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91/402)

다 오면 되지. 한국으로.

덜컥.

가게의 문이 열리고 강우와 마사토가 들어섰다. 마사토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점원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기다리고 계십니다.”

점원은 마사토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아마 자주 오는 가게인 모양이다. 강우와 마사토가 안내를 받아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하루오와 기무라가 대작하고 있었다.

“어르신들!”

마사토가 한층 친근해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루오와 기무라가 반갑게 강우와 마사토를 맞아주었다.

“그래, 이리들 오거라.”

하루오가 자리에서 일어나 기무라의 옆에 앉았다. 강우와 마사토가 그 반대편에 앉았다.

“못 본 사이 어른이 되었구나.”

하루오가 강우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불과 일 년이 조금 넘은 시간에 강우는 더욱 의젓해져 있었다. 기무라가 껄껄 웃으며 술이 담긴 병을 들었다.

“강우야, 이제 성인이니 술을 한잔 받을 수 있겠지?”

“네, 기무라 어르신.”

강우가 두 손으로 공손히 잔을 받았다. 그리고는 하루오와 기무라의 잔을 채워주었다. 각자의 입으로 술이 넘어가고 강우가 준비된 안주를 집어 먹었다. 하루오가 강우를 보며 물었다.

“그래, 김치 공장은 잘 개업했고?”

“네, 어르신들 덕분에 순조롭게 시작했습니다.”

강우가 고마움을 담아 말했다. 하루오가 기무라를 보며 씩 웃었다.

“기무라가 어찌나 신경을 쓰던지. 재봉의 일이라면 아주 물불을 안 가릴 기세야.”

“감사합니다. 기무라 어르신.”

기무라가 입꼬리를 올리며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우리가 어디 남인가?”

“어허~ 이 사람 아직도 그 타령인가?”

강우가 움찔하자 기무라가 더욱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이제 성인 아닌가? 강우야, 내 조카 중에 말이야···.”

“이 사람 정말 쓸데없는 소리를 오늘 그것 때문에 모인 게 아니지 않나.”

하루오가 강우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 중국에서 있었던 일은 들었다.”

강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하루오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재봉이랑은 가끔 통화하고 있지. 재봉이 중국에 갔다 와서는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더구나.”

“맞다. 어찌나 흥분했던지. 내 재봉이 그렇게 좋아하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이었어.”

기무라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두 눈을 감았다. 그러자 하루오도 동감하는 듯 짧게 숨을 뱉어냈다.

“우리랑 다시 만났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야. 조금 섭섭했지.”

“이 사람아! 섭섭할 게 따로 있지. 목숨을 걸고 사선을 넘나든 동료와 같을 수 있겠는가?”

“그렇긴 하지.”

하루오와 기무라의 얼굴에 살짝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 아이 같은 모습에 강우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지는 정말이지 인기 만점이었다.

“그래서 말이다. 강우야, 일본에 있는 할아버님의 동기분들이 조금 구상하고 있는 일이 있다.”

하루오와 기무라가 투덕거리는 사이 마사토가 강우를 보며 말했다.

“어떤 일이요?”

“재봉 어르신과 네가 앞으로 추진할 일 말이야.”

강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설마?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 관한 일이요?”

“그래, 맞다.”

하루오가 마사토 대신 대답을 했다. 강우의 시선이 하루오를 향했다. 하루오가 입을 열었다.

“나와 동기들이 다 모여서 논의를 거듭했지. 사실 일본에서 재단 형태로 만들어 볼까도 했었는데. 그거보다는 역시 당사자들에게 맡기는 게 좋을 거 같아서 말이야.”

“아···.”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기무라가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깊게 생각할 거 없다. 우리는 재봉에게 큰 빚을 지고 있어. 단지 사업 자금을 조금 도와줬다고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김치 공장 건도 그렇고 이것저것 신경을 많이 써주고 계신대요.”

기무라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쉬운 일들이야. 하지만 지금 우리가 하려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어려운 일이지. 우리는 재봉에게 가장 어려운 일을 돕는 사람들이 되고 싶다.”

기무라의 말에 강우의 가슴이 울렸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솟아나며 할아버지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래서 저를 보자고 하신 겁니까?”

“그래, 재봉에게 말하면 분명 펄쩍 뛰겠지. 그래서 그전에 강우 너에게 먼저 말하는 거다. 너라면 재봉을 어떻게 해서든 설득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을 마친 하루오가 신뢰가 가득 담긴 눈빛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생각했던 것보다 그 규모가 커지고 있었다.

‘그래, 이왕 할 거면 제대로 규모를 키워보자. 못 할 거 없지.’

강우가 눈을 빛내며 하루오와 기무라를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제가 돌아가서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하루오와 기무라가 환하게 웃었다. 마사토도 흐뭇한 시선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자···. 그럼 우리 조카사위, 내 술을 한 잔 더 받아보게나.”

기무라가 선수를 치자 하루오가 미간을 좁혔다.

“조카사위가 뭔가 모양 빠지게. 내 술을 한잔 받지 손녀사위.”

“아···. 어르신들···.”

강우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마사토가 술병을 슬쩍 뺏어왔다. 그리고는 강우의 술잔을 따라주며 말했다.

“이왕이면 그냥 사위가 낫지. 안 그래?”

“하하···.”

결국, 강우가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하루오와 기무라 그리고 마사토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식이 아니면 강우를 당황하게 할 일도 없다고 말하며 즐거워했다.

* * *

“이사님,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박 대리가 꾸벅 인사를 해왔다. 두 손에 들린 선물 보따리에 잔뜩 상기된 표정이었다.

“수고 많으셨어요. 내일이면 바로 출근이네요. 어서 들어가서 쉬세요.”

“제가 출장을 가서 뭐 한 게 있나 싶습니다.”

박 대리가 민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고개를 저었다. 박 대리는 공장의 상황을 일일이 체크하고 기록을 남기고 사진을 찍는 등 많은 업무를 수행하지 않았던가.

“열심히 일해주신 거 알고 있어요. 고맙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박 대리가 살짝 감동한 표정이 되었다. 사소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강우는 진심을 담아 고마워하고 있었다. 역시 좋은 회사에 좋은 상사를 만났다는 생각에 가슴이 푸근해졌다. 이윽고 박 대리가 공항을 벗어났다.

“회사 분위기가 정말 좋구나. 직원들과 관계도 좋아 보이고.”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마사토가 말했다. 강우가 슬쩍 웃었다.

“회사는 사람이 모이는 곳이니까요. 딱딱한 분위기는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렇구나.”

수직적인 관계에 익숙한 마사토는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가시죠. 할아버지가 기다리신대요.”

“아···. 그래.”

강우와 마사토는 택시를 타고 공항을 벗어났다. 그리고 곧장 강우의 집으로 돌아왔다. 일요일을 맞이한 거리는 참 한산했다. 택시가 올림픽 대로를 빠르게 달려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탁.

“수고하셨습니다.”

“네, 손님.”

택시가 떠나고 강우와 마사토가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섰다. 강우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하···. 이것 참···.”

마사토가 떨리는 손을 마주 잡으며 긴장했다. 강우가 그런 마사토를 보며 슬쩍 웃었다.

“아저씨, 볼 때마다 그렇게 긴장이 되세요?”

“응? 아···. 그래. 이상하게 어르신 앞에만 가면 그런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강우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형아!”

“아이코 우리 강용이.”

강용이가 마중을 나왔는지 엘리베이터 안에 있었다. 강용이가 마사토를 보더니 간단한 일본어를 했다.

“안녕하세요. 마사토 아저씨.”

“오? 강용이가 일본어를? 잘 지냈니?”

“네, 회화책 보고 조금씩 공부했어요.”

마사토가 실소를 흘렸다. 강우가 강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위에 다들 계시지?”

“응, 엄마가 보쌈에 김치도 해놨어.”

강우가 마사토를 보며 씨익 웃었다.

“어머니가 보쌈이랑 김치도 해놨다네요.”

“오오? 정말?”

마사토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강우의 집이 있는 층에 멈췄다.

덜컥.

문을 열고 들어가자 보쌈 특유의 담백한 냄새가 느껴졌다. 그사이 강하게 스며드는 된장찌개 냄새도 일품이었다. 슬쩍 옆을 보니 마사토는 벌써 기대감에 차 있었다.

“강우 잘 갔다 왔어?”

어머니가 앞치마를 멘 채 주방에서 나왔다. 음식을 하는 어머니의 표정은 항상 행복했다. 강우의 얼굴에 부드럽게 미소가 떠올랐다.

“잘 다녀왔습니다.”

“그래, 우리 아들 요즘 진짜 바쁘네.”

말을 마친 어머니가 이번에는 마사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간단한 영어로 인사를 건넸다.

“마사토 씨도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 이거 또 신세를 지러 왔습니다.”

“아니에요.”

어머니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마사토가 집을 한 차례 둘러보더니 짧게 탄성을 뱉어냈다.

“집이 정말 넓어졌네? 강도 한눈에 보이고?”

“얼마 전에 이사했어요.”

“정식에게 들었어.”

마사토가 넓어진 집으로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때였다.

“마사토, 왔나.”

할아버지의 방문이 열렸다. 마사토의 얼굴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그래, 들어와.”

마사토가 강우의 팔을 툭 하고 치며 할아버지의 방으로 향했다. 마사토의 구원요청에 강우가 화답했다.

“앉아라.”

강우와 마사토가 할아버지의 앞으로 앉았다. 할아버지가 먼저 강우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강우 네가 아범이 없어서 고생이 많았다. 김치 공장은 잘 둘러보고 왔고?”

“네, 할아버지. 공장이 정말 잘 지어졌더라고요.”

“기무라가 신경을 엄청나게 썼다고 하더니 정말 잘됐구나.”

언제 들어도 유창한 할아버지의 일본어였다. 할아버지가 이번에는 마사토를 바라보았다.

“그래, 마사토는 한국에 무슨 일로 온 게야?”

“저 어르신···.”

마치 선생님 앞의 학생처럼 긴장하는 마사토의 모습이었다. 할아버지가 그런 마사토의 긴장감을 느끼고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어. 대충 무슨 이야기인지는 눈치채고 있다.”

마사토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말을 이어갔다.

“그래, 이제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앞으로 일은 점점 많아질 테지. 그러니 예전의 약속처럼 마사토 네가 결정한 대로 해도 좋다.”

“정말이십니까? 그럼 회사를 그만두고 동양 무역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회사를 그만두면 당연히 우리 회사에 와야지. 그럼 다른 데를 갈 생각이었어?”

“아···. 아닙니다.”

마사토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강우가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아저씨가 얼마나 긴장을 하셨는데요. 저한테 할아버지한테 꼭 좀 잘 말해달라고도 했어요.”

“허허···. 내가 뭐 그리 어려운 사람이라고. 내 아들의 친구면 내 아들이나 다름없지.”

마사토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그래, 나도 잘 부탁한다.”

할아버지도 흐뭇하게 웃었다. 이윽고 밖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님, 진지 드세요.”

“오냐. 어멈아, 금세 나가마.”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강우와 마사토가 할아버지를 재빨리 부축했다. 주방으로 나오자 커다란 식탁에 또 진수성찬이었다. 보쌈은 물론이고 어머니 표 갓김치 그리고 된장찌개에 온갖 밑반찬들이었다.

“이거 우리 어멈이 오늘 신경을 엄청나게 썼구나.”

“아버님, 매일 먹던 대로 했어요.”

어머니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강우와 할아버지 그리고 마사토가 자리에 앉았다. 강용이도 한쪽에 앉았다. 할아버지가 수저를 들었다.

“먹자꾸나.”

마사토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어머니를 향해 꾸벅 인사했다.

“잘 먹겠습니다.”

“네, 많이 드세요.”

그 말을 시작으로 식사가 시작됐다. 마사토는 연신 감탄성을 뱉어냈다. 김치 공장의 맛과 어머니의 맛을 비교하면서였다.

“이 김치 맛을 내야 하는데 말입니다.”

마사토의 말에 강우가 씩 웃었다.

“이건 어머니 손맛이라 따라 할 수 없을걸요.”

“그래, 그럴 거 같아. 아쉽군. 아쉬워.”

강용이가 입안 가득 있던 밥을 꿀꺽 삼키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엄마가 공장에 가서 다 만들면 되잖아요?”

강우와 할아버지 그리고 마사토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강용이의 일본어에 실력에 놀랐고 그 생각에 황당도 했다. 그러자 강용이가 또 고개를 갸웃했다.

“아···. 생각해보니까. 우리 엄마는 나 밥해주느라 바쁘다. 취소예요.”

강용이의 말에 폭소가 터져 나왔다. 이윽고 식사가 이어졌다. 마사토는 계속해서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마사토가 진지한 표정을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야, 나 한동안 고민 많이 했는데. 오늘 결심을 했다.”

강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마사토를 바라보았다. 마사토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나 한국에서 살아야겠다.”

갑작스러운 마사토의 선언에 강우와 할아버지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저씨, 그럼 가족들은 어쩌시게요?”

강우의 질문에 마사토가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다 오면 되지. 한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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