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화 (101/402)

네가 책임져라.

지하 깊은 곳에 여러 대의 PC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툭 치면 닿을듯한 좁은 간격의 소파에는 사람들이 빼곡히 앉아있었다. 이곳은 요즘 젊은 세대를 강타하고 있는 피시방이었다. 더군다나 얼마 전 출시한 게임으로 인해 더욱 난리가 난 상태였다.

딸랑.

피시방의 입구가 열리고 강우가 나타났다. 자욱한 담배 연기에 강우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미래의 기억 속 피시방과는 달리 촌스럽고 장비도 나빴다. 하지만 무언가 아련한 추억이 밀려들었다.

‘참 지긋지긋하게 다녔었는데.’

미래의 기억 속 강우는 이 시기에 피시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그뿐만 아니라 게임도 좋아해 피시방을 자주 다니기도 했었다. 상념을 떨쳐낸 강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온통 검은 머리 일색이었다.

‘어디 있지?’

강우가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한쪽에서 게임에 집중하고 있는 남재식을 발견했다. 안경에 비친 모니터 화면이 어지럽게 바뀌고 있었다. 강우가 남재식에게 다가갔다.

“재식아.”

강우가 남재식의 화면을 힐끗 바라보았다. 마우스를 어지럽게 움직이며 열심히 게임을 하고 있었다. 남재식이 하는 게임은 얼마 전 출시해 대한민국을 강타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었다.

‘이 회사가 이 게임으로 국민 개발사의 반열에 오르지.’

강우가 남재식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남재식의 꿈은 게임개발자가 되는 것이었다. 문득 떠오른 기억으로 남재식을 도울 수 있는 게 없을까 싶었다. 하지만 아직 먼 미래의 이야기였다.

“어어? 저기 공격 들어온다!”

강우가 미니맵의 한쪽을 보고는 소리쳤다. 남재식이 움찔하더니 그쪽을 향해 병력을 보냈다. 그리고 뛰어난 컨트롤로 승리를 거두었다. 그렇게 미니맵이 남재식의 색깔로 물들어갔다.

“이겼다.”

승리화면이 뜨고 남재식이 한숨을 푹 쉬었다. 강우가 슬쩍 남재식의 표정을 보며 말했다.

“이겼는데 왜 죽을상이야?”

“몰라. 난 그냥 게임이나 하다 죽을 팔자인가보다.”

남재식의 우울한 표정에 옆자리에 앉아있던 남성이 같이 한숨을 쉬었다. 남재식이 움찔하더니 옆을 향해 사과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게임 하시는데.”

“아닙니다. 남 일 같지 않네요.”

그 말을 끝으로 남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피시방을 떠나갔다. 강우가 남재식의 옆에 앉았다.

“왜? 잘 안됐어?”

“모르겠어. 그냥 어떻게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겠고.”

“뭐 했는데?”

남재식이 머리를 긁적였다.

“카페 가서 차 한잔 마시고 영화 한 편 보고 해어졌지.”

“그래? 코스는 나쁘지 않았는데 왜 그랬지?”

“몰라. 영화 재밌다고 했는데.”

“뭐 봤는데?”

남재식이 영화 제목을 말했다. 세 자리 숫자의 암호명을 가진 첩보원의 활약을 그린 영화였다. 강우가 탄식을 뱉어냈다.

“그거 말고 타이타닉을 봤어야지.”

“아···. 그런가?”

남재식이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는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너는? 어떻게 됐어?”

“어, 연락처 주고받고 헤어졌어.”

“오? 진짜?”

남재식이 부럽다는 듯 말했다. 강우가 이나은을 떠올리고는 씨익 웃었다.

“어. 좋은 애더라. 말도 잘 통하고.”

남재식이 강우를 보며 또 한숨을 쉬었다.

“모르겠다. 게임이나 한판 하게 표 끊어와.”

“잠깐.”

강우가 카운터로 가서는 시간표를 끊어왔다. PC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간을 적어주는 종이였다. 종이를 받은 강우가 자리로 돌아왔다.

“한판 붙자. 이거라도 너를 이겨야겠어.”

남재식이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출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게임이었다. 하루하루가 바빴던 강우가 해봤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는 거냐면···.”

하지만 남재식의 생각은 이내 무너져 내렸다. 강우가 능숙하게 접속하고는 방까지 만들어 놓은 것이다.

“뭐해? 들어와.”

“어? 어어···.”

남재식의 등줄기가 싸늘해졌다. 여태껏 겪어온 수많은 패배의 나날이 떠올랐다. 남재식이 불길한 기분을 느끼며 방에 접속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이 게임은 나온 지 일주일도 안 됐다고!’

남재식이 강우가 고른 종족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강우의 종족은 휴먼이었다. 남재식은 징그럽게 생긴 외계생명체를 다루는 종족을 골랐다.

“시작한다.”

“이번에는 내가 꼭 이긴다.”

남재식이 전의를 다졌다. 게임 시작을 알리는 카운트가 시작되고 두 사람이 맞붙을 전장이 나타났다. 남재식이 빠르게 손을 움직이며 강우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남재식의 기지에서 공격을 위한 유닛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네가 아무리 게임을 잘해도 설마 해보지도 않은 게임을···.”

남재식이 씨익 웃으며 전의를 다지는 순간이었다. 어두웠던 미니맵의 한쪽에서 강우의 병력이 밀려들었다. 일꾼을 앞세운 기본 병력의 러쉬였다. 남재식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뭐···. 뭐야? 이건?”

그렇게 남재식이 당황하는 사이 강우가 방어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일반병력이 들어가 사격이 가능한 건물이었다. 남재식이 입술을 깨물며 자신의 병력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어어?”

하지만 이미 지어진 방어건물로 인해 피해가 누적되기 시작했다. 방어건물을 부숴보려 노력했지만, 강우의 일꾼들이 끝없이 수리했다.

“이거 뭐야? 이런 방식으로 공격도 가능해?”

“흐흐···.”

강우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남재식을 짓밟았다.

“으으···.”

남재식이 결국, 패배를 인정하며 마우스를 놓았다. 그리고는 강우를 보며 질렸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 괴물. 너 이거 연습 많이 했어?”

“아니, 오늘 처음 하는데?”

물론 이번 생에서는 처음이라는 말이었다. 미래의 기억 속에서 강우는 이 게임의 초고수였다. 방금 남재식을 상대할 때도 살짝 가볍게 봐준 것이었다.

“하···. 진짜 재능이라는 게 이렇게 한 사람한테만 다 주어져도 되는 거냐?”

“신도 실수를 하는 법이지.”

남재식이 이를 악물었다.

“한 판 더 해. 이번 판은 방심한 거다.”

“그래? 그럼 내기 걸고 할까?”

“좋아. 뭐 걸까?”

“피시방 끝나고 국밥 내기.”

남재식이 씨익 웃었다.

“오케이.”

그렇게 두 사람의 2차전이 시작됐다. 남재식이 잔뜩 집중하고는 미간을 좁혔다. 그 모습을 힐끗 본 강우가 픽 웃었다.

‘아까 파트너한테나 저렇게 집중을 해보지.’

하지만 집중력과 무관하게 게임은 강우의 승리였다. 역시 초반 병력을 모두 끌고 온 강우의 전략에 진 것이다.

“으아악! 다음 판!”

그다음 판도 마찬가지였다. 남재식이 내리 3판을 져버렸다. 그리고는 멍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게임이 끝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강우의 옆쪽과 뒤쪽의 사람들이 강우의 화면을 보고 있었다.

“대박···. 진짜 잘하네.”

“와···.”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컨트롤과 정확한 타이밍의 공격에 사람들이 감탄 또 감탄했다. 남재식이 괴로워하는 사이 피시방의 문이 열리고 연정호가 나타났다. 싱글벙글 웃는 얼굴인 걸 보니 일이 잘 풀렸나 보다.

“정호야!”

강우가 손을 흔들어 위치를 알렸다. 연정호가 강우를 발견하고는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남재식이 알 수 없는 패배감에 물들었다.

“정호, 너마저···.”

연정호가 강우의 화면을 바라보았다.

“이게 요즘 그 난리라는 게임이냐?”

“너도 이거 알아?”

“그럼, 요즘 우리 과에서도 이거 하느라 난리야.”

남재식이 눈빛을 빛냈다.

“나도 이런 게임을 개발해야지.”

강우가 말없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게임은 모두 끝나고 승리의 대가를 거둘 시간이었다.

“가자 재식이가 국밥 산대.”

“오? 국밥 좋지.”

강우와 남재식 그리고 연정호가 피시방을 나섰다. 연정호가 슬쩍 물었다.

“춘배는?”

“오겠어? 오늘을 위해 나까지 팔아먹었는데.”

강우의 말에 연정호가 피식 웃었다. 남재식이 이번에는 이재원의 행방을 물었다.

“재원이 형은 안 와?”

“형도 연락한댔어. 아마 여자애 집에 데려다주고 오나 봐.”

“역시 매너남이네.”

강우가 말없이 웃었다. 강우와 친구들이 근처의 감자탕집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잡은 강우가 남재식을 보며 웃었다.

“감자탕으로 시킨다?”

“어, 그게 낫지.”

강우가 감자탕을 주문했다. 연정호가 슬쩍 소주도 주문했다.

뚜르르. 뚜르르.

그때, 강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재원이 형이다.”

강우가 덜컥 전화를 받았다. 그러자 예상과는 다른 인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우야, 어디냐?-

“어? 춘배냐? 왜?”

-왜기는 나도 합류하려고 그러지.-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혜지는 어쩌고?”

-혜지네 집이 엄해. 통금 있어서 들어갔다. 아버지가 군인이야.-

“아···.”

강우가 김춘배에게 감자탕집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이윽고 이재원도 연락이 왔고, 똑같이 위치를 알려주었다. 강우가 슬쩍 손을 들었다.

“아주머니, 여기 감자탕 하나 더 주세요.”

남재식이 강우를 보며 ‘왜?’ 하는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슬쩍 웃었다.

“장정 둘이 더 오는데 부족하지.”

“하···. 패자가 무슨 말을 하겠냐.”

이윽고 김춘배가 가게에 도착했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감자탕을 확인한 김춘배가 대번에 입맛을 다셨다.

“크···. 역시 뒤풀이에는 감자탕이지.”

따라락.

소주 뚜껑이 열리고 잔이 채워졌다. 허공에서 잔이 부딪치고 각자의 입으로 술이 넘어갔다. 물론 남재식은 사이다로 소주를 대신했다. 크~ 하는 소리를 내며 잔을 내려놓은 김춘배가 강우를 바라보았다.

“나은이랑은 잘됐냐?”

“뭐···. 연락처는 주고받았어.”

김춘배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오~ 박강우 드디어 연애하는 거야?”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느낌은 좋았지만, 아직 확신의 단계까지는 아니었다.

“연락은 하고 지내보려고.”

“그래, 잘 해봐. 나은이가 우리 동기 중에서 착하기로 소문난 애야.”

“그런 거 같더라.”

강우가 이나은을 떠올렸다.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먼 미래에 뉴스나 텔레비전으로만 접하던 슈퍼스타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그런 강우의 표정에 김춘배가 휘파람을 불며 놀라워했다.

“이야~ 돌덩이 같은 박강우가 여자 때문에 미소를 짓다니 대박 사건이네.”

연정호와 남재식이 크게 공감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김춘배가 이번에는 연정호에게 물었다.

“정호 너도 잘됐다며?”

“어, 오늘부터 사귀기로 했다.”

강우와 남재식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김춘배는 부럽다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정호야, 난 네가 그렇게 직진 스타일인지는 정말 몰랐다.”

연정호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 법이다. 그리고 어차피 안 되면 안 되는 거지 꾸물거릴 이유가 없고.”

“크······.”

김춘배가 탄성을 뱉어내며 손뼉을 쳤다. 연정호가 강우를 바라보았다.

“잘 들었나 박강우? 마음에 들면 직진. 오케이?”

“하하···.”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에이!”

남재식이 돌연 강우의 소주잔을 집어 들었다. 친구들이 화들짝 놀라며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야야!”

“안돼! 뺏어.”

하지만 이미 소주가 남재식의 목을 타고 넘어간 상태였다. 남재식이 탁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한잔 더!”

강우가 소주잔을 뺏으려 했다. 소주 두 잔이면 남재식에게는 치사량이었다. 하지만 남재식은 완강했다.

“나 술 많이 늘었다고. 빨리 한잔 더!”

“후우···.”

강우가 김춘배에게 눈짓을 보냈다. 김춘배가 소주병을 쓰윽 밀어냈다.

“그냥 주자! 재식이도 생각이 있겠지.”

연정호가 술병을 집어 남재식의 잔을 채웠다. 남재식이 다시 벌컥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는 오만상을 쓰더니 돌연 웃었다.

“하하···.”

강우가 움찔하며 남재식에게서 멀어졌다. 술이 많이 늘었다던 남재식의 말은 거짓이었다. 강우가 연정호를 보며 한숨을 뱉었다.

“네가 책임져라.”

그렇게 몇 잔의 술을 더 마신 남재식의 기분이 하늘을 찔렀다. 소주잔을 들고 술을 더 달라며 연신 졸라댔다.

딸랑.

그 순간 가게 문이 열리고 이재원이 들어섰다. 강우를 확인한 이재원이 단숨에 다가왔다. 그리고는 남재식을 발견했다.

“뭐야? 재식이 왜 저래?”

“취했어요. 그것도 만취.”

이재원이 테이블 위를 쓰윽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테이블 위의 소주병은 오직 두 병뿐이었다.

“뭘 얼마나 마셨길래?”

강우가 한쪽 손을 쫙 펼쳤다.

“다섯 병? 벌써?”

강우가 고개를 저었다.

“다섯 잔이요.”

“뭐?”

이재원이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김춘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형, 그래도 주량 많이 늘어난 거예요. 예전에는 한두 잔이면 그냥 기절이었거든요.”

“그럼 적당히 먹이지···.”

말을 이어가던 이재원이 피식했다. 그리고 한쪽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오늘의 미팅 멤버들이 다시 모였다.

“일단 오늘의 주선자 김춘배에게 건배.”

연정호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건배를 제안했다. 김춘배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과장된 표정으로 꾸벅꾸벅 허리를 숙였다.

“우리의 첫 미팅이 성공적으로 끝났음을 축하!”

남재식이 볼멘소리를 내며 투덜거렸다.

“나만 불행해. 나만 혼자야.”

강우가 남재식의 입을 슬쩍 틀어막았다. 그렇게 밤이 무르익어갔다. 술잔이 넘어갈수록 웃음꽃이 사라질 줄을 몰랐다.

“좋아! 오늘도 2차는 내가 산다!”

잔뜩 흥이 난 이재원이 돌격 앞으로 외쳤다. 강우와 친구들은 이재원의 뒤를 따라 2차를 가고 노래방을 갔다. 그렇게 미팅보다 즐거운 남자들의 뒤풀이가 이어졌다.

“내 사랑에!!!”

노래방에서 김춘배의 굉음이 터져 나왔다. 이재원이 귀를 막고 괴로워했다. 연정호는 이미 익숙한 듯 태연한 표정이었다. 남재식은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숙면 중이었다. 김춘배의 굉음도 남재식의 고막을 강타하지는 못했다.

‘어째 미팅할 때보다 더 신이나 보이네 다들.’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진하게 뭉친 사나이들의 우정만큼 값진 게 또 어디 있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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