집 알아볼 거 없이 빨리 모시고 와요.”

    강우가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감탄했다. 역시 어머니도 범상치 않은 심성의 소유자였다. 그때였다. 강용이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침구를 가지고 강우의 방으로 향했다.

    “난 찬성.”

    덜컥.

    강우 방문이 열리고 강용이의 모습이 사라졌다. 강우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가 큰 웃음을 터트렸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최준을 모시고 올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잠시 흐뭇하게 바라보던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자러 가볼게요.”

    “그래, 가서 동생이랑 자.”

    어머니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눈빛으로 ‘잘됐지?’라고 물었다. 강우도 말없이 씩 웃어주었다.

    덜컥.

    강우가 방으로 향했다. 널찍한 침대 위에 강용이가 뒹굴뒹굴하고 있었다.

    “으아~ 좋다!”

    “이 녀석!”

    강우가 씩 웃으며 침대로 몸을 던졌다. 그 반동으로 강용이가 붕 뜨고 말았다.

    “아이코!”

    강용이가 철퍼덕 떨어지더니 엄살을 부렸다. 강우가 강용이를 꼭 앉았다. 강용이가 답답하다며 발버둥 쳤다.

    “자식! 착한 내 동생.”

    “형아, 숨 막혀.”

    강용이가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강우의 힘을 당해낼 리 없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장난을 치고 강우가 강용이를 풀어주었다.

    “형이랑 같이 자서 좋아?”

    “어, 이제 엄마 눈치 안 보고 매일 같이 자니까 좋아.”

    “하하.”

    강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동안 혼자 자느라 쓸쓸했나 보다. 강우가 강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훌쩍 커버렸지만, 여전히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생이었다.

    “방 넓으니까 책상 두 개도 들어올 거고. 짐은 내일 형아가 옮겨줄게.”

    “응.”

    강용이가 활짝 웃었다. 그 순간, 강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강우야, 나야 나은이.-

    강우의 얼굴이 활짝 폈다. 집에 돌아와 이나은에게 호출을 남겨놓았었다.

    “어디야? 집이야?”

    -응, 조금 전에 들어와서 씻고 전화 한 거야.-

    “그랬구나. 나도 집이야.”

    -중국 잘 다녀왔지? 뉴스에서 봤어. 정말 대단해 강우야.-

    “아···. 다행히 일이 잘 풀렸어.”

    강우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슬쩍 옆을 보자 강용이가 씩 웃고 있었다. 강우가 강용이를 향해 귀를 막으라는 시늉을 했다. 강용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강우가 픽 웃고는 다시 통화에 집중했다.

    -우리 이번 주말에 보는 거지?-

    “당연하지. 내가 선물도 사 왔어.”

    -진짜? 기대된다.-

    강우와 이나은은 한참이나 통화를 했다. 잠시 떨어져 있는 연인은 할 이야기가 너무나 많았다. 그렇게 밤이 깊어갔다. 강우의 통화를 지켜보던 강용이는 지쳐 잠이 들었다.

    “그럼 내일 또 전화할게.”

    -응. 잘자.-

    “너도 잘자.”

    풋풋한 작별 인사가 끝나고 통화가 끝났다. 강우가 잠든 강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자리에 누웠다.

    뚜르르. 뚜르르.

    강우의 전화기가 다시 울렸다. 강용이가 몸을 뒤척였다. 강우가 재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은이야?”

    -자다 말고 애인부터 찾아? 이거 완전 사랑의 노예가 되셨군.-

    강우가 피식 웃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재원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한밤중에.”

    -아니 누가 한참을 통화 중이라서 말이지.-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이나은과 통화를 하는 내내 전화를 했었나 보다.

    “오랜만에 통화하는 거라 좀 길어졌어요.”

    -그래, 그럴만하지. 다른 게 아니라 너 내일 시간 좀 돼?-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일이요? 학교에서 보면 되잖아요.”

    -아니 학교 끝나고.-

    “끝나고요?”

    이재원이 잠시 숨을 고르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 내일 저녁에 나랑 같이 회장님 좀 만나자.-

    이재원의 말에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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