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 또한 저의 꿈이기도 했습니다.
사방이 어두운 지하 감옥이었다. 중앙에 놓인 화롯불이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중앙에는 의자가 놓여있었다. 의자에는 젊었을 적의 할아버지가 앉아있었다.
“지독한 놈!”
할아버지의 앞에 있는 일본 순사가 이를 갈았다. 손에 들린 채찍으로 할아버지의 몸을 강하게 내리쳤다.
촤아악!
살갗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으윽···.”
할아버지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냈다. 일본 순사가 옆에 있는 부하에게 눈빛을 보냈다. 그 부하가 화로에서 붉게 달궈진 쇠막대기를 들었다.
“마지막으로 묻지. 조선 내의 불령선인들의 명단을 이실직고해라. 그리고 네가 만나려던 자금 조달 책임자의 이름도 불어!”
일본 순사의 최후통첩이었다. 할아버지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이미 엉망이 된 얼굴로 희미하게 웃었다.
“나를 죽인다 해도. 네놈들이 알아낼 수 있는 건 단 하나도 없다.”
“건방진 놈!”
붉게 달아오른 쇠막대기가 할아버지의 허벅지에 닿았다.
치이이익.
살이 타는 소리와 함께 할아버지의 얼굴이 격통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는 툭 하고 고개를 떨궜다.
“의식을 잃었습니다. 어쩔까요?”
부하의 물음에 일본 순사가 입술을 깨물었다. 지독해도 너무 지독한 놈이라 생각했다. 벌써 며칠째 이어지는 고문에도 단 한 마디의 정보도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서대문으로 보낼까요?”
“아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금책을 알아내야 해. 일단 감옥으로 다시 보낸다. 기력을 회복하면 다시 고문하도록 하겠다.”
“네!”
그 말을 끝으로 부하들이 할아버지를 부축했다. 그리고는 차가운 감방에 던지듯 가두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할아버지의 의식이 돌아왔다.
“읍읍···.”
할아버지가 수갑을 채운 양 주먹을 움켜쥐었다. 밀정인 자신은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이대로 죽는 한이 있다 해도 절대 발설할 수 없었다. 혀라도 깨물고 싶지만, 입에 물린 재갈이 그것마저 방해하고 있었다.
‘잘 도망치셨을까? 붙잡히지는 않았겠지?’
토굴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 기억이 끊긴 할아버지였다. 그때 도망친 인물은 조선 내 독립자금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래, 됐어. 그분을 구한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 순간이었다.
콰아앙!
커다란 폭음과 함께 감옥의 벽면이 터져 나갔다. 그리고는 복면을 쓴 일단의 무리가 들이닥쳤다. 할아버지가 놀란 눈으로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우린 의열단이오. 당신을 구하러 왔소. 움직일 수 있겠소?”
“읍읍···.”
할아버지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복면을 쓴 남성 중 한 명이 할아버지의 재갈을 풀어 주었다.
“여기는 우리가 맡을 테니. 어서 탈출하시오. 이봐 빨리 박 동지를 데리고 나가.”
“네! 알겠습니다.”
복면을 쓴 남성 중 한 명이 다가와 할아버지를 부축했다. 그와 동시에 사방이 시끄러워졌다.
“침입이다!”
사방에서 일본 순사와 병력이 밀려들었다. 의열단의 단원들이 품에서 권총을 꺼내더니 비장한 표정이 되었다.
“안 되오. 다들 같이 도망을···.”
할아버지가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다 같이 나갈 수는 없소. 우리가 시선을 끌 테니 빨리 가시오.”
그 말을 끝으로 할아버지를 부축한 남성이 강하게 할아버지를 잡아끌었다. 그리고는 준비된 탈출로를 자리를 벗어났다. 그와 동시에 강우의 눈앞에 벌어지던 장면이 흐릿해졌다.
“재봉!”
상대방이 할아버지의 이름을 불렀다. 할아버지가 차오르는 격정을 참지 못했다.
“정말···. 정말 형님입니까?”
“그래, 날세. 최준. 잘 지냈는가 아우.”
할아버지가 부들거리는 손을 진정하지 못했다. 이윽고 할아버지와 최준이 서로를 얼싸안았다.
“살아 계셨습니까?”
“수술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자네도 건강해 보이는군.”
강우가 그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받아들인 할아버지의 기억이 최준이 누구인지 알려주고 있었다.
‘그때, 할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발설하지 않았던 바로 그 독립자금을 조달하던 분이 바로 최준이라는 분이었구나.’
강우가 눈앞의 인물을 자세히 살폈다. 할아버지보다 훨씬 늙어 보였지만, 두 눈은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어르신들 일단 자리에 앉으시죠.”
위진오가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믿기지 않는 듯 멍한 표정이었다. 이곳 중국에서 할아버지의 옛 인연을 만날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자네가 살아있는 줄 알았다면 내 진작 찾을 걸 그랬네.”
최준이 울먹이듯 말했다. 할아버지도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게 중경에서였지요?”
“그래, 맞아. 자네가 징모처에서 일할 때였지.”
할아버지는 감옥에서 당한 부상으로 더는 밀정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중경의 임시정부로 향해 광복군 징모처에서 장교로 근무하셨다. 눈앞의 최준은 토굴에서의 사건 이후 위기를 느꼈다. 일본의 감시망이 더욱 엄밀해진 것이다.
‘국내에 있던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는 곧장 중국으로 오셨지. 그리고 그 자금으로 독립군 양성에 힘을 보태셨고.’
하지만 두 분은 해방 이후 운명이 갈라졌다. 할아버지는 귀국했고, 최준은 중국에 남았다. 이미 국내에 있던 모든 재산을 가지고 와 중국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각자의 사정으로 연락이 끊긴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저를 찾으신 겁니까?”
할아버지의 질문에 위진오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최준이 위진오의 팔뚝을 쓰다듬어 주었다.
“여기 있는 진오의 아버지가 나랑 친한 사이였네. 얼마 전, 오랜만에 진오와 연락을 했는데. 그때, 자네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더니···.”
“허···.”
할아버지가 탄성을 뱉어냈다. 강우와 가족들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인연의 고리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할아버지가 강우를 바라보며 대견해했다.
“강우, 네가 또 이 할아비의 인연을 이어주는구나. 고맙다.”
“아니에요. 두 분이 만나게 돼서 정말 기쁩니다.”
할아버지와 최준이 서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한국에서는 어떻게 지내고 있나?”
“지금은 은퇴하고 자식 그늘에 있습니다.”
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또한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은퇴한 지 오래였다. 최준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가 부드럽게 웃었다.
“둘째 아들과 며느리입니다. 인사드리거라. 나와 같이 독립운동을 하시던 정말 훌륭하신 분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최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만나서 반갑다.”
최준의 시선이 이번에는 강우를 향했다. 최준의 눈빛에는 짙은 호기심이 담겨있었다.
“네가 바로 진오가 양아들로 삼았다던 아이구나.”
“안녕하십니까. 박강우입니다.”
깍듯한 강우의 인사에 최준이 부드럽게 웃었다.
“젊었을 적의 재봉을 정말 많이 닮았군.”
“허허···.”
할아버지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흐뭇해했다. 이번에는 강용이가 먼저 나섰다.
“안녕하세요. 저는 박강용입니다. 할아버지의 막냇손자예요.”
“그래?”
강용이의 약간은 허술한 자기소개에 음식점 안에 폭소가 터져 나왔다. 한국어를 모르는 위진오만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최준이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자자. 다들 일단 앉게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하지.”
할아버지와 강우가 자리에 앉았다. 가족들도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미리 주문한 요리가 나왔다. 짙은 갈색으로 요리된 북경 오리는 정말 탐스러워 보였다.
“와~ 맛있겠다.”
강용이가 눈을 반짝이며 기대감에 차올랐다. 최준이 강용이를 보며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했다.
“우리 강용이는 북경 오리를 먹어본 적이 있나?”
“이번이 처음이에요.”
최준이 부드럽게 웃으며 살점 하나를 강용이에게 놓아주었다. 그리고는 옆쪽에 있는 진한 색깔의 소스를 가리켰다.
“여기에 찍어 먹어 보거라.”
“네, 할아버지!”
강용이가 살점을 소스에 찍어 먹었다. 겉은 바삭하고 안은 부드럽게 씹히는 북경 오리의 맛에 강용이가 탄성을 뱉었다.
“와~ 진짜 맛있어. 할아버지, 이거 드셔보세요.”
강용이가 할아버지의 접시에 살점을 놓아드렸다. 할아버지가 흐뭇하게 웃었다. 최준도 기특하다는 듯 강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강용이는 익숙한 듯 씨익 웃었다.
“헤헤···.”
그때였다. 할아버지가 상기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형님, 이렇게 좋은 날 술이 빠질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자네랑 죽기 전에 술을 한잔할 수 있게 되다니.”
강우가 빠르게 종업원을 불렀다. 그리고는 능숙한 중국어로 술을 시켰다. 그 모습을 보던 최준이 할아버지를 보며 짧게 감탄했다.
“손자가 자네를 닮아 언어에 능통하다고 하던데?”
“맞습니다. 중국어는 물론이고 일어 영어까지 완벽히 구사합니다.”
최준이 놀라워하는 표정이 되었다. 눈앞의 강우는 외모뿐만이 아니라 능력까지 할아버지를 똑 닮아있었다.
“대단하군. 대단해. 역시 자네의 자손들다워.”
“형님···.”
할아버지가 민망한 듯 웃었다. 처음 보는 할아버지의 이런 모습에 강우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최준 앞에서 할아버지는 나이가 어린 동생 그 자체였다. 곧이어 주문한 술이 나왔다.
“자. 내가 따르는 술 한 잔 받으세.”
“네, 형님.”
최준이 할아버지의 잔을 채웠다. 할아버지도 최준의 잔을 따라주었다. 위진오가 술병을 이어받더니 아버지의 잔에 따랐다. 그리고는 어머니를 보며 살짝 망설였다. 어머니가 결심한 눈빛을 지었다.
“아주버니, 저도 주세요. 오늘같이 좋은 날에 술이 빠질 수는 없어요.”
강우가 빠르게 어머니의 말을 통역해 주었다. 위진오가 크게 웃었다.
“좋습니다. 우리 제수씨가 아주 화통하군요.”
그렇게 가족들의 술잔이 채워졌다. 강우는 강용이와 함께 음료로 대체했다. 이윽고 건배가 이어지고 식사가 시작됐다. 할아버지와 최준의 이야기는 끊일지를 몰랐다. 서로의 살아온 세월을 주고받으며 기뻐하고 아쉬워하고 또 즐거워했다.
“그래, 자네 다리는 좀 어떤가?”
“멀쩡합니다.”
할아버지가 불편한 다리를 툭툭 치며 태연해했다. 모진 고문의 후유증이 남은 다리는 나이가 들어 더욱 불편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최준에게는 내색하고 싶지 않은가 보다.
“여기 있는 재봉이 무려 사흘 밤낮을 고문을 당했지. 하지만 재봉의 입에서 단 한마디의 정보도 흘러나오지 않았어. 악명 높기로 유명한 종로서에서 말이야. 정말 대단한 의지의 소유자이지.”
최준이 가족들을 보며 할아버지를 칭찬했다. 할아버지가 민망한 듯 웃었다.
“내가 아닌 누구였어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오히려 형님이 의열단을 보내 저를 구해주시지 않았습니까.”
“아니야. 자네는 꼭 구출해야 하는 인물이었어. 자네가 알고 있는 항일투사의 명단과 자금 조달처가 어디 한두 군데였던가?”
강우가 눈을 빛내며 감탄했다. 할아버지는 강우가 알던 것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었다. 할아버지가 최준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형님, 한국에 돌아오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아닐세. 나는 이미 이곳에 뿌리를 내렸어. 그리고···.”
최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할아버지도 최준의 그런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독립운동가들에게 한국은 아쉬움과 그리움만 남은 곳이었다.
“형님 같은 분이 꼭 한국에 돌아오셔야 합니다. 그리고 큰일을 하셔야 합니다.”
“이미 늦었지. 그리고 한국은 우리가 없어도 이제 잘살지 않는가?”
할아버지가 잠시 침묵했다. 그때, 강우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르신.”
“그래 강우야.”
최준이 강우를 바라보았다. 방 안의 시선이 강우에게 몰렸다.
“저는 그래도 어르신의 공적이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어르신의 후손들뿐만이 아니라 한국에 있는 많은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위해서도 말입니다. 꼭 한국에 오셔서 서훈 절차를 밟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으음···.”
최준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 내의 독립유공자들과 후손들의 상황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라를 위해 조국을 떠나고 젊음을 바치고 가문의 재산까지 모두 바쳤다. 그렇게 격렬하게 항일운동을 하던 최준은 자신이 나이가 너무 들었다고 생각했었다.
“강우야.”
최준의 눈빛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가슴속에 잠들어있던 아니 어쩌면 억지로 외면했던 감정이 차올랐다.
“네, 어르신.”
강우도 당당히 최준을 바라보았다. 존경이 담긴 눈빛에 최준의 얼굴에 생각이 깊어졌다. 이윽고 최준의 입이 열렸다.
“사실, 나는 진오와 네 아버지의 회사에 투자하려고 했었다.”
최준의 말에 아버지가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합작회사에 투자한다던 엄청난 재력가가 바로 최준이었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최준의 말에 아버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할아버지는 묵묵히 최준을 바라보았다. 최준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내가 가진 것을 너에게 투자하마. 그 돈을 사업에 사용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줄 수 있겠느냐?”
“네, 어르신.”
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과 중국에 살아있는 독립운동가들과 후손들을 네가 돌보아 줄 수 있겠느냐?”
방 안으로 깊은 정적이 흘렀다. 할아버지조차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강우는 자신감에 가득 찬 얼굴로 답했다.
“네, 어르신. 그것 또한 저의 꿈이기도 했습니다.”
당찬 강우의 포부에 방 안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