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402)

조만간 좋은 소식 있을 거예요.

다음 날, 아침. 강우가 밀려드는 햇살에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옆자리에서 자던 강용이가 몸을 뒤척였다.

“으음···.”

강우가 강용이를 보며 피식 웃었다. 강우의 친구들과 함께 노느라 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은 강용이였다. 강우가 문을 열고 나왔다.

“와···. 넓긴 넓네.”

탁 트인 거실을 보며 강우가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꼈다. 힐끗 주방을 바라보니 어머니가 있었다.

통. 통. 통.

앞치마를 두른 어머니의 칼질이 도마를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음악의 한 구절 같은 규칙성에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강우가 슬쩍 다가가 냉장고를 열었다.

“어머? 우리 아들 일어났어?”

“네.”

강우가 냉장고에서 오렌지주스를 꺼냈다. 강우가 제일 좋아하는 음료로 어머니가 항상 채워놓는 것 중 하나였다. 강우가 오렌지주스를 벌컥 마시려 했다.

“컵에다 마셔.”

어머니가 강우를 말리며 컵을 내밀었다. 강우가 컵을 따라 몇 번이고 주스를 벌컥 마셨다. 그리고는 힐끗 안방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요?”

“사무실 나가셨지.”

아버지는 GIC를 그만두고 동양 무역에 집중하고 있었다. 사무실을 나가는 아버지는 그야말로 생기가 넘쳤다. 자신의 사업에 집중할 수 있어서였다. 이제 일본에서 지어지는 공장도 마무리 단계였다.

‘이제 중국 쪽에 합작회사를 세우는 일도 시작이 될 테니 더 바빠지시겠지. 회사 규모를 생각보다 빨리 키워야겠는걸.’

그러기 위한 시작 단계는 명동에 있는 빌딩을 매입하는 것이었다. 벌써 법원에서 2차례나 유찰이 됐고, 3번째 입찰을 앞두고 있었다.

‘기억이 알려주는 대로 딱 입찰 최고가에서 조금 더 쓰면 되니까. 실패할 일은 없겠지.’

이제 낙찰될 순간만을 기다리면 될 것이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엄마는 요새 하루하루가 꿈만 같아.”

어머니의 잔뜩 들뜬 목소리가 강우의 상념을 깨웠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행복함’이라고 쓰여있었다. 강우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그렇게 좋으세요?”

“응, 여기 살던 사람이 경매로 집을 내놓았을 걸 생각하니 조금 슬프긴 한데. 그래도 행복한 건 행복한 거지.”

역시 마음씨 고운 어머니다웠다. 강우가 자리에 앉으며 배를 쓰다듬었다.

“배고파요. 밥 주세요.”

“그래, 빨리 먹고 나가야지.”

어머니의 표정이 더욱 밝아졌다. 오늘은 강우와 어머니가 백화점을 가기로 한 날이었다. 바로 집 안에 채워 넣을 살림살이를 사러 가기로 한 것이다. 집이 커진 만큼 더 들여놓아야 할 것들이 많았다.

‘냉장고도 더 큰 거로 바꾸고 텔레비전도 그렇고 세탁기랑 가구랑···.’

제법 큰 돈이 들어갈 일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GIC를 그만두며 받은 퇴직금과 중국과의 무역 건을 성사시키며 받은 보너스도 두둑했다.

‘GIC에서 아버지를 잡으려고 그렇게 애원했다지.’

GIC 한국지사는 아버지가 있는 동안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크게 성장했다. 미국의 본사는 한국지사가 자리를 잡는데 아버지의 능력이 크게 작용했음을 알고 있었다. 무기가 쥐어진 아버지는 확실히 대단한 사업가였다.

‘미래의 기억 속에서 실패하신 건 말 그대로 자본이 부족하셨기 때문이니까.’

강우가 상념에 빠져있는 사이 어머니가 간단한 요깃거리를 해주었다. 계란에 각종 야채를 넣고 잘 부친 다음 역시나 잘 구워진 식빵에 설탕과 케첩으로 마무리한 토스트였다.

“아들, 이거 먹어.”

어머니가 시원한 우유를 따라주는 것으로 화룡점정을 찍었다. 토스트에서 올라오는 구수한 냄새에 강우의 입안에서 군침이 돌았다.

“잘 먹겠습니다.”

강우가 토스트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입안 가득 달콤함과 새콤함이 번져나갔다. 오물거리며 맛을 음미하던 강우가 우유를 벌컥 마셨다. 입안을 채우던 온갖 소스의 맛이 우유의 담백함에 쓸려나갔다.

“잘 먹네. 우리 아들.”

“진짜 마시써요···.”

강우가 입안 가득 음식을 오물거리며 엄지를 척 세웠다. 어머니가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엄마는 할아버지랑 강용이 먹을 거 준비할 테니까 씻고 준비하고 나와.”

“네.”

강우가 남은 토스트를 후딱 해치웠다. 그리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큼지막한 욕탕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강용이가 좋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워를 마친 강우가 방으로 들어가 옷을 챙겨입었다.

“우웅···. 형아 어디가?”

“어, 엄마랑 백화점.”

“아···. 맞다.”

강용이가 상반신을 일으키고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바뀐 잠자리에 잠을 깊이 자지는 못한 듯 보였다. 역시 예민한 성격의 강용이다웠다.

“엄마가 밥해놓고 가시니까. 있다가 할아버지랑 같이 먹어. 알겠지?”

“응, 형아. 엄마랑 잘 갔다 와.”

강용이가 슬쩍 웃으며 눈을 비볐다. 그 귀여움에 강우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강용이도 피하지 않고 강우의 손길을 즐겼다.

“준비됐어?”

방을 나서니 어머니도 어느새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강우의 토스트에 할아버지와 강용이가 먹을 식사에 자신의 옷을 챙겨입는 것까지. 역시 어머니들은 슈퍼우먼이 분명했다.

“네, 가요.”

강우와 어머니가 아파트를 나섰다. 빼곡히 들어섰던 주차장의 차들이 그나마 많이 빠져나가 있었다. 강우가 아버지의 승용차로 다가갔다. 회사에서 나온 차량을 반납하고 새로 산 신차였다.

“엄마, 타세요.”

“응.”

강우가 운전하는 승용차가 능숙하게 주차장을 벗어났다. 어머니가 안전띠를 매며 감탄했다.

“우리 아들은 운전도 잘해.”

“하하···.”

강우가 멋쩍게 웃으며 차를 몰았다. 그리고 근처의 백화점으로 향했다. 백화점에 도착하자 어머니의 얼굴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폭풍 쇼핑의 시작이었다.

“가구는 이걸로 하고. 침대도 새로 사고.”

어머니는 집에 필요한 가구들을 꼼꼼히 골랐다. 그다음은 가전매장이었다. 커다란 거실에 맞는 큰 텔레비전으로 구매했다. 중고 매장에서 샀던 오래된 냉장고도 새것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가지고 싶어 하던 김치냉장고도 샀다.

“아들,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어머니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필요한 거면 사야죠. 그리고 이 정도는 사도 문제없어요.”

“그래, 우리 아들 말이라면 믿어야지.”

쇼핑이 끝나자 다시 배가 출출해졌다. 강우와 어머니는 백화점 안의 푸드코트에서 맛있는 것도 사 먹었다. 할아버지와 강용이를 줄 간식도 두둑이 샀다.

“엄마, 아버지 회사에 좀 다녀올게요.”

집 앞에 어머니를 내려준 강우가 말했다. 어머니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는 참이었다.

“알겠어. 아빠 잘 모시고 와.”

“네.”

* * *

강우가 차를 몰아 명동에 도착했다. 사무실로 향하는 길에 예전에 봤던 그 빌딩이 어렴풋이 보였다. 강우가 창문을 내리고 빌딩을 힐끗 바라보았다.

‘조금만 기다려라. 이제 곧 우리 회사의 이름을 걸어주마.’

이윽고 회사 건물에 주차한 강우가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어느덧 어두워진 주변에 강우가 슬쩍 시계를 확인했다.

‘슬슬들 출출해질 시간인데.’

강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근처의 분식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충무김밥과 간식 그리고 마실 것을 조금 샀다. 강우가 빌딩으로 돌아오니 경비아저씨가 역시 강우를 알아보았다.

“오늘도 왔어?”

“네, 아버지 모시고 가려고요.”

“참 효자야. 어서 올라가 봐요.”

강우가 꾸벅 인사를 하고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사무실 앞에 도착한 강우가 슬쩍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사무실 안쪽은 말 그대로 전쟁통이었다.

“부장님! 일본 쪽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원자재 납품 일정 픽스해 달랍니다.”

“오케이. 김 대리, 컨테이너 나가는 일정 문제없지?”

황 부장의 질문에 김지숙 대리가 싱긋 웃었다.

“네, 부장님, 냉장 컨테이너까지 직접 확인하고 왔어요.”

“좋아. 역시 김 대리 꼼꼼해.”

강우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사무실로 들어온 강우를 못 알아볼 정도였다. 강우가 슬그머니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다. 매일 출근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강우의 자리는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어? 강우야, 언제 왔어?”

강종민 대리가 강우를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얼굴 가득한 피로감이 그동안의 업무강도를 대변해주고 있었다. 강종민 대리의 말에 전쟁통 같았던 사무실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강우가 씨익 웃으며 서류를 힐끗 바라보았다.

“뭐 정리하고 계셨어요?”

“어, 패킹리스트랑 원산지증명서 정리하고 있었다.”

강우가 슬쩍 서류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기억을 받아들인 탓일까? 무역서류에 관한 강우의 실력은 상당했다.

‘역시 좀 어수룩해 보여도 능력이 있어. 서류 깔끔하게 정리해 놓았네.’

강우가 씨익 웃었다. 김치 공장을 위해 나가야 할 식자재들과 다른 원자재들의 종류는 다양했다. 그 모든 것을 시기에 맞게 내보내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강우가 가지고 온 간식 봉지를 중앙의 탁자에 올려놓았다.

“출출하시죠? 이것 좀 드세요.”

강우의 말에 직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역시 강우야.”

“어머? 충무김밥이네? 역시 우리 강우 센스는 알아줘야 해.”

강종민 대리와 김지숙 대리가 음식을 먹기 좋게 세팅했다. 일에 파묻혀 있던 황규범 부장도 의자를 드르륵 끌고 다가왔다.

“강우야 매번 고맙다.”

“아니에요. 요즘 일이 너무 많아서 힘드시죠?”

강우가 다른 봉지에서 준비한 음료까지 올려놓았다. 강종민 대리와 김지숙 대리가 역시 하는 표정으로 엄지를 들었다. 황규범 부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요즘 같은 시기에 이렇게 일거리 많은 것도 복이지.”

직원들이 음식에 집중하는 사이 강우가 슬쩍 김지숙이 가지고 온 서류를 바라보았다.

“그건 뭐예요?”

“응, 일본 공장에 나갈 김치 레시피랑 제조 공정 매뉴얼을 일본어로 정리 중이었어.”

“제가 좀 봐도 될까요?”

“그럼, 나야 고맙지.”

김지숙이 대번에 밝은 표정을 지었다. 강우의 일본어야 완벽하니 더할 나위가 없었다. 강우가 오역을 잡아내거나 조금 더 깔끔한 문장으로 다듬었다.

“이 정도면 되겠네요.”

강우가 내민 서류를 확인한 김지숙이 탄성을 뱉어냈다.

“진짜 깔끔하네.”

강종민 대리도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미 한두 번 겪는 강우의 능력이 아니었지만,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아직 대학교도 안 들어간 나이라는 게 믿기지 않네.”

김지숙 대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외국어만 완벽한 게 아니니까요. 무역서류 관련 지식도 예전에 모시던 과장님 저리 가라예요.”

강우가 씨익 웃었다.

“다 아버지한테 배워서 그래요.”

순간, 직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업무 능력이야 이미 겪어봐 익히 알고들 있었다.

“우리 이사님의 실력이야 다들 잘 알고 있지. 정말 대단하신 분이야. 우리 회사에 이사님 같은 분만 몇 명 더 있으면 다들 정말 편할 텐데 말이야.”

황규범이 농담 아닌 농담을 던졌다. 그러자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다들 고생 많으시죠. 조만간 좋은 소식 있을 거예요.”

똑 부러지는 김지숙 대리가 말을 거들었다.

“맞아요. 부장님. 우리도 이제 인원 더 뽑아야 하긴 해요. 경력직이 아니라도 최소한 일을 거들 신입이라도 말이에요.”

“음···. 그렇지 않아도 이사님도 그 말씀 하시던데.”

황규범 부장의 말에 강우에게로 시선이 쏟아졌다. 강우가 씨익 웃으며 충무김밥을 하나 입에 넣었다.

“네, 조만간 인원 보충을 하긴 할 거예요.”

“그런데 사무실이 좁아서 뽑아도 어디서 일들을 합니까? 서서 할 수도 없고.”

강종민 대리가 나름대로 재치 있는 유머라 생각했는지 혼자 키득거렸다. 그러자 김지숙 대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강우도 올라가는 입꼬리를 부여잡았다.

“그래서 조만간 사무실도 옮기려고요.”

강우의 말에 직원들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황규범 부장이 잠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왕 옮기려면 이참에 평수가 넓은 곳으로 갔으면 좋겠군.”

“부장님, 직원들을 한 다섯은 더 뽑아야겠죠? 그러려면 이 사무실의 두 배 정도는 돼야겠네요.”

직원들이 간식을 먹으며 의견을 나누었다. 사무실에 필요한 집기들이 뭐고 또 어떤 직원들을 뽑아야 할지 잔뜩 들떴다. 강우는 직원들을 보며 말없이 웃었다.

“강우야, 사무실 이사 가는 거에 대해 아는 거 없니?”

황규범 부장이 궁금해 죽겠다는 듯 물었다. 강우가 씨익 웃었다.

“여기서 명동 시내 쪽으로 조금 가면 태일빌딩이라고 있어요.”

직원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명동에 빌딩이 한두 개던가. 강우가 주소까지 불러주고는 세세히 설명했다.

“아~ 그 호텔 근처에 있는 빌딩인가 보네.”

강종민이 알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일 층에 그 카페 들어서 있는 5층짜리 건물?”

김지숙 대리는 자세히 기억까지 하나 보다. 황규범 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거기는 한 층을 전부 써도 사무실 크기가 그리 크지는 않을 텐데···.”

강우가 씨익 웃었다.

“그 빌딩 조만간 동양 무역에서 살 겁니다.”

툭.

강종민 대리가 손에 들린 음료수 잔을 떨어트렸다. 황규범 부장과 김지숙 대리는 서로를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빌···. 빌딩을 산다고?”

황규범 부장이 말을 더듬었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건물을 통째로 회사 건물로 사용할 거예요. 직원들도 많이 뽑을 거고요. 앞으로 일이 엄청나게 커질 거거든요.”

강우의 말에 직원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였다.

“강우 왔구나?”

잠시 사무실을 비웠던 아버지가 돌아왔다. 두 손에는 역시나 간식 봉지가 잔뜩 들려있었다. 탁자 위에 먹을 것을 발견한 아버지가 머리를 긁적였다.

“이야~ 우리 직원들 아주 복이 터졌네. 터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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