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한다. 우리 아들.
강우와 SLAM의 동아리원이 먼저 도착한 곳은 상해였다. 상해의 시내에 있는 호텔에 미니버스가 들어섰다. 총 세 대의 미니버스였다.
치이익.
맨 선두의 미니버스가 호텔의 입구에 섰다. 뒷문이 열리고 강우와 아버지 그리고 이재원이 내렸다. 그러자 호텔의 입구에서 일단의 무리가 다가왔다. 선두에는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잘 지냈어?”
“어? 위 형님.”
강우에게 씩 웃으며 반가움을 표하는 남성은 위혁오였다. 위진오는 이번 동아리 엠티에 엄청난 신경을 써주었다. 그리고 위혁오까지 보내 강우 일행을 도우라 한 것이다.
“당숙께서 못 와본다고 매우 미안해하셨다.”
“아니에요. 대부님 요새 바쁘시다고 들었어요.”
“정신없으시지.”
위진오는 베이징의 중앙당으로 간 이후 본격적인 행보를 펼치고 있었다. 본인의 위치를 확고히 하며 여러 사람과 인맥을 쌓고 있었다. 강우의 조언을 믿어 현 주석의 라인에 일찌감치 선을 대고 적극적으로 지지한 결과였다. 위진오는 현 주석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그럼 이번에는 못 뵙겠네요.”
강우가 아쉬워하자 위혁오가 말없이 웃었다. 위진오의 일정이 어찌 될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위혁오가 이번에는 아버지를 보며 꾸벅 인사를 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그래, 자네도 잘 지냈지?”
이제는 제법 유창한 중국어를 구사하는 아버지였다. 중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강우와 아버지의 모습에 이재원이 혀를 내둘렀다. 강우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여기는 대진 미디어의 이재원 사장님입니다.”
강우가 영어로 이재원을 소개했다. 위혁오가 멋들어진 미소를 지으며 역시 영어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위혁오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대진 그룹의 이재원입니다.”
두 사람이 악수하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영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위혁오는 이재원에게 큰 관심을 드러냈다. 한국의 재벌 2세라 하니 궁금하기도 한 것이다.
“오면서 봤는데 상해가 많이 개발 되어 있더군요.”
“맞습니다. 중앙당에서 상해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위혁오의 말처럼 상해는 중국의 경제개발 특구로 지정돼 개발의 열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이재원의 영어 실력과 경제에 대한 지식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위혁오 역시 중국의 명문대학을 나온 인재였다. 위진오를 최측근에서 수행하는 비서라 할 만했다.
“강우야.”
그때, 미니버스에서 신원주와 채보라가 다가왔다. 강우가 두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미니버스에서는 아무도 내리고 있지 않았다.
“다들 왜 안 내려요?”
“지금 내리라고 할까?”
채보라의 질문에 강우가 픽 웃었다. 중국은 아직 공산국가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동아리원들은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나 보다.
“네, 지금 다 내리라고 해줘요.”
“응, 알겠어.”
신원주와 채보라가 미니버스로 돌아갔다. 힐끗 그 뒤의 마지막 미니버스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대진 미디어의 직원들이 촬영 장비를 내리고 있었다.
“준비를 많이 해오셨습니다.”
위혁오가 장비들을 보며 살짝 감탄했다. 강우와 이재원은 이번 여정을 모두 기록으로 남길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기록은 다큐멘터리 제작에 사용될 예정이었다. 강우는 이번 촬영을 위해 특별히 중국 정부의 허가도 맡았다.
“저분들이 당에서 나오신 분들이죠”
“네, 맞습니다.”
강우가 위혁오와 같이 있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분명 촬영을 감독하기 위해 당에서 관리들이 파견될 거라고 이야기했었다. 중국은 아직 이런 부분에서는 민감한 국가였으니까 말이다.
‘애초에 허가가 나온 것도 대단한 거야.’
모두 위진오가 힘을 써준 덕분이었다. 그리고 중국 정부는 중국에 남아있는 항일운동의 유적지나 기록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편이었다.
“자자! 다들 모여요!”
신원주와 채보라가 동아리원들을 통솔했다. 연정호도 옆에서 두 사람을 돕고 있었다.
“강우야, 아빠는 호텔에 들어가서 체크인하고 있을게.”
“네.”
아버지가 위혁오와 함께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이번 여행을 참 만족스러워했다. 그리고 동아리 엠티의 보호자 역할도 했다. 아버지의 존재 덕분에 동아리원들의 부모님들도 모두 이번 여행을 흔쾌히 허락한 것이다.
“다들 불편한 점은 없죠?”
강우가 동아리원들을 향해 다가가 물었다.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동아리원들이 불편한 점이 없다며 크게 대답했다. 이재원이 씩 웃었다.
“이야~ 우리 동아리원분들 긴장 많이 했나 봐?”
이재원의 말에 동아리원들이 피식 웃었다. 이재원이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다들 조심해야 해. 혼자 다니거나 그러면 공안이 와서 잡아간다더라. 쥐도 새도 모르게···.”
이재원이 잔뜩 겁을 주자 동아리원들이 얼굴이 창백해졌다. 강우가 이재원의 등을 펑 하고 쳤다.
“무슨 소리예요?”
그리고는 동아리원들을 보며 아니라고 안심시켰다. 동아리원들이 다시 안도했다.
“일정 중에 자유 여행도 있으니까요. 다들 안심하고 다니세요. 대신에 혼자서 다니는 건 그래도 자제해주세요.”
강우의 말에 또 우렁찬 대답이 들려왔다. 강우의 말이 끝나자 채보라가 나섰다.
“우리 호텔 앞에서 단체 사진 찍어야 한대.”
대진 미디어에서 온 촬영팀의 일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이미 검사를 나온 관리들에게 장비의 검사를 모두 끝냈나 보다. 강우와 동아리원들이 호텔 앞에 모였다. 연정호가 한국에서 준비해온 커다란 현수막을 꺼냈다.
“이것 좀 들어주세요.”
대열의 양 끝에 있는 동아리원들이 현수막을 잡았다. 상해의 바람이 불어와 현수막이 펄럭 펼쳐졌다. 촬영을 준비하던 대진 미디어의 직원들이 짧게 감탄을 터트렸다. 임시정부에서 사용하던 태극기가 그려진 현수막이었다.
-1998년 제1기 SLAM 동아리 엠티. 민족의 뿌리를 찾아서.-
그리고 그 밑에는 강우가 지난번 떠올렸던 문구도 적혀있었다. 태극기가 펼쳐지자 동아리원들의 분위기가 진지해졌다. 강우 역시 무언가 묘한 느낌을 받았다. 강우가 이재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재원도 강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뜨겁게 맞닿았다.
“자! 찍습니다!”
찰칵. 찰칵.
제일 먼저 단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곧장 카메라를 이용한 촬영에 돌입했다. 점검을 받기 전에 카메라 사용을 못 한 터라 다시 미니버스에 탔다가 내리는 소동도 있었다.
“중국에 도착한 소감이 어떻습니까?”
이번에는 개개인의 인터뷰를 담기 시작했다. 여러 대의 카메라가 동아리원들을 차례대로 붙잡았다. 그렇게 호텔 앞이 북적거리는 동안 호텔에 체크인이 끝났다.
“다들 체크인하고 잠시 쉬었다가 모일 겁니다.”
동아리원들이 질서정연하게 호텔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배정받은 방으로 흩어졌다. 호텔 방은 2인 1실로 주어졌다. 강우는 아버지와 함께 방을 쓰기로 했다.
덜컥.
문을 열고 들어간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뜻밖의 인물들이 강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
“오빠!”
강우를 향해 반갑게 인사하는 인물은 쌍둥이 남매인 위이강과 위단향이었다.
“어? 너희 둘이 여기는 웬일이야?”
두 사람이 씩 웃었다. 그리고 위이강이 말했다.
“나랑 누나랑 형 보러 왔어요.”
“어? 너희 둘이?”
강우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러자 두 사람의 입에서 차례대로 한국어가 흘러나왔다.
“우리 그동안 한국어 공부 열심히 했어요.”
“어때요? 이 정도면 한국인 같아요?”
두 사람의 조금 어설픈 한국어에 강우가 피식 웃어버렸다.
“고맙다. 상해까지 와주고.”
* * *
호텔에 체크인이 끝난 지 한 시간이 지났다. 강우는 곧바로 외출준비를 하고 로비로 나왔다. 로비에는 동아리원들이 모여있었다.
“강우 나왔다!”
강우를 발견한 동아리원들의 얼굴에 안도감이 떠올랐다. 마치 흩어지면 큰일이 나는 것처럼 모여있는 동아리원들이었다. 강우가 픽하고 웃으며 동아리원들에게 다가갔다.
“다들 외출준비 끝났습니까?”
동아리원들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강우가 뒤쪽에 있는 위이강과 위단향을 소개했다.
“여기는 제 중국 동생들이에요. 이름은 위이강 그리고 위단향.”
위이강과 위단향이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위이강입니다.”
“안녕하세요. 위단향이에요.”
두 중국인이 뱉어내는 한국어에 동아리원들이 ‘오오~’하는 소리를 냈다. 외국에서 만나는 외국인의 한국어는 참 반가운 것이었다.
“두 사람은 중국에 있는 제 동생들이에요. 이번 여행에 같이하고 싶다고 왔어요.”
강우의 말에 동아리원들이 환영한다며 손뼉을 쳤다. 위이강과 위단향이 살짝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오늘은 일정대로 상해 임시정부터를 방문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모여서 단체 회식도 할 예정입니다.”
동아리원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이번 동아리 엠티의 목적은 노는 것도 있지만 민족의 뿌리를 찾아 임시정부 터를 방문하는 것이었다.
“강우야, 준비됐으니까 출발하자.”
이재원의 말에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앞장서서 로비를 벗어났다. 강우와 동아리원들이 호텔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준비된 미니버스에 올라탔다.
부우웅.
미니버스는 상해 임시정부 청사가 있는 로만구에 도착했다. 미니버스에서 동아리원들과 촬영팀이 모두 내렸다.
“와···. 여기는 완전 옛날 모습이 남아있네.”
임시정부가 있던 로만구 일대는 개발이 되지 않아 옛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었다.
‘말이 좋아 옛 모습이지 많이 낙후된 곳이야.’
강우와 동아리원들이 상해임시정부로 쓰였던 건물의 앞에 모였다.
“아······. 여기가···.”
동아리원들이 탄식을 뱉어냈다. 낡고 허름한 3층짜리 건물 하나가 바로 옛 상해 임시정부 청사였다. 강우가 건물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제 곧 이곳은 존폐의 기로를 맞이하게 된다.’
중국은 상해 엑스포와 베이징 올림픽을 유치하게 된다. 중국 전역은 재정비에 들어가게 되고 상해임시정부가 있는 로만구 일대도 대대적인 재개발에 돌입한다.
‘다행히 미래의 정부가 이곳을 지키는 데 성공하지.’
나중에 밝혀진 그때의 일화는 마친 특수 작전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강우가 눈을 빛내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결심을 내렸다.
‘나중에 이곳을 지키는 일이 수월할 수 있게 미리 손을 써놔야겠어.’
아쉽게도 중국은 땅을 내어주지는 않는다. 공산당이라는 정체성 때문이었다. 동양 무역의 때처럼 땅을 임대받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말은 반대로 상해 시장이랑 당 서기만 설득하면 얼마든지 이곳을 지킬 수도 있다는 거지.’
가능한 일이었다. 강우에게는 위진오라는 강력한 꽌시가 있었다. 위진오를 통해 이 주변 일대의 토지 이용권을 얻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돈이라면 중국 법인에 충분히 있으니까.’
생각을 마친 강우가 슬쩍 옆을 보니 함께 온 아버지도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강우야, 이건 생각보다 너무 초라한데?”
어느새 다가온 이재원도 씁쓸한 표정이었다. 유적지를 둘러보는 동아리원들도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이게 현실이죠.”
“음···.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지금 하는 거예요.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의 관심이 높아지면 그때는 정부도 가만히 있지 않겠죠.”
강우의 말에 이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됐다. 대진 미디어의 촬영팀은 임시정부터의 모습을 하나하나 자세히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동아리원들이 유적지를 둘러보는 모습도 담았다.
“임시정부의 건물을 방문한 소감이 어떻습니까?”
“생각보다 초라해서 슬펐어요. 그리고 내가 참 무관심했었다는 것도 깨달았어요.”
동아리원들의 개별 인터뷰와 단체 인터뷰도 진행되었다. 그렇게 소란스러운 가운데 강우가 청사 건물 안으로 홀로 들어섰다. 1층에는 임시정부의 구성원들이 썼던 회의실이 있었다.
‘음···.’
강우가 곳곳을 둘러보았지만,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강우가 2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임시정부의 주요 인사의 집무실이 있었다. 강우가 그중 한곳에 들어갔다. 작고 아담한 방에는 두 개의 책상과 하나의 침대가 놓여있었다.
‘여기가 백범 선생님의 집무실인가?’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강우가 밖으로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강우의 머리가 지끈 아파져 왔다. 강우가 화들짝 놀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더는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강우의 미간이 좁혀졌다. 분명 지금의 현상은 강우의 능력이 발동될 때의 느낌이었다. 강우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보았다. 머리가 살짝 지끈거려왔지만, 더 이상의 변화는 없었다.
“강우야, 여기 있었어? 너 인터뷰해야 해.”
그때, 강우를 찾던 연정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지끈거리던 두통이 말끔히 사라졌다.
“어, 알았다.”
강우가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촬영팀이 강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마지막 순서가 강우의 차례였나 보다. 강우의 인터뷰가 시작됐다. 카메라 여러 대의 시선이 강우를 향해 쏟아졌다.
“먼저 박강우 학생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니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오늘 이곳에 온 소감을 말씀해 주시죠.”
아버지가 강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 가득 대견함과 뿌듯함이 떠올라있었다. 강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상해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의 바탕을 이루는 중요한 유적지입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그동안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건 살아계신 제 할아버지 박재봉 독립 투사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내딛는 이 발걸음이 국민의 커다란 관심으로 돌아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인터뷰를 진행하던 사람이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가 강우를 바라보며 뿌듯하게 웃었다.
“잘한다. 우리 아들.”
강우가 씩 웃었다. 그렇게 임시정부터의 방문을 끝낸 강우와 동아리원들은 마지막으로는 건물 앞에서 현수막을 펼친 채 사진을 찍었다.
“자 찍습니다!”
찰칵. 찰칵.
마치 먼 과거에 독립투사들이 모여 찍었던 사진과 같은 구도였다. 강우가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뒤를 돌아보았다. 동아리원들은 각각의 다짐을 담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 이렇게 한 명씩 시작하는 거야. 그렇게 심어진 젊은 씨앗들이 이 사회에 거대한 나비효과를 일으키겠지.’
강우도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런 강우의 어깨를 이재원이 두드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