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화 (106/402)
  • 우리 오늘 뭐 할까?

    동아리방이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동아리원들은 여권을 만들어야 한다며 야단법석이었다. 믿기지 않는 일에 모두가 잔뜩 흥분해 있었다.

    “사진부터 찍으러 가야겠네.”

    “난 여권 있지.”

    이재원이 흥분한 동아리원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비자 발급해야 하니까. 여권이 있는 사람들은 미리 총무한테 제출하고 없는 사람들은 가능하면 빨리 만들어 줘. 중국 비자 받는데 시간이 제법 걸리니까.”

    이재원의 말에 동아리원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잔뜩 상기된 표정이 마치 소풍 전날의 아이들 같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강우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대학생이 되면 다 큰 어른 같지만, 아직 20대 초반에 불과한 나이였다.

    ‘들뜰 만도 하지. 해외여행이라니까.’

    강우가 이재원을 슬쩍 바라보았다. 이재원 역시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후···. 진짜 대단한 사람이에요. 형은.”

    “내가 말했지. 너 가는 길에는 나도 간다고. 아버지한테서 이야기 듣고서 곰곰이 생각해 봤다. 장부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우리가 하려는 일을 세상에 알리는 일도 중요하잖아. 마침 나한테는 미디어 회사가 있고.”

    강우가 씩 웃었다. 이재원이 강우의 팔을 툭 하고 치며 말했다.

    “일단 오늘은 동아리원들 다 모인 첫날이니까. 즐겁게 즐기자고.”

    “네, 좋죠.”

    강우가 신원주와 채보라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역시 아직 멍한 표정이었다.

    “선배, 깜빡 잊고 있었는데 진짜 대단한 사람이었네요?”

    “내 말이.”

    두 커플의 말에 이재원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알았으면 앞으로 잘 받들어 모시거라~”

    “잘 나가다가 또 그런다.”

    강우가 이재원을 향해 핀잔을 날렸다. 이재원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이 끝나자 강우가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은 첫 만남이니까 동아리 회식을 할 예정입니다. 혹시 시간 안 되시는 분?”

    강우의 말에 동아리원들이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선약이 있었어도 취소할 기세였다.

    “고기 먹으러 가는 겁니까?!”

    동아리원들이 배를 움켜쥐며 소리쳤다. 강우가 씩 웃으며 말했다.

    “네, 오늘은 제가 사겠습니다.”

    동아리 방으로 엄청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채보라가 강우를 보며 슬쩍 물었다.

    “강우야, 사람이 몇 명인데? 엄청나게 먹어댈걸?”

    “괜찮아요. 회장인데 오늘 같은 날 한턱 내야죠.”

    채보라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신원주가 씩 웃었다.

    “보라야, 걱정하지 마. 강우 돈 많아.”

    “그래? 그래도···.”

    강우가 피식 웃으며 신원주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말까지 놓은 두 사람이었다. 이재원도 살짝 미간을 좁혔다. 오직 연정호가 신원주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우리 원주. 남자네.”

    신원주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채보라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 평소 당찬 모습과는 다른 여성스러운 모습이었다.

    “아···. 그런데 인원이 너무 많아서 한 번에 들어갈 만한 고깃집이 있을까?”

    이재원의 말에 채보라가 빠르게 답했다.

    “그건 내가 알아볼게요. 일단 조금만 기다려봐요. 가자 원주야.”

    “응.”

    신원주와 채보라가 선발대로 떠났다. 강우와 남은 동아리원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연락을 기다렸다.

    뚜르르. 뚜르르.

    이윽고 강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채보라와 신원주가 모든 인원이 들어갈 만한 고깃집을 찾았다. 강우가 통화를 끝내고 동아리원들을 향해 말했다.

    “자리 찾았대요. 출발하죠.”

    우렁찬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동아리 방을 벗어난 강우와 일행은 학교에서 제법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딸랑.

    가게 문이 열리고 SLAM의 동아리원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고깃집 사장의 입이 귓가에 걸렸다. 젊은 대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왔으니 그럴 만했다. 강우와 동아리원들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장님, 오늘 여기 달라는 대로 다 주세요.”

    강우가 골든벨을 울렸다. 동아리원들이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지글. 지글.

    고깃집 안이 금세 연기로 가득 찼다. 곳곳에서 구워지는 삼겹살 냄새가 정말이지 끝내줬다. 강우와 이재원 등 SLAM의 임원들은 다 따로 떨어져 앉았다. 새로 들어온 신입 동아리원들과 친해질 필요가 있었다. 여자 대부분이 강우와 이재원의 테이블로 모였다.

    “강우야, 여자친구 있어?”

    여자 동기의 돌직구 질문에 강우가 멈칫했다. 그러자 같은 테이블에 앉은 남자가 말했다.

    “없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 강우가 뭐 하나 빠지는 게 있나?”

    강우가 말없이 웃었다. 그리고는 고기를 집어 주변의 동아리원들에게 놓아주었다. 그 자상한 모습에 여자 동기들이 또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다 익었다. 빨리 먹자.”

    고기가 익고 술잔이 가득 찼다. 이재원이 벌떡 일어나 건배를 제안했다.

    “다들 즐겁게 지내보자! SLAM을 위하여!”

    “위하여!!”

    고깃집 안이 순식간에 왁자지껄해졌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테이블의 사람들이 마구 바뀌었다. 첫 만남인 오늘 서로 통성명을 하고 친분을 쌓아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조금 남아있던 어색함마저 사라졌다.

    “SLAM! SLAM!”

    동아리원들이 동아리 이름을 연신 외치며 파도타기를 했다. 그때, 누군가가 강우의 이름을 연호했다.

    “박강우! 박강우!”

    그 목소리를 시작으로 동아리원들이 강우를 연호했다. 이미 새터에서 보여준 강우의 장기자랑 무대는 전설로 남아있었다. 강우가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이름을 처음으로 외친 범인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이미 분위기에 묻혀 알 수가 없었다.

    “아···. 이것 참···.”

    주변의 강력한 요청에 강우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가게의 중앙에 섰다.

    “강우야, 여기.”

    연정호가 소주병에 숟가락을 꽂아 가져다주었다. 강우가 픽하고 웃으며 소주병을 받았다. 강우의 입에서 한창 유행 중인 록 발라드가 뿜어져 나왔다.

    “울지마~”

    강우의 노래가 이어지자 왁자지껄한 가게 안이 고요해졌다. 남자들은 놀라움에 눈을 동그랗게 떴고, 여자들은 흠뻑 빠져 들은 표정이었다. 강우의 노래가 계속 흐르는 가게 안이 어느덧 작은 콘서트장같이 변해버렸다.

    “와아아! 대박! 소문이 사실이었어!”

    강우의 노래가 끝나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가게주인이 강우에게 슬쩍 다가오더니 팬과 종이를 내밀었다.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왜 주시는 거죠?”

    “연예인 지망생 아닙니까? 나중에 유명해질 거 같은데 사인이나 미리 받아 놓으려고 그럽니다.”

    가게주인의 말에 사방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가게주인이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또 다른 인물의 이름이 연호 됐다.

    “이재원! 이재원!”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이재원이 씩 웃었다. 그리고는 단숨에 무대의 중앙으로 나왔다. 강우에게서 소주병을 받아든 이재원이 준비 자세를 잡았다. 신원주와 연정호가 슬쩍 귀를 막았다. 이윽고 이재원의 입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어?”

    동아리원들의 얼굴에 의아함이 서렸다. 강우와는 다른 노래 실력에 서로를 바라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재원은 위풍당당 노래를 불렀다.

    “와~ 잘했다.”

    동아리원들이 이재원을 향해 박수를 보냈다. 이재원이 다음 차례로 채보라를 지목했다. 채보라가 싱긋 웃더니 신원주를 잡아끌었다.

    “우우! 커플 지옥!”

    커플의 듀엣 송 시도에 사방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채보라가 짐짓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동아리원들의 고개가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대 안의~”

    채보라와 신원주가 듀엣곡을 부르자 가게 안의 분위기가 훈훈해졌다. 마지막으로 연정호의 차례였다.

    “패기 있게. 한 곡 하겠습니다.”

    시작부터 범상치 않은 등장에 주변의 시선이 집중됐다. 연정호가 커다란 성량으로 팝송을 뿜어냈다. 임원진의 노래자랑이 모두 끝났다. 그렇게 고깃집에서의 첫 회식이 성황리에 끝났다.

    * * *

    시간이 흘러 금요일이 되었다. 강의를 일찍 끝낸 강우는 곧장 캠퍼스를 벗어났다. 그리고 곧장 중앙대가 있는 흑석동으로 향했다.

    부우웅.

    버스가 흑석동의 대로변에 멈춰섰다. 뒷문이 열리고 강우가 내렸다. 평소보다 신경 써서 입은 강우의 모습에 주변의 시선이 살짝 쏟아졌다. 청남방에 청바지를 입은 강우는 참 멋졌다. 강우가 길을 건너 중앙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살랑이는 봄바람에 강우의 마음이 조금씩 들뜨기 시작했다.

    -혜성 꽃집-

    중앙대로 향하는 길에 꽃집이 있었다. 봄바람에 실려 오는 꽃향기에 강우가 끌리듯 가게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꽃 좀 사려고 하는데요.”

    강우가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보통의 남자가 그렇듯 꽃을 사는 일은 항상 어색했다. 꽃집 주인은 젊은 여성이었다.

    “꽃이요? 여자친구 주려나 봐요?”

    대학교 근처의 꽃집이라 그런지 대번에 목적을 알아맞혔다.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네, 이쁜 거로 한 다발 만들어 주세요.”

    “음···. 어디 보자. 여자친구분 줄 거면 역시 장미가 최고일 거예요.”

    이윽고 가게주인이 장미꽃 한 다발을 만들어 주었다. 하얀색 안개꽃이 붉은 장미 여러 송이를 한껏 돋보이게 해주었다. 강우가 계산하고는 다시 중앙대 앞으로 향했다. 강우를 알아본 일부 사람들의 힐끗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제는 익숙하다 이거지.’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이미 중앙대로 오는 대중교통 안에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탓이다. 이윽고 강우가 중앙대의 캠퍼스에 도착했다.

    ‘어디 보자···.’

    강우가 주변의 학생들에게 물어물어 한참을 걸었다. 강우가 이나은이 찾아오라고 한 건물의 한쪽에 앉았다. 원래대로라면 중앙대 연극영화과는 안성에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흑석동 캠퍼스에 1학년생들이 단체로 볼일이 있다고 했다.

    “강우야!”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손에 들린 꽃을 뒤로 숨겼다. 건물의 입구에서 이나은이 나오고 있었다. 봄을 맞이해 가벼운 원피스 차림인 이나은의 모습에 강우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어···. 안녕?”

    “많이 기다렸어? 찾아오는데 안 힘들었어?”

    이나은이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물었다. 강우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안 힘들었어. 그리고 나도 방금 왔고.”

    “그랬구나. 다음부터는 중간 지점에서 만나자.”

    말을 마친 이나은이 살짝 얼굴을 붉혔다. 다음이라는 말이 이리 쉽게 나올지 몰랐나 보다. 강우가 슬쩍 꽃을 앞으로 내밀려던 순간이었다.

    “야! 박강우!”

    김춘배의 우렁찬 고함이 들려왔다. 강우가 움찔하며 손을 다시 뒤로 했다. 건물의 입구에서 김춘배를 비롯한 일단의 무리가 쏟아져 나왔다. 그중에는 지난 미팅에 나왔던 여학생들도 모두 있었다.

    “어, 춘배야.”

    김춘배가 강우에게 다가오더니 어깨동무를 했다. 그리고는 모여든 학생들을 향해 자랑스럽게 말했다.

    “여기가 내 친구 박강우.”

    학생들의 눈이 빛을 냈다.

    “우와~ 춘배한테 말은 많이 들었는데, 진짜였어?”

    “안녕? 우리는 춘배 과 동기들이야.”

    강우가 멋쩍게 웃으며 손을 들어 인사했다. 김춘배가 힐끗 강우의 손에 들린 꽃을 발견했다. 그리고는 씩 웃으며 동기들을 향해 다가갔다.

    “자자! 우리는 그만 가자. 남의 청춘사업에 방해하지 말고.”

    김춘배의 말에 강우와 이나은이 얼굴을 붉혔다. 김춘배가 동기들을 끌 듯이 데리고 사라졌다. 그렇게 한바탕 소동이 지나가고 정적이 찾아왔다.

    “이거···. 좋아할지 모르겠네.”

    강우가 뒤쪽으로 숨겼던 꽃을 슬쩍 내밀었다. 이나은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꽃을 받은 이나은이 얼굴로 가져가 꽃향기를 맡았다.

    “와···.”

    그 모습에 강우가 탄성을 뱉어냈다. 누가 꽃이고 누가 사람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이나은은 예뻤다.

    “우리 오늘 뭐 할까?”

    이나은이 강우를 향해 싱긋 웃었다. 강우가 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영화 보러 가자. 타이타닉.”

    강우의 손에는 미리 끊어놓은 극장 입장권 두 장이 들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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