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6/402)
  • 역시 아버지 말이 맞았어.

    목동 사거리의 한 건물 앞에 강우와 친구들이 주르륵 앉아있었다. 야심한 밤이었지만, 거리에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스무 살이 되는 자정을 맞이해 목동 사거리에 수많은 신입 성인들이 넘쳐나는 것 같았다. 근처의 가게들도 대목을 알아차렸는지 오늘은 늦게까지 영업을 한다며 난리였다. 강우가 친구들의 얼굴을 살폈다. 초조한 친구들의 얼굴에는 빨리 새해가 왔으면 하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몇 시냐?”

    김춘배가 시계를 힐끗거렸다.

    “10분 남았다.”

    강우가 씨익 웃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하고는 몇 번이고 술을 마셔본 적이 있는 강우였다. 하지만 친구들과는 처음 가지는 술자리였다. 미래의 기억을 가진 강우에게 친구들과의 술자리는 익숙했지만, 기억은 기억일 뿐이었으니까 말이다.

    뚜르르. 뚜르르.

    그때, 강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강우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다. 어디냐?-

    이재원이었다. 강우가 씨익 웃으며 답했다.

    “목동 사거리요. 친구들이랑 있어요.”

    -자식들 성인 된다고 벌써 술이나 마시러 다니고.-

    “형은 안 그랬나 보네요?”

    -아니. 나도 그랬었지.-

    이재원이 추억에 잠긴 듯 잠시 말이 없었다.

    “형은 어디에요?”

    -나? 회사지. 네가 말해준 렌탈 사업계획서 만드느라 며칠째 집도 못 가고 있다.-

    피곤함이 묻어나는 이재원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넘쳐 보이기도 했다.

    “고생 많네요.”

    -나야 뭐 최종 점검만 하고 있지. 나랑 같이 일하는 직원들이 고생이지.-

    이재원은 대진 미디어를 장악한 뒤 인적 쇄신을 단행했다. 기존의 나이 들고 타성에 젖어있던 늙은 임원들을 대폭 물갈이했다. 그리고는 대학의 인맥과 원주 아버지의 인맥을 동원해 유능한 인재들을 수혈했다.

    ‘말 그대로 젊은 인재들이 넘쳐나는 기업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거지.’

    보통의 재벌 2세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온 이재원이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그래서 마무리는 잘돼 가고 있어요?”

    -응, 조만간 마무리하고 회장님한테 보고할 계획이다.-

    그때, 김춘배가 강우를 보며 손목시계를 콕콕 찍었다. 어느새 자정이 다가오고 있었나 보다. 강우가 급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형, 시간 다 됐어요. 그럼 수고해요.”

    -야야! 강우야, 거기가 어딘데?-

    “여기 목동 사거리에 있는 호프집 앞이에요.”

    -아니 호프집이 몇 개인데···.-

    친구들의 아우성에 강우가 전화를 끊었다. 그와 동시에 김춘배가 씨익 웃었다.

    “오케이. 이제 자정이다. 우리 성인이야.”

    강우가 거침없이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오늘의 점령지인 호프집은 삼층에 있었다.

    “가자.”

    그 뒤를 친구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따르기 시작했다. 고작 한해가 바뀌었지만, 강우와 친구들에게는 대격변의 시기나 다름없었다. 이제는 어엿한 스무 살. 즉 성인이 된 것이었다. 이윽고 강우와 친구들의 호프집의 입구에 도착했다.

    “다들 준비됐지.”

    강우의 물음에 친구들이 품에 있는 주민등록증을 만지작거렸다. 표정들도 제각각이었다. 묘한 긴장감마저 흘렀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금단의 구역이었다.

    ‘이제부터는 합법적으로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된 거라고.’

    강우도 신분증을 만지작거렸다. 이제는 그 위상이 달라진 신분증이었다. 젊은 시절을 즐기라는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오늘은 제대로 아버지의 말을 따를 작정이었다. 강우가 힘차게 호프집의 문을 열어젖혔다.

    딸랑.

    가게 문이 열리고 강우와 친구들이 들어섰다. 웅성거리는 가게 안쪽의 손님들의 시선이 입구를 향해 잠시 쏟아졌다. 하지만 이내 시선을 돌리고 자신들의 시간에 집중했다.

    “어서 오세요. 몇 명이세요?”

    강우 일행을 발견한 아르바이트생이 웃는 얼굴로 물었다. 강우가 손가락 다섯 개를 펼쳤다.

    “다섯 명이요.”

    아르바이트생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안내해드릴게요.”

    강우와 친구들이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강우가 힐끗 친구들을 살폈다. 김춘배는 이미 몇 번 술자리를 해봤는지 담담했다. 신원주는 별생각이 없는 듯 신나 보였다. 남재식과 연정호의 표정이 볼만했다. 마치 신세계에 와봤다는 듯 연신 입을 벌리고 있었다.

    “뭐 먹을래?”

    강우가 메뉴판을 내밀었다. 김춘배가 메뉴판을 보더니 익숙하게 말했다.

    “난 쏘야.”

    신원주가 김춘배의 뒤를 이었다.

    “난 오징어 땅콩.”

    강우가 남재식과 연정훈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어깨를 으쓱했다.

    “일단 그거면 되지 않을까?”

    강우가 고개를 저었다.

    “이걸로는 어림도 없지. 사람이 몇인데. 그냥 내가 더 시킬게.”

    장정 다섯이 모였으니 얼마나 먹어댈지 안 봐도 뻔했다. 강우가 손을 들어 아르바이트생을 불렀다.

    “저기요.”

    “네! 갑니다.”

    아르바이트생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몇 년생들이세요?”

    강우와 친구들이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주민등록증을 꺼내 들었다. 그 빠르기가 서부의 총잡이 저리 가라였다. 순간 움찔한 아르바이트생이 주민등록증을 확인하더니 슬쩍 웃었다.

    “성인 된 거 축하드려요. 그럼 주문받을게요.”

    강우가 씨익 웃으며 주문을 했다.

    “소시지 야채볶음 하나. 오징어 땅콩 하나. 모둠튀김 하나 치킨 한 마리랑 삼천하나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어린 학생들치고는 많은 주문량이었다. 아르바이트생이 주문서를 들고는 날 듯이 카운터로 돌아갔다. 왁자지껄한 주변 분위기에 강우와 친구들의 분위기도 점점 달아올랐다.

    “어? 쟤네 우리 학교 애들 같은데?”

    김춘배가 멀찍이 떨어져 있는 테이블을 가리켰다. 강우가 슬쩍 보니 낯이 익은 얼굴들이 몇몇 보였다.

    “그러네. 나도 아는 얼굴들 좀 있어.”

    남재식도 주변을 보며 실소를 흘렸다. 신원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몇몇 아이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상대방도 신원주를 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냥 양서고 동창회장이라고 해도 믿겠네.”

    강우의 말에 신원주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몇몇 아이들과 또 인사를 했다.

    “다른 학교 애들도 몇 있네.”

    “다른 학교 애들도 알아?”

    신원주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 학원 다니면서 알게 된 애들 좀 있어.”

    “대단하네. 진짜.”

    역시 신원주다운 인맥이었다. 이윽고 주문한 맥주가 나왔다. 강우가 친구들의 잔에 맥주를 따라주었다. 황금빛 출렁이는 액체에 친구들이 꿀꺽 입맛을 다셨다.

    “그동안 공부들 하느라 수고했다.”

    강우의 말에 친구들이 잔을 들었다. 허공에서 다섯 남자의 잔이 부딪쳤다. 강우가 단숨에 맥주를 들이켰다. 목젖을 자극하는 따끔함이 느껴지고 입안 가득 알싸한 알코올의 향이 느껴졌다.

    “크······.”

    강우가 잔을 내려놓고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술을 처음 마시는 연정호는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이걸 무슨 맛으로 먹냐?”

    남재식은 벌써 얼굴이 벌게졌다. 슬쩍 딸꾹질까지 시작했다. 남재식은 술 체질이 아닌 것 같았다. 강우가 슬쩍 물었다.

    “재식이 괜찮냐?”

    “속이 좀 거북해.”

    강우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이 좋은 걸 못 마시다니.

    “맛있다.”

    김춘배는 역시 술을 즐길 줄 알았다. 기다리지도 못하고 자신의 잔을 채우더니 다시 벌컥 마셨다. 곧 주문한 안주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빨간 자태를 뽐내는 소시지 야채볶음에서 달콤한 냄새가 풍겼다. 잘 구워진 오징어의 향도 끝내줬다.

    “안주다.”

    남재식이 대번에 포크를 들고는 안주를 먹기 시작했다. 연정호가 강우에게 잔을 내밀었다.

    “강우야, 한 잔만 더 줘봐. 뭔가 이상하게 당기네.”

    “그래?”

    강우가 잔을 채워주었다. 연정호가 다시 벌컥 마시더니 이제는 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맛이었군. 궁금하기는 했지.”

    연정호가 오징어를 부욱 찢더니 질겅이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모듬튀김이 나왔다. 신원주가 감자튀김을 집어 케첩에 찍어 먹었다.

    “오~ 맛있네.”

    순식간에 안주가 동이 나기 시작했다. 김춘배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야! 너희 안주 빨 좀 그만 세워라. 술 마시러 왔냐 먹으러 왔냐?”

    남재식이 터질 듯 붉어진 얼굴로 씩 웃었다.

    “난 먹으러.”

    강우가 실소를 흘렸다. 남재식이 멍한 얼굴로 자신의 잔을 내려다보았다. 강우가 불길한 느낌을 받고는 말리려는 순간.

    꿀꺽.

    남재식이 단숨에 잔을 비웠다. 순간, 친구들의 시선이 남재식을 향했다. 남재식이 어깨를 으쓱하며 왜 그러냐는 듯 말했다.

    “왜? 나 괜찮은데?”

    하지만 남재식의 얼굴은 이미 시한폭탄처럼 터질듯한 얼굴이 되어있었다. 위기를 감지한 강우가 빠르게 남재식의 잔으로 손을 뻗었다.

    “안 되겠다. 재식이는 그만 마셔.”

    남재식이 잔을 지키려 했다.

    “왜? 더 마실 수 있어.”

    강우가 남재식의 잔을 요령껏 뺏었다. 그리고는 아르바이트생을 향해 소리쳤다.

    “여기 콜라 하나 주세요.”

    “왜? 나도 술 마실래.”

    남재식이 발끈했지만, 친구들의 타박이 쏟아졌다.

    “내가 볼 때 너 더 마시면 집에 기어간다.”

    “그래, 네 얼굴이 지금 그냥 빨강이야.”

    남재식이 결국 알겠다 하며 수긍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었다. 의외의 강자는 연정호였다. 술을 연거푸 마셔도 멀쩡해 보였다. 숨겨진 재능을 찾았다며 좋아하기까지 했다.

    “강우, 너는 술도 잘 마시냐??”

    김춘배가 강우를 보며 실소를 흘렸다. 술이라도 이겨보자며 강우에게 덤볐지만, 취하지 않는 강우의 모습에 기가 질렸다. 신원주는 딱 적당한 주량의 소유자였다.

    “난 천천히 마실게.”

    각자의 주량이 대충 파악됐다. 연신 술잔이 돌려지며 즐거운 시간이 계속됐다. 약간은 어색하고 긴장했던 분위기도 모두 날아가 버리고 없었다.

    그때였다.

    “흐흐흐···.”

    친구들의 시선이 남재식을 향했다. 남재식이 실성한 듯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꾸벅 졸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맥주 두 잔에···.”

    “이제 재식이 술은 안 먹이는 거로 하자.”

    강우의 말에 친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부터 남재식에게 술은 주지 않는 거로 다들 동의했다.

    “야야! 천천히 좀 먹으라고.”

    김춘배가 연신 안주 빨을 세우는 친구들을 타박했다. 강우도 실소를 흘렸다. 안주가 금세 동이 나버렸다.

    “저기요!”

    강우가 다시 안주 몇 개를 주문했다. 3,000CC 호프도 더 시켰다. 오늘은 정말 제대로 먹어볼 작정이었다. 어느 정도 먹을 만큼 먹자 슬슬 대화에 시동이 걸렸다.

    “그런데 광웅이가 안 보이던데?”

    강우가 보이지 않던 박광웅에 관해 물었다. 평소 늘 같은 자리에서 고구마를 팔던 박광웅이었다. 김춘배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게. 나도 못 봤네. 무슨 일 있나?”

    신원주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오늘은 쉬나 보지.”

    “그런가.”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생각해보니 박광웅의 연락처 하나 모르고 있었다.

    ‘다음에 만나면 물어봐야겠네.’

    그때, 김춘배가 입을 열었다.

    “우리 여행은 언제 갈까?”

    역시 노는 일에는 김춘배가 앞장섰다. 술을 훌쩍이던 친구들이 잔을 내려놓고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열심히 찹쌀떡을 판 것도 여행을 위해서였다. 이제 곧 대학을 가며 흩어질 친구들이었다. 물론 예전과 같은 우정을 유지하겠지만, 예전만큼 붙어있지는 못할 것이었다.

    “나 중국 가기 전에 갔다 오는 게 어떨까?”

    강우의 말에 김춘배가 물었다.

    “중국에는 언제 가는데?”

    “나 합격 발표 나고 갈 거 같은데?”

    “그럼 그전에 갈까?”

    강우가 잠시 생각을 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오케이. 그럼 다음 주 금, 토, 일로 정하자.”

    그렇게 여행 일정이 잡혔다. 다음은 여행에 목적지를 정해야 할 순간이었다. 겨울이었지만, 친구들은 바닷가를 가고 싶어 했다. 한참의 갑론을박 끝에 목적지가 정해졌다.

    “정호, 너도 갈래?”

    강우의 물음에 연정호가 고개를 저었다. 찹쌀떡 장사에 함께하지 않아 부담스러울뿐더러 시간도 나지 않는 눈치였다.

    “아니, 여행은 못 갈 거 같아.”

    “그래, 아쉽네. 다음에 기회가 되면 같이 가자.”

    “그래.”

    술자리는 계속 이어졌다. 강우와 친구들은 내일이 없는 것처럼 먹고 마셨다. 평소 절제를 잘하던 강우도 오늘만큼은 이성을 잠시 내려놓았다.

    “이차 가자.”

    “오케이 노래방!”

    잔뜩 흥이 오른 강우와 친구들은 노래방을 갔다. 잠들어 버린 남재식은 강우가 들쳐 엎었다. 노래방에 도착하자 김춘배가 마이크를 대번에 잡았다. 빠르게 번호를 입력한 김춘배가 노래를 시작했다. 뿜어져 나오는 김춘배의 고음 불가에 다들 박장대소했다. 강우가 마이크를 잡자 김춘배와 신원주가 기대감에 차올랐다. 강우의 노래가 시작됐다. 가수 뺨치는 노래 실력에 연정호가 실소를 흘렸다.

    “노래도 잘해?”

    그렇게 한참이 지나자 남재식의 의식이 돌아왔다. 입안 가득 술 냄새를 풀풀 풍기는 남재식의 모습에 친구들이 또 박장대소했다.

    “물···. 물···.”

    남재식이 물을 찾아 벌컥벌컥 마셨다. 누가 보면 오늘 술은 혼자 다 마신 줄 알 정도였다. 노래방 안이 흥으로 가득 차올랐다. 정신을 차린 남재식도 노래 부르기에 합류했다. 강우가 자리에 앉아 친구들을 보며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좋네. 역시 아버지 말이 맞았어.’

    미래의 기억이 있는 강우였다. 어쩌면 오늘과 같은 술자리의 기억은 수백 번이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새로웠다. 친구들과의 시간은 늘 강우를 또래의 아이로 만들어주는 기분이었다.

    ‘행복하다.’

    강우가 스르륵 미소를 지었다. 기억과는 바뀐 현재였지만, 너무나도 소중한 추억이 될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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