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화 (104/402)
  • 해방된 조국에서 곧 만나세.

    강우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리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직 흐릿한 시야 사이로 오래된 양식의 건물의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형님, 지금 장제스가 충칭을 떴다고 합니다.”

    익숙한 목소리에 강우가 화들짝 놀랐다. 바로 젊은 날 할아버지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강우의 정면으로 낯이 익은 얼굴이 있었다. 바로 젊은 날의 최준이었다.

    ‘맙소사···.’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최준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우, 자네라도 빨리 조국으로 돌아가게.”

    “형님은 안 가십니까?”

    할아버지가 애타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최준이 긴 숨을 뱉어냈다.

    “나는 아직 이곳에 남아 처리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아.”

    “형님···.”

    할아버지가 탄식을 뱉어냈다. 하지만 최준의 상황은 어쩔 수가 없었다. 혈혈단신 홀몸인 할아버지와는 달리 최준은 이곳에 너무 많은 것이 있었다.

    “내 가족도 재산도 모두 이곳에 있네. 지금 갑작스럽게 떠날 수가 없어. 그리고···.”

    최준이 말끝을 흐렸다. 아직 중국에 남아있는 수많은 항일운동가도 있었다. 그 사람들을 모두 조국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것이 최준의 사명이기도 했다.

    “내가 지금 떠나면 다른 동지들은 어쩌란 말인가? 그들은 조국으로 돌아갈 여력이 없어.”

    “그럼 저라도 남겠습니다.”

    할아버지가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최준이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그렇게 나온다면 내 자네를 다시는 안 볼걸세.”

    “형님!”

    할아버지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최준이 이번에는 할아버지를 달랬다.

    “이보게 장제스가 비록 수세에 몰렸다고는 하지만 쉽게 무너질 인물이 아니야. 잠시 쥐 죽은 듯 있으면 반드시 이곳을 탈환하러 오겠지. 그리고 마오쩌둥도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는 않겠지.”

    최준의 말대로였다. 비록 충칭 임시정부가 장제스의 도움을 크게 입었다고는 하지만, 공산당에게 딱히 밉보인 것도 없었다. 어찌 됐든, 같은 항일운동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할아버지가 불안한 것은 최준과 할아버지의 노선이 공산당과는 현저히 달랐다는 것이다.

    “위험합니다. 마오쩌둥의 성격을 모르십니까? 분명 이곳의 동지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겁니다.”

    “나를 믿고 빨리 먼저 떠나게. 돌아가서 이곳에 있는 동지들을 조국에 보낼 방도를 찾아야지.”

    최준의 말에 할아버지가 말문이 막혔다. 더는 최준을 설득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형님, 그러면 제가 연락을 할 때까지 몸을 챙기셔야 합니다.”

    “그래, 아우 해방된 조국에서 곧 만나세.”

    그 말을 끝으로 할아버지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강우의 머리가 더욱 지끈거리며 눈앞의 장면이 뿌옇게 변했다.

    ‘음···.’

    그때, 최준이 자신의 방에 한쪽에 있는 목함에 다가갔다.

    딸칵.

    나무상자가 열리자 그 안에는 여러 권의 서책이 들어있었다. 강우가 멀어지는 장면을 부여잡으며 글씨를 확인하려 노력했다. 그리고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 이거다!’

    강우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최준의 방문이 열리고 또 한 명의 남성이 나타났다.

    “형님.”

    “그래 경아.”

    최준과 형제처럼 닮은 인물이었다. 최준이 경이라 부른 인물에게 목함을 건넸다.

    “이 안에 든 것이 얼마나 중한 것인지 알고 있겠지?”

    “네, 준이 형님.”

    최준이 눈을 빛냈다.

    “나는 너무 알려져서 그것을 지키기에 부적합하다. 그러니 네가 그걸 가지고 적당한 곳에 숨어있거라. 내 이곳이 안정되고 나면 너를 찾아갈 것이야.”

    “네, 형님.”

    최준이 경이라 불린 사내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꼭 살아남거라.”

    그 말을 끝으로 경이라 불린 남성이 사라졌다. 그리고 강우의 시야가 경이라 불린 인물을 따르기 시작했다. 목함을 품에 안은 경이라는 인물은 충칭에 있는 비밀 거처로 숨어들었다. 강우가 그 건물을 눈에 찍어내듯 담았다.

    그 순간, 기억이 먼지처럼 흩어졌다.

    ‘아아···.’

    강우가 탄식을 뱉어냈다. 분명 눈앞의 인물이 가지고 사라진 것이 최준이 말한 바로 그 장부일 것이다.

    “강우야.”

    그때, 강우를 부르는 이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끈거리던 두통이 사라지고 강우의 정신이 돌아왔다. 눈앞으로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방 안의 인물들이 보였다.

    “강우야, 왜 그래? 어디 아파?”

    이재원이 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강우를 살폈다.

    뚝. 뚝.

    강우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떨어져 내려 발밑을 적셨다. 강우가 손을 들어 얼굴을 스윽 훔쳐냈다. 소매가 다 젖어버릴 만큼의 땀이 닦아졌다.

    “후······.”

    강우가 긴 숨을 뱉어냈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방 안이 조금 덥네요.”

    괜찮다는 강우의 말에 방안의 인물들이 안도하는 표정이 되었다. 강우가 호텔 방 안의 화장실로 향했다.

    쏴아아.

    강우가 찬물을 틀어 몇 번이고 세수했다.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보니 창백해진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강우가 조금 전의 일을 떠올렸다.

    ‘분명 최준 할아버지의 입을 통해서 들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관련된 일이었고.’

    할아버지와 최준이 함께하는 순간까지는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기억 속에서 할아버지가 자리를 떠난 이후였다.

    ‘엄청난 고통이 따르기는 했지만, 분명 기억이 조금 더 유지됐었어.’

    그리고 그 기억은 할아버지가 알 수 없는 기억이었다.

    ‘분명 내 가족들의 일이거나 미래의 내가 경험이나 기억하는 것들이 떠오르는 것이 내 능력이었어.’

    강우가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능력이···. 발전한 것일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똑똑.

    그때, 화장실의 아버지가 노크했다.

    “강우야, 괜찮아?”

    “네, 더워서 세수 좀 했어요.”

    강우가 옆쪽에 걸려있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냈다. 세수를 하고 나자 창백했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와 있었다. 문을 열고 화장실을 나가자 인터뷰는 다 끝난 상태였다.

    “그럼 오늘 저녁은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김광일 기자가 잔뜩 상기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최준의 곁에 딱 달라붙어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닐세. 이렇게 좋은 경험을 시켜주었는데 오늘 저녁은 우리가 사겠네.”

    “어르신···.”

    김광일 기자의 말을 할아버지가 잘랐다.

    “그냥 따라오게.”

    “네, 어르신.”

    김광일 기자가 깍듯이 답했다. 할아버지가 흐뭇하게 웃더니 강우를 보았다.

    “우리 강우가, 최근에 너무 무리했구나. 오늘은 고기로 몸보신을 좀 해줘야겠어.”

    “아버지, 근처에 잘하는 고깃집 있지 않습니까. 거기로 가시죠.”

    아버지의 말에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강우와 일행은 호텔을 벗어났다.

    * * *

    지글. 지글.

    불판 위로 고기들이 익어가고 있었다. 이재원이 열심히 고기를 굽고 있었다. 이재원의 옆에는 강우가 앉아있었다. 여전히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 앞으로는 할아버지와 최준 그리고 아버지와 김광일 기자가 있었다.

    “오늘 인터뷰는 개인적으로 제 인생 최고의 인터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광일 기자가 최준을 보며 말했다. 최준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그런가요?”

    “네, 정말 대단했습니다.”

    김광일 기자가 최준을 향해 술병을 공손히 들었다. 최준이 부드럽게 웃으며 술을 받았다.

    “어르신도 한잔 올리겠습니다.”

    “고맙네.”

    김광일 기자가 할아버지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아버지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재원의 잔에 술을 따르며 감탄을 뱉어냈다.

    “대진 그룹의 떠오르는 신성인 이재원 사장님이 정식 형님의 가족과 인연이 닿아있을 줄 정말 몰랐습니다.”

    “그런가요?”

    이재원이 고기를 뒤집으며 웃었다. 김광일 기자가 무언가 궁금한 듯 입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이재원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재원의 아픔을 건드리기 싫은 것이다.

    “사실 저랑 강우가 먼저 알게 됐습니다. 제가 한창 힘들 때 많이 도움이 된 동생이죠.”

    이재원이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김광일 기자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다들 궁금해 할 이야기군요. 하지만 개인적인 궁금증을 해소하는 데 만족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기자님.”

    이재원이 김광일 기자의 성품에 살짝 감탄했다. 그리고는 강우를 만난 것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하···. 이건 뭐 완전히 영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김광일 기자가 크게 감탄을 했다. 강우와 이재원의 이야기를 처음 듣는 최준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보게 재봉. 이거 우리 이야기 같지 않은가?”

    “형님, 듣고 보니 이야기가 그렇게 됩니까?”

    그 시대의 최준과 할아버지, 현시대의 이재원과 강우. 시대는 달라졌지만 묘하게 닮은 이야기 같았다.

    “그래, 다르지만 또 똑같은 상황이 아니겠는가? 재원아.”

    “네, 어르신.”

    이재원이 깍듯이 답했다. 그러자 최준이 부드럽게 웃었다.

    “두 사람의 인연이 보통이 아닌 듯하구나. 앞으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둘은 꼭 함께 고난을 헤쳐나가야 한다. 알겠지?”

    “네, 어르신.”

    이재원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준의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 너도 이렇게 훌륭한 형을 두었으니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형을 잘 따라야 한다. 알겠지?”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강우가 화들짝 놀라며 답했다.

    “네? 네, 할아버지.”

    평소와는 다른 강우의 표정과 행동에 최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때마침 이재원이 다 구워진 고기를 최준과 할아버지의 접시에 놓아주었다.

    “고맙구나.”

    할아버지와 최준이 커다란 쌈을 싸더니 입을 크게 벌려 넣었다. 아버지가 흐뭇하게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이재원이 강우를 툭 하고 쳤다.

    “야. 너 뭔 생각을 그렇게 해?”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생각을 좀 정리하고 있었어요.”

    강우가 슬쩍 서류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안의 내용물을 꺼냈다.

    툭.

    안쪽에는 기자들이 쓸법한 수첩이 여러 개 들어있었다. 강우가 그중 하나를 집었다.

    “야야. 밥 먹고 봐. 배 안 고파?”

    이재원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아요. 천천히 먹을게요.”

    사라락. 사라락.

    강우가 조심히 수첩을 넘기기 시작했다. 과연 김광일의 노력이 담긴 내용물이었다. 한국에 있는 여러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을 인터뷰한 내용이 많았다. 그리고 중국에 남은 독립운동가들의 자료도 제법 있었다. 강우가 그중에서 최준과 관련된 부분을 찾기 시작했다.

    “강우야, 최준 어르신에 대한 자료들은 이 수첩에 있다.”

    김광일 기자가 수첩 하나를 집어 주었다.

    “네, 감사합니다.”

    강우가 수첩을 넘기기 시작했다. 최준이 민망한 듯 너털웃음을 흘렸다.

    “내가 뭐 그리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렇게 조사까지 했어.”

    “어르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김광일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최준은 항일운동 말기에 국내에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그리고 중국으로 넘어간 후에도 임시정부의 기둥이었다. 다만 그 빛을 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찾았다.’

    이윽고 강우가 눈을 빛냈다. 그리고는 최준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혹시 경이라는 이름 기억나세요?”

    “허허···. 경이라.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로군.”

    최준의 얼굴에 짙은 회한이 서렸다. 모두의 시선이 최준을 향했다. 가게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도 어느새 강우가 있는 테이블에 향해 있었다. 이윽고 최준의 입이 다시 열렸다.

    “경이는 내 친동생이었지. 그리고 난리 통에 잃어버린 장부를 맡아주었었지. ”

    최준이 긴 숨을 뱉어냈다. 할아버지도 슬픈 표정이 되었다. 강우는 조금 전 보았던 기억으로 알 수 있었다.

    ‘분명 내가 보면 장면이 사실이라면, 최경이라는 분은 그날 충칭을 벗어나지 못했다.’

    강우가 눈을 빛냈다. 중국에 세워진 법인의 힘을 이용할 첫 번째 과제가 주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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