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8화 (108/402)

책임을 져야지.

다음 날인 토요일 저녁. 강우와 이재원이 호텔의 정문 쪽에 있었다. 잘 차려입은 강우와 이재원은 정말 멋졌다. 주변을 지나가는 행인들의 시선이 집중될 정도였다.

“어제 데이트는 잘했냐?”

이재원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강우가 슬쩍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부렸다. 그러자 이재원이 더 집요하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허~ 형님이 물으시는데.”

“후···.”

강우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이재원뿐이 아니었다. 오늘 오전 내내 학교에서도 수없이 들었던 말이었다.

“아니 도대체 누가 정보를 흘린 거예요?”

“일단 나는 결백하다.”

강우가 실소를 흘렸다.

“이 내 인생에 사생활이란 없는 건가···.”

강우의 독백에 이재원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속으로 그나마 SNS가 발달하지 않은 시대인 걸 감사히 여기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너희 이제 사귀는 거야?”

“음···. 글쎄요. 사귀자고는 아직 말은 하지는 않았는데···.”

“아니 영화 보고 손까지 잡았는데 아직도 고백을 안 했어?”

이재원이 이런 나쁜 놈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무슨 소리냐는 듯 미간을 좁혔다.

“아니 영화 보고 손잡았다고 사귀는 건가요?”

“그래야지. 책임을 져야지.”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분명 자신을 놀리려고 일부러 저러는게 분명했다.

“알겠어요. 날 잡아서 연락할게요.”

“오오! 단숨에 결혼까지?”

강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조만간 집에 오기로 했다며?”

“그것도 알아요?”

이재원이 씩 웃었다.

“당연하지. 너희 집에 내가 심어놓은 첩자가 있거든.”

“아···.”

누군지 말을 안 해도 알 것 같았다.

“그나저나 둘이 학교가 멀어서 자주 못 보겠네.”

강우의 캠퍼스는 서울에 이나은의 캠퍼스는 안성에 있었다. 먼 거리였지만, 그나마 이나은이 통학을 하는 게 다행이었다.

“꼭 자주 봐야 좋은 건 아니니까요. 나는 나대로 바쁘고 나은이도 연기공부에 충실하고 좋죠.”

“그렇긴 하지.”

이재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그래도, 연락도 자주 하고 만날 수 있으면 자주 만나.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법이니까.”

“네, 알겠어요.”

강우가 슬쩍 웃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문득 어젯밤 통화내용이 떠올랐다. 이나은의 어머니는 강우가 하려는 일을 정말 대단하다고 칭찬해 주었다. 그리고 꼭 한 번 집에 놀러 오라고 했다.

‘이거 진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닌가?’

강우가 쓸데없는 상상을 하며 실실 웃었다. 그 모습을 보던 이재원이 강우의 등을 펑펑 두들겼다.

“좋을 때다. 좋을 때야.”

등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에 강우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누가 보면 주변에 여자 하나도 없는 줄 알겠어요. 형 좋다고 줄 서 있는 서울대생들이 캠퍼스를 한 바퀴 두르고도 남을걸요?”

“사랑에 빠지더니 과장이 심해졌군.”

이재원의 말에 강우가 실소를 흘렸다. 그리고는 손목에 차인 시계를 힐끗 바라보았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약속 시각이 되어가고 있었다.

“형, 준비해요. 이제 시간 다 돼가네요.”

“벌써?”

이재원의 얼굴에 작은 긴장감이 떠올랐다. 오늘은 최준을 보러 독립투사들이 모이는 날이었다. 모두 최준 또는 할아버지와 인연이 있는 분들이었다. 최준의 이야기가 뉴스에 나가고 나서 전국 곳곳에서 연락이 닿았다. 얼마 전 최준에게 강우가 자리를 만들겠다고 했고, 그 사실을 안 이재원이 전폭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사장님.”

호텔의 안쪽에서 잘 차려입은 남성이 나왔다. 강우도 안면이 있는 사람으로 대진 그룹 비서실의 정지환 비서였다.

“아, 정 비서. 안쪽은 준비 끝났습니까?”

이재원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조금 전까지 강우를 놀리던 장난스러운 얼굴은 없었다.

“네, 최준 어르신과 박재봉 어르신도 모두 내려와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은 정말 중요한 날이니까 다들 신경 많이 써주세요.”

“네, 사장님.”

정지환 비서가 강우를 보더니 표정이 밝아졌다. 그리고는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뵙는군요.”

“아···. 정 비서님, 잘 지내셨어요?”

정지환 비서는 할아버지와 강용이가 병원에 입원할 당시 만났던 바로 그 비서였다. 그 당시 강우 가족을 위해 여러 부분을 신경 써 주기도 했었다. 그리고 오늘 있을 모임을 위해서도 노력을 많이 해주었다.

“안쪽에 연회장은 잘 준비됐습니다. 음식도 준비가 다 됐습니다.”

“안쪽에 취재진에게 다시 한번 언질 주세요. 절대 어르신들에게 불편을 끼쳐서는 안 됩니다.”

“네, 사장님.”

정지환 비서가 다시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럼 저는 들어가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정지환 비서가 다시 호텔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오늘 모임은 최준이 머무는 호텔에서 있었다. 호텔 측에서 먼저 강우에게 이곳에서 모임을 할 것을 제안했고, 강우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호텔은 오늘의 모임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벌써 호텔의 안쪽에는 취재진이 모여있었다.

“아직인가?”

이재원이 초조한 듯 양손을 비볐다. 강우가 힐끗 이재원을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긴장했어요?”

“이상하게 떨리네. 넌 안 그래? 어떻게 보면 오늘부터가 시작일 수도 있잖아.”

“떨리기보다는 조금 설레기는 하네요.”

강우가 호텔의 입구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대진 미디어에서 나온 촬영팀이 장비를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재원은 오늘의 만남도 영상으로 남겨야 한다고 했다. 앞으로 강우가 할 일들에 좋은 홍보가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강우도 그 생각에는 동의했다.

“형 덕분에 준비 잘됐으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요.”

“그래야지.”

이재원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호텔의 안쪽 로비에는 역시 살짝 긴장한 듯한 대진 미디어의 홍보팀 직원들이 있었다.

부우웅.

잠시 후, 커다란 미니버스가 호텔로 들어섰다. 호텔의 정문에 멈춰선 미니버스의 후문이 열리고 지긋이 나이가 든 사람들이 하나둘씩 내리기 시작했다.

“어르신들 안녕하십니까? 박강우입니다.”

강우가 미니버스로 다가가 꾸벅 인사를 했다. 버스에서 내린 노년의 남성들이 강우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오? 자네가 바로 박강우 군인가? 만나서 반갑네.”

“뉴스에서 본 거보다 실물이 훨씬 훤칠하구먼.”

강우에 대한 칭찬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그 모습을 이재원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강우가 받는 칭찬이 자신이 받는 칭찬과 같은 느낌이었다.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미니버스에서 내린 인원은 열 명 남짓이었다. 더 많은 사람에게 연락이 왔지만, 오늘 참석이 가능한 사람은 이게 전부였다. 개인적인 사정이나 본인이 참석을 원치 않은 사람도 있었다.

펑. 퍼퍼펑.

호텔의 로비로 들어가자 취재진이 몰려있었다. 열 명의 독립투사들이 잠시 당황하는 듯했다. 광복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났고, 이런 관심을 받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예정대로 인터뷰는 연회가 끝난 후에 진행하겠습니다.”

정지환 비서가 취재진을 향해 말했다. 이미 사전에 합의된 사안이라 취재진도 별말을 하지 않았다. 호텔의 VIP 연회장이 오늘의 모임 장소였다. 정지환 비서가 어르신들을 향해 깍듯이 인사했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오늘 모임 장소로 안내하겠습니다.”

열 명의 독립투사들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저 최준을 만나러 오는 식사 약속 정도로 생각을 했던 탓이다. 하지만 강우와 이재원은 오늘의 만남을 성대하게 준비했다.

“다들 왔는가?”

열 명의 독립투사들이 연회장으로 들어서자 최준의 격양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암 선생입니까?”

“이보게 최준!”

최준을 확인하자 격정적인 반응들이 터져 나왔다. 서로에게 빠르게 가까워진 최준과 열 명의 독립투사들이 얼싸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는데 이런 날이 왔습니다.”

“잘 지냈나? 다들 예전 모습 그대로군? 이대로 만주벌판에서 항일운동을 해도 되겠어?”

최준의 농담에 눈물짓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할아버지도 반가운 해후의 장에 합류했다.

“오? 재봉, 잘 지냈는가?”

“광복절 행사 이후 오랜만일세.”

다만 이미 광복절 행사로 종종 만나던 서로였기에 가벼운 인사만 했다.

“정비서, 이제 시작해도 될 거 같네.”

“네, 사장님.”

정지환 비서가 주변의 직원들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연회장으로 준비된 음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최준이 자리를 권했다.

“자자 다들 앉지.”

최준과 할아버지가 자리에 앉았다. 나머지 독립투사들이 둥그렇게 둘러앉았다. 오늘 준비된 음식은 나이가 많은 참석자들을 배려해 건강식 위주였다. 식사가 시작되고 이야기꽃이 피었다.

“이제 정말 한국에 정착하시는 겁니까?”

최준이 부드럽게 웃었다.

“이미 국적회복 신청도 해놓았지.”

“잘하셨습니다. 정말 잘하셨습니다.”

모두가 최준의 결정에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식사가 이어지는 장면은 모두 대진 미디어에서 준비한 카메라에 담겼다. 이 모든 과정은 카메라에 담겨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제작될 것이다. 이재원의 제안을 받은 강우가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보기 좋다. 그치?”

그 모습을 보던 이재원이 흐뭇하게 웃었다. 옆에 앉아있던 강우도 흐뭇한 표정이었다.

“그러게요. 진짜 이런 장면을 보는 날이 오네요.”

“앞으로 점점 더 크고 규모 있게 키워 보자고.”

“그래야죠.”

이재원이 강우를 향해 주먹을 쓱 내밀었다. 강우가 픽 웃으며 주먹을 마주 툭 하고 가져다 댔다. 그렇게 한참을 오랜 세월이 지나 만난 최준과 독립투사들은 때로는 울고 또 웃었다. 이윽고 식사가 끝났다. 그릇들이 치워지고 간단한 다과가 준비됐다.

“으음···.”

최준의 표정은 착잡했다. 조금 전 식사를 하며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연을 모두 들었다. 오늘 모인 열 명의 독립투사들은 분명 서로를 알고 있는 동지였다. 하지만 현재 그 상황이 사뭇 달랐다.

“서훈을 받지 못하고 어렵게 지냈다니.”

오늘 모인 독립투사 중 유공자로 서훈을 받은 사람은 총 여섯 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네 명은 자료가 소실돼 증언만으로는 서훈을 받을 수 없다는 답변만이 돌아왔다고 했다.

“내 자식들이 몇 번이고 서훈신청을 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이제, 걱정하지 말게. 내가 도와주겠네.”

최준이 서훈받지 못한 독립투사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리고는 강우를 보며 눈을 빛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강우의 든든한 답변에 최준의 얼굴이 밝아졌다.

“형님, 정말 든든한 후계자를 두셨습니다.”

열 명의 독립투사들이 강우를 칭찬했다. 이미 뉴스를 통해 강우가 하려는 일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도울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돕겠네. 언제든지 말만 하게.”

“네, 어르신들.”

독립투사들의 말에 강우가 의욕을 불태우며 답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재원이 입을 열었다.

“어르신들 그럼 지금부터 어르신들의 항일투쟁기를 기록으로 남겨 놓으려고 합니다. 한 분씩 저쪽에 마련된 인터뷰 석으로 가주시면 됩니다.”

연회장의 한쪽에 준비된 곳에는 여러 대의 카메라가 있었다. 최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먼저 하겠네.”

그렇게 차례대로 열두 명의 독립투사들이 옛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각자의 치열했던 항일운동의 기억이었다. 강우와 이재원은 정신없이 그 이야기에 몰입했다. 각각의 사연이 평범한 것이 없었다. 목숨을 걸고 가진 것을 모두 내어놓고 싸운 독립투사들의 인생사는 영화 그 자체였다. 하지만 한 분 한 분이 자신의 이야기를 부끄러워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한 일이지. 이렇게 누군가에게 알리려고 했던 일은 아닌데 말이지.”

“아닙니다. 이런 기록은 남겨 주변에 널리 알려야 합니다. 그게 독립운동가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첫걸음이 될 겁니다. 그리고 꼭 이 기록을 후대에 전해주어야 합니다.”

이재원이 진지한 표정을 답했다. 문득 강우가 미래에 화제가 되었던 유명 독립투사의 말을 떠올렸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

강우의 말이 연회장 안을 강하게 울리며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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