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3/402)
  • 어? 울다가 웃으면.

    사람들로 북적이는 명동 거리의 한쪽에 태일 빌딩이 있었다. 총 5층으로 이루어진 빌딩은 오늘 새 주인 맞이에 한창이었다.

    “하아···. 이런 날이 오다니.”

    아버지가 빌딩을 바라보며 입이 찢어질 듯 웃었다. 강우도 물끄러미 빌딩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법원에서 낙찰을 받던 순간이 생생했다. 차순위 낙찰가와 얼마 차이가 나지 않던 짜릿한 경험이었다. 그렇게 낙찰을 받은 빌딩은 후에도 몇 가지 처리할 게 있었다. 남아있는 임차인들의 문제였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임차인들의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지.’

    어차피 경매로 시세보다 훨씬 저렴하게 산 빌딩이었다. 강우와 아버지는 법원에서 보호받는 임차인들을 제외한 다른 임차인들에게도 보증금을 모두 내주었다.

    “사장님, 축하드립니다.”

    그때, 일 층 카페 사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층에 있던 임차인들은 모두 보상을 받고 나간 상태였다. 다만 일 층의 카페 사장은 장사를 더 하고 싶다고 해서 남기로 했다. 건물의 등기를 동양 무역으로 마치고 임대차 계약도 새로 한 상태였다.

    “감사합니다. 오늘 종일 좀 시끄러워서 장사에 지장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오늘은 우리 건물의 잔칫날 아닙니까. 오늘 여기 오시는 손님들 커피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때, 멋지게 차려입은 강용이가 건물에서 뛰어나왔다.

    “형아! 엄마가 불러. 빨리.”

    “어, 알겠어.”

    강용이는 잔뜩 신나 있었다. 어린 강용이 건물을 샀다고 좋아할 리는 없었다. 그저 가족 모두가 들떠있으니 즐거운 것이다. 강우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 이 층으로 올라갔다. 널찍한 이 층에는 커다란 탁자들이 놓여 있었다. 오늘 이곳으로 많은 사람이 초대될 것이었다.

    “강우야, 거기 탁자 위에 전지 좀 크게 깔아줄래.”

    “네, 엄마.”

    어머니는 앞치마를 두르고 분주했다. 아버지는 뷔페업체를 부르자 했지만, 어머니가 완강히 거절했다. 오늘같이 좋은 날 자신의 손으로 손님들을 접대하고 싶다고 했다. 힘든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보였다.

    “주문하신 떡 왔습니다.”

    먼저 도착한 것은 근처 떡집에서 주문한 떡이었다. 강우가 떡 상자를 받아들었다. 시루떡 특유의 달콤한 냄새가 강우의 코를 찔렀다.

    “여기 있어요.”

    어머니가 떡값을 치렀다. 배달부가 슬쩍 주변을 보더니 말했다.

    “오늘 개업하시나 봐요. 축하드립니다.”

    “네, 고맙습니다.”

    어머니가 활짝 웃었다. 배달부가 돌아가자 어머니가 떡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는 시루떡을 큼지막하게 썰어 일회용 접시 위에 놓았다. 이윽고 주문한 머리 고기도 도착했다. 근처 슈퍼에서 주문한 술들도 도착했다.

    “형아, 나는 뭐 할까?”

    강용이도 돕겠다며 팔을 걷어붙였다. 강우가 씨익 웃으며 강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강용이는 형이 전지 깐 탁자 위에 숟가락이랑 젓가락 놔줘.”

    “응!”

    강용이가 수저를 준비해 탁자 위에 놓기 시작했다. 아직 어리지만 꼼꼼한 성격의 강용이답게 가지런히 놓았다. 강용이의 콧잔등으로 송골송골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손님을 맞이할 자리 세팅이 끝났다.

    “이제 음식들을 준비하면 될 거 같은데.”

    어머니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무엇부터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 순간이었다.

    “사모님, 안녕하세요. 늦어서 죄송해요.”

    김지숙 대리가 헐레벌떡 나타났다. 편안한 복장을 한 채였다.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대리님, 오늘 쉬는 날이잖아요.”

    “응, 그래도 회사 건물 현판식 하는 날인데 빠질 수는 없지.”

    김지숙 대리의 말에 어머니가 싱긋 웃었다.

    “그래도 쉬는 날인데 그냥 놀다가 가요.”

    “아니에요. 원래 출근해야 하는 날이었으니까요.”

    김지숙 대리가 능숙하게 앞치마를 멨다. 오늘은 평일이었다. 그러니 출근하는 날이 맞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직원들에게 하루 휴식을 주었다. 어차피 사무실 이사로 정신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요. 미안해서 어떡해요.”

    “아니에요. 저도 좋아서 하는 거예요.”

    김지숙의 말이 끝나자 강종민 대리도 나타났다.

    “사모님, 안녕하십니까? 도울 게 없을까요?”

    어머니가 입을 가리며 활짝 웃었다. 든든한 지원군들의 등장이었다. 김지숙 대리는 어머니 옆에 자리했다. 그리고는 한쪽에 놓인 커다란 들통을 가리켰다.

    “사모님, 저건 육개장인가요?”

    “맞아요. 내가 집에서 끓인 거예요.”

    김지숙 대리가 들통에서 국물을 조금 떠서는 후루룩 먹어보았다. 그리고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아~ 진짜 맛있어요.”

    “그래요? 다행이다.”

    어머니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강종민 대리가 슬금슬금 다가오더니 육개장을 맛보았다. 그리고는 역시 화들짝 놀라며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최고입니다.”

    강종민 대리가 엄지를 ‘척’ 하고 내밀었다. 잠시 후, 황규범 부장이 이 층에 나타났다. 가족들과 함께였다.

    “부장님!”

    강종민 대리가 반가워하며 황규범 부장을 반겼다.

    “어어~ 강 대리, 먼저 와있었어?”

    “조금 전에 왔습니다.”

    황규범 부장이 김지숙 대리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김 대리도 있네.”

    “오셨어요.”

    황규범 부장의 아내가 어머니를 향해 다가왔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사모님. 처음 봬요.”

    황규범 부장의 아내도 대번에 앞치마를 둘러멨다. 어머니의 얼굴에 미안함이 가득 차올랐다.

    “다들 이러려고 부른 게 아닌데···. 오늘은 정말 제가 대접하고 싶었어요.”

    “아니에요. 사모님,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제가 도울게요.”

    황규범 부장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옆에 있는 아들을 툭하고 쳤다.

    “인사해라. 박강우. 알지? 이번에 수능 만점자에 서울대 수석 입학자.”

    “안녕하세요 형, 황재환입니다.”

    강우가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제 중3이 됐다던 아들이었다.

    “그래, 만나서 반갑다. 박강우야.”

    황규범 부장이 아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강우야, 우리 아들도 서울대 가는 게 목표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우리 아들 공부 좀 봐줘.”

    “네, 부장님.”

    황재환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수능 전국 수석의 공부 지도라니 설렐 만도 했다.

    “아 참! 밖에 화환들 봤어?”

    황규범 부장이 직원들을 향해 말했다. 열심히 일하던 김지숙 대리와 강종민 대리가 황규범 부장을 바라보았다.

    “화환요? 우리 왔을 때는 별로 없었는데?”

    “사장님 인맥도 대단하지만, 할아버님 인맥이 엄청나다고 하던데요.”

    황규범 부장이 목을 가다듬더니 입을 열었다.

    “대진 그룹 회장님이 화환을 보냈더라고.”

    김지숙 대리와 강종민 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재원과 강우 가족의 관계를 알고 있지 않던가.

    “회장님이요?”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뭐···. 비서실에서 보냈나 보죠.”

    강우의 말에 직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지원군이 합류하자 상차림에 속도가 붙었다. 머리 고기가 놓이고 그 옆에 김치가 놓였다. 주변에 기본적인 세팅이 끝났다.

    “고마워요. 도와들 줘서 금세 끝났어요.”

    어머니의 말에 강종민 대리와 김지숙 대리가 멋쩍게 웃었다. 황규범 부장의 아내가 싱긋 웃었다.

    “이제 손님 맞을 준비가 끝난 거 같아요.”

    “그런 거 같네요.”

    어머니가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야, 이제 내려가서 손님들 맞이해도 될 거 같아.”

    “네, 엄마.”

    강우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강용이도 질세라 따라 내려왔다. 건물의 앞쪽으로 이곳저곳에서 보낸 화환이 도착해있었다. 모두 동양 무역과 거래를 하는 거래처들이었다. 그리고 대진 그룹에서 보낸 화환도 있었다.

    -대진 그룹 회장 이철금.-

    선명히 적힌 글씨에 강우가 잠시 상념에 빠졌다. 강우가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아버지, 준비 끝났어요.”

    “그래? 알겠어.”

    강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할아버지는요?”

    “근처에 다 왔다고 하시더라.”

    할아버지는 이재원이 직접 모시고 오기로 했다. 이재원도 오늘을 위해 회사를 하루 쉬었다. 이윽고 첫 손님이 도착했다.

    “정식아.”

    “철민 형님!”

    아버지가 환하게 웃으며 원주 아버지를 향해 다가갔다. 아버지와 원주 아버지가 뜨겁게 악수하였다.

    “축하하네. 이야~ 이제 이거 건물까지 가진 어엿한 건물주님이시구먼.”

    “하하! 형님 부끄럽게 왜 그러십니까?”

    아버지가 옆을 힐끗 바라보았다. 원주 어머니와 신원주도 같이 와있었다. 아버지는 원주 어머니와 신원주하고도 인사를 나누었다.

    “강우야, 축하한다.”

    신원주가 강우 옆으로 축하를 건넸다. 강우도 씨익 웃으며 신원주의 팔을 툭하고 쳤다.

    “와줘서 고맙다. 올라가서 뭐라도 좀 먹고 있어.”

    “오케이.”

    먹을 것이라는 말에 신원주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다음으로 김춘배와 가족들이 도착했다. 역시나 인사를 나눈 김춘배와 춘배 어머니는 이 층으로 올라갔다. 춘배 아버지는 건물의 입구에서 다른 아버지들과 이야기 삼매경이었다.

    “이야! 축하합니다. 이거 경매로 샀어도 가격이 만만치 않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재식 가족이 도착했다. 역시나 재식 아버지도 입구에 남았다. 아버지들이 전부 모이자 금세 왁자지껄해졌다. 해운대의 결의 이후 자주 모임을 한 아버지들은 정말 친해져 있었다.

    “오늘 건물 현판식 끝나고 다들 뭐 하십니까? 제가 오늘 크게 사겠습니다!”

    아버지는 잔뜩 들떠있었다. 친구 아버지들도 크게 웃으며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오늘같이 건수 잡힐 날이 얼마나 있겠는가.

    “야! 강우야, 이것 좀 먹어봐라. 대박.”

    계단에서 김춘배가 헐레벌떡 뛰어 내려왔다. 옆에는 강용이도 함께였다. 강용이는 친구들이 모두 이 층으로 가자 따라 올라갔다. 강용이는 강우의 친구들을 참 좋아했다.

    “우리 엄마 육개장? 이거 좀 맛있지.”

    “크···. 진짜 이거 술 먹고 다음 날 해장으로 딱 인데.”

    강용이가 김춘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형아, 그러다가 술고래 된다.”

    “뭐? 하하!”

    김춘배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정호랑 광웅이는?”

    “어, 오늘 못 올 거야. 둘 다 바쁘잖냐.”

    “그렇긴 하지.”

    연정호는 아르바이트로 그리고 박광웅은 재수 생활을 시작해서였다. 물론, 오늘 아침에도 정말 미안하다며 몇 번이고 연락이 왔었다. 그때였다.

    뚜르르. 뚜르르.

    강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강우야, 나다 거의 다 왔다.-

    “네, 형.”

    강우가 전화를 끊고는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다 와 간다고 말했다. 아버지를 비롯한 친구 아버지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떠올랐다. 이미 할아버지를 몇 번 만난 원주 아버지도 처음 뵙는 춘배 아버지와 재식 아버지도 잔뜩 긴장했다.

    “하···. 이거 은근히 떨리는데.”

    “정말 훌륭하신 분인데 이렇게 뵙게 되네.”

    이윽고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도로로 이재원의 고급 세단이 멈춰 섰다. 눈이 좋은 강우가 그걸 발견했다.

    “오셨어요!”

    강우의 말에 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 세단에서 내린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땅에 짚었다. 그리고 이재원의 부축을 받으며 건물로 걸어왔다.

    한 걸음. 두 걸음.

    걸음을 걷는 할아버지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점점 격동으로 얼굴이 물들어갔다.

    “서···. 설마···.”

    할아버지가 침음성을 흘렸다. 많이 바뀌었지만,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주변의 풍경이었다. 할아버지가 살짝 휘청거렸다.

    “괜찮으세요?”

    이재원이 빠르게 할아버지를 부축했다. 이재원의 부축을 받은 할아버지가 건물의 앞에 도착했다. 할아버지의 입에서 긴 숨이 뱉어져 나왔다. 그 깊은 감정을 강우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하아······. 이게 정말 사실인 거야?”

    다시는 찾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건물이었다. 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가 건물의 입구로 다가갔다. 그리고 현판을 가리고 있던 흰 천을 거침없이 걷어냈다.

    ㈜동양 무역.

    현판이 모습을 드러내자 주변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축하드립니다!”

    “동양 무역이 번창하길 바랍니다!”

    현판에 적힌 이름을 보는 할아버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고 강우와 아버지에게 다가와 힘껏 끌어안았다.

    “고맙다. 고마워.”

    강우가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참았던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그때였다. 소란을 감지한 강용이가 계단에서 후다닥 뛰어 내려왔다. 그리고는 허리에 손을 ‘척’하고 올리며 어머니의 흉내를 냈다.

    “우리 엄마가 국 식으면 맛없다고 했어요. 거기 남자들 빨리 올라오세요!”

    강용이의 철없지만 순수함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강용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강우와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눈물 자국을 본 것이다. 그리고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어? 울다가 웃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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