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9/402)
  • 아버지, 그렇게 좋으세요?

    방 안의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최준은 연신 만족스러운 듯 큰 웃음을 터트렸다. 강우의 발언을 중국어로 전달받은 위진오는 강우를 보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역시 대단해. 당차고 자신감 넘치는군! 역시 강우 너는 정치를 해야 했어.”

    위진오가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강우는 말없이 웃었다. 할아버지가 최준을 보며 고마움을 표했다.

    “형님, 내 손자를 그렇게까지 믿어주시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아닐세. 나 또한 나의 유지를 이어받을 사람이 필요했어.”

    최준은 정말 대단한 자본가였다. 중국으로 오기 전에도 조선에서 커다란 상회를 운영하던 사람이었다. 역시나 타고난 사업가인 최준이었다. 금세 자리를 잡고 오히려 사업을 크게 불려 나갔다고 했다.

    “하지만, 형님의 자손들은···.”

    할아버지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그러자 최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내게는 자손들이 없네.”

    할아버지가 화들짝 놀라며 멍한 표정이 되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위진오만이 조금은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형님, 어찌 그런 일이. 분명 아들 둘이 있지 않으셨습니까?”

    “역병으로 모두 죽었네.”

    최준의 담담한 듯한 말에 깊은 정적이 흘렀다. 자식을 잃은 최준의 심정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최준이 희미하게 웃었다.

    “이미 오래된 일이네. 이제 많이 내려놓았어.”

    “형님···.”

    할아버지가 최준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더는 사연을 묻지 않았다. 최준이 강우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장성한 할아버지의 후손들을 보며 내심 부러운 표정을 했다.

    “사실 내가 죽으면 내가 가진 것을 위씨 가문에 의탁할 생각이었지.”

    최준이 위진오를 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위진오가 씨익 웃었다.

    “대부님, 저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저에게는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습니다. 오직 위씨 가문의 명예를 높이는 게 제 목표입니다.”

    “그래, 고맙다.”

    최준이 할아버지를 보며 입을 열었다.

    “내 비록 엄청난 재산을 가진 재벌은 아니지만, 가진 것이 적지는 않아. 그것이라면 자네 자손들이 중국에서 사업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거야.”

    “형님, 이 은혜를···.”

    최준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목숨을 걸고 지킨 덕분에 지킬 수 있었던 재산들이네. 이제 쓰여야 할 곳에 쓰일 테니 내 죽어도 여한이 없군.”

    “제 아들과 손자가 꼭 형님의 바람을 이루어 줄 겁니다.”

    할아버지와 최준이 강우와 아버지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래, 중국에서 고추 종자 개량을 시도한다고?”

    최준의 질문에 아버지가 답했다.

    “네, 한국산 종자를 들여와 비슷한 맛의 종자를 개발하는 게 목표입니다.”

    “흠···. 그렇군.”

    “하지만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종자는 한국에서 정식으로 사 오면 되지만 문제는 한국과 비슷한 토질과 일조량을 가진 곳을 찾아야 합니다.”

    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추 재배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때, 강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그런 조건과 맞는 곳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화들짝 놀라며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야, 그게 무슨 말이야?”

    “아버지, 사실 제가 평소에 이런저런 자료조사 많이 하는 거 아시죠?”

    “알고 있지. 틈만 나면 컴퓨터로 자료 수집하는 거.”

    강우가 씨익 웃었다. 미래의 기억이 선명히 말해주고 있었다. 길림성에 세워질 커다란 유한회사가 있었다. 그 회사는 길림성 일대에서 금탑 고추를 재배해 막대한 이윤을 남긴다. 강우는 그곳을 선점할 생각이었다.

    “길림성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화들짝 놀랐다. 아버지 역시 내심 후보지로 생각하고 있던 곳이었다.

    “강우야,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어. 정말 대단한데?”

    “아버지도요?”

    강우도 내심 놀랐다. 역시 아버지의 능력도 대단했다. 위진오가 강우를 향해 무슨 대화냐며 물었다. 강우가 아버지와 나눈 대화를 중국어로 말해주었다.

    “길림성? 허···. 이거 운명의 장난도 아니고.”

    위진오가 탄성을 뱉어냈다. 그리고는 최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르신, 길림성이라고 합니다.”

    “나도 들었다. 정말 잘되었군. 내가 중국으로 넘어와 자리를 잡았던 곳이 길림성이지 않던가. 그곳이라면 내가 힘을 써볼 수 있지.”

    강우와 아버지가 탄성을 뱉어냈다. 먼 시간을 돌고 돌아 만난 인연의 고리는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잘 맞아들어갔다.

    “정말 자네의 손자가 범상치 않군. 대단한 인재야. 이제 겨우 20살이라는 게 믿기지 않아.”

    최준이 강우를 보며 연신 감탄을 뱉어냈다. 손자가 칭찬을 받아 할아버지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나갔다.

    “제 손자라서가 아니라 정말 뛰어난 아이입니다. 그래서 제가 무리해서라도 앞길을 닦아주고 싶었습니다.”

    “그랬군. 그럴만해.”

    할아버지에게 일본에서의 일을 들은 최준이었다. 최준이 이번에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자세한 사업 이야기는 또 자리를 만들도록 하지. 오늘은 내 자네의 아버지와 못다 푼 회한을 풀고 싶군.”

    “당연합니다. 오늘은 두 분을 위한 자리입니다.”

    그렇게 식사가 이어졌다. 할아버지와 최준은 그동안 쌓인 이야기를 끝없이 나누었다. 한참이 지나도 끝나지 않는 대화였다.

    * * *

    호텔의 로비에 있는 카페에 강우와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가 앉아있었다. 할아버지는 아직도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강우야, 네 덕분에 할아버지가 말년에 이런 호사를 누리는구나.”

    할아버지는 정말 아이처럼 좋아했다. 지나간 옛 인연들을 만나 회포를 푸는 것이 너무나 좋았나 보다. 강우도 정말 행복했다. 할아버지의 밝은 얼굴에 그 무엇보다 성취감이 가득 차올랐다.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니까 저도 너무 좋아요.”

    “아버지, 그렇게 좋으세요?”

    아버지의 얼굴에도 미소가 가득했다. 할아버지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좋고말고. 이제 죽기 전에 내 소원을 하나씩 풀고 갈 수 있겠구나.”

    강우와 아버지가 서로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강우가 아버지를 향해 눈짓했다. 지금이야말로 그 이야기를 꺼낼 순간이었다.

    “아버지, GIC는 그만 다녀야 할 거 같습니다.”

    아버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알고 있다. 이제 합작회사까지 만들어지면 정말 정신없이 바빠질 테지. 그러려면 네가 이제 우리 사업에 집중해야겠지.”

    “네, 아버지.”

    아버지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꼭 열심히 일을 마무리하고 나와야 한다. 사람은 항상 마무리를 잘해야 하는 법이야.”

    “네,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에 큰 계약 건도 하나 따냈습니다.”

    “그래, 잘했다.”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는 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먼저 들어가서 쉬어야겠다. 내일 또 형님을 만나야 하니까.”

    “방으로 모셔다드릴게요.”

    강우와 아버지가 따라 일어나자 할아버지가 두 사람을 말렸다.

    “아니다. 엘리베이터만 타면 금방이다. 둘은 더 이야기 나누고 올라와라.”

    “네, 아버지.”

    할아버지가 강우와 아버지를 대견스럽게 바라보았다.

    “정식아, 강우야. 나는 너희들이 정말 자랑스럽다. 그리고 고맙다.”

    강우와 아버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정말이지 홀가분한 할아버지의 표정이었다.

    “아버지, 이제 편하게 지내세요. 저랑 강우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래, 좋지. 나는 이제 정식이 너랑 강우가 성공하는 거 보고, 우리 막둥이 강용이의 재롱을 보면서 즐겁게 지내련다.”

    그 말을 끝으로 할아버지가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지팡이를 짚은 발걸음이 오늘따라 가벼워 보였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할아버지의 모습이 그 안으로 사라졌다. 끝까지 그곳을 바라보던 강우와 아버지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정말 좋아하시네.”

    “네, 중국에 오시길 정말 잘했어요.”

    강우와 아버지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 이제 합작회사는 길림성에 세우는 거겠죠?”

    “그럴 거 같다. 최준 어르신과 진오 형님의 도움이라면 길림성에 좋은 땅을 장기간 임대받을 수 있을 거야.”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준은 후계자가 없었다. 그래서 평생을 일구어 놓은 사업들을 모두 매각했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은 엄청난 현금을 가진 부자였다.

    ‘우리한테는 아주 최적의 조건인 거지.’

    강우가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최준의 투자를 받는다면 중국에서 벌일 수 있는 사업의 폭이 더 커질 것이다. 그리고 미래의 기억을 아는 강우는 중국에 숨어있는 수많은 알짜배기 기업들을 알고 있었다.

    ‘일단 투자되는 자본금의 크기를 보고 그다음에 움직여 보자.’

    강우가 아버지의 시선을 느끼고 상념에서 벗어났다. 아버지는 흐뭇한 표정으로 강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강우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정말 할 일이 많아지겠어요.”

    “그래, 직원들도 더 뽑아야 하고 중국 쪽에 상주할 인원도 뽑아야 할 거 같고.”

    아버지가 감회가 새로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사업에 실패해 절망적인 나날을 보내던 아버지였다. 하지만 강우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지금은 그야말로 탄탄대로 위에 있었다.

    “아버지는 너무 기대된다. 강우 너와 함께 만들어갈 사업이.”

    “저도 아버지랑 같이 일할 날이 너무 기다려져요.”

    아버지가 강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강우가 말없이 씨익 웃었다. 아버지의 손길은 따듯하고 부드러웠다. 강우와 아버지는 한참을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앞으로의 사업 방향과 아이템을 주고받았다. 아버지는 강우의 사업을 보는 안목에 정말 감탄했다.

    “우리 아들 정말 대단하다. 대학교만 아니면 바로 사업을 맡아도 되겠는걸?”

    “그래도 단계라는 게 있는 거니까요. 제가 대학 졸업할 때까지는 아버지가 잘 맡아 주셔야 합니다?”

    강우의 장난 섞인 말에 아버지가 크게 웃었다.

    * * *

    다음 날, 할아버지는 최준을 만나 종일 붙어 계셨다. 아버지는 최준의 변호사를 만나 사업체에 대해 상담을 나누었다. 강우와 어머니 그리고 강용이는 베이징 일대를 관광했다. 그렇게 하루를 각자의 일정으로 보낸 강우 가족이 밤늦게 공항으로 나타났다.

    “잘 가게.”

    강우 가족을 배웅 나온 최준이 눈시울을 붉혔다. 할아버지가 최준의 손을 잡았다.

    “꼭 한국에 오셔야 합니다. 발전된 조국의 모습을 꼭 보셔야 합니다.”

    “알겠네. 내 이번 일만 마무리 지으면 바로 한국으로 가겠네.”

    “꼭 오셔야 합니다.”

    할아버지는 마치 동생이 형에게 조르듯 집요했다. 결국, 최준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 사람아, 알았대도. 꼭 약속하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형님이 한국에 오면 꼭 모시고 가고 싶은 곳이 많습니다.”

    부드럽게 웃은 최준이 이번에는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야, 나와의 약속을 잊어서는 안 된다.”

    “네, 어르신.”

    “편하게 할아비라 부르거라.”

    “네, 할아버지.”

    최준이 인자하게 웃었다. 단 이틀을 지켜본 강우였지만,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위진오가 양자로 삼았다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참으로 예의 바르고 똑똑한 아이야. 공손하면서도 눈에는 자신감이 가득하니 꼭 재봉의 젊은 시절을 보는 거 같아.’

    인생의 황혼에서 강우를 만난 것이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지켜보며 자신이 가진 것을 이어받을 수 있을 아이인지 지켜볼 요량이었다.

    “비행기 시간 다 됐습니다.”

    같이 배웅을 나온 위진오가 할아버지와 최준을 향해 말했다.

    “그래,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법. 조심히 가게나.”

    “곧 만날 겁니다.”

    위진오와 아버지도 살짝 포옹했다.

    “아우, 조심히 가게. 어르신 잘 모시고.”

    “형님, 이제 중국에 자주 들리겠습니다.”

    중국의 법인 문제로 또 한동안 중국에 살다시피 해야 할 아버지였다. 위진오와 아버지가 서로를 보며 씨익 웃었다.

    “할아버지,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꼭 건강하세요. 다음에도 제가 우리 할아버지 모시고 꼭 놀러 올게요.”

    강용이가 최준을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최준이 강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우리 강용이 착하다.”

    강용이가 이번에는 위진오를 보며 꾸벅 인사했다.

    “큰아버지, 안녕히 계세요. 건강하세요.”

    제법 당찬 중국어였다. 위진오가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강우와 아버지도 강용이를 보며 살짝 놀라워했다. 강용이가 머리를 긁적이며 혀를 삐죽 내밀었다.

    “중국어 회화책 보고 조금 연습했어요.”

    역시 핏줄이 어디 가지는 않는가 보다. 어머니도 최준과 위진오를 향해 인사를 했다. 그렇게 다음을 기약하고 강우 가족이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강우를 제외한 가족은 깊은 잠에 빠졌다. 짧은 시간이었던 만큼 일정이 빡빡했던 탓이었다.

    “.......”

    강우는 창밖으로 보며 멀어져가는 중국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 중국행은 대성공이었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도 알게 되었고.’

    강우가 눈을 빛냈다.

    ‘다시 차근차근 하나씩 완벽하게 이루어 간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