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90/402)
  • 강우야, 나 결심했다.

    일본 하네다 공항에 강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강우의 모습은 젊은 사업가의 모습이었다.

    “이사님, 이쪽으로 가시죠.”

    강우의 옆에는 한 명의 남성이 함께였다. 이번에 새로 뽑힌 경력직 직원으로 이번 일본 출장을 함께했다. 직급은 대리였다.

    “네, 박 대리님. 가시죠.”

    강우와 박 대리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사님, 저기 저 사람 같습니다.”

    강우가 고개를 돌리니 강우의 이름이 적힌 팻말을 들고 있는 남성이 있었다. 아마 일본 김치 공장의 직원일 것이다. 강우가 남성에게 다가가 능숙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박강우입니다.”

    “아···. 안녕하십니까? 박강우 이사님.”

    일본인 직원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강우의 나이가 상당히 어려 보이니 말이다. 하지만 크게 내색하지는 않으려 노력했다.

    “안내 부탁드려도 될까요? 공장으로 바로 가겠습니다.”

    “네, 물론입니다.”

    강우와 박 대리가 일본인 직원을 따라 공항 밖으로 나왔다. 회사에서 준비한 차량이 대기하고 있었다. 강우와 박 대리가 차에 올라탔다. 차량이 공항을 출발해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하네다 공항에서 김치 공장이 있는 이바라키현까지는 거리가 제법 있었다.

    “마사토 이사님은 공장에 계십니까?”

    강우의 질문에 일본인 직원이 빠르게 답했다.

    “네, 지금 공장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알겠습니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에 있는 박 대리를 바라보았다. 신기한 듯 창밖 풍경에 푹 빠져 있었다.

    “일본 처음이세요?”

    “네? 네, 이사님. 해외에 나오는 거 자체가 처음입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박 대리의 얼굴은 조금 상기돼 있기까지 했다.

    “주말인데 쉬지도 못하고 미안해서 어쩌죠? 제가 혼자 온다니까···.”

    사실 주말을 이용해 일본에는 혼자 오려 했다. 여행 겸 사업 겸해서 말이다. 박 대리가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닙니다. 김 과장님이 절대 이사님 혼자는 못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말이라고 해야 집에만 박혀있는데요. 이렇게 해외에 나오니 여행 온 기분이 들고 너무 좋습니다. 그리고 우리 회사처럼 주말에 일한다고 수당까지 다 챙겨주는 회사가 흔치 않습니다.”

    말을 마친 박 대리의 얼굴에 자부심이 떠올랐다. 대기업은 아니었지만, 동양 무역은 사람 냄새 물씬 나는 그런 곳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강우가 추구하는 회사의 모습이었다.

    ‘능력은 업무의 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지. 무식하게 일만 한다고 회사가 돌아가는 게 아니라고.’

    미래의 여러 기업처럼 개인이 가진 능력을 충분히 효율적으로 쓸 수 있다는 게 강우의 생각이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 이왕 온 김에 공장에 들러서 시제품 나오는 거 확인하고 도쿄 구경도 좀 하다가 가죠.”

    강우의 말에 박 대리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불감청 고소원이라 했던가. 해외 출장을 온 김에 관광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상사인 강우가 딱 말을 해주니 좋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십니까? 그런데 시간이 괜찮으시겠습니까? 과제도 있으실 텐데···.”

    직원이 이사의 대학 과제를 걱정해주는 웃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하지만 강우에게 일 학년의 과제 정도는 우스웠다.

    “아···. 다 해놓고 왔습니다.”

    “역시 이사님.”

    박 대리가 엄지를 치켜들었다. 강우가 씨익 웃은 뒤 창밖을 바라보았다. 박 대리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조금만 가면 공장이 나옵니다.”

    일본인 직원이 강우를 향해 말했다. 강우와 박 대리의 시선이 차량의 앞 창문으로 향했다. 그렇게 얼마를 더 달리자 멀리서 김치 공장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오오! 이사님, 다 왔습니다.”

    “네, 그렇네요.”

    이윽고 차량이 공장의 입구로 들어섰다. 커다란 공장 용지를 둘러싼 펜스를 지나자 안쪽의 전경이 나타났다. 넓은 부지에는 두 동의 김치 공장이 세워져 있었다. 한쪽으로는 비어있는 부지가 눈에 들어왔다. 강우도 놀랄 만큼 커다란 면적이 남아있었다.

    ‘나중에 사업이 확장되면 세우려고 비워놓은 면적이 제법 된다고 하더니 엄청나네.’

    부지를 제공한 기무라는 정말 화끈하게 강우와 할아버지를 밀어주고 있었다. 이윽고 강우를 태운 차가 주차장에 세워졌다. 강우가 차에서 내리자 일본인 직원이 다가왔다.

    “이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강우와 박 대리가 일본인 직원을 따라 이동했다. 공장으로 들어서기 전 소독을 하고 위생복으로 갈아입었다. 과도할 정도의 위생 지침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강우와 아버지가 마사토에게 가장 강조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이쪽입니다.”

    위생 모자에 위생장갑까지 쓴 강우가 공장 안으로 들어섰다. 공장의 안쪽 역시 순백의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사방에는 아버지가 설비업체와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 설비들이 가득 차 있었다.

    “와···. 이사님, 이게 정말 김치 만드는 곳이 맞습니까? 설비들이···.”

    “네, 맞아요. 설비에 조금 신경을 쓰기는 했죠.”

    강우가 뿌듯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IMF를 지나간 후를 위해 장장 몇 년을 기다린 곳이었다. 이렇게 완공된 것을 보니 기분이 새로웠다.

    “강우야!”

    그때, 역시 위생복을 입은 남성이 강우를 부르며 다가왔다. 얼굴을 자세히 보니 마사토였다. 강우의 표정도 대번에 밝아졌다.

    “마사토 아저씨!”

    “그래, 오랜만이구나. 잘 지냈어? 학교생활은 할 만하고?”

    마사토가 강우를 살짝 얼싸안아 준 후 물었다.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저씨도 건강하시죠?”

    “그럼 그럼, 나야 일이 바빠서 살 좀 빠진 거 빼면 아주 건강해.”

    살짝 훑어보니 마사토의 얼굴이 홀쭉해져 있었다. 위생복을 입고 있어 한눈에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시제품은요?”

    강우의 질문에 마사토가 씨익 웃었다. 그 웃음이 마치 장성한 아들을 보는 듯했다.

    “우리 강우 이제 사업가다운 모습이 보이는구나.”

    “아···.”

    강우가 살짝 민망해했다. 그러자 마사토가 강우를 이끌어 한쪽으로 향했다. 한쪽에는 김치를 만드는 라인이 설치되어있었다. 일본인 직원들은 열심히 순서대로 김치를 만들고 있었다.

    “다들 능숙하네요?”

    “한국에서 보내준 매뉴얼이 크게 도움이 됐어. 레시피대로 완벽하게 만들어지고 있다.”

    “한번 맛봐도 될까요?”

    “물론이지.”

    마사토가 직원에게 시제품 중 하나를 가지고 오라 시켰다. 직원이 시식을 위해 김치를 가지고 왔다. 강우가 작은 플라스틱 포크로 김치를 찍어 먹었다.

    ‘오···. 맛있는데?’

    강우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긴장하고 있던 마사토와 일본 쪽 직원들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쳐 지나갔다.

    “어떠니?”

    마사토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강우가 슬쩍 하나를 더 집어 먹었다.

    “좋네요. 맛있어요.”

    “다행이다.”

    “포장은 어떻게 되고 있죠?”

    “이쪽으로.”

    강우와 마사토가 이번에는 최종 공정인 포장라인으로 향했다. 박 대리는 멍한 표정으로 강우의 뒤를 따랐다. 김치 공장이라 하니 작고 평범한 음식 제조 공장을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공장 내부는 정말이지 신세계였다.

    ‘와···. 이건 뭐···.’

    박 대리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강우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박 대리님.”

    “네? 아! 네!”

    “공장 어때요? 마음에 드세요?”

    “최고입니다. 이렇게 위생과 설비에 신경 쓴 공장은 처음입니다.”

    강우가 뿌듯하게 웃었다. 강우의 계획대로라면 남은 부지에 공장을 모두 세워 연간 2만 톤 이상의 생산력을 갖추는 게 목표였다. 지금 지어진 두 동의 공장으로는 연간 1만 톤의 생산이 가능했다. 하지만 당장 그렇게 김치를 쏟아낼 수는 없었다.

    ‘빨리 공장의 생산력을 최대한 돌리는 날이 왔으면 좋겠네.’

    강우와 박 대리 그리고 마사토가 공장의 마지막 라인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임시 포장으로 김치들이 적은 양으로 덜어지고 있었다.

    “임시 포장이네요.”

    “응, 아직은 마케팅용으로 시식회에만 들어갈 물량이라 그런다.”

    “백화점들에 다 들어가는 거죠?”

    “맞아. 일단 도쿄에 있는 백화점부터 시작해서 곧 전국 각지에 백화점으로 들어갈 예정이야.”

    강우가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도쿄가 아니라 전국에요?”

    마사토가 씨익 웃었다.

    “그래, 어르신 중에 한 분이 큰 유통업체를 알고 계시더구나. 그분이 백화점마다 힘을 좀 써주셨다. 유통은 그쪽이랑 계약하기로 했고.”

    “정말 잘됐네요.”

    강우의 얼굴이 환해졌다. 사실 김치를 만드는 것까지는 공장에서 가능했다. 하지만 유통은 또 다른 문제였다. 신생 업체인 동양 무역이 넓은 일본에서 유통까지 담당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유통업체 선정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그 문제로 또 한국에서 계속 회의 중이었는데. 또 한 방에 해결됐네. 이거 일이 잘 풀리는데?’

    강우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일본에서는 처음 시도하는 시스템인데 이렇게 잘 돌아가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이게 다 한국 본사에서 신경을 써준 덕분이지.”

    “이제 백화점에 마케팅을 시작하면 진짜 바빠질 텐데요. 마음 같아서는 아예 일본에 머물면서 도와드리고 싶은데 제가 학교를 나가야 해서.”

    강우가 미안함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마사토가 부드럽게 웃었다.

    “괜찮아. 여기에도 다 직원들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 김지숙 과장도 당분간 파견 온다고 했잖아. 걱정하지 말고 학교생활 열심히 해야지.”

    “네, 아저씨.”

    그렇게 강우와 마사토는 한참 동안 공장을 둘러보았다. 최상의 설비와 최고의 재료들로 만들어지는 김치는 분명 성공할 것이었다.

    “후아···.”

    잠시 후, 공장을 벗어난 강우가 위생모를 벗었다. 일본의 3월 날씨에 이마에 땀이 맺혀있었다. 곧 바람이 불어와 강우의 이마를 쓰다듬고 지나갔다.

    “그래, 아직 식사 전이지?”

    뒤이어 공장에서 나온 마사토가 강우에게 물었다.

    “네, 아직이요.”

    “그럼 사내 식당에서 밥 먹고 가라.”

    “네, 좋네요.”

    강우와 박 대리 그리고 마사토가 사내 식당으로 향했다. 역시 깔끔하게 준비된 식당에 강우가 또 만족스러움을 느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직원들의 후생 복지는 철저해야 했다.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식당에 들어서자 직원들이 인사를 건네왔다. 그리고는 강우를 힐끔힐끔 보며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슬쩍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밥을 배급하는 쪽으로 걸어갔다.

    “오늘은 돈가스네요?”

    마침 강우가 좋아하는 돈가스가 오늘의 점심 메뉴였다. 허기가 진 강우의 입에 침이 고였다. 박 대리도 눈을 빛내며 음식을 받았다. 강우가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강우가 돈가스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입안 가득 육즙이 퍼져 나갔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요. 힘들게 일하는 분들인데 밥은 항상 최고로 대접해야죠.”

    “그래, 강우 네가 항상 그걸 강조해서 우리도 신경 쓰고 있지.”

    마사토가 흐뭇하게 웃었다. 직원들을 챙기겠다는 강우와 아버지의 생각은 참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가풍은 할아버지로부터 온 것으로 생각했다. 훌륭하고 대단한 가문이었다.

    “이사님, 이거 정말 맛있는데요? 그냥 팔아도 되겠습니다.”

    “그럴까요? 한국에 일본식 돈가스 전문점이라도 할까요?”

    “오오! 그거 저는 대찬성입니다.”

    박 대리는 진심이었다. 강우도 말없이 웃으며 식사를 이어갔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강우야, 이제 공장은 다 둘러봤으니 뭐를 할 거니?”

    마사토의 질문에 박 대리가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제가 뭐 할 일이 있을까요?”

    “아···. 도쿄에 가면 하루오 어르신이랑 기무라 어르신 좀 만나러 가자.”

    “아, 그럼 내일 오후 비행기인데 조금 시간을 미뤄야 하나요?”

    “아니, 오늘 저녁에.”

    “네.”

    강우가 박 대리를 바라보았다. 역시 일본어를 할 줄 아는 박 대리는 상황 파악이 끝난 후였다. 강우가 미안함에 슬쩍 웃었다. 그리고는 품에서 법인카드를 꺼냈다.

    “저는 못 갈 거 같네요. 대신 이거 가지고 오늘 밤에 혼자 관광하세요.”

    “이···. 이사님, 저는 괜찮습니다. 그냥 호텔에 있겠습니다.”

    강우가 고개를 저었다.

    “약속한 거는 지켜야죠.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즐기세요. 한국 가면 엄청 부려먹을 겁니다.”

    “네, 이사님! 열심히 놀고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박 대리가 잔뜩 신이 나서 크게 답했다. 한국말을 모르는 마사토가 고개를 갸웃했다.

    “일 끝났으니까. 좀 쉬라고 했어요.”

    “하···. 나도 한창 젊었을 때 강우 너 같은 상사를 만났어야 했는데.”

    마사토도 웃으며 흐뭇해했다. 강우의 배려심이 참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강우는 다시 도쿄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는 마사토도 함께였다.

    “정식은 중국에서 언제 돌아오는 거야?”

    마사토의 질문에 강우가 답했다.

    “한동안은 힘드실 거 같아요. 중국 합작법인 일로 바쁘시거든요.”

    “그래, 나도 얼핏 듣기는 했다만. 자세히 좀 설명해줄 수 있을까? 궁금해서 말이야.”

    강우의 입에서 중국에서 있던 일이 술술 흘러나왔다. 마사토는 감탄하고 또 살짝 눈시울을 붉히고는 했다. 그렇게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도쿄에 도착했다.

    “강우야, 나 결심했다.”

    마사토가 강우를 보며 눈을 빛냈다. 강우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너와 정식 그리고 어르신이 하는 사업에 나도 함께하기로 말이다.”

    “.....”

    강우가 살짝 멍한 표정을 지었다. 마사토가 그런 강우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나이는 어리지만, 강우는 남달랐다. 그리고 강우와 함께라면 동양 무역은 크게 성장할 것이 분명했다. 마사토가 결심이 가득한 말로 입을 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이제 동양 무역에서 제대로 일해보고 싶구나. 그래서 어르신의 염원을 푸는 데 내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다.”

    “지금 회사는요?”

    마사토가 씨익 웃었다.

    “이제 다닐 만큼 다녔어. 나도 새로운 도전이 필요해. 그리고 동양 무역만큼 훌륭한 직장이 어디 있겠니. 설마 어르신이랑 정식이 나를 거절하는 건 아니겠지?”

    강우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마사토는 정말이지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분명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찬성하실 거야.’

    하지만 혼자서 결정을 할 수는 없었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한국 가는 비행기로 같이 한국에 가시죠. 할아버지부터 만나 뵈어요.”

    “그래, 그러자.”

    강우의 말에 마사토가 환하게 웃었다. 강우가 슬쩍 옆을 바라보니 박 대리는 창문에 열심히 머리를 박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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