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2/402)

앞으로는 다 잘될 거야.

월요일 아침부터 강의가 시작됐다. 강우는 열심히 강의를 들으며 학업에 집중했다. 그렇게 강의가 끝나고 강의실 밖으로 나오자 이재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강우야.”

“어, 형, 기다리고 있었어요?”

“너 점심까지 공강이지?”

이재원은 강우의 시간표를 꿰고 있었다. 사실 선배들의 도움을 받아 짠 일 학년의 시간표는 대동소이했다. 강우와 이재원이 건물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사방에 꽃들이 완연히 피어있었다.

“오늘은 또 뭐 먹지.”

이재원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도시락이라도 다시 싸달라고 해야 하나.”

“뭐? 진짜?”

이재원이 반색을 하며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워낙, 요리하는 거 좋아하시니까요. 한번 말은 해 볼까요?”

“음···. 그럼 나야 좋은데. 그래도 어머니도 이제 당분간 새벽같이 일어나는 거 해방이실 텐데. 그냥 우리끼리 사 먹자.”

이재원의 말에 강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사람 몰리기 전에 가서 일찍 먹고 올까?”

“그래요.”

결국, 두 사람은 또 차를 타고 캠퍼스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강의 시간이 엇갈려 신원주와 연정호는 함께하지 못했다.

딸랑.

강우와 이재원이 근처의 국밥집으로 향했다. 이재원은 찌개나 국 그리고 탕 종류를 참 좋아했다. 물론 강우는 음식을 가리지 않는 식성이었다. 아직 점심시간 전인 국밥집은 한산했다.

“여기 순댓국 두 그릇이요.”

강우가 이재원의 물컵에 물을 따랐다. 이재원이 수저를 놓으며 운을 뗐다.

“저번에 말한 동아리 말이야.”

“동아리요? 아···.”

이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농구 동아리.”

“그거 진짜 할 거예요?”

이재원이 당연하다는 듯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럼, 당연하지. 내가 언제 허투루 말하는 거 봤냐.”

“그렇긴 하죠. 실행력 하면 이재원이지.”

“그래, 그래서 말인데. 동아리 회장은 네가 하고 내가 부회장으로 하자.”

강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요? 회장은 형이 해야죠.”

“그냥. 나는 농구 잘 모르기도 하고. 네가 해라.”

“음···. 그럴까요.”

강우가 순순히 허락했다. 이재원이 ‘어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씨익 웃음을 지었다.

“이왕 할 거 제대로 해 보려고요. 제가 농구는 진짜 좋아하거든요.”

“그래? 강우 너 농구 잘해?”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제법 할걸요? 아마도?”

“그래? 난 축구는 좀 하는데 말이야.”

이런저런 대화가 오가는 사이 순대국밥이 나왔다. 뜨끈한 뚝배기에 담긴 뽀얀 국물에 절로 침이 넘어갔다. 양을 보아하니 학생인 강우와 이재원에게 잔뜩 인심을 담아준 듯했다.

“맛있게들 먹어요.”

서빙이 끝나자 강우가 빠르게 새우젓을 들었다. 그리고는 순댓국에 거침없이 부었다. 그다음은 들깻가루였다. 강우가 들깻가루를 숟가락으로 퍽퍽 퍼서는 국에 넣었다. 무려 5번이나 넣자 뽀얀 순댓국의 색이 살짝 탁해졌다.

“아니 무슨 들깻가루를 그렇게 퍼부어?”

“이래야 맛있어요.”

이재원이 살짝 생각하더니 강우를 그대로 따라 했다. 강우가 씩 웃으며 말했다.

“다진 양념은 넣지 말아요.”

“어? 어어.”

다진 양념을 집으려던 이재원이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이윽고 두 사람의 식사가 시작됐다.

후루룩. 후루룩.

뜨끈한 국물을 먹으니 속이 든든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강우가 깍두기를 사각 깨물어 먹으며 연신 국물을 먹었다. 이재원이 그런 강우를 보며 픽 웃었다.

“진짜 너 먹는 거 보면 나까지 입맛이 돈다니까.”

“그러니까 많이 좀 먹어요. 그렇게 말라서 운동이나 하겠어요?”

강우가 이재원을 보며 말했다. 이재원은 남자치고도 날렵한 몸을 가졌다.

“네가 너무 건장한 거지. 나 정도면 표준이라고.”

이윽고 순댓국을 다 먹은 강우와 이재원이 가게를 나왔다. 점심시간이 다가온 거리에는 어느덧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시간이 남은 두 사람은 근처의 카페로 갔다.

“앉자. 여기 커피랑 오렌지주스 하나 주세요.”

이재원이 주문을 넣었다. 강우가 슬쩍 주변을 보니 몇몇 시선이 쏟아지고 있었다. 두 사람을 알아본 서울대학생들인 거 같았다.

“그런데 진짜 원주랑 정호도 동아리 한데요?”

“어, 꼭 한다고 하더라. 내 생각에 정호가 똑 부러지는 면이 있으니까 총무를 시키면 될 거 같다.”

강우가 내심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연정호를 떠올리며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사실 연정호의 가정 형편상 힘든 대학 생활이 될까 걱정했었다. 하지만 대학에 온 연정호는 고등학교 때보다는 여유로워 보였다.

‘심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그런 연정호의 배경을 만들어 준 것이 바로 이재원이었다. 강우가 이재원을 바라보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이재원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왜 또?”

강우가 말없이 웃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을 대화했다. 주말에 있었던 김치 공장 이야기 위주였다. 강우의 말을 들으며 이재원은 종종 생각에 빠지고는 했다.

“그렇군.”

마지막으로 하루오와 기무라의 이야기를 듣자 크게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야? 이거 일의 규모가 점점 커지네.”

“잘됐죠.”

이재원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강우, 네 부탁이면 자다가도 벌떡 나갈 테니까.”

“말만 들어도 고맙네요.”

이재원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야. 농담 아니다.”

강우가 스윽 이재원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래, 아, 그리고 오늘 저녁에 애들이랑 좀 모이자.”

“오늘 저녁이요?”

“응, 동아리 창설 문제로 회의도 하고 선후배 간에 정도 쌓고.”

이재원이 술잔을 넘기는 손짓을 했다. 강우가 피식 웃었다.

“어째, 동아리 만드는 목적이 대충 예상이 되는데요?”

“겸사겸사 다 그런 거지.”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그럼 제가 연락해놓을게요.”

“그래, 오늘 내가 강의가 조금 늦게 끝나니까. 먼저 만나서 놀고 있어.”

“네.”

이윽고 강우와 이재원이 카페를 나섰다. 그리고는 캠퍼스로 돌아와 각자의 강의실로 흩어졌다.

“강우야.”

“어, 왔냐?”

강의를 마친 강우와 연정호가 경영대 건물 앞에서 만났다. 강우가 슬쩍 주변을 보며 물었다.

“원주는?”

“아직 안 왔어?”

연정호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강우가 핸드폰을 꺼내 신원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가 가고 딸칵 전화가 연결됐다.

“원주야, 왜 안 와?”

-아···. 잠깐만.-

신원주가 작게 속사이더니 잠시 말이 없었다. 곧 자리를 이동한 듯한 신원주가 깊은숨을 뱉어냈다.

-야, 나 지금 선배들이랑 미팅 나왔어.-

“어? 미팅? 무슨 사업···. 아···. 그 미팅.”

강우가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미팅을 사업적인 미팅으로 착각하다니 최근 업무에 바쁘기는 했나 보다.

-엉, 인원이 비었다고 해서. 억지로 끌려왔다.-

“그래? 그럼 이왕 간 김에 예쁜 인연 만들고 오세요.”

강우의 장난스러운 말에 신원주가 다급히 강우를 불렀다.

-야! 강···.-

툭.

강우가 핸드폰을 끊었다. 연정호가 궁금해 죽겠다는 듯 물었다.

“미팅을 나갔다고? 원주가?”

“어, 청춘사업 중이시란다.”

연정호의 얼굴로 부러움인지 모른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강우가 그 모습에 픽하고 웃었다. 생각해보면 신원주도 연정호도 남탕의 역사를 쭈욱 이어왔었다.

‘남중 3년에 남고 3년이라.’

물론 강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과정을 겪고 대학에 왔으니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문득 따스한 봄바람이 강우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코끝으로 느껴지는 꽃냄새에 강우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을 때지.”

연정호가 픽하고 웃었다.

“강우 너는 연애 안 할 거냐? 이제 대학생인데.”

“그럴 시간이 없다. 연애하기에는 너무 바쁜 몸이라.”

연정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예전에 나한테는 여유를 좀 가지라고 그렇게 말하더니.”

“그런가. 그러는 너는?”

연정호가 눈을 빛냈다.

“나는 목표한 게 있다. 사시 합격 최대한 빨리하는 거 그게 내 목표야.”

“아···. 그러냐. 부담되면 동아리 안 해도 괜찮은데.”

연정호가 목표하고 있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연정호에게 억지로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연정호는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농구 동아리는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그래 그럼 다행이고.”

강우가 시간을 슬쩍 확인했다. 아직 이재원의 강의가 끝나기까지 시간이 남았다.

“우리끼리 먼저 가 있자. 형은 장소 알려주면 되니까.”

“그래.”

강우와 연정호는 학교를 벗어나 근처의 술집으로 향했다. 자리를 잡고 앉은 강우가 500CC 맥주 두 잔을 시켰다. 간단한 안주로는 소시지 야채볶음을 시켰다.

“오늘은 회사 안 가도 돼?”

연정호의 질문에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 일단 급한 사안은 다 처리됐거든. 당분간 나도 학교에 집중하려고.”

“다행이네. 피곤해 보였는데.”

강우가 슬쩍 얼굴을 만지며 웃었다.

“많이 티 나냐?”

“다크서클이 좀 진하긴 해.”

연정호의 말에 강우가 눈가를 매만졌다. 그러자 연정호가 픽 웃었다.

“농담이다. 농담.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 나야 네 일정을 아니까 걱정돼서 한 말이고.”

“오? 공붓벌레님이 농담도 하고? 요즘 살만한가 봐?”

강우가 농담을 건네자 연정호가 씨익 웃었다. 이제는 이런 농담도 여유 있게 웃는 연정호였다. 강우는 그런 연정호의 변화가 참 좋았다. 이윽고 주문한 맥주가 나왔다.

“한잔하자.”

강우와 연정호의 잔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시원한 맥주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 목을 알싸하게 자극하는 맥주의 목 넘김에 강우와 연정호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크···. 이 좋은 걸 너무 늦게 알았어.”

연정호가 단숨에 비운 술잔을 보며 말했다. 강우가 실소를 흘렸다. 연정호는 정말이지 말술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강우와 연정호가 끝없이 맥주잔을 비웠다.

“그런데 강우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연정호가 술잔을 탁 내려놓으며 말했다. 술이 조금 들어간 연정호의 얼굴에는 취기가 돌고 있었다.

“왜?”

강우가 안주를 집어 먹으며 답했다. 연정호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나 얼마 전에 학교 갔었다.”

“어디? 양서고?”

연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가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선생님들 잘 계시지?”

졸업한 지 얼마 안 됐지만, 매일 지겹도록 보던 선생님들이었다. 한동안 안보니 또 안부가 궁금하기고 했다.

“어, 잘 계시지. 그리고 나 학생주임 선생님께 이야기 들었다.”

연정호의 말에 강우가 입에 가져다 대던 술잔을 멈췄다. 그리고는 슬쩍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냐? 뭐 그런 거까지 말씀을 하셨대···.”

“나도 예상은 했었지. 생각해보면 이상하잖아. 대진 그룹이 장학금을 주는 학교가 있긴 하지만, 우리 학교처럼 크게 밀어주는 학교가 없거든.”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연정호의 말처럼 대진 그룹이 후원은 그 학교의 전교 1등 몇 명 정도가 전부였다.

“너무 그렇게 받아들이지 말고. 나는 그냥 재원이 형한테 부탁이나 해 본 건데 형이 그룹에도···.”

“괜찮아. 내가 미안하지. 진짜 고맙다.”

연정호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강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슬쩍 웃었다. 연정호가 말을 이어갔다.

“요즘 엄마도 마음이 편해지셔서인지 건강도 좋아지셨고, 내 동생들도 예전처럼 먹는 거 입는 거 걱정 없이 학교도 잘 다니고 행복하다.”

“잘됐네. 나도 마음이 좋다.”

연정호가 강우를 보며 눈을 빛냈다.

“사실 나는 가진 사람들을 조금 싫어했었어. 중학생 때까지는 그래도 덜했는데 양서고 오고 나서 더 심해졌지. 알잖아. 양서고 애들 전부 가정형편들 좋은 거.”

“대부분 그렇지.”

양서고에 배정받는 아이들은 대부분이 목동 쪽에 사는 아이들이었다.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윤택한 생활을 누렸다.

“어린 마음의 질투심이었는지. 나는 왜 이런 가정환경일까. 그런 원망도 많이 했다. 생각해보면 우물 안 개구리였어.”

“....”

강우가 묵묵히 연정호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너 만나고 조금씩 생각이 바뀌었어. 너처럼 나도 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당당해지려고.”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연정호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고맙다. 친구야. 너를 만난 게 어쩌면 내 인생 최고의 성공이 아닌가 싶다.”

“아우···. 낯간지럽다. 그러지 마.”

강우가 손사래를 쳤다. 연정호가 씨익 웃으며 술잔을 내밀었다. 강우도 술잔을 들어 연정호의 잔과 마주했다.

“너처럼 노력해서 여기까지 온 사람도 드물어. 진짜 고생 많았다. 그리고 앞으로는 다 잘될 거야.”

연정호가 눈시울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애들 말처럼 네가 잘될 거라 하면 다 그렇게 되겠지.”

강우가 씨익 웃었다. 그 순간이었다.

딸랑.

호프집의 문이 열리고 이재원과 신원주가 나타났다. 강우와 연정호의 시선이 그쪽을 향해 돌아갔다. 그리고는 이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재원과 신원주의 옆으로 한 명이 여학생이 서 있었다.

“강우야, 저 여자는 누구지?”

“나도 모르지. 원주가 미팅 나갔다고 하더니 거기서 만난 여자인가?”

순간, 여자가 이재원의 옆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익숙한 듯 대화를 나누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강우의 머리가 지끈 아파져 왔다. 이윽고 미래의 기억이 떠오른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저 여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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