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402)
  • 나도 왕년에는 한 까칠한 남자야.

    밤이 늦어 어두운 거리에 이재원의 고급 세단이 나타났다. 세단은 미끄러지듯 다가와 오성맨션의 앞에 멈춰 섰다. 차가 멈추자 앞자리에서 이재원이 내렸다.

    “김 기사님, 트렁크 좀 열어주세요.”

    덜컹.

    트렁크가 열리고 이재원이 커다란 캐리어 두 개를 꺼냈다. 운전석에서 김 기사가 내리려 했지만, 역시나 이재원이 말렸다.

    “제가 할게요.”

    “네, 사장님.”

    그사이 세단의 뒤쪽에서 강우가 내렸다. 강우가 반대편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할아버지, 내리세요.”

    “고맙구나. 강우야.”

    강우의 부축을 받은 할아버지가 차에서 내렸다. 강우가 이재원을 보며 말했다.

    “형, 저 할아버지랑 먼저 올라갈게요.”

    “어, 올라가 이건 내가 가지고 갈게.”

    “고마워요.”

    이재원이 씨익 웃으며 캐리어를 들었다. 그리고는 김 기사를 향해 말했다.

    “먼저 가세요. 저는 여기서 자고 갈게요.”

    “네, 사장님.”

    이재원의 세단이 미끄러지듯 사라져갔다.

    덜컥.

    문이 열리고 강우와 할아버지가 집 안으로 들어섰다. 익숙한 집안 공기에 할아버지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역시 집이 최고구나.”

    “추우시죠? 제가 보일러 켤게요.”

    강우가 거실의 한쪽으로 다가가 잠들어 있던 보일러를 깨웠다. 금세 집안에 온기가 가득 차기를 바랐다.

    “강우야.”

    뒤이어 이재원이 현관으로 들어왔다. 커다란 캐리어 두 개를 든 채였다. 이재원이 캐리어를 거실에 놓았다. 그리고는 할아버지를 부축했다.

    “할아버지, 방으로 모실까요?”

    “그래, 우리 재원이 오늘 마중 나와서 고맙다.”

    할아버지가 인자하게 웃었다. 중국에서 돌아오는 강우 가족을 이재원이 마중을 나왔다. 중국으로 가기 전 돌아오는 항공편을 자세히 묻더니 이런 이유였나 보다. 덕분에 강우와 할아버지는 편하게 왔다.

    “제가 승합차를 가지고 올 걸 생각을 못 했네요.”

    이재원이 민망한 듯 볼을 긁적였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강용이는 택시를 타고 뒤따라오고 있었다.

    “아니다. 택시 타고 오니까 금세 올 거야.”

    “제가 자리 봐 드릴게요.”

    강우가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깔았다. 이윽고 이재원의 부축을 받은 할아버지가 방으로 들어왔다.

    “아이구···.”

    할아버지가 신음을 흘리며 자리에 누웠다. 이재원이 빠르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여행의 피로감이 몰려왔을까?

    “으음···.”

    할아버지는 짧은 침음성과 함께 금세 잠이 들었다. 강우가 방의 불을 끄고는 열린 문으로 조심히 나왔다. 이재원이 뒤를 따라 나오며 문을 살며시 닫았다.

    “할아버지, 많이 피곤하셨나 보다.”

    “그래도 형이 마중 나와서 진짜 편하게 왔어요.”

    “김포공항에서 여기까지 얼마나 걸린다고.”

    “그래도요.”

    이재원이 털썩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는 익숙한 듯 텔레비전을 틀었다. 마침 TV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재벌 개혁은 재벌 총수의 군살을 빼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비상경제 대책위원회의 시각입니다. 따라서 비 대위는 재벌 회장의 전권을 강화해 준다는 지적을 받아왔던 재벌 회장실과 기획조정실을 없애는 내용의 행정 지도를 펴기로 했습니다. 기업 경영이 부실할 땐 경영진이 퇴진하도록 책임 소재를 분명히 따지기로 했습니다.-

    뉴스를 보던 이재원이 긴 숨을 뱉어냈다. IMF 체제가 본격화되며 한국 경제는 체질 수술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 가장 큰 대상이 재벌들임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형네는 좀 어때요?”

    강우가 창밖을 보며 물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강용이가 탄 택시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그나마 덜해. 은행 부채도 적고 사내 유보금도 빵빵하잖냐. 덕분에 구조조정에서도 좀 자유롭다.”

    “직원들은 해고 없이 가는 거 맞죠?”

    이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나 약속한 건 지킨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회장님한테 그건 강하게 밀어붙였지.”

    “순순히 들어주세요?”

    이재원이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는 반대했지, 그런데 내가 한다는데 안 들어주시면 어쩔 거야? 그리고 그 일 때문에 회장님이 청와대에도 다녀왔다. 힘든 시기에 훌륭한 기업이라고 아주 칭찬을 많이 받은 모양이야. 입이 귀에 걸렸다. 아주.”

    “잘됐네요.”

    강우가 씨익 웃었다.

    “회장님이야 맨날 내 칭찬하느라 난리지. 요즘은 내가 무슨 일만 한다고 그러면 그냥 보지도 않고 오케이야.”

    “그럼 저번에 말한 온라인 사업은 진행하는 거예요?”

    “어, 내가 맡아서 진행하기로 했다. 덕분에 아주 일에 파묻혀서 산다.”

    이재원의 볼멘소리에 강우가 미간을 좁혔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하더라고요.”

    “그냥 하는 소리지.”

    이재원이 소파에 몸을 깊게 묻었다. 그리고는 뉴스를 보며 눈을 빛냈다. 그때, 멀리서 택시 한 대가 다가왔다.

    “왔네요.”

    “진짜? 내가 내려간다.”

    이재원이 날 듯이 현관을 내려갔다. 이윽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현관으로 들어섰다. 이재원은 그새 잠든 강용이를 안고 있었다.

    “형 저한테 줘요.”

    강우가 강용이를 받아 안았다. 그리고는 조심히 방에 눕혔다.

    “으음···. 형아···.”

    강용이가 잠꼬대하듯 중얼거렸다. 강우가 강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이불을 덮어주었다.

    “짐 정리는 내일 하자.”

    아버지가 캐리어들을 거실의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어머니도 피곤하다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식탁에 강우와 아버지 그리고 이재원이 둘러앉았다.

    “냉장고에 맥주 있을 거야.”

    아버지의 말에 강우가 냉장고를 열었다. 그리고 시원한 병맥주를 꺼냈다. 그 소리를 들은 어머니가 슬쩍 나오시더니 앞치마를 멨다.

    “어머니, 피곤하실 텐데 쉬세요.”

    이재원이 어머니를 말렸다. 어머니가 싱긋 웃으며 가스레인지에 불을 켰다.

    “금세 만들어.”

    어머니가 냉장고에서 이런저런 재료를 꺼냈다. 그리고는 맥주 안주 몇 개를 뚝딱 만들어냈다. 이재원이 탄성을 뱉었다.

    “이야~ 우리 어머니 음식솜씨는 정말 기가 막혀요.”

    “고맙다 재원아.”

    어머니가 앞치마를 풀었다.

    “당신도 맥주 한잔할래?”

    “그래요. 오늘은 나도 끼워줘요.”

    어머니가 한쪽에 앉았다. 어머니가 만들어준 맥주 안주는 작은 크기로 만든 부침개였다.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을 넣고 뚝딱 만들었다기에는 그 맛이 일품이었다.

    “우리 여보~ 한잔 받으시오.”

    아버지가 어머니의 잔을 채웠다. 어머니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고마워요. 서방님.”

    아버지와 어머니의 닭살 행각에 강우가 멍한 표정이 되었다. 이재원은 고개를 슬쩍 돌리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너희도 결혼해 봐라. 나처럼 되나 안 되나. 나도 왕년에는 한 까칠한 남자야.”

    “어머? 나 좋다고 맨날 따라다닌 사람이? 휴가 나오려고 그렇게 난리를 쳤으면서.”

    강우는 벌써 몇 번이고 들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재원은 궁금했나 보다.

    “두 분 연애 시절 이야기 좀 해주세요.”

    이재원의 말에 아버지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너희 이모 있잖니. 이모가 아버지 부대에 있는 카투사를 사귀었었어. 그런데 하루는 남자친구 면회 가는데 나보고 같이 가자고 하지 뭐야?”

    어머니가 맥주를 한잔 마셔 목을 축였다. 이재원이 점점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갈까 말까 했는데 미군 부대 구경도 하고 싶고 그래서 면회하러 갔지. 그런데 너희 아빠가 이모 남자친구의 선임병이었던 거야. 면회 갔는데 같이 따라 나왔더라고. 거기서 처음 봤지.”

    “와···. 그런 인연이셨군요.”

    이재원이 탄성을 뱉어냈다.

    “응 그런데 너희 아빠가 다음에는 꼭 자기 면회를 오라는 거야. 어찌나 막무가내던지 알았다고 했지.”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한눈에 반한 게 확실합니다.”

    이재원이 결론을 내듯 말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재원의 말이 사실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정작 너희 이모는 나중에 그 남자랑 헤어지고 나만 너희 아빠 면회 다녔지.”

    “너희 엄마가 젊었을 때 얼마나 이뻤는데. 너희 엄마가 미군 부대 면회 오면 미군 놈들도 난리가 아니었어. 미스 코리아 왔다고.”

    아버지가 어머니 자랑에 열을 올렸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팔뚝을 퍽하고 치며 웃었다.

    “어머! 이이가.”

    “왜? 사실이잖아?”

    아버지의 팔불출이었지만, 너무나도 보기 좋았다. 강우와 이재원의 얼굴에 푸근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우리 미스 코리아 어머니 한잔 올리겠습니다.”

    이재원이 넉살 좋은 표정을 지으며 어머니의 잔을 따랐다. 그리고 잔을 들어 건배하자고 했다.

    챙. 챙.

    잔이 부딪치고 맥주가 꿀꺽꿀꺽 넘어갔다. 동시에 ‘캬~’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재원이 입에 묻은 맥주 거품을 쓰윽 닦더니 물었다.

    “크···. 저도 두 분처럼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고 싶습니다.”

    “우리 재원이가 뭐가 부족해. 얼굴도 잘생겼지. 능력도 있지. 마음도 착하지. 꼭 좋은 여자 만날 거야.”

    어머니가 이재원을 칭찬했다. 강우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렇게 부모님의 연애사가 조금 더 이어졌다. 들어도 들어도 재밌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연애 이야기가 끝나고 이재원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중국에 가셨던 일은 잘 끝났습니까?”

    “그럼, 잘된 정도가 아니지.”

    아버지가 중국에서 있었던 일을 이재원에게 말해주었다. 이재원은 연신 감탄을 토해냈다. 특히 할아버지가 옛 독립운동의 동료를 만난 부분에서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솔직히 이거 영화로 만들어도 될 이야기 아닙니까?”

    이재원이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가득 담긴 얼굴로 말했다. 아버지가 흐뭇하게 웃으며 이재원의 잔을 채워주었다.

    “할아버지, 진짜 대단하신 분입니다. 정말 존경하고 본받고 싶은 분이세요.”

    “그래, 맞다. 정말 대단하신 분이지.”

    그렇게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끝나고 이번에는 중국에 세워질 법인 이야기가 나왔다. 이재원은 또 놀랍다는 표정이 되었다. 강우와 아버지의 인맥이 상상 이상이었다.

    “우리 그룹도 중국에 진출할 생각을 하고 있는데요. 나중에 아버지 도움 좀 받겠습니다.”

    “그럼 당연하지. 언제든지 말만 해.”

    이재원이 씨익 웃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아버지도 정말 기분이 좋아 보였다. 연신 맥주를 마시며 즐거워했다.

    그때, 강우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 형 저번에 부탁한 건 어떻게 됐어요?”

    “아···. 그거 벌써 처리했다.”

    이재원이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는 자신이 받을 대진 미디어의 장학금을 박광웅의 동생인 박지혜가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해달라 했다. 박지혜 역시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었으니 명분은 충분했다.

    “고마워요.”

    “뭐 어려운 일도 아닌데. 아 그리고 그건 네 장학금이랑은 별개로 처리했다.”

    “네?”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이재원이 씩 웃었다.

    “내가 말했지 그건 내가 너한테 주는 선물이라고. 줬다 뺏으면 되냐?”

    “하하···.”

    강우가 실소를 흘렸다.

    “아 그리고 이참에 성적우수자들을 위한 장학금뿐만이 아니라 소외계층 아동들을 위한 지원금도 만들 생각이야. 명색이 학생들을 상대한다는 기업이 그런 아이들을 외면하면 쓰겠어?”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재원이 씨익 웃었다.

    “그러니까 네 친구도 걱정하지 마라. 그룹에서 도와주는 거면 친구 자존심도 안 상할 수 있을 거야.”

    “형···.”

    강우는 고마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내심 민감한 나이대인 박광웅을 어찌 도울까 고민하던 차였다. 이재원이 민망한 듯 볼을 긁적였다.

    “나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니야. 하지만 너랑 가족들을 알고 나서 점점 바뀌고 있는 거지. 나도 할아버지의 말씀처럼 소외당하고 힘든 사람들 외면 안 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거든.”

    묵묵히 듣고만 있던 어머니가 이재원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잘했어. 우리 큰아들 멋있네.”

    “제가 누굽니까? 이 집안의 큰아들 아닙니까?”

    이재원이 한껏 잘난 척을 했다. 하지만 절대 미운 짓이 아니었다. 강우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재원은 참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재벌 총수들이 전부 이재원 같으면 어떨까 하는 상상도 해보았다.

    “자자 먹자. 이거 오늘도 기분이 최고네. 기분이 좋아서 하늘 끝까지 솟아버리면 어쩌나 싶어.”

    아버지의 말에 강우와 이재원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이내 입을 틀어막았다. 잠든 할아버지와 강용이가 깰까 싶었다.

    “안주 부족하네요. 내가 더 만들어줄게요.”

    어머니가 다시 앞치마를 둘러멨다. 그리고는 남은 명절 음식들을 데우고 간단한 안주들을 더 만들었다. 밤새 이야기꽃이 피었다. 강우가 흐뭇한 표정으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가족과 다름없는 이재원을 보았다. 가족의 화기애애한 온기가 느껴졌다.

    ‘좋네.’

    강우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어느새 차가웠던 집안 공기도 따듯해져 있었다. 그때, 이재원이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 그리고 이사할 집은 결정하셨어요?”

    이재원의 질문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강우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강우가 씨익 웃으며 답했다.

    “정했어요. 강남으로. 다음 달에 이사해요.”

    “오? 정말? 강남 어딘데?”

    이재원의 질문에 강우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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