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97/402)

정말 대단했습니다.

호텔의 지하 일 층에 있는 연회장이 순식간에 작은 기자회견장으로 변했다. 강우의 부탁을 들은 호텔 측은 화들짝 놀라며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었다.

“준비는 끝났습니까?”

강우의 질문에 호텔 지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자분들은 모두 모여 계십니다.”

“갑자기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강우의 말에 호텔 지배인이 무슨 소리냐는 듯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호텔이 영광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분이신 줄 몰랐던 게 오히려 죄송합니다.”

“호텔 예약을 제 이름으로 했으니 더 모르실 수밖에요.”

“작은 규모지만 오늘 기자분들이랑 회견은 잘 끝날 수 있게 직원들에게 신신당부해 놓았습니다.”

“고맙습니다.”

호텔 지배인이 명함을 꺼내 강우에게 주었다. 강우도 명함을 꺼내 주었다.

“그럼,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연락해 주십시오.”

“네, 지배인님.”

지배인이 자리를 떠났다. 때마침 숙소로 올라갔던 할아버지와 최준이 다시 내려왔다. 강우가 빠르게 다가갔다.

“장소 준비는 끝났어요. 두 분도 준비되셨죠?”

할아버지와 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걸어온 인생의 경험 때문일까? 두 독립투사의 얼굴에는 일말의 긴장감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가자꾸나.”

강우가 할아버지와 최준을 안내했다. 급하게 준비된 장소였지만, 잘 꾸며져 있었다.

덜컥.

문을 열고 들어가자 준비가 끝난 기자들이 앉아 있었다. 강우가 숫자를 세어보니 스무 명가량의 기자들이었다.

번쩍. 번쩍.

플래시 세례가 다시 쏟아졌다. 강우가 기자들을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최준을 준비된 자리로 안내했다. 강우는 할아버지의 왼쪽에 앉았다.

“지금부터 독립투사이신 최준 님과 박재봉 님의 기자회견을 시작하겠습니다. 제가 호명하는 기자님들부터 질문을 받겠습니다.”

진행은 김광일 기자가 맡아주었다. 나중에 따로 1:1 인터뷰를 해달라는 요청과 함께였다. 이런 경험이 없는 강우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래서인지 기자회견은 준비가 잘되어 있었다.

“왼쪽 뒤에 앉으신 기자님.”

김광일 기자가 한 명을 지목했다. 지목받은 기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한국일보 사회부 소속입니다. 최준 님, 한국으로 돌아오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최준이 부드럽게 웃었다. 기자가 질문을 이어갔다.

“먼저 1949년 중화인민 공화국이 세워지면서 주중에 있던 조선인들의 국적이 박탈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최준 님의 국적은 중화인민 공화국이 맞습니까?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오신 이유와 그 배경을 듣고 싶습니다.”

질문이 끝나자 기자들의 시선이 최준을 향해 쏟아졌다. 최준이 준비된 마이크로 입을 가져다 댔다.

“먼저 제 국적은 중화인민 공화국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번 귀국을 통해서 국적회복을 할 생각입니다. 제가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는 바로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국적을 회복하는 것 그리고 내 조국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최준의 말에 기자들이 탄성을 뱉어냈다. 그리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노쇠한 독립투사는 일생을 조국에서 마무리하겠다 한 것이다. 김광일 기자가 잠시 눈시울을 붉히더니 이내 신색을 회복했다.

“다음 분은. 여기 앞쪽에 기자분.”

지목받은 기자가 일어났다. 그리고 질문을 던졌다.

“최준 님은 알려진 바로는 중국 내에 상당한 자산을 이룬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한국으로 귀화하시면 그 재산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최준 님에게는 가족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기자의 질문에 김광일 기자가 움찔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최준의 아픈 기억을 건드렸나 싶었다. 하지만 최준은 강인한 인물이었다.

“맞습니다. 제게는 남은 가족이 없습니다. 중국으로 넘어간 후 항일 운동을 하며 자식들은 모두 죽었고, 남아있던 일가친척들은 한국전쟁 이후 생사를 알 수 없습니다. 저는 중국에서 재혼도 하지 않았으니 완벽한 혼자의 몸이었습니다.”

최준이 잠시 말을 멈췄다. 기자들의 시선이 최준을 향해 뜨겁게 쏟아졌다. 강우가 준비된 생수를 뜯어 최준의 잔에 따라주었다. 최준이 물을 마시더니 입을 열었다.

“하지만, 독립운동을 함께하던 내 아우를 만났고 그의 가족들을 만나게 됐습니다. 나에게는 새로운 가족이 생긴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내가 중국에서 일군 재산은 모두 여기 있는 박강우 군에게 물려주었습니다.”

폭탄선언이었다. 알려진 바라면 최준의 자산은 수백억 단위였다. 그것을 모두 핏줄이 아닌 다른 이에게 물려줬다고 한 것이다. 기자들의 시선이 강우를 향했다. 그 눈빛에 담긴 짙은 호기심과 경악스러움에 강우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내 재산은 모두 중국에 있는 합작회사에 투자됐습니다. 그 회사의 주인은 바로 강우입니다. 그 재산은 사업의 용도로도 쓰일 것입니다. 하지만 나와 재봉의 가족은 다른 꿈이 있습니다.”

최준이 강우를 바라보았다.

“나머지는 강우가 네가 설명을 해주거라.”

“네, 할아버지.”

강우가 마이크를 잡았다. 잠시 머릿속에 생각을 정리하고는 입을 열었다.

“중국에는 국적을 잃고 어려운 삶을 사시는 독립운동가분들과 후손들이 많습니다. 저희는 그분들의 국적회복과 유공자 서훈을 위해 중국 합작법인의 수입을 사용할 예정입니다. 물론 한국에 있는 독립운동가분들과 후손분들을 도울 방법도 찾을 겁니다. 감사하게도 그 중요한 일을 저의 할아버지이신 박재봉 님과 최준 님이 저에게 맡겨주셨습니다.”

강우의 말이 끝나자 기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강우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의 무게가 절대 가볍지 않음을 알았다.

“저기 혹시 이번 수능 만점자에 서울대 수석 입학을 한 박강우 군이 맞습니까?”

기자 중 한 명이 강우를 알아보았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기자들이 눈에 이채가 서렸다. 독립유공자의 후손 그리고 수능 만점에 서울대 수석 입학까지. 화젯거리가 차고도 넘쳤다. 오늘의 일이 기사로 나간다면 정말 특종 중의 특종이었다. 이윽고 김광일 기자가 다음 질문자를 지목했다.

“현재 중국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의 유공자 서훈은 그 전례가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앞으로 서훈 절차가 쉽지 않아 보이는데요. 이에 대한 어떤 대책이 있으십니까?”

지목받은 기자가 강우에게 물었다. 기자의 질문은 날카로웠다.

“네, 맞습니다. 그래서 중국에 있는 합작법인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영리 업체로서 이익을 추구하겠지만, 중국에 남아있는 혹은 한국에 남아있는 독립투사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증거를 찾는 데도 노력을 할 생각입니다.”

기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강우의 말을 받아 적어나갔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게 기자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하지만 강우는 자신이 있었다. 김광일이 다음 기자를 지목했다.

“최준 님과 박재봉 님은 어떤 인연이 있었던 겁니까? 그 배경이 궁금합니다.”

기자의 질문이 끝나자 최준이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가 마이크에 입을 가져다 댔다.

“저는 독립운동가 박재봉입니다. 저는 미약하나마 임시정부와 조선을 오가는 밀정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 역할에는 독립자금의 조성 그리고 운반도 있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최준 형님과는 항상 사선을 같이한 동지이자 형제였습니다.”

짧지만 가슴을 울리는 할아버지의 설명이었다. 기자들 모두 탄성을 뱉어내며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그 박수 소리가 점점 커져 임시 기자회견장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허···. 이것 참···. 부끄럽구먼···.”

할아버지와 최준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강우는 두 분이 너무 자랑스러웠다. 강우도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손뼉을 치던 기자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우가 힐끗 김광일 기자를 바라보았다. 김광일 기자가 씨익 웃으며 칭찬을 바라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최준 할아버지에게 최고의 선물 중 하나가 됐을 겁니다.’

강우가 마주 웃어주며 엄지를 척 들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이어지던 기자회견이 끝났다. 기자들은 할아버지와 최준에게 다가와 인사를 하고 존경한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후···. 정말 대단했습니다.”

기자들이 모두 떠나갔다. 김광일 기자가 텅 빈 주변을 보며 긴 숨을 뱉어냈다. 정말이지 대단한 기자회견이었다. 강우가 김광일 기자를 보며 말했다.

“혼자 독점했으면 특종 중의 특종이었을 텐데요. 안 아쉬우세요?”

“저 특종에 매달리는 그런 기자 아닙니다. 취재를 시작하게 된 것도 잘못된 일을 바로 세우기 위해 시작한 겁니다. 제 특종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오늘의 일이 널리 알려져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인식도 널리 알려지고 처우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광일 기자가 열변을 토해냈다. 강우가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미래의 기억 속 강우가 알고 있는 기자들의 모습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김 기자님 같은 분이 많아져야 할 텐데요.”

“많을 겁니다. 다만 아직 모르고 있을 뿐이죠. 그래서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강우가 진심을 담아 꾸벅 인사를 했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할아버지 두 분이 너무 행복해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로 최준 할아버지의 친척 중 누군가를 찾게 될 수도 있겠네요.”

“음······. 그래서 말인데요. 제가 강우 이사님에게 제안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김광일 기자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떤 제안입니까?”

“제가 취재를 하면서 모아놓은 자료들이 조금 있습니다. 그 자료들을 이용한다면 하고자 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겁니다.”

“대단하시네요. 정말···.”

강우가 계속 감탄을 터트렸다. 김광일이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대신 앞으로 종종 좋은 기삿거리 부탁드립니다.”

“네, 제일 먼저 연락드리겠습니다.”

강우가 김광일 기자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김광일 기자가 씨익 웃으며 강우의 손을 마주 잡았다.

“아···. 그런데 두 분 단독인터뷰는 언제···.”

김광일 기자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강우가 씨익 웃었다.

“오늘은 피곤하실 테니 내일 어떠세요?”

“좋습니다.”

그때였다.

“강우야!”

집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연회장의 입구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강우에게 달려왔다.

“이게 무슨 일이야? 기자회견 했다며? 아니 이게 도대체···.”

아버지가 믿기지 않는 듯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리고는 김광일 기자를 발견했다.

“어? 기자님?”

“안녕하세요. 죄송합니다.”

대뜸 미안하다고 하는 김광일 기자의 말에 아버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강우가 아버지에게 호텔에서의 일을 모두 설명했다. 강우의 설명을 들은 아버지가 환하게 웃었다.

“기자님, 정말 훌륭하신 분이었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두 분이 정말 좋아하셨겠습니다.”

“하하···.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닙니다. 어르신 두 분이 대단하고 훌륭한 분들이시죠.”

아버지와 김광일 기자가 서로를 보며 씨익 웃었다. 중년의 나이에 들은 두 남성은 그 순간 알아차렸다.

“제가 오늘 일로 술 한잔 대접하고 싶은데 괜찮으십니까?”

아버지의 제안에 김광일 기자가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좋습니다!”

아버지와 김광일 기자가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가 어색하게 웃었다.

“저도 가나요?”

“당연하죠. 저 아직 강우 군에게 궁금한 게 많습니다.”

김광일 기자가 강우의 한쪽 팔을 잡았다. 아버지가 씨익 웃으며 남은 강우의 팔을 잡았다.

“우리 아들이 까도 까도 나오는 게 많은 양파 같은 남자입니다. 기삿거리 쓰실 거 엄청 많으실 겁니다.”

“오···. 이거 말만 들어도 기대됩니다.”

순식간에 쿵짝이 맞은 두 중년남성이었다. 강우는 아버지와 김광일 기자에게 끌려 호텔 밖으로 나왔다. 할아버지와 최준은 오늘 밤 호텔에서 같이 머물기로 했다. 이윽고 근처의 고깃집에 세 남자가 도착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어갔다. 김광일 기자의 질문 세례가 강우의 안주였다.

“으하하! 형님, 이거 참 대단합니다.”

“그렇지? 내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참 대단한 아이지.”

금세 호형호제까지 해버리는 아버지와 김광일 기자였다. 강우가 그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좋은 사람은 많이 알아 갈수록 즐거운 법이니까.’

그렇게 밤새 강우는 술을 마셨다. 그리고 다음 날, 대한민국이 떠들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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