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402)
  • 좋아. 그걸로 정했어.

    점심을 먹은 강우는 잠깐의 시간이 생겼다. 다음 강의까지 공강이 되어버린 것이다. 강우는 교내의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옆에는 이재원도 함께였다.

    “화났냐?”

    이재원이 강우를 보며 슬쩍 물었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뇨. 뭐 그 정도로.”

    “그래?”

    이재원이 슬쩍 웃었다. 그리고는 잠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서울대의 명물이라는 호수가 있었다. 명물치고는 수질이 깨끗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이재원이 입을 열었다.

    “내가 1학년 때는 말이야. 말 그대로 투명 인간이었지. 물론 내가 스스로 다 걷어찬 것도 없지 않아 있지만 말이야.”

    “그랬군요.”

    강우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재원이 말을 이어갔다.

    “그렇게 일 학년 지나고 나니까 진짜 주변에 남는 게 없더라고 추억도 없고…. 그래서 그냥 기계적으로 학교만 다녔지. 그때는 졸업이 내 최대 목표였으니까.”

    “.....”

    강우가 이재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일학년이 끝날 무렵 강우와 이재원은 처음 만났었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정말 후회되더라고. 그래서 너는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 지금,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아.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즐길 거는 다 즐기고 그래 보자고.”

    “형, 그거 알아요?”

    이재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우리 아빠도 똑같은 말 해준 거?”

    “그래? 역시 아버지랑 나랑은 통하는 게 있다니까.”

    “그러게요. 신기하네.”

    “사업도 중요하지만 다른 것도 놓치지는 마라. 그리고 나도 그러려고 너랑 맞춰서 복학한 거야.”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한 상황에 있는 이재원의 말은 더욱 가슴에 와닿았다. 강우가 이재원을 힐끗 바라보았다. 이재원은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지금 강우에게 해준 말은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테니까 말이다. 남은 학창 시절이 끝나면 이재원은 재벌 후계자로 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수만 명의 생계를 책임지고 주변에는 인의 벽이 둘리는 그런 자리까지 가겠지.’

    물론 이재원은 잘 해낼 것이다. 능력이 있고, 무엇보다 강우 자신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재원에게도 평범이라는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형도, 남은 대학 생활 마무리 잘해요.”

    “그래, 이제는 네가 있어서 그럴 수 있을 거 같아.”

    이재원이 씨익 웃었다. 강우도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뚜르르. 뚜르르.

    강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딸칵 전화를 받으니 신원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우야, 어디냐? 나 공강인데 밥 먹자.-

    “나? 밥은 먹었는데…. 일단 여기로 올래?”

    강우가 지금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이재원이 슬쩍 물었다.

    “누구야?”

    “아…. 원주요. 잠깐 온다고 해서요.”

    “오? 그래?”

    이재원도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이윽고 멀리서 신원주가 나타났다. 땀을 뻘뻘 흘리는 게 분명 길을 잔뜩 헤맨 게 분명했다. 옆에는 연정호도 함께였다. 강우의 얼굴에 반가움이 떠올랐다.

    “뭐야? 오다가 만났어?”

    “아니, 오늘 학생 식당에서 만났어.”

    신원주와 연정호가 이재원을 보더니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어, 그래 우리 후배들 밥들은 먹었나?”

    신원주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줄이 얼마나 길던지 그냥 포기하고 나왔어요.”

    이재원이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다음 강의까지는 충분한 시간이 남아있었다.

    “가자, 밥 사줄게.”

    “또요? 이럴 거면 학교 안에 식당을 차리던가.”

    강우의 말에 이재원이 손뼉을 ‘탁’ 치며 소리쳤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학교 밥이 맛없으면 맛있는 밥을 만들면 되잖아?”

    “아….”

    농담 같지 않은 농담에 강우와 친구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살짝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린 강우가 연정호에게 물었다.

    “정호야, 학교생활 어떠냐? 동기들이랑은 친해졌냐?”

    “우리야 뭐 각자도생이지.”

    연정호의 말에 이재원이 슬쩍 끼어들었다.

    “그 삭막한 법대 애들 사이에서 고생이 많다. 거기는 애들이 통 정이 없어 정이.”

    “그래도 터치가 없어서 편하기는 합니다.”

    역시 연정호다운 생각이었다. 연정호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선배님,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룹에서 주는 장학금 덕분에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연정호가 꾸벅 인사를 했다. 연정호는 강우 다음으로 서울대 전체 차석이었다. 그리고 서울대 법학과를 수석으로 입학했다. 그렇게 학교에서 나오는 장학금까지 받게 되었으니 아르바이트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재원이 씨익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에이~ 그게 내가 주는 거냐? 다 우리 그룹에서 훌륭한 인재들에게 주는 거지. 나한테 고마워할 필요 없어.”

    “그래도요.”

    연정호가 멋쩍게 웃었다. 그 순간, 신원주와 연정호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이재원이 픽 웃으며 신원주와 연정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럼 어디 이 선배의 후배 사랑을 느끼러 출발해 보실까?”

    이재원이 두 사람을 끌고는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이윽고 강우와 이재원 그리고 두 친구는 캠퍼스를 벗어났다. 이재원이 학교에 타고 다니는 차를 타고서였다. 근처의 패스트푸드점에 도착한 강우와 일행은 또 잔뜩 음식을 시켰다.

    딩동. 딩동.

    음식이 나왔다는 알림음에 신원주와 연정호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음식이 가득 담긴 커다란 쟁반을 하나씩 들고 돌아왔다.

    “잘 먹겠습니다.”

    신원주와 연정호가 이재원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이재원이 씨익 웃었다.

    “그래, 많이들 먹어.”

    강우와 이재원도 간단한 음식을 시켰다. 햄버거와 콜라 하나씩이었다. 한창 먹을 나이인 20대들이니 좀 전에 먹은 짜장면은 이미 에너지로 승화한 지 오래였다.

    “그런데 너희들은 동아리 안 들어?”

    이재원이 신원주와 연정호에게 물었다. 두 사람이 입안 가득 햄버거를 오물거리며 답했다.

    “저는 생각해 놓은 데가 없어요.”

    “저도입니다. 공부하기만도 바빠서요.”

    이재원이 연정호를 보며 살짝 한숨을 쉬었다. 강우는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공붓벌레 연정호가 아니던가.

    “강우 너는?”

    이재원이 강우에게 물었다.

    “저도 딱히요. 뭐…. 농구 동아리 정도는 생각은 하고 있는데….”

    “좋아. 그걸로 정했어.”

    이재원이 손바닥을 부딪치며 크게 소리쳤다. 순간 패스트푸드점의 시선이 확 쏠렸다. 이재원이 아차 싶은 표정으로 고개를 까닥했다.

    “뭘 정해요?”

    이재원이 씨익 웃었다.

    “강우 너랑 같이 만들 동아리.”

    “네?”

    강우가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농구 동아리 만들자고. 동아리 만드는 게 뭐 어렵나? 사람 모으고 뭐 할지 정하면 그게 동아리지.”

    “아…. 그래서 지금 형이랑 나랑 둘이 농구 동아리 만들자고요? 농구 할 줄 알아요?”

    “농구? 이제 배우면 되지.”

    강우가 픽 웃었다.

    “둘이서 무슨 농구 동아리를 만들어요. 농구 경기를 하려면 최소한 다섯 명은 있어야 한다고요.”

    “아…. 그래?”

    이재원이 신원주와 연정호를 바라보았다. 이재원의 시선을 받은 두 사람이 불길함에 움찔했다. 이재원이 씩 웃었다.

    “일단 두 명은 확보.”

    * * *

    늦은 저녁 강의를 마친 강우는 곧장 사무실로 출근했다. 인테리어를 끝낸 태일빌딩의 5층은 강우와 임원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그 아래로 3층과 4층은 사무공간이었고, 2층은 회의실들로 꾸몄다.

    띵.

    강우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4층으로 향했다. 4층은 일본의 김치공장을 위한 사업부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사무실을 들어서자 새로 뽑힌 신입사원들이 인사를 건네왔다.

    “이사님, 오셨습니까?”

    강우가 일일이 인사를 받아주며 부드럽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다들 수고가 많으십니다.”

    어린 강우였지만, 신입사원들의 눈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며칠 안 된 출근이었지만, 강우가 보여준 능력은 그야말로 사기급이었다. 외국어와 서류작성 등등 업무상으로 못 하는 게 없었다.

    덜컥.

    강우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의자에 몸을 던졌다. 강우는 현재 4층에 사무실을 쓰고 있었다. 5층보다는 좀 더 밀접하게 직원들과 소통해야 했기 때문이다. 강우의 온몸이 노곤해지며 절로 긴 숨이 터져 나왔다.

    “으아…. 몸이 세 개 정도면 딱 좋겠는데 말이야.”

    잠시 멍하니 있던 강우가 오늘 학교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학교로 돌아오니 이재원의 예전 모습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었다. 장난기 많고 위트 넘치던 모습 말이다. 물론 회사에 다닐 때도 비슷했지만, 그때는 조금 쫓기는 느낌이기는 했다.

    ‘이제 뭐 후계자 싸움도 마무리 단계고. 재원이 형도 진짜 고생 많았지.’

    똑똑.

    그때, 누군가가 사무실의 문을 노크했다. 강우가 자세를 바르게 잡으며 말했다.

    “네, 들어오세요.”

    덜컥 문이 열리고 신입사원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사님, 회의 시간이십니다.”

    “아…. 시간이 그렇게 됐군요. 알겠습니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에는 김지숙이 있었다. 신입사원을 뽑은 뒤로 과장으로 직급을 올려 이제는 김지숙 과장이었다. 초고속 승진이었지만, 당연하였다.

    “강우 이사님,”

    김지숙이 친밀한 호칭으로 강우를 불렀다. 다른 직원들의 눈빛에 살짝 부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누구도 이렇게 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황규범과 강종민 그리고 김지숙은 동양 무역의 개국 공신이었으니까.

    “다들 앉으세요.”

    강우가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았다. 김지숙 과장을 비롯해 대기하던 직원들이 자리에 앉았다. 김지숙 과장이 강우의 앞에 회의 자료를 놓아주며 말했다.

    “오늘은 공장에서 나올 시제품의 포장에 대한 안건입니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김지숙 과장이 직원 중 한 명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번에 새로 뽑힌 직원으로 김지숙 과장과 함께 김치공장을 지원하는 부서에 배치된 자였다.

    “먼저, 자료를 보며 설명하겠습니다. 먼저 현재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공장 김치는 모두 킬로그램 단위의 포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고객이 보관이 쉬운 비닐 포장 재질로서 저희 또한 이러한 형태로 포장을 할 예정입니다.”

    직원의 말이 끝나자 강우가 슬쩍 손을 들었다. 회의실 안의 시선이 온통 강우를 향해 쏟아졌다. 저 대단한 어린 이사님의 입에서 또 어떤 참신한 아이디어가 나올까 싶었다.

    “일본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김치를 오래 보관해서 먹는다는 개념이 없습니다. 김치를 사더라도 그날 전부 소진하거나 한 끼 정도 먹는 게 전부겠죠.”

    강우의 말에 직원들이 아~ 하는 표정이 되었다. 김지숙 과장은 대놓고 눈을 빛내며 강우를 바라보았다.

    “맛은 우리의 것을 지킨다고 하지만, 마케팅적인 부분은 그 나라의 기호에 맞게 조금 변형하는 게 좋겠습니다. 한국에서 포장되는 방식이 아닌 일본 특유의 소포장 문화를 어찌 적용할 건지 그에 따른 원자재 단가변화와 출시 가격 책정을 다시 논의해보세요.”

    강우의 말에 직원들의 손이 바빠졌다. 각자의 수첩에 연신 메모를 했다. 강우가 눈을 빛내며 회의실을 둘러보았다.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만드는 김치의 첫인상은 바로 포장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작은 부분 하나까지 놓치지 말고 일본인의 기호에 맞게 설정해 보세요.”

    “네, 강우 이사님.”

    김지숙 과장이 대표로 크게 대답했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부드럽게 웃었다.

    “다들 요새 고생들 많은 거 알고 있습니다. 이번 시제품 런칭만 잘 끝나면 당분간은 크게 고생할 일 없을 겁니다. 그리고 김 과장님.”

    “네, 강우 이사님.”

    “법인카드 있는 거로 직원들 밥은 꼭 잘 챙겨 주세요. 한국인은 밥심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강우의 말에 회의실 안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잘 먹고 잘 쉬고 또 일은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강우가 가진 회사의 모습이었다.

    ‘어쩌면 미래의 기억이 있으니 이런 생각을 하는 걸 수도.’

    90년대인 지금의 회사 분위기와는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 가고 싶었다. 회사 구성원들도 다들 젊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강우가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하…. 농구 동아리라….’

    오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강우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허공에 대고 슛을 던지는 폼을 잡았다. 강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뭐…. 못 만들 건 없지. 한번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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