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8/402)
  • 네가 가는 길에는 나도 간다.

    다음 날 아침. 마을버스가 언덕길을 힘겹게 올라가고 있었다. 창가 쪽에 앉은 강우가 꾸벅 졸고 있었다. 밤새 이어진 뜨거운 술자리에 밤이 새는지 몰랐다.

    삐이-

    버스의 벨이 눌리자 강우가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내려야 할 곳이었다. 강우가 벌떡 일어나다 마을버스 천장에 머리를 부딪쳤다.

    쿵.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강우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든 시선이 강우에게 쏠려 있었다. 강우가 민망한 듯 살짝 얼굴을 붉히며 뒷문에 섰다.

    “야. 박강우.”

    그때, 누군가가 강우의 어깨를 툭 하고 건드렸다. 강우가 슬쩍 뒤를 돌아보자 친근한 얼굴이 있었다.

    “아···. 안녕.”

    강우의 남자 동기가 씨익 웃고 있었다. 남자 동기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씨익 웃었다.

    “사람들 전부 너 알아보는 거 봐.”

    “어? 그게 무슨 말이야?”

    동기의 말에 강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진한 관심이 묻어있었다. 단지 조금 전 머리를 부딪친 이유는 아닌 듯했다.

    “안녕하세요?”

    강우가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마을버스에 앉아있던 나이 지긋한 노인이 입을 열었다.

    “거참 훌륭하게 자란 청년일세.”

    그 말을 시작으로 주변에서 강우의 칭찬이 쏟아졌다. 강우가 알 수 없는 상황에 당황할 때쯤 버스가 멈춰 섰다. 강우가 버스에서 황급히 내렸다.

    “안녕히 계세요.”

    그 와중에 인사성 밝은 강우답게 인사도 빼먹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린 강우가 한숨 돌렸다.

    “후아···. 이게 무슨 일이냐?”

    강우의 뒤를 따라 버스에서 내린 동기가 정말 모르냐는 듯 말했다.

    “아니, 그렇게 멋진 인터뷰까지 해놓고서 무슨 일이냐고 묻냐?”

    “어? 그거 때문이라고? 그런데 이렇게 너도나도 다 안다고?”

    동기가 씨익 웃더니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는 신문을 하나 꺼내 강우에게 내밀었다. 신문을 받은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독립운동가 구암 최준 선생. 한국에 돌아오다.-

    커다랗게 적힌 기사 제목 아래에는 최준의 이야기가 자세히 적혀있었다. 그리고 강우와 할아버지의 이야기도 적혀있었다. 그리고 동양 무역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문제는 대문짝만하게 실린 사진이었다. 강우와 할아버지 그리고 최준이 나란히 앉아있는 사진이 실린 것이다.

    “이거 봐라.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어. 널 몰라보는 게 이상한 거지.”

    강우가 움찔하며 동기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이렇게 크게 실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강우의 생각과는 달리 이번 기사는 여러 가지로 화젯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신문사들은 충분한 메인 기삿거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럼 아침부터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던 눈빛이······.’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지하철에서까지 사람들의 시선이 이상하게 쏠린다 했다. 혹시 뭐라도 묻었나 바지 지퍼라도 열렸나 몇 번이나 더듬거렸는지 몰랐다.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아침에 나올 때 신문이라도 확인할걸.’

    어젯밤 술자리로 늦잠을 자 허겁지겁 나온 게 문제였다. 동기가 상념에 빠진 강우를 보며 눈을 빛냈다.

    “너 진짜 멋지더라. 이 땅의 잊혀진 영웅들을 위해 일을 하겠다니. 나도 너처럼 큰 뜻을 품고 살고 싶다.”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

    “그럴까?”

    강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꼭 거창하게 뭐를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분들을 기억하고 잊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러면 나머지는 누군가가 나서서 알아서 할 거야.”

    “그게 바로 너구나.”

    강우가 말없이 웃었다. 강우를 바라보는 동기의 얼굴에 많은 상념이 차올랐다. 자신과 동갑인 강우의 남다른 행보에 생각이 많아진 것이다. 강우가 앞장서며 동기를 툭 하고 쳤다.

    “가자, 강의 시간 늦겠어.”

    “어어.”

    강우가 동기와 함께 경영대 건물로 들어섰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주변의 시선이 역시 강우에게 쏟아졌다. 이미 시선의 의미를 예상한 강우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강우야!”

    사방에서 선배와 동기들이 밀려들었다. 그리고는 강우를 향해 질문을 쏟아냈다.

    “강우야, 최준 어르신은 잘 계셔?”

    “우리는 뭐 도울 거 없을까?”

    최준에 관해 묻는 선배와 동기들 그리고 무어라도 돕겠다는 선배와 동기들 사이에서 강우가 흐뭇한 표정이 되었다.

    ‘그래, 이렇게 한 걸음씩 나아가는 거야.’

    강우가 주변을 보며 말했다.

    “많은 선배님 그리고 동기들의 관심이 큰 힘이 될 거 같습니다. 여러분이 도울 일이 있는지는 제가 차차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때가 되면 제 요청을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

    강우의 말이 끝나자 마치 함성 같은 대답이 터져 나왔다.

    “좋아! 기다리고 있을게.”

    “강우야, 선배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만 해!”

    너도나도 젊음의 열정을 불사르리라 다짐하고 다짐했다. 그렇게 경영대 건물 안이 뜨거운 분위기로 달아올랐다. 하지만 강의 시간은 지켜야 했다. 강우는 주변의 환호성을 받으며 강의실로 들어갔다. 조교가 들어와 출석을 부르고 곧이어 교수가 들어왔다.

    “박강우.”

    교수가 대뜸 강우의 이름을 불렀다.

    “네, 교수님.”

    “나중에 시간이 나면 나를 좀 찾아와라.”

    “네, 교수님.”

    교수가 부드럽게 웃은 뒤 강의를 시작했다. 조금 전 선배와 동기들의 응원 덕분일까? 강우의 술기운도 어느새 완벽히 날아가 있었다. 강우는 그 어느 때보다 설레는 마음으로 강의에 임했다. 그렇게 강의가 끝났다. 강의실 밖으로 나오자 강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뚜르르. 뚜르르.

    강우가 덜컥 전화를 받자 잔뜩 흥분한 김춘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야 인마! 박강우!-

    “왜 인마! 김춘배.”

    -아니 스타가 되고 싶은 건 난데. 왜 네가 맨날 스타 같냐?-

    김춘배의 말에 강우가 픽하고 실소를 흘렸다.

    “그러게.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되네.”

    -아···. 진짜 이러다가 나 못 뜨면 네 탓이다.-

    “또 실없는 소리 한다. 왜 전화했어?”

    김춘배가 잠시 말을 끊었다. 수화기 너머로 사람들의 아우성이 들렸다. 특히 여성들의 꺅꺅 소리가 주였다. 강우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 있잖아. 너희 과랑 우리 과랑 과팅 하지 않을래?-

    강우가 실소를 흘렸다.

    “과팅? 좋지. 동기들한테 한번 말해볼게.”

    -너도 나오지?-

    강우의 성격을 아는 김춘배의 자신감 없는 목소리였다.

    “너, 나 팔아서 뭐 얻어먹었냐?”

    -아니거든!-

    발끈하는 게 진실이었나 보다. 강우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가주고 싶은데 진짜 시간이 없다. 회사도 나가야 하고 우리 할아버지들도 내가 모셔야 하고···.”

    -하고?-

    김춘배가 강우의 말꼬리를 부여잡았다. 강우가 잠시 말을 끊고는 씨익 웃었다.

    “동아리 활동도 해야 하고.”

    -야! 그럼 시간 있네. 제발! 나 한 번만 살려줘! 너 좀 보겠다고 나를 얼마나 쥐어짜는지 알아?-

    “아니 그 사람들이 내가 친구인 건 어찌 알았냐?”

    -하하···.-

    김춘배가 멋쩍게 웃었다. 분명 강우가 친구라고 자랑하고 다녔을 것이다. 물론 그럴만했다. 그리고 이해도 했다.

    “아무튼, 당분간 힘들고···.”

    -아아! 제발!-

    김춘배가 애원하듯 사정했다. 결국, 강우가 백기를 들었다. 친구의 부탁을 계속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럼 우리 내일 신촌에서 만나기로 했으니까 그때 보던지. 과팅 말고 우리 친구들끼리 5:5 미팅으로 어때?”

    -오! 그거 좋지!-

    그때였다. 누군가가 강우의 어깨를 툭툭 쳤다. 힐끗 뒤를 돌아보니 이재원이 멋들어지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쪽 손을 들어 자신을 쿡쿡 가리키면서였다. 강우가 픽 웃었다.

    “5:5 말고 6:6으로 하자.”

    -나랑 너랑 재식이 정호 그리고 원주 말고 또 누가 있어? 서···. 설마?-

    김춘배가 크게 흥분하기 시작했다.

    “어 맞아. 재원이 형.”

    -맙소사! 이건 사건이다. 사건!-

    “무슨 또 사건까지야. 그럼 이번 주말에 신촌에서 보자.”

    -오케이! 진짜 무르기 없기다!-

    김춘배의 수화기 너머로 환호성이 들렸다. 그리고는 통화가 끊겼다. 강우가 이재원을 보며 진심이냐는 듯 물었다.

    “아니 진짜 같이 가려고요?”

    “왜 경쟁자 나타나서 싫어?”

    “아니 무슨 경쟁은···.”

    “농담이고. 어차피 내일 신촌에서 보는 거 같이 보기로 했잖아. 나만 짝 없이 뻘쭘할 수는 없지.”

    각각의 대학으로 흩어진 강우와 친구들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신촌에서 만나 진한 우정을 확인하기로 선약이 있었다. 그리고 이재원은 강우에게 같이 가겠다고 한 상태였다. 강우가 이재원의 눈치를 슬쩍 보며 물었다.

    “보라 선배는요.”

    “뭐? 보라가 여기서 왜 나와?”

    “과팅 나간 거 걸리면 욕 안 먹어요?”

    이재원이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그놈은 그냥 남자 후배야 나한테.”

    “아···. 그래요? 보라 선배도 그렇게 생각하고요?”

    이재원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큰일 날 소리 하지 마라. 나하고 엮으면 너 보라한테 맞아 죽어.”

    “아···. 그럼 없었던 말로 하죠.”

    “오케이. 약점 하나 확보.”

    강우가 실소를 흘렸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지난 술자리에서 이재원과 채보라는 남자 선후배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는 했다.

    “일단 나가자. 애들 기다려.”

    “네.”

    오늘은 동아리 SLAM의 구성원이 모이는 날이었다. 그렇게 밖으로 나가자 캠퍼스 곳곳의 게시판에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게시판에는 온갖 동아리들이 동아리원을 모집하는 대자보로 가득했다. 강우와 이재원이 게시판을 향해 다가갔다.

    “진짜야? 이거?”

    “뭔데? 뭔데?”

    강우가 슬쩍 게시판의 한쪽을 확인했다.

    -농구 동아리 SLAM 회원 모집.-

    대자보의 상단에 큼지막하게 적혀있는 제목이었다. 강우가 대자보의 내용을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그리고는 씨익 웃었다.

    “역시 형 추진력 하나는 알아줘야 해요.”

    “꾸물거릴 이유가 없지.”

    흥미를 유발하는 온갖 문장들로 꾸며진 대자보에 강우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슬쩍 대자보의 마지막 문단을 보자 채보라의 호출기 번호가 적혀있었다.

    -문의는 동아리 매니저 경영학과 96학번 채보라에게로.-

    “어? 박강우다?”

    그때, 강우를 알아본 누군가가 소리쳤다. 강우가 상대방을 확인했다. 모르는 사람인 걸 보니 다른 과의 학생인가 보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상대방이 이재원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 그래. 반갑다.”

    이재원이 능숙하게 인사를 받았다. 강우가 슬쩍 물었다.

    “경영과 선배예요?”

    “아니.”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강우와 이재원에게 쏟아졌다.

    “이 동아리 나도 가입할래.”

    “저도 가입하고 싶습니다!”

    사방에서 가입 의사가 쏟아져 들어왔다. 강우와 이재원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진한 호의가 가득했다. 강우가 대자보를 가리키며 씨익 웃었다.

    “여기 적혀있는 경영과 96학번 채보라 선배님한테 연락해주세요. 동아리 가입 절차에 대해 친절히 알려주실 거예요.”

    사람들이 눈을 빛내며 대자보를 다시 확인했다. 생각해보면 90년대 후반인 지금은 농구의 인기가 절정일 때였다. 더군다나 교내 최고의 화제 인물인 강우와 이재원이 만든 동아리였다. 여러모로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여기 매니저한테 연락해주시면 친절히 알려드릴 겁니다.”

    순식간에 쏟아지는 관심에 강우가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는 재빨리 이재원을 잡아끌어 게시판이 있는 곳을 벗어났다.

    “후아···. 진짜 이게 뭔 난리예요.”

    “관심에 익숙해져라. 그리고 이용도 할 줄 알아야지.”

    이재원이 강우가 전에 해준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형도 기사 봤어요?”

    “그래, 역시 내 동생 스케일이 달라. 나는 고작 기업 하나 차지하겠다고 아웅다웅하는데. 너는 세상을 바꾸려고 하다니.”

    이재원이 정말 감탄했다는 듯 말했다.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 중요한 일에 형이 많이 필요할 거 같아요. 그것도 아주 많이.”

    “내가 말했지. 네가 가는 길에는 나도 간다.”

    강우와 이재원이 서로를 보며 씨익 웃었다. 정말이지 강우에게는 든든한 조력자이자 형이었다.

    “오늘이죠? 동아리원 심사.”

    “어, 내가 특별히 체육관도 대관해 놨다.”

    강우가 오~ 하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스케일이 남달랐다.

    “역시, 대단해요.”

    “칭찬은 항상 환영이지.”

    두 사람은 학생식당으로 가서 같이 점심을 먹었다. 평소라면 밖을 이용했겠지만, 오늘은 시간이 부족했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동아리원 지원을 받기로 한 체육관으로 향했다.

    * * *

    퉁. 퉁.

    공 튀기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체육관에 강우와 이재원이 나타났다. 주변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인파에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 이상한데?’

    분명 오늘 있을 동아리원 모집 건으로 체육관을 대관했다고 들었다.

    “형, 이게 무슨 일이죠? 대관한 거 맞아요?”

    “어? 이상하다.”

    강우와 이재원이 어리둥절해 있었다. 그때, 체육관의 멀리서 채보라가 손을 흔들며 강우와 이재원을 반겼다.

    “강우야! 재원 선배!”

    활동성 있는 체육복을 입은 채보라는 수수한 모습이었다. 채보라의 외침을 들은 주변의 시선이 강우와 이재원을 향해 쏟아졌다.

    “박강우다! 재원 선배도 있다!”

    강우가 채보라를 향해 의아한 듯 물었다.

    “보라 선배, 오늘 여기 우리가 대관한 거잖아요. 저 사람들은 다 뭐예요?”

    채보라가 어깨를 으쓱하며 싱긋 웃었다.

    “어 맞아. 전부 다 동아리 지원자들이야.”

    강우와 이재원이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시작부터 심상치 않은 동아리 SLAM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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