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4화 (114/402)
  • 강우야, 고맙다.

    강우와 아버지가 탄 승용차가 강남의 호텔에 들어섰다. 호텔의 입구에 멈춰선 승용차에서 강우와 아버지가 내렸다. 아버지의 품에는 천에 쌓인 나무상자가 들려있었다.

    “왔다!”

    장사진을 치고 있던 취재진이 강우와 아버지를 발견했다.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들고, 플래시 세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미 입국 당시부터 언론의 집중 관심을 받은 강우였다. 익숙한 듯 기자들의 질문에 조금씩 답하며 호텔의 입구에 도착했다.

    “후···.”

    호텔직원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엘리베이터에 탄 강우가 긴 숨을 뱉어냈다. 아버지도 나무상자를 지키느라 진땀을 뺐는지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있었다.

    띵.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강우와 아버지가 내렸다. 그리고 최준이 머무는 방으로 걸었다. 강우와 아버지는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옅은 긴장감과 설렘이었다.

    똑똑.

    아버지가 문을 노크했다. 긴장한 아버지는 벨을 누르는 것도 까먹었나 보다. 하지만 안쪽에서는 곧장 반응을 보였다.

    “정식이니?”

    할아버지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목을 한번 가다듬더니 답했다.

    “네, 아버지.”

    덜컥.

    문이 열리고 할아버지의 얼굴이 나타났다. 밤새 잠을 못 잤는지 피곤해 보였다. 그도 그럴만했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강우의 연락을 받았으니 말이다.

    “어서 들어오거라. 형님이 종일 기다리고 계셔.”

    할아버지의 말에 강우와 아버지가 안으로 들어섰다. 최준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뒷모습이 왜인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강우가 최준에게 다가갔다.

    “다녀왔습니다.”

    강우의 그 한마디에 최준의 어깨가 작게 떨렸다. 강우는 그 모습을 보며 잠시 묵묵히 기다렸다. 이윽고 감정을 정리한 최준이 몸을 돌렸다.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아버지가 강우에게 다가와 나무상자를 건네주었다.

    “최경 어르신이 끝까지 지킨 장부에요. 직접 확인하시라고 열어보지도 않았어요.”

    강우가 내민 나무상자를 바라보는 최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떨리는 손으로 나무상자를 받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최경 어르신의 유해도 찾았어요. 절차가 끝나는 대로 한국으로 모셔올게요.”

    “강우야, 고맙다.”

    최준이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오랜 세월 생사도 모르던 동생이었다. 강우 덕분에 유해라도 찾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최준이 나무상자를 한쪽에 있는 탁자에 내려놓았다. 방 안으로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긴 숨을 뱉어낸 최준이 나무상자를 감싼 천을 풀기 시작했다.

    “하아···.”

    천이 모두 풀리고 나무상자를 확인한 최준이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나무상자를 열었다. 그 안쪽으로 몇 권의 장부가 나타났다. 최준이 나무상자에서 장부를 꺼냈다.

    사라락. 사라락.

    최준의 손이 느리게 장부를 넘겼다. 그리고는 강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게 맞아. 장하구나! 우리 강우.”

    최준이 강우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강우를 향해 눈빛에는 무한한 고마움과 신뢰가 담겨있었다. 평생을 노력해도 찾지 못했던 장부와 동생이었다.

    “옛 광복군 사령부에 지하로 향하는 비밀 입구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말에 할아버지가 탄식을 뱉어냈다.

    “허···. 그랬구나. 그래서 형님이 알지 못했던 게야.”

    강우와 아버지의 시선이 할아버지에게 쏟아졌다. 사실 강우도 그게 궁금했다. 최준은 임시정부의 주요 인물이었다. 어째서 광복군 사령부를 찾아보지 않았을까 싶었다. 할아버지가 그 해답을 알려주었다.

    “그 지하 통로는 광복군 내에서도 극히 아는 자가 드물다. 임시정부의 주요 인물들도 모르는 곳이지.”

    “할아버지는 알고 계셨나요?”

    강우의 질문에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 역시 밀정으로 활동을 했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그곳은 밀정으로 활약한 동지들의 비밀 회합 장소였다. 당연히 형님이 모르실 수밖에 없지.”

    강우와 아버지가 탄성을 뱉어냈다. 최준과 할아버지의 연락이 끊기며 알아낼 방법이 없었겠구나 싶었다. 정말이지 기구한 운명이었다.

    “그랬군. 그랬어.”

    최준도 안타까움에 탄식했다. 하지만 원망의 빛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이제라도 할아버지를 만나고 그 후손들이 자신의 염원을 풀어주고 있는 것에 감사했다.

    “그럼 이제 이 자료를 바탕으로 어르신의 서훈을 진행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증거가 없어 서훈을 받지 못했던 분들의 서훈도 같이 진행하겠습니다.”

    아버지의 말에 할아버지와 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강우가 품에서 몇 권의 책을 꺼냈다. 그리고 할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할아버지, 혹시 이게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강우가 내민 책자에 할아버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리고는 책자를 받아 조심히 열었다. 안쪽에는 알아볼 수 없는 암호가 잔뜩 적혀있었다.

    “허···. 이럴 수가···.”

    할아버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강우를 보며 탄성을 뱉어내며 말했다.

    “강우야, 이건 광복군 소속의 밀정 명단과 임무 내용이 담긴 책자구나···.”

    강우와 아버지가 화들짝 놀랐다. 최준도 벌떡 일어났다. 강우가 할아버지를 보며 눈을 빛냈다.

    “안쪽에 적힌 내용이 암호인 거 같더라고요. 도통 알아볼 수가 없었어요.”

    “당연하지. 밀정의 활동이라지만 기록은 남겨야 했고, 그걸 암호로 남기는 건 당연한 거였어. 하지만 문제없다. 이 암호라면 아직도 그 해독법이 내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있으니까.”

    할아버지의 말에 방 안으로 정적이 흘렀다. 강우가 찾아온 것들은 그야말로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지각변동을 가지고 올 물건이었다.

    “아들, 아무래도 우리가 엄청난 일을 해낸 거 같다.”

    아버지가 강우를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강우가 할아버지를 보며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의 이름과 활동내용도 이곳에 있나요?”

    “그래.”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책자의 한 곳을 가리켰다. 강우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증거가 없어서 징모처에서 활동한 공로만 인정받으신 게 우리 할아버지다.’

    강우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도 취재진이 잔뜩 몰려있었다.

    ‘이제는 우리 할아버지도 제대로 된 공로를 인정받아야 해.’

    강우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도 같은 생각인지 강우를 보며 눈을 빛냈다.

    * * *

    엄청난 화제를 몰고 온 강우 투어에서 돌아온 강우와 이재원이 다시 만났다. 강우의 집 근처로 이재원이 찾아왔다. 이재원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활기가 넘쳤다. 강우를 도와 해낸 일에 뿌듯함이 말도 못 한 것이다.

    “최준 어르신은?”

    이재원의 첫 질문도 최준에 관한 것이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잘 전해 드렸어요. 정말 기뻐하시더라고요.”

    “아···. 내가 있었어야 했는데.”

    이재원이 진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이철금 회장을 만나러 간 이재원이었다. 중국 상해에서 논의된 투자 때문이었다.

    “회장님 반응은요?”

    “난리 났지. 입이 귀에 걸쳤어.”

    이재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중국 투자라는 것은 돈만 있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야말로 꽌시에 의해 움직이는 나라였다. 강력한 인맥과 배경이 없다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또 대기업의 입장에서는 놓칠 수 없는 시장이었다.

    ‘인구수가 어마어마하니 기회의 땅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기회도 있었지만, 온갖 위험도 존재하는 곳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재원은 강우의 도움을 받았다. 위진오라는 꽌시를 소개받았다. 위진오는 강우를 적극적으로 돕는 이재원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준비 잘해서 들어가 봐요. 의부님이 전폭적으로 지원해 준다고 했으니까요.”

    “하···. 진짜 믿기지가 않네. 사실 우리 회장님도 중국 한번 나가보려고 그렇게 노력했다는데 말이야. 강우 네 말 한마디에 일사천리로 일이 풀리다니.”

    이재원이 강우를 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강우도 마주 웃어주었다.

    “내가 중국에 계획하고 있는 투자처랑 사업이 있으니까요. 나중에 우리 중국법인이랑 같이 합작해서 투자도 하죠.”

    “진짜지?”

    강우가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재원이 눈을 빛냈다. 강우의 말이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는 것을 한두 번 겪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요. 중국도 중국이지만, 한국 쪽에 형이 좀 신경을 썼으면 하는 사업 분야가 있어요.”

    “뭔데?”

    이재원이 눈을 빛내며 몸을 끌어당겼다. 강우의 입에서 또 어떤 황금알이 튀어나올까 싶었다. 강우가 씩 웃었다.

    “일단 오렌지 주스 좀.”

    “아···.”

    이재원이 픽 웃더니 오렌지 주스를 시켰다. 자신의 몫으로도 오렌지 주스를 시켰다. 강우와 하도 붙어 다니다 보니 오렌지 주스의 매력에 빠졌단다. 이윽고 주스가 나오고 강우가 크게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작년에 세일제당에서 미디어 사업에 진출한 거 알고 있어요?”

    “알고 있어. 뮤직네트워크를 인수했다고 하더라.”

    강우가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형,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앞으로 미디어의 힘이 점점 강해질 거예요.”

    “그래, 알아. 그래서 네 말대로 네트워크 사업도 준비하고 있어.”

    이재원이 강우가 알려준 온라인 강의에 대해 언급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미래 산업인 미디어 산업의 노른자는 아직도 널리고 널렸다.

    “그거 가지고는 부족하죠. 케이블TV 쪽에도 진출하고요. 그리고 형, 혹시 이번에 나온 스페이스 크레프트라는 게임 알아요?”

    “게임? 내가 그쪽에는 관심이 없어서.”

    이재원이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생각해보면 이재원은 게임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다.

    “지금 배틀넷이라는 온라인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어요. 조만간 사람들이 서로 게임을 하고 경쟁하는 걸 방송으로 보는 시대가 올 거예요. 마치 스포츠처럼.”

    “그래?”

    이재원이 살짝은 의아한 듯 반응했다. 그럴 만도 했다. 이 시대의 인식이라는 게 게임을 방송으로 본다? 고개를 저을 것이다. 지금까지 전혀 없었던 일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강우는 미래의 기억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내 말 믿어요. 앞으로 게임 방송을 기반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E-SPORTS라는 분야가 탄생할 거니까요. 그걸 대진 미디어에서 선점하고 주도하는 거예요. 그뿐이 아니라 영화 산업에도 투자하고요.”

    “하···. 너 벌써 머릿속에 구체적으로 사업 방향이 다 들어있구나? 이 괴물···.”

    이재원이 놀랍다는 듯 질린 표정을 지었다. 강우는 항상 이랬다. 간혹 말해주는 사업 방향은 세밀하고 방향성이 명확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보면 말 그대로 이루어졌다. 천재적이라고도 생각했고, 가끔은 미래를 보는 건가도 싶었다. 만약 이재원이 정말 강우가 미래를 본다는 것을 안다면 그 표정이 참 볼만할 것이다.

    “네, 일단 게임 산업 쪽 영화 산업 그리고 기획사도 차려서 가수들도 키우고요. 말 그대로 미디어, 문화 쪽에 전방향적으로 투자를 하는 거죠. 공격적으로.”

    이재원의 얼굴이 상기되기 시작했다. 강우가 충칭에서 들었던 백범 선생의 말을 그대로 읊어주었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바로 백범 선생님의 말씀이에요. 그리고 이건 가까운 시일 내에 현실이 될 거예요. 미래가치 산업 중 으뜸은 바로 문화산업이에요. 분명 국경도 없고 총성 없는 전쟁터가 될 거예요.”

    “으음···.”

    이재원이 탄성을 뱉어냈다. 강우의 말이 맞았다. 지금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게임기부터 만화 그리고 패션까지 모두 일본 문화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일본 문화를 합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을 때는 문화 잠식까지 걱정하지 않았던가.

    “지금이 바로 선점할 때에요. 개척자가 돼서 깃발을 꽂아 놓으면 후발 주자들은 손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겠죠. 상해에서 말했죠? 평범한 사업가들과는 다르게 생각해야 해요.”

    이재원이 잠시 미래의 그림을 그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강우를 바라보며 상기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강우의 도움이라면 무조건 현실로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게 있었다.

    “그럼 동양 무역은?”

    “우린 분야가 다르잖아요. 우린 해외무역 쪽으로 힘을 쏟을 거예요. 문화산업은 형이 맡아요.”

    “그래, 대신 나도 동양 무역의 일은 무조건 도울게.”

    “새삼스럽게 그런 말을 해요? 당연한 거 아니에요? 우리 가족인데.”

    강우와 이재원이 서로를 보며 씩 웃었다. 강우가 이재원은 한참이나 미디어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강우의 방대하고 꼼꼼한 사업 설명에 이재원은 계속해서 혀를 내둘렀다. 급기야 다음에 회의를 한번 하기로 했다.

    “잘 부탁한다. 내 동생.”

    “저도요.”

    강우가 백범 선생을 떠올렸다.

    ‘가장 원하셨던 문화를 가장 올바른 방식으로 꽃피워 보겠습니다.’

    어쩐지 기억 속 백범 선생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나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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