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4/402)
  • 아버지가 오시니까 집 안이 꽉 차네요.

    커다란 거실에 강우와 아버지가 마주 앉아있었다. 할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강용이는 잠에든지 오래였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정말 나눌 이야기가 많았다. 다행히도 내일 강우의 수업은 오후부터 있었다.

    “김치 공장 이야기 들었다. 강우 네가 나 없는 동안 진짜 고생 많았어.”

    “아니에요. 아버지가 중국에서 힘드셨죠.”

    중국에서 호텔 생활을 한 아버지는 조금 야위어 있었다. 생각해보면 미래의 기억 속 아버지도 참 열심히 사셨다. 항상 이곳저곳 출장을 다니며 사업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아니, 지낼만했어.”

    하지만 지금 아버지의 얼굴은 편해 보였다. 사업이 탄탄대로이니 몸은 힘들어도 날아갈 듯 가벼운 것이다.

    “당분간 한국에 계시는 거예요?”

    강우의 질문에 아버지가 슬쩍 웃었다. 그리고는 미안한 표정이 되었다.

    “일단 합작법인 설립 건은 끝나서 돌아온 건데. 이제 또 본격적으로 일이 돌아가기 시작하면 또 나가봐야 할 거 같아.”

    “네···.”

    아버지가 설명을 이어갔다.

    “길림성에 좋은 땅을 임대받았어. 이번에 한국에서 전문가들 데리고 가서 조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강우, 네 생각처럼 금탑 종자 키우기에 적당한 거 같아.”

    “그럼 일단 종자 회사에 문의해야겠네요.”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리고 전문가들도 수소문해야 하고. 아빠 한국에 있는 동안 다 끝내놓고 가야지.”

    “네, 저도 열심히 도울게요.”

    아버지가 부드럽게 웃었다. 강우의 존재가 그렇게 든든할 수 없었다.

    “그래, 우리 아들 대학 생활해야 하는데 아빠가 미안하네···.”

    “아니에요. 저 할 거 다 하고 다녀요. 동기들이랑 술도 먹고요. 아 재원이 형이랑 농구 동아리도 만들었어요.”

    아버지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지금을 즐기라는 말은 아버지의 진심이었다.

    “그래, 잘했어. 친구들이랑도 자주 만나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사업도 열심히 하고요.”

    강우와 아버지가 서로를 보며 씨익 웃었다. 아버지가 생각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기다려봐.”

    아버지가 방으로 들어가시더니 서류 가방을 들고나왔다. GIC를 그만둔 아버지에게 할아버지가 물려준 가죽가방이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평생이 담긴 이 가방을 자신의 분신처럼 여겼다. 아버지가 가방을 열더니 커다란 서류 봉투를 꺼냈다.

    “이게 뭐예요?”

    “한번 읽어봐라.”

    강우가 서류 봉투에서 서류를 꺼냈다. 중국어로 작성된 서류와 영어로 작성된 서류가 각각 한 부씩 있었다. 강우가 영어와 중국어로 적힌 서류를 하나씩 확인했다. 두 개의 서류에 담긴 내용은 같았다.

    “이걸 보는데도 믿기지 않네요.”

    “아빠도 마찬가지다.”

    서류의 내용은 최준의 재산이 모두 합작법인에 투자되었음을 증명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회사의 주인이 강우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강우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아버지가 말을 이어갔다.

    “아버지, 종자 개발에 쓰고도 여유 자금은 충분하죠?”

    “그렇지, 워낙 큰돈이니까.”

    강우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강우는 중국의 여러 기업을 조사했다. 그리고 남은 자본을 투자할 곳을 결정했다.

    “아버지, 남은 돈으로 제가 투자를 해보고 싶은 곳이 있어요. 중국에 돌아가시면 부탁드릴게요.”

    “오? 그래?”

    아버지가 큰 관심을 드러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네, 제가 나중에 자세히 정리해서 전해드릴게요.”

    “그래, 알겠다.”

    아버지가 흐뭇하게 웃었다. 강우가 눈을 빛냈다.

    “저는 최준 어르신이 주신 자금을 크게 불릴 생각이에요. 그리고 그 자금은 모두 독립유공자분들과 후손들을 위해 쓰겠어요.”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는 대견하다는 빛이 가득했다.

    “그래, 우리 장남 장하다.”

    “아버지, 우리 같이 꼭 해내요.”

    “그럼, 아빠는 네가 있어 든든해.”

    그때였다. 아버지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 참 그리고 마사토 말이다. 정말 그런 이야기를 한 거야?”

    “통화 못 하셨어요?”

    아버지가 옅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늘 한국에 왔잖아. 중국에서는 연락 못 했고.”

    “내일 아침에 연락해 보세요.”

    “허···. 거참···.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아버지가 짧게 탄성을 뱉어냈다. 하지만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마사토가 한국에 온다면 그리고 동양 무역에서 일한다면 천군만마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이민 오시려면 한참 걸리겠죠. 주변 정리할 것도 많으실 거고요.”

    “그럼 그리고 한동안은 김치 공장 때문에 일본에 있기도 해야 해.”

    강우가 슬쩍 일본에서의 일을 꺼내 들었다.

    “아버지, 사실 얼마 전에 일본에 갔다가 하루오 어르신이랑 기무라 어르신을 만났어요.”

    “오? 그래?”

    아버지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강우가 하루오와 기무라의 의중을 아버지에게 전달했다. 아버지가 매우 놀라며 소리쳤다.

    “지···. 진짜야?”

    강우가 입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일본의 동기분들도 그 일에 함께하신다고 하셨어?”

    “네.”

    아버지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음···. 할아버지는 이미 사업자금을 받은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실 거야.”

    “그뿐이 아니죠. 최준 어르신이 추진하는 일이니까요. 일본 분들의 도움을 받는 건 이번에는 또 다른 문제죠.”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강우의 말에 동감했다.

    “일단 최준 어르신이 한국에 오시기로 했으니까. 그때 두 분을 전부 모시고 이야기를 꺼내 보자.”

    “언제 오신대요?”

    “비자가 나오면 바로 오실 예정이다.”

    강우의 눈이 빛났다.

    “준비 많이 해야겠네요.”

    “그래, 해방된 조국에 처음 오시는 거야. 그것도 무려 몇십 년 만에···.”

    아버지의 얼굴이 살짝 씁쓸해졌다. 지금 같은 경우가 어디 최준 한 명의 일이겠는가. 해방을 맞이하고도 조국에 오지 못한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한국에 오시면 먼저 국적회복이랑 유공자 서훈을 추진해야겠어요.”

    “그게 쉽지는 않을 거다.”

    아버지가 살짝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단순히 할아버지의 증언으로는 부족했다.

    “할아버지도 서훈을 받는데 고생 많으셨다고 들었어요.”

    “맞아. 밀정의 임무를 담당하신 탓에 남아있는 기록이 없었지. 그나마 징모처에서 일한 게 밝혀져서 다행이었지. 그리고 독립군 장군이었던 분의 증언도 있었고.”

    할아버지의 서훈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몇 장의 사진들이었다. 그리고 독립군 장군이었던 분의 회고록에 적힌 할아버지에 관한 내용도 있었다. 그 두 개의 증거가 아니었다면 할아버지도 독립운동을 인정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밀정을 하셨던 일까지 인정받으셨다면 더 높은 훈장을 받으셨을 텐데요.”

    “할아버지는 애초에 서훈도 달가워하지 않으셨지. 나라를 위한 일을 했는데 자신의 공을 내세우기 싫어하셨어.”

    그나마 강우의 친할머니가 생전에 강하게 밀어붙인 탓에 지금의 공로라도 인정받았다. 그만큼 유공자 서훈까지의 길은 멀고 험난했다. 그리고 강우와 아버지는 수많은 묻혀있는 독립운동가들을 서훈까지의 길로 인도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최준 어르신이 시작이에요. 첫 단추가 잘 풀려야 그 뒤의 일도 잘 풀릴 텐데요.”

    “아빠가 중국에 있으면서 최대한 증거들을 찾으려 해볼 거야.”

    “힘든 일이 되겠네요.”

    “힘들겠지. 그래도 진오 형님도 계시고 자본도 있으니까 노력해 봐야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강우는 아버지를 믿었다. 아버지가 커다란 사업을 벌이고 싶어 했던 이유가 바로 지금, 이 순간과 일맥상통했다.

    ‘미래의 아버지는 가문을 다시 일으키고 크게 돈을 벌어서 지금과 같은 일을 하고 싶어 했지.’

    강우가 아버지를 보며 눈을 빛냈다. 아버지가 곁에 있으니 너무 든든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오셔서 좋아요.”

    강우의 말에 아버지의 얼굴에 스르륵 미소가 떠올랐다. 손을 들어 장성한 아들의 머리를 쓱쓱 넘겨주었다.

    “그래, 나도 집에 오니까 너무 좋아.”

    * * *

    다음 날. 아침 쏟아지는 햇살에 강우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넓어진 방만큼 커다란 침대는 건장한 강우가 뒹굴기에도 충분했다.

    “으음···.”

    힐끗 탁상 위의 시계를 확인하니 오전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강우가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주방 쪽에서 향긋한 된장찌개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강우의 얼굴에 스르륵 미소가 번졌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주방으로 다가가자 아버지가 신문을 보고 계셨다. 아버지가 신문을 내려놓더니 강우를 바라보았다.

    “좋은 아침이다.”

    “언제 일어나셨어요.”

    강우가 아버지의 앞쪽에 앉으며 물었다. 아버지가 식탁 위에 놓인 커다란 물병에서 물을 한잔 따랐다. 그리고 강우 쪽으로 스윽 내밀었다.

    “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동네 산책하고 왔다. 이거 한잔 마셔. 아침에 일어나면 물 한잔이 그렇게 건강에 좋다더라.”

    강우가 아버지가 내민 물을 단숨에 비웠다. 전날의 음주로 바짝 말랐던 입안이 부드럽고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아들, 조금만 기다려 된장찌개 다 되가.”

    어머니가 그런 강우와 아버지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다정한 부자의 모습은 참 보기 좋았다.

    “역시 아버지가 오시니까 집 안이 꽉 차네요.”

    “자식···.”

    아버지가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다. 강우가 힐끗 할아버지의 방을 보았다.

    “할아버지는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할아버지가 방에서 나왔다.

    “냄새 좋구나. 오늘도 우리 어멈이 맛있는 밥을 했나 보구나.”

    강우와 아버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아버지, 일어나셨어요.”

    “그래, 어젯밤에 늦게들 잤니?”

    할아버지가 부드럽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가족 수에 맞춰 식탁의 크기도 매우 커져 있었다. 강우가 물잔에 물을 따라 할아버지의 앞에 놓았다.

    “고맙구나.”

    할아버지가 부드럽게 웃으며 강우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주름졌지만, 따듯한 할아버지의 손길에 강우가 씨익 웃었다.

    “뜨거운 거 가요.”

    이윽고 어머니 표 된장찌개가 식탁의 중앙에 놓였다. 세 남자의 얼굴에 기대감이 차올랐다. 강우가 벌떡 일어나 전기밥솥으로 다가갔다.

    “엄마, 밥은 제가 풀게요.”

    강우가 전기밥솥을 열자 뜨끈한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강우가 밥을 푸고 어머니는 밑반찬을 준비했다. 그렇게 강우네 가족의 아침상이 완성됐다.

    “먹자꾸나.”

    할아버지의 말을 시작으로 식사가 시작됐다. 역시 어머니의 된장찌개는 끝내줬다. 특히 아버지는 감격에 젖었다.

    “크···.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이거를 너무 먹고 싶었다니까.”

    아버지의 말에 어머니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좋아했다. 어머니 역시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가 참 좋았나 보다. 어머니가 앞치마를 푸르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강우와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식사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엄마, 강용이는 학교 잘 갔어요?”

    “응, 요새는 잘 가.”

    강용이는 전학을 오고 한동안 학교 가기를 힘들어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보며 물었다.

    “친구들은 좀 만들었대?”

    “응, 친한 애들 몇 명 만들었나 봐요.”

    “언제 한번 친구들 집에 불러서 파티라도 해줘. 금세 친해지려면 같이 먹고 노는 게 최고니까.”

    “알겠어요.”

    그렇게 식사가 이어질 무렵이었다.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아범아, 오늘 회사에는 언제 나갈 게냐?”

    “무슨 일 있으세요? 밥을 먹고 바로 나갈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설렘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주말에 준이 형님이 오신다고 하지 않았더냐. 묵으실 호텔부터 모시고 갈 곳까지 오늘부터 내가 직접 준비하고 싶어서 그런다.”

    “아···. 그러면 제가 일을 빼겠습니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보고 있던 강우가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럼 제가 모시고 다녀올까요?”

    “아들이? 오늘 강의는?”

    강우가 씨익 웃었다.

    “강의 갔다가 금세 오면 시간 충분할 거 같아요.”

    다행히도 오늘은 강의도 하나만 있는 날이었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해했다.

    “그래, 그럼 우리 강우랑 나랑 다녀오면 되겠구나.”

    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흐뭇해했다.

    “역시 우리 아들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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