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402)
  • 알겠어. 약속할게.

    늦은 저녁 강우와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가 거실에 둘러 앉아 있었다. 세 사람의 중앙에 놓여있는 상위에는 푸짐한 안주가 차려져 있었다.

    “아버지, 제가 한잔 따라드릴까요?”

    “그러려무나.”

    강우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잔에 막걸리를 따라드렸다. 할아버지는 어느새 건강을 모두 회복하셨다. 이제는 조금씩 반주를 드시기도 했다. 하지만 예전만큼 즐겨 하시지는 않았다. 강우와 강용이를 위해 오래오래 사는 게 목표라고 하셨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참을 수가 없는 날이었다.

    할아버지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아범도 한잔 받거라.“

    “네.”

    할아버지가 아버지의 잔에 막걸리를 따라주었다. 그리고는 강우를 동시에 바라보았다.

    “이제 일주일만 있으면 강우도 성인이지?”

    “맞습니다. 아버지.”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는 슬쩍 앞에 놓인 잔을 두 손으로 공손히 들었다. 할아버지가 강우의 잔도 따라주었다. 세 남자의 잔이 가득 찼다. 강우와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고, 사업도 잘될 거다.”

    할아버지의 말을 끝으로 잔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세 남자의 목젖이 꿀렁거리더니 잔이 단숨에 비워졌다. 할아버지가 안주를 집어 먹었다. 어머니가 만든 두부김치였다.

    “강우도 좀 먹거라.”

    “네, 할아버지.”

    강우도 안주를 집어 먹었다. 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강우야.”

    “네.”

    “이제 김치 공장 짓는 거 시작해도 되겠지?”

    강우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차분히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해보았다. 일단 환율의 고점에서 환전해 이득을 보았다. 하지만 외국과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달러가 필요했다. 어느 정도 저점에 이르면 다시 일부를 달러로 환전해야 할 것이다.

    “일본 공장은 어떻게 되고 있어요?”

    “공장건물은 거의 다 지어간다고 하더라. 이제 안쪽에 설비를 채워놓을 차례지.”

    강우가 수능 준비를 하는 도중에도 김치 공장을 짓는 사업은 차근차근 진행 중이었다. 아버지와 마사토는 각자의 회사에서 그리고 또 같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자금이 두 배가 됐으니까 설비도 제일 좋은 거로 하고 재료에도 신경을 많이 쓰면 좋겠어요.”

    “걱정하지 마라. 아빠 생각도 같으니까.”

    아버지가 부드럽게 웃었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김치 레시피는요?”

    “일단 중국산 고춧가루와 한국산 고춧가루를 둘 다 사용해서 시제품을 만들고 있다.”

    아버지와 마사토는 레시피를 이용해 김치를 조금 생산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각 백화점에 조금씩 납품을 하면서 그 결과를 검토하고 있었다.

    “한국산 고춧가루가 더 인기 있죠?”

    “그건 당연하지.”

    중국산 고춧가루는 한국산과 비교해 질도 맛도 떨어진다. 특히 일본인들은 중국산 고춧가루의 쓴맛을 싫어할 것이다. 기존의 양념에 섞는 용도로야 충분했지만, 김치는 고춧가루의 맛이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단가 차이가 엄청나. 한국산 고춧가루도 써야 하지만, 가격 경쟁을 위해서는 중국산 고춧가루의 종자 개량이 필요하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미래의 기억 속에서 중국 업체들은 끊임없이 종자 개량에 도전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도 했었다. 강우는 그 일을 아버지의 손으로 하게 할 생각이었다.

    “아버지, 대부님한테 고추 종자 개량 건은 말해 보셨어요?”

    “음···. 그게 말이다. 진오 형님이 이번에 중앙당으로 가게 됐다고 하더구나.”

    “진짜요?”

    강우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중앙당으로 간다는 것은 확실히 권력에 한걸음 가까워졌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또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청도에 누가 새로운 서기로 올지 모르겠군.’

    강우가 눈을 빛냈다. 위진오가 중앙당으로 가기 전 새로운 서기를 소개받아야 할 것이었다.

    “그래, 어찌나 좋아하시던지. 아 그리고 다음에는 북경에서 보기로 했지. 강우 너도 꼭 데리고 오라고 하시더라.”

    마침 위진오도 강우가 보고 싶은 듯했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학 입시 끝나고 시간이 남으니까 그때 같이 다녀와요.”

    강우는 당분간 정신이 없을 것이었다. 원서도 넣어야 했고, 새 학기도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친구들과의 중요한 약속도 남아있지 않던가.

    “그래, 그러자.”

    강우와 아버지의 대화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할아버지가 물었다.

    “강우야, 입시원서는 언제 접수인 거야?”

    “29일부터예요. 아직 시간은 좀 있어요.”

    “그래, 그럼 김치 공장은 이제 아범에게 맡기고 강우는 입시 준비를 해야겠구나.”

    “네, 할아버지.”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와 마사토는 충분히 능력이 있었다. 김치 공장을 세우고 운영하는 것은 아버지와 마사토로 충분했다. 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물었다.

    “이사는 언제쯤 할까?”

    “조금 기다리면 좋은 매물들이 경매로 쏟아질 거예요.”

    강우의 말대로였다. 높아지는 금리를 감당하지 못해 경매에 나오게 되는 매물이 넘쳐날 것이다. 강우는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 갈 생각이었다.

    ‘미래라면 꿈도 꾸지 못할 액수지만···.’

    IMF는 강우 가족에게는 커다란 기회이기도 했다.

    “위치는 어디로 갈 생각이니?”

    “강남이 좋지 않겠어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동산을 사야 한다면 강남은 불패의 역사가 있지 않던가.

    “그래, 강남으로 가는 게 좋겠구나.”

    “네.”

    강우가 이번에는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경매로 나오는 것은 아파트뿐만이 아니었다.

    “할아버지, 이사회를 소집해야겠어요.”

    “이사회? 차액을 어디에 쓸 생각이구나?”

    이사회라고 해야 강우와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일본의 기무라와 마사토가 전부였다. 하지만 법인의 자금을 처리하는 데에는 이사회의 결정이 필요했다.

    “네, 이번 기회에 회사가 사용할 빌딩도 경매로 샀으면 해서요.”

    “허···. 빌딩까지?”

    할아버지가 옛 기억을 떠올리며 감회에 빠졌다. 과거의 할아버지가 동양 무역의 이름을 걸고 사업을 하던 건물이 있었다.

    “네, 회사는 점점 커질 거예요. 지금이 아니면 회사건물 사는 데 큰 자금이 들어갈 거예요. 미리미리 준비해 놓는 게 좋겠어요.”

    “그래, 그러자꾸나.”

    강우가 씨익 웃었다. 할아버지의 회사가 있던 건물은 명동에 있었다. 강우는 할아버지에게 그 건물을 다시 찾아줄 생각이었다.

    ‘마침 이번에 그 빌딩이 경매로 나오지.’

    미래의 기억 속 아버지는 늘 명동에 사무실이 있었다. 아버지를 만나 명동을 걸을 때면 아버지는 늘 한탄을 하시고는 했었다. 총 오 층짜리 건물을 보며 저것이 할아버지의 회사가 있던 건물이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IMF 당시 경매로 나왔던 것도 알려주었었다.

    ‘환율로 차액도 많이 봤고, 경매로 나온 물건은 대출을 끼고도 가능하니까. 자금은 충분하겠지.’

    그렇게 사놓은 집과 건물은 IMF가 지나고 천정부지로 가치가 뛰어오를 것이었다. 상념에 빠진 강우에게 아버지가 물었다.

    “그런데 경매로 나올 물건들을 알아보려면 꽤 시간이 들 텐데 말이다. 아빠는 당분간 바쁘고 부동산 전문가라도 한 명 알아봐야 하는 게 아닐까?”

    “그건 저한테 생각이 있어요.”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를 보는 표정에는 대견함과 신뢰가 가득했다.

    “자자. 먹는 거 앞에 두고 이야기가 길었구나. 어서들 먹자.”

    할아버지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와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시 후,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먼저 일어날게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으로 돌아오자 강용이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책상 의자에 앉은 강우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딸칵.

    폴더를 열고 익숙한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이재원의 전화번호였다. 하지만 이재원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물끄러미 핸드폰을 내려다본 강우가 잠자리에 누웠다.

    “형아···.”

    밤 귀가 예민한 강용이가 뒤척이더니 강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강우가 강용이를 품에 꼭 안았다. 그리고는 토닥토닥 등을 두들겨 주었다. 강용이가 스르륵 미소를 짓더니 이내 잠이 들었다.

    * * *

    다음 날인 1997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였지만, 한국은 깊은 침묵에 빠졌다. 전날의 환율 폭등이 휩쓸고 간 탓이었다.

    딸랑.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재원이 심각한 표정으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강우가 이재원의 앞쪽으로 앉았다. 이재원이 통화를 급하게 끝냈다.

    “왔냐?”

    “네.”

    강우가 메뉴판을 보더니, 오렌지 주스를 시켰다. 이재원도 목이 타는지 한 잔 더 주문했다.

    “강우야.”

    이재원이 상기된 얼굴로 강우를 불렀다.

    “네, 어떻게 됐어요?”

    “대박 터트렸다.”

    강우가 씨익 웃었다. 이재원은 어제 그동안 모아놓은 달러를 모두 원화로 바꾸었다. 대진 미디어의 자본금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잘됐네요.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알아서들 고개를 숙여 오겠죠.”

    이재원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첫 번째 목표는 이재원의 배다른 둘째 형이었다.

    “둘째 형이 건설사 인수한다고 쏟아부은 돈이 얼마인지 아냐? 그런데 그 회사가···.”

    이재원이 말을 잊지 못했다. 이재원의 둘째 형이 인수한 건설회사는 역시나 부실 덩어리였다. 이제 곧 IMF가 오면 구조조정의 칼날을 피하지 못할 것이었다.

    “일단 돈은 계속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건설회사가 어려워지면 바로 나서야 해요.”

    이재원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 부실 회사를 살리라고?”

    강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죠. 대진 그룹을 살리는 거죠.”

    “아···. 그렇네.”

    이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나면 바로 해야 할 일이 있어요.”

    “뭔데?”

    이재원이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강우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흘려들을 게 하나도 없었다.

    “대진 그룹이 정수기 사업에 진출한다고 엄청나게 무리한 거. 지금 다 재고로 남아있죠?”

    “맞아. 처치 곤란에 골칫덩어리지.”

    이철금 회장은 가전제품 시장에도 진출하고 싶었다. 이 시기의 가전제품 시장은 이미 기득권을 가진 대기업의 그림자가 너무 컸다. 하지만 이철금 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대진 커웨이를 설립하고 생활가전 시장에 뛰어들었다. 대진 커웨이는 승승장구하는 듯했다. 하지만 97년인 올해에 들어서는 330억 원의 매출을 내고도 11억 원의 영업손실이 났다. 더군다나 IMF로 소비시장이 위축되자 적자가 늘어나고 대량의 재고가 발생한 것이다.

    “혹시 그룹 내부에서 렌탈 사업에 관한 논의가 있나요?”

    “렌탈 사업?”

    이재원이 처음 듣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강우가 잠시 생각에 빠졌다.

    ‘대진 그룹은 정수기 렌탈 사업으로 위기를 돌파했어. 그런데 아직 논의도 없다는 건가?’

    강우가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이재원을 보며 눈을 빛냈다.

    “형, 제가 말하는 거 잘 생각해봐요. 어차피 팔리지 않을 정수기들이라면 차라리 렌탈로 빌려주는 게 어떨까요?”

    “렌탈이라···. 그러니까 네 말은 대당 100만 원이 넘는 정수기를 렌탈을 해주는 것으로 소비자들의 초기 부담 비용을 대폭 줄이자는 거지?”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지금처럼 소비 심리가 위축된 상황일수록 렌탈 사업은 더 관심을 받게 되니까요.”

    “그렇지.”

    이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의 말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진 그룹의 누구도 생각하고 있지 않은 생각이었다.

    “렌탈 사업 계획서를 만들어봐요. 그리고 회장님한테 사업 제안을 해봐요. 분명히 마음에 들어 할 거에요.”

    똑똑한 이재원은 강우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이윽고 이재원이 씨익 웃음을 지었다.

    “역시, 대단해. 고맙다 강우야.”

    “형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좋을 거예요.”

    이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디어란 남보다 먼저 독점할 때 그 가치를 발하는 것이었다. 강우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정수기 렌탈 사업은 이철금 회장이 구상 중일지도 모른다. 만약 재원이 형이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거기다가 재원이 형이 대진 그룹의 유동자금 위기를 한 방에 해결한다면?’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이재원은 후계자의 자리에 우뚝 설 것이 분명했다. 강우가 이재원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번 일만 잘 처리하면 형은 분명히 후계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거예요.”

    “걱정하지 마. 꼭 해내고 만다.”

    이재원이 결의를 다졌다. 강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지난번에 말한 제 부탁 꼭 들어주세요.”

    “그래? 무슨 부탁인지 들어나 볼까?”

    강우가 눈을 빛냈다.

    “IMF가 시작되고 구조조정이라는 혹독한 겨울이 찾아올 거예요. 제가 원하는 건 딱 한 가지에요.”

    “말해봐.”

    이재원이 진지한 표정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의 입이 열렸다.

    “정리해고. 대진 그룹은 꼭 정리해고 없이 가야 해요. 알겠죠?”

    IMF에 수많은 기업이 구조조정이라는 이유로 정리해고를 시작한다. 정부도 기업들도 한목소리를 내며 대량의 정리해고를 했다. 물론 어쩔 수는 없는 일이라고는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직장인이 일자리를 잃게 된다.

    ‘하지만 대진 그룹은 상황이 다르다. 재원이 형이 만들어놓은 유동자금이라면 대진 그룹은 구조조정의 칼날을 피해 갈 수 있겠지.’

    이재원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그 깊은 뜻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약속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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