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1/402)
  • 네 선택에 맡기마.

    동양 무역의 사무실이 있는 곳은 명동에 있는 고층 빌딩이었다. GIC 본사가 있는 건물의 바로 옆 건물로 아버지가 움직이기 편하게 얻은 곳이었다. 그 빌딩 앞으로 강우가 나타났다.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은 강우는 가방을 메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미래의 기억 속에서도 아버지의 사무실이 있던 건물이었다. 강우가 슬쩍 안으로 들어갔다. 경비아저씨가 힐끗 강우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경비아저씨가 강우를 알아보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사무실을 몇 차례 들렀던 강우를 기억하는가 보다. 강우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띵.

    사무실이 있는 7층에 내린 강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회색의 철문이 있었다. 슬쩍 철문의 옆을 보자 ㈜동양 무역이라는 작은 현판이 걸려있었다. 강우가 잠시 현판을 어루만졌다.

    ‘후···.’

    할아버지의 뜻을 이은 회사명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강우가 크게 키워나갈 회사였다. 이윽고 강우가 열쇠를 꺼내 잠긴 문을 열었다.

    덜컥.

    평소 비어 있는 사무실에는 냉기가 살짝 흘러나왔다. 강우가 사무실의 불을 켰다. 사람의 흔적이 별로 닿지 않은 사무실은 적막했다.

    ‘일단 청소부터 좀 할까.’

    사무실은 그리 크지는 않았다. 방 두 개와 중앙의 커다란 사무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작은 방은 아버지가 사용하는 곳이었다. 큰 방은 할아버지의 사장실이었다. 비록 사용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말이다. 중앙의 공간에는 사무용 책상이 여러 개 놓여있었다.

    ‘뭐···. 조만간 옮겨갈 거니까. 지금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강우가 사무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무실이 점점 정리되어갈 때쯤이었다.

    뚜르르. 뚜르르.

    강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딸칵 소리와 함께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어, 아빠다. 사무실이니?-

    아버지의 묵직한 저음이 들려왔다. 무언가에 집중하실 때 나오는 특유의 목소리였다. 아마 GIC 한국지사의 일로 정신이 없으신가 보다.

    “네, 지금 사무실 정리 중이에요.”

    -그래, 알겠어. 금세 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네, 바쁘시면 천천히 오세요.”

    -아니야. 어차피 쉬는 날이었는데 나온 거니까. 최대한 빨리 갈게.-

    통화가 끝났다. 오늘은 동양 무역의 직원을 뽑는 면접일이었다. 아버지는 오늘의 면접을 위해 회사에 월차를 사용하셨다. 하지만 회사 일이 워낙 바빠 잠깐 들르신 듯했다. 오늘 뽑을 직원은 3명이었다.

    ‘회사건물도 생기고 일이 바빠지면 점점 늘려야겠지만.’

    일본 쪽에 공장이 완공되고 나면 그쪽에도 많은 직원을 뽑아야 했다. 그 일은 마사토가 담당할 것이었다. 한참을 정리하고 나니 사무실이 몰라보게 깨끗해졌다. 시간을 힐끗 보니 면접을 약속한 시각이 다가오고 있었다.

    딸랑.

    그때, 사무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아버지가 들어왔다. 급하게 오셨는지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아버지가 사무실을 둘러보더니 만족스럽게 웃었다.

    “와? 사무실 정말 깨끗해졌는데?”

    “오셨어요?”

    아버지가 강우에게 다가와 넥타이를 바르게 고쳐주었다. 아직 넥타이 매는 것이 어색한 강우였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건가?”

    “네. 아직 시간이 좀 남았잖아요.”

    “사람들 오면 간단한 다과라도 있어야 할 텐데.”

    강우가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는 어머니가 준비해준 샌드위치와 음료들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사무실에 놓을 커피믹스와 녹차, 둥굴레차 팩도 들어있었다. 강우가 가방에 든 먹을 것들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그럼 강우야, 잘 부탁한다.”

    “네, 들어가 계세요.”

    오늘 면접은 사장실에서 진행된다. 아버지가 사장실로 들어가더니 서류뭉치를 들고나왔다.

    “이거 이력서들인데 너도 한번 살펴봐.”

    “네.”

    강우가 서류뭉치를 받아들었다. 묵직한 무게에 강우가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가 그런 강우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요즘 취업난이긴 한가 보더라. 지원자가 엄청 많아.”

    “그런가요···.”

    강우가 씁쓸한 표정으로 서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원자들의 학력이 중소기업에 지원할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깜짝 놀란 강우를 보며 아버지가 말했다.

    “우리 회사 조건이 좀 좋아서 그럴 거야.”

    “잘됐네요. 이 기회에 유능한 직원들 뽑을 수 있겠어요.”

    동양 무역은 아직 작고 초라해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내실을 들여다보면 전도가 유망한 기업이라 할 수 있었다. 회사 보유금도 탄탄했고, 일본에는 공장도 지어지고 있었다.

    ‘지금 우리 회사에 들어오는 사람은 그야말로 천운을 타고난 걸 수도.’

    강우가 씨익 웃으며 서류를 계속 살폈다. 아버지는 사장실로 다시 들어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첫 번째 면접자가 도착했다.

    “안녕하십니까?”

    우렁차게 인사하는 남성은 이제 20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안경을 낀 얼굴 위로는 약간의 긴장감이 느껴졌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면접 오셨습니까?”

    “네, 맞습니다.”

    강우가 이력서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눈앞의 사람과 똑같이 생긴 사진을 찾아냈다. 이력서에는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의 경영학과를 나오고 특기로는 영어를 잘한다고 쓰여 있었다. 정석으로 적힌 자기소개서도 눈에 들어왔다.

    똑똑.

    강우가 사장실의 문을 노크했다.

    “네.”

    “이사님, 면접자가 왔습니다.”

    강우가 문을 열고 이력서를 아버지의 책상에 놓았다. 아버지가 이력서를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네.”

    강우가 밖으로 나와 지원자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면접자가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강우가 커피를 준비해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맞은편의 자리에 앉은 지원자의 표정은 긴장감 그 자체였다. 커피를 놓고 나온 강우가 자리에 앉았다.

    “반갑습니다. 동양 무역 박정식 이사입니다.”

    안쪽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면접이 진행됐다. 아버지는 상대방의 자기소개를 듣고, 회사에 지원한 동기 그리고 입사한다면 어떤 자세로 일한 것인지 묻고는 했다. 정석적인 면접 질문들이었다. 지원자는 잔뜩 긴장한 듯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아버지가 편하게 대해주자 점점 자신이 있게 면접을 치렀다.

    ‘잘하시네.’

    집에서와 다른 아버지의 모습에 강우가 살짝 신기한 기분을 느꼈다. 그렇게 첫 번째 지원자가 면접을 보는 동안 다른 지원자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적막했던 사무실 안이 사람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지금이 10시부터 1시까지 면접자들이 온 거구나.’

    지원자가 몰려 오늘의 면접은 총 두 타임으로 나누어 보기로 했다.

    “다들 한쪽에 앉아서 기다려주세요.”

    강우의 지시에 지원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착석했다. 강우가 면접서류를 일일이 확인했다. 아버지는 직원을 뽑으면서 중점을 둔 부분이 하나 있었다. 바로 외국어 능력이었다. 지원자 중에는 영어, 일어, 중국어를 하는 사람들이 골고루 있었다.

    ‘외국어 능력은 내가 좀 확인해 봐야겠군.’

    강우가 이력서를 챙겨 지원자들에게 다가갔다. 어려 보이는 강우가 다가오자 지원자들의 얼굴에 의아함이 서렸다. 강우가 지원자들의 맞은편에 앉았다.

    “면접에 앞서서 외국어 능력을 간단히 평가하는 시간을 조금 가질까 합니다.”

    강우의 말에 지원자들의 얼굴에 의아함이 짙어졌다. 강우 혼자서 뭐를 하겠다는 건가 싶었다. 강우가 먼저 일본어를 잘 구사한다는 지원자를 바라보았다. 20대 후반 정도의 여성이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저희 동양 무역회사에 지원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려도 될까요?”

    강우의 말에 여성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발음도 어휘도 완벽한 일본어였다. 여성이 살짝 당황한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지숙입니다. 서울에 살고요 올해 나이는 26살입니다. 이화여대 일본어 학과를 나왔습니다.”

    여성의 입에서 유창한 일본어가 흘러나왔다. 강우의 얼굴에 만족감이 차올랐다. 강우가 일본어로 이것저것을 계속 물었다. 여성은 안정을 찾았는지 차분히 답했다.

    “다음은 이철환 씨?”

    강우가 중국어로 다음 지원자를 불렀다. 일어를 구사했던 김지숙이 화들짝 놀랐다. 시큰둥한 표정을 짓던 다른 지원자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네! 제가 이철환입니다.”

    “자기소개 부탁합니다. 물론 중국어로요.”

    이철환이라 불린 남성이 잔뜩 긴장했다. 그리고는 어설픈 중국어로 입을 열었다. 강우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생각보다 훌륭한 중국어는 아니군요. 성조가 부정확해 정확한 뜻을 전달하기가 힘들겠어요.”

    이철환의 고개가 푹 숙였다. 성조도 발음도 완벽한 강우의 중국어에 할 말이 없어졌다. 강우가 이력서에 적힌 중국어 구사라는 부분에 엑스 자를 그렸다. 물론 김지숙의 일본어 구사라는 부분에는 완벽이라는 글씨를 달았다.

    “다음은···.”

    강우의 시선을 받은 지원자들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눈앞의 말도 안 되는 언어능력자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강우는 대충 일할 생각이 없었다.

    “주형진 씨?”

    이번에는 영어였다. 지원자들은 이제는 반쯤 넋이 나갔다.

    “주형진 씨?”

    강우가 재차 부르자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고 적은 지원자가 손을 번쩍 들었다. 강우가 씨익 웃더니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다.

    “자기소개해 주실까요?”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지원자들이 회사 안을 두리번거리며 여기는 도대체 뭐 하는 곳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자신들보다 한참이나 어린 말단 직원이 3개 국어를 유창히 하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강우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차근차근 언어능력을 점검하고 이력서에 표시했다. 그사이 대기하던 지원자들이 한 명씩 면접을 들어갔다.

    “후아···.”

    한참이 지나고 첫 번째 면접 타임이 끝났다. 강우는 돌아가는 면접자들에게 어머니의 샌드위치를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약간의 교통비도 함께였다. 강우가 의자에 앉아 기지개를 쭈욱 폈다. 미래의 기억 탓일까? 사람을 다루는 일에 그다지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전 타임에 면접을 본 인원이 십여 명이 넘어갔다.

    “강우야, 이제 끝났지?”

    아버지가 피곤한 얼굴로 방에서 나왔다. 사람을 여럿 만났으니 힘들 만했다. 강우가 이력서를 뒤적였다.

    “아직 오후 타임 한 번이 남았어요.”

    “그래? 하···. 그냥 몇 번에 나눠서 면접을 볼 걸 그랬나?”

    “시간이 없어서 그랬으니까 어쩔 수 없죠.”

    아버지는 이번에 중요한 계약 건을 진행 중이었다. GIC의 미국산 식품을 중국에 수출하는 건이었다. 조만간 위진오를 만나러 가는 것도 이 일과도 관련이 있었다. 아버지는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런 이유로 면접을 몰아서 보기로 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우리도 나가서 밥이나 먹고 올까?”

    “오랜만에 칼국수 어떠세요?”

    “좋지.”

    강우와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 칼국숫집으로 향했다. 강우도 아버지도 밀가루 음식을 참 좋아했다.

    “아까 밖에서 지원자들 언어 테스트하던 거 같던데?”

    “아···. 들으셨어요? 혹시 몰라서요. 확실한 게 좋잖아요.”

    아버지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지원자 중에 밖에 있는 사람이 평직원이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다들 많이 놀란 거 같던데.”

    강우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뽑을 만한 사람들은 있어요?”

    “음···. 일단 오후 면접자까지 만나보고 같이 결정하자. 오후에도 강우 네가 오전처럼 해줘.”

    “네.”

    아버지가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 아들 정말 대단해.”

    강우가 말없이 슬쩍 웃었다. 그리고는 칼국수를 후루룩 먹었다. 맛깔스러운 면치기에 아버지가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는 자신도 큼지막하게 한 입 먹었다.

    * * *

    면접을 모두 끝낸 강우와 아버지는 근처의 고깃집에 들렀다. 아버지가 회식하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아들과 아버지가 하는 단둘만의 회식이었다.

    치이익.

    고기가 익어가는 불판 위로 강우의 손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아버지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소주잔을 털어 넘기고 있었다. 강우가 아버지의 접시에 익은 고기를 놓아 드렸다.

    “크···.”

    소주를 한꺼번에 털어 넣은 아버지가 고기를 집어삼켰다. 입안 가득 퍼지는 진한 육즙에 아버지의 얼굴이 노곤해졌다.

    “강우, 너도 한잔할래?”

    “네.”

    강우가 빠르게 소주잔을 들었다. 아버지가 씨익 웃더니 강우의 잔을 채워주었다.

    “오늘 강우 네가 아니었으면 시간이 엄청 오래 걸렸을 거야.”

    “그러게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고요.”

    오늘 회사로 면접을 보러온 지원자들은 정말이지 간절했다. 아버지와의 면접에 최선을 다하며 한마디라도 더 하려 했다.

    “우리 회사 조건이 좀 좋기는 하니까. 요즘 같은 시기에 연봉 이렇게 주는 곳 없다.”

    “그 덕분에 확실히 좋은 인재들이 많이 왔으니까요.”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기업을 다니던 경력직이 심심치 않게 오늘 면접에 왔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 중에서도 마음에 드는 사람들은 있었다.

    “강우야.”

    아버지가 강우를 불렀다. 강우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네?”

    아버지가 강한 신뢰가 담긴 시선으로 강우에게 말했다.

    “합격자 말이야. 네가 뽑아봐라.”

    “네에?!”

    강우가 깜짝 놀랐다. 주변의 시선이 강우와 아버지의 테이블로 쏟아졌다. 강우가 급히 진정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흩어졌다.

    “아까 밖에서 네가 사람들이랑 이야기하는 거 들었는데 말이야. 강우 네가 사람 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던데? 아빠도 내심 생각하는 사람은 있지만, 이번에는 강우, 네 선택에 맡기마.”

    잠시 망설이던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 역시 내심 뽑았으면 하는 사람이 있었다. 강우가 눈을 빛내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최고의 인재로 뽑아드릴게요.”

    아버지가 씨익 웃었다.

    “이번에도 강우 너를 믿으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