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도 식후경.
완연한 봄이 찾아왔다. 얼굴을 휘감고 지나가는 따듯한 바람에 강우가 스르륵 미소를 지었다.
‘좋네. 이제 캠퍼스 생활의 시작이군.’
개강한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다. 그리고 동양 무역의 신입사원 면접은 매우 잘 마무리되었다. 동양 무역에는 20명의 신입사원과 5명의 경력직 사원이 뽑혔다. 모두 강우와 직원들이 고심해서 뽑은 인재들이었다.
‘이번 주에는 김치 공장에서 시제품이 나온다고 들었는데. 주말쯤 해서 일본에 다녀와야 하나.’
머리에 온통 사업 생각뿐이었다. 지금 이 시기는 정말 중요한 순간이었다. 강우는 계속해서 업무를 떠올리며 걸었다.
“강우야!”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우가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단의 무리가 강우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강우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어, 얘들아.”
잔뜩 몰려오는 무리는 강우의 98학번 동기들이었다. 새터까지 다녀온 동기들은 정말 친해져 있었다. 물론 강우도 새터에 참석해 동기들과는 매우 친해져 있었다.
“강우야, 너 동아리 어디 들 거야?”
“동아리?”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학업과 사업으로 바쁜 강우였다. 동아리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강우 너를 선배들이 잔뜩 노리고 있는 거 알지?”
“나를 노린다고?”
강우가 움찔하며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동기들이 눈을 빛내며 강우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생각해봐라. 넌 선배들이 좋아할 만한 조건을 다 갖췄어. 술 잘 마시지. 잘생겼지. 붙임성 좋지. 선배들이 자기 동아리에 데리고 가려고 잔뜩 노리고 있다고.”
한 동기의 말에 다른 동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또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맞아. 그리고 우리는 네가 이번 1학년 과 대표를 맡아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어. 안 그래?”
주변에서 맞는 이야기라며 동의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강우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미안한데. 내가 정말 시간이 없어서 과 대표는 무리일 거 같아. 그리고 동아리는 생각을 좀 해볼게.”
강우의 말에 동기들이 아쉬움 가득한 탄식을 뱉어냈다. 신환회와 새터에서 보여준 강우의 모습은 과대를 맡기에 차고도 넘쳐 보였다. 리더십도 훌륭했고, 특히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해주고 다독여주는 그런 따듯함이 있었다.
“아쉽다. 우린 강우 네가 과 대표했으면 좋겠는데.”
“시간이 없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지.”
강우가 슬쩍 웃으며 미안함을 표했다.
“대신 미안하니까 오늘 점심은 내가 산다.”
“오오!”
동기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 순간이었다.
“어디 1학년들이 자기 돈을 내고 밥을 사 먹으려고 하는 거야?”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동기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강우가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고는 피식 웃었다. 예전처럼 화려하게 차려입은 이재원이 손을 흔들고 서 있었다.
“재원 선배님!”
강우의 동기들이 우르르 이재원을 향해 몰려갔다. 순식간에 허전해진 주변에 강우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리고는 갈 길을 가려 했다.
“어어? 박강우!”
이재원이 깜짝 놀라며 강우에게 다가왔다.
“왜요?”
“왜요? 선배한테 왜요라니.”
이재원이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그냥 평소 하던 대로 해요. 갑자기 무게 잡으니까 이상하잖아요.”
“그···. 그런가? 역시 그렇지?”
이재원이 볼을 긁적이며 얼굴에서 힘을 풀었다. 동기들이 멍한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지난번부터 느낀 거지만 두 사람은 정말 친해 보였다.
“그럼 가난한 후배들을 위해 오늘 점심은 선배님이 쏘는 건가요?”
강우의 말에 이재원이 씨익 웃었다.
“당연하지. 내가 복학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 아니겠어? 왔노라. 보았노라. 밥을 샀노라.”
“하여간···.”
강우가 실소를 흘렸다. 그에 비해 동기들은 존경심이 가득한 얼굴로 이재원을 바라보았다. 사실 재벌 2세라 하니 대하기 어려울 거로 생각한 인물이 이재원이었다. 하지만 신환회 때부터 보여준 털털함은 도저히 재벌가의 사람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선배님, 정말 사랑합니다!”
동기들이 일제히 이재원을 향해 일제히 꾸벅 인사를 했다. 이재원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오냐! 어린양들아.”
이재원이 동기들을 이끌고 당당히 걸어 나갔다. 강우는 그 뒤를 따라 강의실로 향했다. 그렇게 강의실에 도착한 강우와 동기들이 자리에 앉았다. 역시 강우를 중심으로 몰려 앉은 동기들이었다. 그렇게 강의가 시작됐다.
“지금부터 출석을 부르겠다.”
강의실로 들어온 조교가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미처 들어온 교수의 강의가 시작됐다. 오늘의 첫 수업은 교양수업이었다. 일 학년인 강우는 전공 수업보다는 교양수업이 많았다. 이재원은 전공 수업 위주기 때문에 다른 강의실에 있었다.
“수고들 했어요.”
강의를 마친 교수가 강의실을 나갔다. 고등학교와는 다른 강의실의 분위기와 강의 내용. 모두가 새로웠다. 그렇게 강의가 이어지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얘들아 모여!”
동기들이 우르르 강우의 곁으로 모였다. 강우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이재원이 점심시간에 강우를 따라오라는 말을 남긴 탓이었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밥 얻어먹으러.”
동기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강우를 따라갔다. 강의실을 나오니 다른 선배들도 많았다. 강우와 동기들이 우렁차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들이 슬쩍 웃으며 후배들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리고는 강우를 보더니, 직진해 왔다.
“박강우, 너 우리 동아리 들어라.”
“네? 어떤 동아리죠?”
선배가 강우에게 종이 포스터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선명한 글씨로 ‘메아리’ 라고 적혀있었다.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밴드동아리야. 새터에서 보니까 노래도 잘하고 끼도 있어 보이던데 우리 동아리가 딱 맞아.”
“아···. 네, 생각해보겠습니다.”
강우가 살짝 망설이는 듯 보이자 선배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신환회와 새터에서 보여준 강우의 열창은 전설로 남은 상태였다.
“그럼 다음에 밥 사줄 테니까 동아리방으로 한번 놀러 와.”
“네, 선배님.”
그 말을 끝으로 선배가 씨익 웃으며 사라졌다. 동기들이 강우를 향해 질문을 쏟아냈다.
“강우야, 진짜 우리 동아리는 어때?”
“동아리 진짜 안 할 거야?”
열의에 가득 찬 동기들의 표정에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동아리 선배들에게 특명을 받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강우는 동아리에 가입한다면 이미 생각해 놓은 곳은 있었다.
‘농구 동아리가 들고 싶긴 한데 말이지···.’
사실 강우는 농구를 참 좋아했다. 미래의 기억 속에서도 계속 농구를 즐겼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사회인 농구팀에 꾸준히 나갈 정도였다. 큰 키에 건장한 체격으로 농구를 하기에 딱 알맞은 강우였다. 더군다나 신체 능력이 향상된 지금 얼마나 농구를 잘할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일이 좀 한가해지면 그때 생각해보자.’
상념을 벗어난 강우가 이재원과의 약속장소로 향했다. 이재원은 몇몇 동기들과 선후배들과 함께였다. 강우가 씨익 웃었다.
‘인기 만점이네. 아주.’
그리고 예전의 이재원과는 달리 그런 관심을 즐기고도 있었다. 관심을 이용하라는 강우의 말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이재원이 강우를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었다.
“강우야!”
이재원 주변의 시선이 강우에게 확 쏠렸다. 지금 서울대 경영학과에서 가장 화젯거리인 두 사람이 바로 강우와 이재원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서로 친밀하다는 것도 큰 화제였다.
“아···. 형···.”
강우가 슬쩍 이재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주변을 둘러보며 이재원에게 낮게 말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밥 사는 겁니까?”
“어.”
이재원이 천진한 얼굴로 답했다. 강우가 살짝 한숨을 쉬었다.
“급식소라도 차릴 셈이에요? 이 많은 사람을···.”
말을 이어가던 강우가 움찔했다. 동기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은 온통 이재원을 향해있었다. 강우가 결국 픽 웃었다.
“그래요. 다 사세요. 다 뭐···. 어차피 내 돈 나가는 거도 아니고. 재벌 2세 지갑 사정 걱정하는 것도 우습고.”
“학기 초니까 그런 거야. 다 같이 모여서 선후배끼리 정도 쌓고 얼마나 좋냐.”
강우가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이미 여러 번의 술자리로 진하게 이어진 선후배들이 아니던가. 이재원이 주변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다들 밥 먹으러 갑시다!”
마치 선거 유세장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재원을 필두로 우르르 식당으로 향했다. 사실 강우도 알고 있었다. 밥을 사 먹을 돈들이 없겠는가? 그저 이런 시간이 즐거울 따름일 것이다. 미래의 기억과는 달리 이 시기의 선후배는 무언가 끈끈한 정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강우야, 빨리.”
동기 몇 명이 남아 강우를 재촉했다. 강우가 남은 동기들과 함께 이재원의 뒤를 따랐다. 학생 식당은 사람이 몰려 한 번에 많은 인원이 가기에는 힘들었다. 이재원은 오늘 중국집 배달을 시킬 생각이었다.
“자자 자리들 잡고 앉아.”
이재원의 말에 모두가 둘러앉았다. 이재원이 강우를 보더니, 씨익 웃었다.
“후배야, 주문 좀 받아보시죠.”
“아? 내가요?”
강우가 픽하고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문을 받았다. 수십이 넘는 사람들의 주문이었지만, 강우는 척척 외웠다.
“안 적어도 돼?”
주문이 끝나가자 몇몇 사람들이 걱정했다. 그 많은 메뉴를 다 기억하나 싶었을 것이다. 강우가 씨익 웃으며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이재원이 알려준 중국집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능숙하게 주문을 했다.
“그래, 인원수만 맞추면 대충 먹어.”
몇몇 사람들의 말에 이재원이 씨익 웃었다. 아직 괴물 같은 강우의 능력을 모르나 싶었다.
“조금 있다가 깜짝 놀라지들 마라. 강우 저놈 기억력은 그냥 뇌에 찍어놓는 수준이라니까?”
강우가 멋쩍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주문한 음식이 오기 전까지 왁자지껄 대화시간이 이어졌다. 주로 이재원을 향한 질문 세례였다.
“재원아, 재벌들은 진짜 매일 드레스 입고 파티하고 그래?”
“선배님, 월급은 얼마나 받으세요?”
온갖 이상한 질문에도 이재원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친절하고 재치 있게 답을 해주었다. 흔히 볼 수 없는 재벌가 사람의 소탈한 모습에 주변의 모두가 흠뻑 빠져들었다.
‘역시, 재원이 형의 장점은 저거야. 재벌가답지 않은 소탈함.’
그리고 사람들 대하는 데 있어서 가식이 없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이재원에게 몰린 관심에 강우는 상대적으로 편하게 있을 수 있었다. 몇몇 동기만이 강우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해오고는 할 뿐이었다.
“그런데 강우야, 너 장학금은 왜 포기한 거야?”
동기의 질문에 다른 동기들도 궁금하다는 듯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내가 독립유공자 후손이라서 국가에서 장학금이 나오거든. 그러니까 학교에서 나오는 장학금은 다른 사람한테 기회를 주는 게 맞지.”
“와아~ 진짜? 독립운동 후손이야? 누가 하셨는데?”
동기들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어, 우리 친할아버지.”
동기들이 탄성을 뱉어냈다. 다른 주변의 몇몇 선배들도 강우를 바라보며 눈빛을 달리했다.
“진짜 존경스러운 분이시다. 강우 너 진짜 대단한 가문의 후손이구나.”
“그래? 고맙다.”
강우의 마음이 살짝 벅차올랐다. 돈이 많다는 것보다 그리고 자신이 전체 수석 입학이라는 것보다 지금, 이 순간이 더욱더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다행이네. 내가 어디서 들었는데.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다 가난하다고 하더라. 교육도 잘 못 받아서 학력들도 낮고.”
동기의 말에 강우가 속으로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동기가 악의를 가지고 말한 것은 아닐 것이다. 사실 지금의 현실이 그러하니 알고 있는 대로 말한 것이었다.
“그렇긴 하지 그래서 내가 바꿔보려고.”
“이야! 박강우, 너 멋있다?”
동기들이 엄지를 들며 강우를 칭찬했다. 강우와 동기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강우의 배경을 알게 된 동기들은 과 대표를 맡아야 한다며 난리였다.
“내가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야.”
강우가 겸손하게 거절하려 했다. 그 순간, 강우와 이재원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이재원이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그리고는 마치 들으라는 듯 크게 말했다.
“아 맞다. 강우야, 너희 회사 신입사원 면접은 잘 끝났어? 이번에 25명인가 뽑는다고 했던가?”
“네?”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재원에게 쏠렸던 시선이 스르륵 강우를 향해 돌아섰다. 강우가 뭐라고 할 사이도 없이 이재원의 공격이 이어졌다.
“면접 보느라 힘들었지? 그래도 어쩌겠냐? 우리 박강우 이사가 고생해야 좋은 직원을 뽑을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아니···. 형 지금 갑자기···.”
강우의 등줄기로 한 가닥 식은땀이 흘렀다. 선배들의 시선이 점점 짙은 호기심으로 물들었다. 동기들의 강우를 향한 열기가 점점 뜨거워졌다. 다들 속으로 설마 강우도 숨겨진 재벌인가 싶었을 것이다.
“그래, 힘들었지? 나도 잘 알지 학업이랑 사업 병행하는 게 어디 쉬워? 그래도 강우 너는 잘 해낼 거야.”
강우가 빠르게 손을 저으며 말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배달 왔습니다!”
주문한 음식이 도착했다. 이재원이 이때다 싶어 계산하고는 크게 소리쳤다.
“자자! 일단 먹자고. 금강산도 식후경. 강우 구경도 식후경.”
주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시킨 음식을 찾아갔다. 곧 탄성이 터져 나왔다.
“뭐야? 주문 제대로 했는데? 이걸 다 기억했다고? 그 짧은 시간에?”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미 강우에 대한 이미지는 부풀려질 대로 부푼 상황이었다. 동기들도 역시 강우라며 엄지를 추켜세웠다. 강우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짜장면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이재원을 바라보았다.
‘하···. 저 형이 진짜.’
강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재원도 질세라 씨익 웃었다.
‘나만 당할 수는 없지.’
강우와 이재원이 서로를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