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생활 잘해보자. 후배님.
“다녀오겠습니다.”
강우가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조금씩 느껴지는 봄 내음에 강우의 얼굴이 스르륵 풀렸다. 이윽고 강우가 아파트 단지를 벗어났다. 그리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뚜르르. 뚜르르.
지하철역에 도착하자 강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딸칵 전화를 받으니 이재원이 대뜸 물었다.
-어디냐?-
“학교 가는데요?”
-벌써?-
“네, 학교 가서 신 교수님 뵈려고요.”
-그래, 알겠다.-
툭 하고 전화가 끊겼다. 목소리를 보니 상당히 바쁜 듯했다.
“뭐야···. 싱겁게.”
강우가 어깨를 으쓱하며 핸드폰을 품에 넣었다.
띠리리리.
지하철이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강우가 안전선 밖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치이익.
이윽고 지하철 문이 열리고 강우가 안쪽으로 몸을 던졌다. 학교까지 가는 길은 제법 멀었다. 3호선을 탔던 강우는 2호선으로 갈아타고 서울대입구역에 내렸다.
‘아···. 이거 상당히 머네.’
집에서 10분도 안 걸리던 고등학교를 떠올리니 아쉬움이 들었다. 하지만 멀어도 무언가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새벽부터 끌려가 감옥처럼 갇힌 듯한 기분은 들지 않을 테니까. 강우는 또 버스를 탔다.
“감사합니다.”
이윽고 강우가 버스에서 내렸다. 드디어 서울대에 도착한 것이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설렘이 담긴 얼굴들이 여럿 보였다. 모두 오늘을 위해 모인 새내기들이 분명했다.
‘가볼까.’
강우가 힘차게 정문으로 들어섰다. 이미 아르바이트를 위해 여러 번 왔던 곳이었다. 하지만 신입생으로 들어서는 느낌은 사뭇 달랐다. 강우는 거침없이 캠퍼스를 걸었다. 그리고는 경영대학 건물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자리에 계시려나.’
강우가 핸드폰을 꺼내 원주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들리고 덜컥 통화가 연결됐다.
“여보세요? 아버지 어디세요?”
-어, 강우구나? 나 지금 교수실에 있지.-
“저 지금 경영대 앞이에요. 잠깐 들려도 돼요?”
-오~ 그랬구나. 어서 와. 사무실에 있을 테니까.-
“네, 금세 갈게요.”
강우가 거침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원주 아버지의 교수실 앞에 섰다.
똑똑.
노크하자 안쪽에서 원주 아버지가 들어오라고 말했다. 강우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원주 아버지가 반겨주었다.
“이야~ 이게 누구야? 우리 경영대학의 자랑 서울대 전체 수석 박강우가 아닌가?”
“네에?”
원주 아버지의 장난스러운 말에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원주 아버지가 강우의 등을 두들겨 주며 자리를 권했다.
“앉아라.”
“네.”
강우와 원주 아버지가 마주 보고 소파에 앉았다.
“학교는 웬일로 들렸어?”
“신입생환영회도 있고요. 아버지 얼굴도 좀 보고요. 겸사겸사해서요.”
원주 아버지가 시계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
“아···. 오늘이 신입생환영회 있는 날이었구나.”
“네. 있다가 저녁에요.”
원주 아버지가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서울대에서 술을 많이 먹이기로 유명한 곳이 바로 경영학과가 아니던가.
“분위기가 그렇다고는 하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말아. 못 마시겠으면 못 마시겠다고 해.”
“네, 걱정하지 마세요. 적당히 조절해서 마실게요.”
물론 대답을 하는 강우도 그럴 수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원주 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이며 강우와 같은 생각을 했다. 오늘은 그야말로 먹여 죽이는 날이 아니던가.
“이번 연도에는 별 사고 없이 잘 넘어가야 할 텐데 말이야.”
“그러게요···.”
매년 신입생환영회에서 벌어지는 사건·사고는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다. 강우가 문득 미래의 기억을 떠올렸다. 대학은 달랐지만, 먼 미래에도 크게 바뀌지는 않는 문화였다. 원주 아버지가 긴 숨을 뱉어냈다.
“아무튼, 이제 개강하면 자주 보겠구나. 일 학년이라 자주는 못 보겠지만 말이야.”
“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강우가 씨익 웃었다. 원주 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조금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남들은 대학 들어오면 자유다 뭐다 하지만 강우 너는 공부 열심히 할 거라 믿는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대견하다. 학업에 또 사업에 재원이도 그렇고 너고 그렇고.”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원주 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얼마 전 강우 아버지의 부탁처럼 최선을 다해 가르칠 생각이었다. 물론 대학은 자신의 노력이 중요한 곳이었다. 하지만 강우라면 열심히 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 그럼 오랜만에 점심이나 같이 먹을까?”
“구내식당이죠?”
원주 아버지가 씨익 웃었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죠. 오늘은 제가 사겠습니다. 스승님.”
“그래, 제자야.”
두 사람은 식당으로 가서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자 어느덧 약속 시각이 다가왔다. 강우는 원주 아버지와 헤어져 약속장소로 향했다.
‘신림동이라···.’
서울대학교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신림동 녹두거리에 도착하니 이미 주변은 학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과별로 이루어지는 신환회가 제법 진행되고 있는 듯했다. 강우가 목적지로 향했다.
덜컥.
강우가 녹두거리에서 유명하다는 전집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구수한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강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한쪽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왔다!”
막걸릿집 안의 시선이 일제히 강우를 향해 쏟아졌다. 수십이 넘는 시선이 쏟아지자 강우가 움찔했다. 그리고는 슬쩍 시계를 확인했다. 오늘의 모임 시간은 저녁 5시였고 아직 10분이나 남은 상황이었다.
‘늦은 줄 알았네.’
그때 누군가의 선창을 시작으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전체 수석!
뜨거운 환호는 반가움인지 선배들의 장난스러움인지 헷갈렸다. 하지만 선배들은 내심 기쁜 것이 사실이었다. 작년에는 자연대에서 전체 수석이 나왔고, 인문계 수석은 법대를 갔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애초에 대부분의 인문계 수석들이 법대를 선택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감사합니다.”
강우가 멋쩍게 웃으며 주변을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앞으로 수년을 함께할 선배들이자 동기들이었다. 항상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우는 잘 알고 있었다.
“이쪽으로 와서 앉아.”
강우가 오늘의 진행을 맡은 2학년 과 대표의 안내를 받아 한쪽 자리에 앉았다. 그 자리에는 먼저 온 신입생들 즉 강우의 동기들이 앉아있었다. 잔뜩 긴장하거나 겁먹은 모습에 강우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긴장될만하지···. 여기 분위기에 주눅들만도 하고.’
사방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선배들은 거침없었다. 하지만 이제 겨우 OT를 통해 조금 알게 된 신입생들이었다. 서먹하기도 할 것이다.
“안녕? 반갑다. 박강우야.”
강우가 동기들을 향해 인사를 했다. 회사 일로 OT는 참석하지 못했던 강우였다. 동기들과는 초면이었다.
“어어···. 안녕 반가워.”
동기들이 강우를 힐끔거리며 인사를 건네왔다. 강우는 동기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다부진 체격과 남자답게 생긴 강우의 외모였다. 그리고 자신들과 다른 여유가 엿보였다. 그런 강우의 모습에 동기들이 속으로 감탄을 했다. 동기들과 인사를 나누는 강우에게 선배들의 뜨거운 시선이 계속 쏟아졌다.
“자 받아!”
질문 공세 이전에 술잔이 먼저 날아들었다.
“네? 아···. 네.”
오자마자 대뜸 술이라니 역시 신환회다웠다. 선배가 내민 잔도 범상치 않았다.
‘이건 술잔이 아니라···. 그냥 대접이네.’
먹여 죽이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강우는 주량도 대단했다. 망설임 없이 잔을 받아 내밀었다.
콸콸.
막걸리가 쏟아지듯 채워졌다. 주변에서 선배들이 마시라며 크게 연호했다. 강우가 슬쩍 웃은 뒤 단숨에 술을 비웠다.
“오오!”
“좀 마시는데?”
주변에서 또 환호성이 터졌다. 강우가 입가를 스윽 닦으며 잔을 내려놓았다. 동기들도 살짝 커진 눈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선배들의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강우는 선배들의 질문에 답하며 연신 술잔을 받았다.
“자! 그럼 다 모인 거 같으니까 신환회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2학년 과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그러자 몇몇 선배들이 주방으로 가서 커다란 사발을 들고나왔다. 강우가 방금 받은 잔이 우스워 보일 정도의 크기였다. 선배들이 사발에 술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못 마시겠으면 나한테 말해.”
강우가 동기들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동기들이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강우가 씨익 웃었다.
“술 못 마시겠으면 내가 흑기사 해준다고.”
강우의 말에 몇몇 동기들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그사이 술잔이 채워지고 신입생들의 앞에 커다란 사발이 하나씩 놓였다. 맨 처음 차례는 남자 동기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학번을 외치고 출신 고등학교까지 이야기했다.
“마셔라! 마셔라!”
선배들이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남자 동기가 눈을 딱 감고는 사발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발에 담긴 술을 한 번에 마시기가 쉬울 리가 없었다. 금세 우욱 하더니 사발에서 입을 뗐다.
“어어? 안 마시는 거야?”
선배들의 재촉에 동기가 술을 벌컥 마셨다. 그다음은 여자 동기의 차례였다. 역시 자신의 학번과 출신고등학교를 말하더니 사발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마셔라! 여자라고 안 봐줘!”
여자 동기가 울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내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렇게 강우의 차례가 돌아왔다.
“안녕하십니까? 경영대 98학번 박강우입니다. 서울 양서고등학교 나왔습니다!”
강우의 우렁찬 목소리에 몇몇 선배가 눈을 빛냈다. 아마 양서고등학교 출신인가 보다. 강우가 또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그렇게 신환회의 서막이 오르고 죽자고 마시는 술판이 이어졌다.
“강우야, 고마워.”
“아니야.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여자 동기 몇 명이 강우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강우는 정말 버티지 못하겠다는 동기들의 술을 대신 마셔 주었다. 밖에서는 한계에 다다른 남자 동기들이 열심히 마신 술을 비워내고 있었다.
“와! 저놈 공부만 잘하는 게 아니라 주량도 끝내주네.”
선배들이 강우를 괴물 보듯이 바라보았다. 마셔도 마셔도 끝이 없는 강우의 주량 때문이었다. 강우 자신도 놀랄 만큼의 주량이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죽자고 마셔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일이 걱정이긴 하네.’
그렇게 신환회가 이어졌다. 동기들은 차례대로 불러나가 장기자랑도 했다. 민망한 듯 귀여운 신입생들의 장기자랑에 선배들이 크게 웃으며 즐거워했다.
“잘하네! 우리 새내기들!”
이윽고 강우의 차례도 돌아왔다. 강우가 술집의 중앙에 섰다.
“어디 전체 수석 장기자랑은 뭔지 좀 보자!”
선배들이 잔뜩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춤은 좀 그렇고···. 노래나 한 곡 하자.’
강우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크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선곡은 한참 화제인 김강호라는 로커의 노래였다. 강우의 목에서 낮은 중저음이 흘러나왔다.
“뭐···. 뭐야? 잘하는데?”
왁자지껄하던 술집 안에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이윽고 클라이맥스에 다다르자 강우에게서 찢어질 듯한 고음이 터져 나왔다.
“대박!”
선배들과 동기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의 노래 실력은 대단했다. 마치 가수가 부르는듯한 노래 솜씨에 누구 할 것 없이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강우의 노래가 끝났다.
“감사합니다!”
강우가 꾸벅 인사를 했다.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커다란 박수 소리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오오!”
“새터 장기자랑 때 볼만 하겠는데?”
일부 여자 선배들과 동기들이 왜인지 모르지만, 얼굴까지 붉혔다. 강우가 꾸벅 인사를 하고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벌컥.
술집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섰다. 손뼉을 치던 선배들이 순간 멍한 표정이 되었다.
“어어? 선배님?”
“맙소사!”
강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형이 왜 거기서 나와요?”
술집의 입구로 가벼운 차림을 한 이재원이 서 있었다. 그림같이 멋진 외모는 허름한 차림임에도 변함없었다.
“재원이 형이다!”
선배들이 이재원을 알아보고 폭발적으로 반응했다. 이재원이 대진 그룹의 2세라는 것이 알려진 탓이었다. 이재원이 씨익 웃으며 강우를 향해 다가왔다.
“이야~ 우리 동생 노래 솜씨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강우를 향한 이재원의 친밀함에 선배들과 동기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신입생 환영해주러 온 거예요? 바쁘다며요?”
“어, 겸사겸사. 바빠도 할 건 해야지. 이 좋은 장면을 놓칠 수는 없으니까.”
이재원이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말을 이어갔다.
“아 그리고 나 이번 학기에 복학했다. 학교생활 잘해보자. 후배님.”
이재원이 강우의 어깨를 두들겨 준 후 자리로 가서 앉았다. 강우가 피식 웃으며 이재원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이재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크게 소리쳤다.
“오늘 마음껏들 마셔 여기는 내가 산다!”
이재원이 골든벨을 울렸다. 술집 안에 떠나갈 듯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