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402)
  • 저희 아들 잘 부탁드립니다.

    건물의 이 층이 시끌벅적했다. 주변을 가득 채운 사람들에 강우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많은 손님이 찾아와 주었다. 그리고 강우의 주변에는 든든한 친구들도 함께였다.

    “진짜, 우리 아빠 비상금 몰래 챙길 때 빼고 저렇게 좋아하는 거 처음 본다.”

    김춘배가 자신의 아버지를 보며 실소를 흘렸다. 아버지는 친구 아버지들과 함께 앉아 박장대소하고 있었다. 유부남들의 모임은 항상 즐거웠다.

    “난 우리 아빠가 술을 안 먹고도 저렇게 잘 어울릴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

    남재식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자신의 아버지는 심지어 콜라를 마셨음에도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남재식이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아빠처럼 술 안 먹고도 취한 척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뭔 소리야?”

    뜬금없는 혼잣말에 신원주가 피식 웃었다. 남재식이 한숨을 푹 쉬었다.

    “조금 있으면 신입생 환영회 한다더라. 술 엄청나게 먹인다던데 걱정이 태산이야.”

    “걱정도 팔자다. 너 어차피 한잔 먹으면 바로 기절할 텐데. 설마 기절한 사람 입에 깔때기라도 꼽겠어?”

    김춘배의 말에 남재식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강우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위급하면 우리한테 연락해. 112에 신고해줄 테니까.”

    “아···. 경찰에?”

    남재식의 표정이 더욱 창백해졌다. 그러자 강우가 남재식의 등을 툭 하고 쳤다.

    “괜찮아. 그냥 애초에 술을 못 마신다고 해.”

    “그래야지 반드시.”

    강우가 친구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다행히도 김춘배와 남재식도 대학에 붙었다. 특히 김춘배는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합격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실기를 끝내주게 잘 본 거지.’

    남재식은 국민대에 합격했다. 이과로 교차지원을 해 컴퓨터 공학과에 붙었다. 본격적으로 게임개발자의 길을 걷겠다며 의지를 불태웠다. 강우가 슬쩍 옆쪽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친구 아버지들과 함께 참 즐거워 보였다. 어머니는 여자들끼리 뭉쳐 수다 삼매경이었다. 아버지들에게 질 수 없다며 어머니들만의 모임도 급히 결성하셨다.

    “나 잠깐, 회사 분들한테 갔다 올게.”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먹는 데 집중한 친구들이 팔을 휘휘 저었다. 강우가 회사 사람들이 모여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다들 많이 드셨어요? 음식 부족하면 더 드릴까요?”

    강우의 말에 황규범 부장이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는 자신의 볼록 나온 배를 탕탕 쳤다.

    “아니야. 이 배 봐라. 엄청 먹었어.”

    “맞아요. 강우 학생, 우리 남편이 동양 무역 다니고 나서 살이 찌고 있다니까요?”

    황규범 부장의 아내가 남편의 배를 바라보며 말했다. 강우가 입꼬리를 올리며 직원들의 옆자리에 앉았다. 강종민 대리가 의자를 옆으로 살짝 옮겨 강우의 자리를 넓혀주었다.

    “이제 입학 얼마 안 남았지?”

    “네, 다음 주예요.”

    강종민 대리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학교생활 시작하면 이제 회사는 잘 못 나오겠네.”

    “강 대리님, 지긋지긋한 수험생 생활 끝내고 이제 자유의 몸인데 한동안은 놀겠죠.”

    김지숙 대리가 자신도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씨익 웃었다.

    “사실 대학 다니면서도 틈나는 대로 사무실에 나올 생각이에요.”

    “정말?”

    강종민 대리와 김지숙 대리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그리고는 동시에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나이는 자신들보다 한참이나 어린 강우였다. 하지만 같이 있을 때는 왜인지 모를 안정감을 느끼고는 했다.

    “네, 사실 이거 비밀이었는데요.”

    비밀이라는 말에 황규범 부장의 얼굴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강우가 목소리를 낮추며 조용히 말했다.

    “중국에 합작법인을 세울 예정이거든요. 그래서 직원들도 많이 보충할 거고요. 당분간 진짜 바쁠 거예요.”

    세 명의 직원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저랑 아버지가 중국에서 금탑 고추를 재배하려고 한다는 건 알고 있죠? 그 건으로 중국 정부에서 길림성의 땅을 임대받을 거거든요. 앞으로 지금보다 더 정신없어질 거예요.”

    “종자 개량을? 그거 돈이 만만치 않게 들어가는 일일 텐데···.”

    황규범 부장이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동양 무역이 중소기업치고 자본금이 튼실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미 법인의 이름으로 빌딩까지 사들인 차였다. 남은 자금은 김치 공장을 위해 필요한 자본이었다.

    “아···. 합작법인에 저희 자금은 안 들어가요. 투자자를 찾았거든요.”

    강우의 말에 직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미 일본에서의 일을 들어 알고 있었다.

    “설마?”

    직원들의 시선이 스르륵 한곳을 향했다. 그곳에는 이재원과 강용이 그리고 밝은 표정의 할아버지가 있었다. 직원들의 시선을 따라간 강우가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스르륵.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는 강우였다.

    “맞아요. 저희 할아버지 덕분이죠. 중국에 남으신 독립운동가세요.”

    세 명의 직원들이 탄성을 뱉어냈다. 정말이지 파도 파도 끝을 모르는 할아버지의 인맥이었다.

    “저런 분이 여태껏 초야에 묻혀계셨던 거잖아.”

    강종민이 존경심이 담긴 눈빛을 했다. 김지숙도 짧게 한숨을 뱉어냈다.

    “어디 어르신뿐이겠어요?”

    황규범 부장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강우를 보며 물었다.

    “합작 회사의 자본 규모는 얼마나 되는 건데?”

    “동양 무역의 한···. 다섯 배요?”

    잠시 셈을 해본 직원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사···. 삼백억?”

    “맙소사···.”

    강우가 입에 손을 가져다 대며 낮게 말했다.

    “대신 중국에서 사업을 하는 데 대부분 사용될 거예요. 자본을 가져오기도 쉽지 않고요. 따로 쓰일 곳도 있어요.”

    “대단하다. 대단해. 그런 큰 자금을 투자하실 분이 있다니. 그럼 중국에서 자본을 대고 우리는 종자 기술을 담당하는 거겠군.”

    황규범 부장이 대번에 사업의 얼개를 알아챘다. 그리고는 말을 이어갔다.

    “자본을 중국에서 대는 만큼 입김은 그쪽이 강할 거고. 중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어쩔 수 없긴 하지만.”

    강우가 말없이 웃었다. 자신이 회사의 대주주라는 것을 알면 어떤 표정일까도 싶었다.

    ‘나도 믿기지 않는데 말이지.’

    황규범 부장이 멍한 표정의 직원들에게 말했다.

    “이거 지금보다 더 바빠진다니 설레는걸? 우리 동양 무역을 남부럽지 않을 회사로 키워보자고.”

    책임감 넘치는 황규범 부장의 말에 직원들이 전의를 불태웠다.

    “네, 부장님. 우리가 창사 멤버니까 중심을 꽉 잡겠습니다!”

    “창사 멤버는 아니지. 1기 사원이면 모를까요.”

    김지숙 대리가 강종민 대리의 말을 정정해주었다. 강종민 대리가 씨익 웃었다.

    “아무려면 어때? 나도 이제 선배님 소리 듣는다는 거 아니야?”

    “아휴···. 하여간.”

    김지숙 대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강우가 흐뭇하게 웃었다. 정말이지 사람 하나는 잘 뽑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 뽑을 사람들도 지금 직원들만 같았으면 했다.

    “아무튼, 세 분만 알고 계세요. 곧 신입사원 뽑을 거니까. 그때는 세 분이 면접에도 신경을 써 주시고요.”

    “강우 너는 면접에 참석 안 할 거야?”

    강종민 대리가 강우를 보며 물었다. 면접 당시 강우에게서 느꼈던 아우라를 잊을 수 없었다. 새 직원을 뽑는데 강우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저도 참가하죠. 그런데 뽑는 숫자가 제법 돼서 제가 전부 체크 할수는 없으니까요. 저는 최종 면접에만 관여할 생각이에요. 그전에는 제가 합격자 뽑는 기준을 정리해서 알려드릴 테니까요. 거기에 충실해서 뽑아주시면 됩니다.”

    세 명의 직원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강우는 세 사람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나이가 어린 강우였지만, 상대방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강우와 세 직원은 그 뒤로 한참이나 업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강우를 바라보던 원주 아버지가 탄성을 뱉어냈다.

    “자네 아들은 보면 볼수록 대단해. 굳이 대학 졸업장이 필요할까 싶기도 하다니까? 시간 낭비가 아닐까 싶어.”

    아버지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한국에서 사업하려면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학연, 지연이 중요한 나라니까요.”

    “그렇긴 하지. 이제 곧 개강인데 강우 가르칠 생각에 조금 설레기도 하는군.”

    아버지가 원주 아버지를 보며 눈을 빛냈다.

    “형님, 저희 아들 잘 부탁드립니다. 능력이 좋고, 똑똑해도 늘 겸손하고 올바르게 자랐으면 합니다. 사업가가 돼서도 말이죠. 형님이라면 제 아들을 잘 가르쳐 주실 거라 믿습니다.”

    “걱정하지 마. 자네 아들은 누구 밑에 가도 올바르게 배울 아이니까.”

    아버지와 원주 아버지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유부남들의 술자리에 뛰어들었다.

    * * *

    늦은 밤, 강우가 모는 승용차가 태일 빌딩의 근처에 나타났다. 현판식이 끝나고 친구 아버지들과 2차를 가신 아버지를 모시러 온 것이다. 할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강용이는 이미 집에 데려다준 후였다.

    빵.

    강우가 살짝 경적을 울렸다. 빌딩을 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아버지가 살짝 놀라더니 승용차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활짝 웃으며 달려왔다.

    덜컥.

    문을 열고 조수석에 앉은 아버지의 입에서 달곰한 술 냄새가 물씬 풍겼다. 강우가 슬쩍 운전석 창문을 내렸다.

    “약주 많이 하셨어요?”

    “응, 조금.”

    아버지의 애매한 대답에 강우가 입꼬리를 올렸다.

    “으음.”

    아버지가 의자를 뒤로 젖히며 침음성을 흘렸다. 강우가 차를 부드럽게 출발시켰다.

    “피곤하세요?”

    “그러게. 어째 GIC까지 다닐 때보다 더 힘드네.”

    “일이 많아져서 그러죠.”

    아버지가 살짝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다음 달이면 김치 공장에서 시제품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는데 말이야.”

    “일단 백화점 위주로 마케팅하실 거죠?”

    “그래야지. 식품이라는 게 첫인상이라는 게 정말 중요한 거거든. 백화점에서부터 홍보하는 게 좋을 거야.”

    강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활성화되지 않은 일본의 김치시장이었다. 마땅히 파고들 시장도 없는 게 현실이었다. 백화점이라는 공간이야말로 홍보에는 최적의 장소가 될 것이다.

    “후생성에서 허가가 쉽게 나올지는 몰랐어요. 엄청 까다롭다고 들었는데요.”

    “일본에 계신 할아버지 친구분들이 힘써준 덕분이지.”

    강우가 작게 탄성을 뱉어냈다.

    “할아버지 안 계셨으면 이 사업은 시작도 못 했을 거예요.”

    “강우, 네 말이 맞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자.”

    “네, 아버지.”

    강우가 씨익 웃으며 운전에 집중했다. 일본의 김치 공장에서 만들어질 김치는 모두 한국산 배추와 고춧가루로 만들기로 했다. 그 외의 재료들도 모두 한국산을 썼다. 단가가 매우 높아 가격 책정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중국산 고춧가루의 쓴맛이 일본인들의 입맛에 맞지 않을 테니까.’

    단가를 낮추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중국에서 금탑 종자를 생산해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 아버지도 바삐 움직이고 계셨다.

    “아버지 피곤하면 좀 주무세요.”

    “괜찮아. 우리 아들이랑 대화하면서 가는 시간이 제일 좋다.”

    강우와 아버지가 스르륵 입꼬리를 올렸다. 강우가 다시 한번 아버지에게 말했다.

    “집에 가서 마저 이야기하면 되죠. 좀 주무세요.”

    “그럴까?”

    이윽고 아버지의 고개가 스르륵 창문에 닿았다. 강우가 면허를 따면서 조금씩 운전을 하지 않는 아버지였다. 미래의 기억 속에서도 아버지는 강우가 운전하는 차를 가장 편해하셨다. 강우가 힐끗 옆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어느새 옅게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덜컹.

    강우의 승용차가 방지턱을 넘어 현대 아파트로 들어섰다. 다행히도 아버지는 깨지 않았다. 강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와···.”

    빼곡히 주차된 차들에 강우가 탄식했다. 강우는 한참이나 주변을 빙빙 돌았다. 마침내 자리를 찾은 강우가 주차를 끝냈다.

    “아버지.”

    강우가 아버지를 살짝 흔들어 깨웠다. 아버지가 움찔하며 몸을 일으켰다.

    “다 왔어?”

    “네, 주차도 끝났어요.”

    아버지가 기지개를 크게 하며 하품을 했다. 찔끔 눈물이 나왔는지 손으로 눈을 벅벅 비볐다.

    “이야~ 역시 우리 아들 운전 참 잘해. 여기까지 오는지도 몰랐다.”

    “하하···.”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아버지가 차에서 내렸다. 강우도 사이드 브레이크를 꽉 채우고 내렸다. 차에서 내리니 아버지가 고개를 들어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느새 어두워진 주변을 아파트에서 나오는 빛이 밝히고 있었다.

    “꼭 등대 같네.”

    아버지의 말에 강우가 슬쩍 웃었다. 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씨익 웃었다.

    “맥주 한 병 사갈까?”

    “한 병까지고 되겠어요? 세 병 정도 사가죠.”

    “음···. 엄마한테 안 혼날까?”

    강우가 픽 웃었다.

    “제가 있잖아요. 그리고 오늘은 좋은 날이잖아요.”

    “그래, 좋은 날이지. 그리고 우리 장남도 있지. 고맙다 아들.”

    강우와 아버지는 근처의 슈퍼에 가서 병맥주와 안줏거리로 과자와 쥐포를 샀다. 그리고 다행히도 어머니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강우는 곧장 씻고 자리에 누웠다.

    “.....”

    천장을 바라보며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 주에는 대학 생활의 첫 번째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강우가 얼마 전 받은 97학번 과 대표의 연락을 떠올렸다. 집으로 직접 전화가 와서 강우와 통화를 했다.

    ‘안가면···. 안 되겠지?’

    강우가 미래의 기억을 떠올리며 픽하고 웃었다. 대학은 달랐지만, 이미 신환회나 OT 등을 경험해본 강우였다.

    ‘그 시기에는 왜들 그리 죽자고 마셔댔는지···.’

    하지만 미래에도 강우는 항상 최후의 승자였다. 그리고 이번 신환회에서도 최후의 일인이 되리라 다짐했다.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느낀 강우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뛰어난 신체를 물려준 부모님에게 감사하며 스르륵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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