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73/402)

아빠가 다 뿌듯하더구나.

강우의 집이 있는 목2동에 이재원의 차량이 나타났다. 부드럽게 달리던 차량이 시장 근처의 상가 밀집 지역에 멈춰 섰다.

덜컥.

이재원이 문을 열고 내렸다. 강우와 아버지도 차에서 내렸다. 운전석에서 김 기사가 내리려 하자 이재원이 말렸다.

“김 기사님, 여기 집 근처니까 먼저 들어가세요. 저는 택시 타고 갈게요.”

“네, 도련님. 혹시 모르니 집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김 기사가 익숙한 듯 답했다. 강우네 가족이라면 이재원에게는 친가족과 같았다. 몇 번이고 이런 경험이 많았다. 이윽고 차량이 멀어져 갔다. 이재원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아버지, 껍데기 어떠세요?”

“오~ 좋지.”

강우가 시계를 힐끗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일찍 끝난 회식 덕분에 시간은 아직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강우와 이재원 그리고 아버지가 고깃집으로 들어갔다.

“아이고~ 박 사장님 오셨어요?”

고깃집 사장이 아버지를 반겼다. 이재원과 강우도 알아보고는 반겼다. 집 근처에 있는 이곳은 강우 가족의 단골집이었다. 강우 일행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기 껍데기 3인분이랑 소주 두 병 주세요.”

이재원이 익숙하게 주문했다.

“재원아, 아직 밥 안 먹었어?”

“네, 사실 오늘 일찍 끝나서 집에 밥 얻어먹으러 가려고 했거든요.”

이재원이 배를 어루만졌다. 표정을 보아하니 어지간히 배가 고픈 모양이다. 아마 강우와 아버지가 회식한다고 해서 기다린 모양이다.

“저녁 먹고 오지 그랬어요.”

“그냥 어머니가 해준 밥이나. 여기 껍데기가 먹고 싶었어.”

이재원은 한동안 정말 바빴다. 렌탈 사업 계획서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일은 잘 마무리 했어요?”

“그럼, 오늘 회장님한테 보고했다. 회의장이 아주 난리가 났었지.”

이재원이 싱글벙글 웃었다. 아버지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잘됐다. 그럼 이제 네가 렌탈 사업을 책임지는 거지?”

“네, 아버지. 이번에 대진 미디어를 대진 커웨이에 흡수시키면서 제가 사장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강우와 아버지의 입꼬리가 찢어질 듯 올라갔다. 이재원의 경사는 곧 강우 가족의 일이었다.

“재원아, 축하한다.”

아버지의 축하에 이재원이 멋쩍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이게 전부 강우 덕분이죠. 고맙다 강우야.”

“제가 뭐한 게 있나요. 그냥 아이디어만 준 건데. 진짜 축하해요.”

이재원이 회의장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회장님이 얼마나 좋아하시던지. 회의장이 떠나가라 웃으셨지. 네가 형들 표정을 봤어야 했는데.”

강우도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재원이 제안한 렌탈 사업은 말 그대로 대박을 터트릴 것이다. 미래의 기억이 분명히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철금 회장의 반응도 눈앞에 선했다.

‘아들이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해서 사업계획까지 세워버렸으니. 아마 자기 머릿속에 들어갔다가 나왔나 싶었을 거다.’

그뿐인가? 이재원의 대진 미디어가 가진 현금은 그야말로 대진 그룹의 생명줄 역할을 했다. 둘째 아들이 건설 회사를 인수하면서 생겨난 유동성 위기를 이재원의 활약으로 한 방에 해결한 것이다.

‘일단 둘째 아들은 눈 밖에 났을 게 분명하고.’

이제 대진 커웨이가 이재원의 손에 들어왔다. 이철금 회장의 첫째 아들과의 경쟁에서도 앞서나가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강우는 이재원의 후계자 싸움에 쐐기를 박아줄 생각이었다.

“형, 이제 이빨을 드러냈으니 완벽하게 적의 숨통을 끊어야죠.”

“방법이 있을까?”

이재원의 눈동자가 빛을 내기 시작했다. 강우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내가 저번에 인터넷이 점점 보급되면 많은 변화가 일어날 거라고 했었죠?”

“네트워크 중점의 사업 말이야?”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재원이 숨을 죽이고 강우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와 이재원이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그래왔지만, 앞으로도 입시시장은 더 경쟁이 심해질 거에요.”

“그렇지.”

이재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대한민국은 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버텨온 나라였다. 인구수 대비 훌륭한 인적 자원으로 경제 성장을 주도해 온 것이다. 그리고 그 신화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제 네트워크. 즉 온라인의 시대가 올 거예요. 지금 학원에서 하는 수업들 그리고 오프라인에서 이루어지는 학습지 교육들 이걸 모두 온라인과 연계시켜봐요.”

“아···.”

이재원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도 강우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강우의 말은 정말 놀라운 것뿐이었다. 마지막으로 강우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공무원 시험 쪽에도 진출해보고요. 지금 내가 말한 사업들은 형한테 대진 미디어가 있으니까 손쉽게 풀어갈 수 있을 거예요.”

“그렇지.”

이재원이 턱을 쓰다듬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확실히 사업적 감각이 뛰어난 이재원이었다. 강우의 말을 금세 알아듣고 머릿속으로 청사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 그런 거구나.”

이재원이 눈을 크게 뜨며 입꼬리를 올렸다. 강우의 말대로만 한다면, 첫째 형이 진행 중인 학습지 사업을 자연스럽게 흡수하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 대진 그룹의 주력 사업을 장악한 이재원은 명실상부한 후계자가 될 것이다.

“이해했죠?”

“그래, 완벽히. 강우 너는 진짜 외계인이 분명해.”

강우와 이재원이 동시에 웃었다. 아버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외계인? 우리 강우가?”

그때, 주문한 메뉴가 나왔다.

“자~ 껍데기 나왔습니다.”

고깃집 사장이 주문한 음식들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힐끗 가게를 둘러보았다. 아르바이트생이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혼자 일하나 봐요?”

“네, 아무래도 요새 좀 힘들어서요. 저녁 식사 타임이 끝나면 새벽까지는 혼자 운영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국민들 모두가 IMF라는 파도를 각자의 방식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고깃집 사장이 불판 위에 껍데기를 올려주었다.

“그나저나 한동안 바쁘셨나 봅니다?”

단골집인 이곳도 오랜만에 오는 아버지였다. 그만큼 바쁜 나날을 보내셨다.

“네, 회사 일로 좀 바빴습니다.”

고깃집 주인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요즘 같은 시기에 바쁘시다니 다행입니다.”

아버지가 말없이 웃었다. 세팅을 마친 고깃집 사장이 카운터로 돌아갔다. 가게 안으로 손님 몇 팀이 더 들어왔다. 적막했던 고깃집이 조금은 북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껍데기가 모두 익었다.

“아버지, 한잔 따라 드리겠습니다.”

“그래, 좋지.”

이재원이 아버지의 잔에 술을 따랐다. 강우에게도 소주를 따라주었다. 아버지가 잔을 들며 기분 좋게 웃었다.

“자! 재원이의 후계자 경쟁과 동양 무역의 앞날을 위하여!”

강우와 이재원이 ‘위하여!’라고 크게 소리쳤다. 세 남자의 잔이 뜨겁게 부딪치고 술이 단숨에 목젖을 타고 넘어갔다.

“크···.”

“캬···.”

세 남자가 동시에 껍데기를 집었다. 먹는 방식은 제각각이었다. 강우는 쌈장에 찍어 먹었다. 아버지는 껍데기 그대로의 맛이 좋다며 그냥 드셨다. 이재원은 콩가루에 찍어 먹었다.

“쫄깃하고 좋네.”

아버지가 흐뭇하게 웃었다. 지금, 이 순간이 참 즐거웠다. 이번에는 강우가 아버지의 잔을 채웠다. 그리고 이재원의 잔도 채워주었다. 그렇게 고깃집에서의 즐거운 시간이 흘러갔다. 이재원은 된장찌개에 공깃밥까지 추가해 먹었다. 강우와 아버지도 공깃밥을 먹었다. 역시 대식가인 강우 가족이었다.

“잘 먹고 갑니다.”

강우 일행이 고깃집을 나섰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고깃집 사장이 강우 일행을 배웅했다. 강우와 아버지 그리고 이재원이 집이 있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직은 쌀쌀한 밤바람이었지만, 술기운이 몸을 따듯이 데워주었다.

“재원아, 오늘 자고 갈래?”

“아닙니다. 어머니가 걱정하셔서 들어가 봐야 해요. 요즘 계속 회사에서 살다시피 했거든요.”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재원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침 멀리서 택시가 오고 있었다. 이재원이 손을 크게 흔들어 택시를 잡았다.

“아버지, 그럼 가보겠습니다.”

이재원이 꾸벅 인사를 했다. 아버지가 이재원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그래, 고생 많았다. 밥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와.”

“네···.”

이재원이 뭉클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앞에서는 이재원도 20대 청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는 했다.

“강우야, 간다.”

“네, 조심히 가요.”

이재원이 택시를 타고 떠났다. 잠시 택시를 바라보던 아버지가 긴 숨을 뱉어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지금의 상황에 후련함을 느꼈다.

“아들, 우리도 가자.”

잠시 후, 강우와 아버지가 오성맨션에 도착했다. 강우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현관문으로 다가갔다.

덜컥.

“아버지, 들어가요.”

“그래.”

강우와 아버지가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에 들어서자 거실의 불이 켜있었다.

“누구세요?!”

거실에서 기다리던 강용이가 대번에 달려왔다. 늦은 밤이었지만, 강우와 아버지를 기다렸나 보다. 가까이 다가온 강용이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코를 부여잡았다.

“으···. 술 냄새···.”

아버지가 강용이를 끌어안으려 했다. 강용이가 재빠르게 몸을 피하더니 안방으로 뛰어갔다.

“엄마! 아빠랑 형아 왔어. 또 술 엄청 마셨어!”

강우와 아버지가 실소를 흘렸다. 이윽고 안방에서 어머니가 나왔다. 어머니가 허리에 손을 ‘척’하고 올렸다. 옆에 있는 강용이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어머니를 따라 했다.

“아주 두 부자가 요새 쿵짝이 맞아서.”

어머니의 싫지 않은 타박에 아버지가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어머니를 껴안았다.

“아이고~ 우리 사모님, 나 기다렸구나?”

“어머~ 애들 보는데 이이가.”

어머니가 밀어내는지 아닌지 모를 행동을 하며 웃었다. 강우와 강용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후, 차례대로 씻고 나온 강우와 아버지가 식탁에 앉았다.

“오늘은 새 직원들 출근 첫날이니까. 용서해주는 거예요. 당분간 술 금지.”

어머니가 아버지 앞에 꿀물을 놓아주며 말했다. 얼굴에는 아버지의 건강을 걱정하는 빛이 역력했다. 아버지가 씨익 웃었다.

“그래도 오늘은 조금만 마셨다고.”

아버지가 꿀물을 마셨다. 옆에 앉아있던 강용이가 다시 코를 부여잡았다.

“오늘은 내가 엄마랑 잘래. 술 냄새 싫어.”

강용이가 안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머니가 살짝 당황하더니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의 얼굴에 진한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우리도 그만 자러 가자.”

“네.”

강우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방에 들어갔다. 강우와 아버지가 잠자리에 나란히 누웠다. 잠자리 위로 있는 창문에서 희미한 불빛이 들어와 두 부자의 얼굴을 비췄다.

“......”

“......”

잠시 흐르던 침묵을 깨고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강우야.”

“네?”

아버지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보니까 우리 아들 능력이 참 대단하더구나. 아빠가 네 나이 때는 놀기 바빴는데 말이야.”

“저도 똑같아요. 노는 게 제일 좋고 그래요.”

아버지가 씨익 웃었다.

“재원이 도와준 거 정말 잘했다. 아빠가 다 뿌듯하더구나.”

“그냥 조언 몇 마디 한 거뿐이에요. 나머지는 형이 다 자기 능력으로 해낸 거죠.”

아버지가 말없이 강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들의 뛰어난 능력이 뿌듯했고, 또 겸손함이 대견했다.

“그래, 항상 그렇게 겸손하고 성실하고. 할아버지 말처럼 어려운 사람들 도울 수 있으면 외면하지 말고.”

“네, 아버지.”

“아빠는 요즘 같아서는 정말 여한이 없구나. 회사 일도 가족들도···.”

아버지의 목소리는 정말이지 편해 보였다. 강우가 스르륵 미소를 지었다.

“저도요.”

“그래, 당분간은 또 서로 바빠지겠구나. 강우 너는 대학 생활에 아빠는 회사 일들로 말이야.”

말을 마친 아버지가 강우를 향해 주먹을 쓰윽 내밀었다. 강우가 살짝 놀라며 마주 주먹을 툭하고 부딪혔다. 그러자 아버지가 씨익 웃었다.

“잘 자라 아들.”

“네.”

강우와 아버지의 대화가 끝났다. 방안으로 다시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왜인지 잠이 오지 않는 강우였다. 물끄러미 천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제가 빨리 졸업해서 아버지 부담 덜어드릴게요. 그리고 학교 다니면서도 회사일 도울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강우의 말에도 아버지는 반응이 없었다. 강우가 힐끗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많이 피곤하셨나 보네.’

아버지는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강우가 아버지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고단함이 가득한 가장의 얼굴에는 어느새 잔주름이 늘어있었다.

“.......”

강우가 한동안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IMF라는 거대한 파도를 넘긴 강우 가족의 앞날은 밝았다. 강우가 아버지에게 이불을 잘 덮어줬다. 그리고는 자신도 잠을 청했다.

드르릉. 드르릉.

술을 많이 마신 탓일까? 방안으로 강우와 아버지의 코를 고는 소리가 차올랐다. 똑 닮은 두 부자는 코를 고는 소리마저 닮아있었다.

* * *

직원 세 명의 가담으로 회사가 운영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GIC 한국지사의 일과 동양 무역의 일로 정신이 없는 나날을 보내셨다. 일본 쪽 공장을 짓는 것도 가속도가 붙었다. 공장이 완공되고 나면 더욱 정신이 없어질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강우에게 중요한 날이 왔다.

“형아, 잘 갔다 와.”

옷을 챙겨입는 강우의 옆에서 강용이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강우가 씨익 웃으며 강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할아버지 말씀 잘 듣고 있어.”

“응. 알겠어.”

그때, 밖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우야, 준비가 다 됐니?”

“네!”

강우가 문을 열고 나갔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벌써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평소와는 다르게 어머니도 급하게 서두른 모양이었다.

“가자. 아마 차가 막힐 수도 있을 거야.”

아버지가 강우의 머리를 만져주며 부드럽게 웃었다.

“너무 긴장들 하지 말거라. 강우가 떨어지면 서울대에 붙을 사람이 누가 있겠니?”

거실에 앉아계신 할아버지가 부모님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다녀오거라. 결과 확인하면 꼭 연락해주고.”

“네.”

강우와 부모님이 현관을 나왔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차를 타고 서울대로 향했다. 오늘은 1998년도 서울대 입시의 합격자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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