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402)

이제 이걸로 뭐를 할 거니?

부우웅.

드럼통의 앞쪽으로 고급 세단이 멈춰 섰다. 뒷좌석의 문이 열리고 깔끔하게 차려입은 이재원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재원이 내리자 고급 세단이 스르륵 출발해 사라졌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이재원을 강우가 불렀다.

“재원이 형!”

“어?”

이재원이 강우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숯검정을 잔뜩 묻힌 탓에 알아보지 못했나 보다. 이재원이 강우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강우야, 너 얼굴이 그게 뭐냐?”

“아···. 군고구마 팔다가 좀 묻었나 보네요.”

강우가 장갑 낀 손으로 얼굴을 스윽 닦았다. 숯검정이 더 묻어나자 이재원이 박장대소를 했다. 강우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고구마 사러 온 거예요? 놀리러 온 거예요?”

“지금 상황에서는 둘 다 맞겠네.”

이재원이 드럼통으로 다가왔다. 안면이 있는 신원주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재원이 형, 안녕하세요.”

“어, 그래. 원주 안녕.”

이재원이 김춘배와 남재식을 힐끗 바라보았다. 남재식이 벌떡 일어나더니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남재식입니다.”

“그래, 반갑다. 이재원이라고 한다.”

이재원이 김춘배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재원과 시선이 마주친 김춘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 잘생겼다.”

김춘배의 중얼거림에 이재원이 픽하고 웃었다. 남재식이 김춘배의 옆구리를 툭 하고 쳤다. 김춘배가 깜짝 놀라더니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김춘배입니다.”

“아···. 네가 춘배구나.”

친구들과의 인사가 끝났다. 이재원이 강우를 보더니, 씨익 웃었다.

“그래서. 남은 고구마가 얼마라고?”

“여기 있는 거 다요.”

강우가 남은 고구마 박스를 가리켰다. 아직 한참이나 남은 박스의 숫자였다. 이재원이 흠칫하더니 피식 웃었다.

“아주 떨이도 이런 떨이가 없네.”

“그렇죠. 세상에서 제일 비싼 떨이죠.”

“그런데 이거 다 익히려면 한참 걸리겠는데?”

강우가 친구들이 앉아있는 쪽을 가리켰다. 이재원의 고개가 스르륵 돌아갔다. 강우의 친구들이 난간에 조르륵 앉아있었다.

“출출하죠?”

강우가 손잡이를 잡아 고구마가 담긴 긴 통을 잡아뺐다. 드럼통 안에서 화르륵 불꽃이 넘실거렸다. 강우가 장갑 낀 손으로 군고구마를 집었다. 그리고 이재원에게 ‘척’ 하고 내밀었다.

“빨리 익혀 줄 테니까 저기 앉아서 이거 먹고 있어요.”

“어.”

이재원이 군말 없이 군고구마를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친구들 옆에 앉아 군고구마를 먹기 시작했다. 박광웅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분이 누군데 이걸 다 사가셔?”

“있어. 돈 많은 사람.”

“그래? 부럽네.”

박광웅이 부럽다는 듯 이재원을 바라보았다. 강우가 속으로 피식 웃었다. 돈이 많아도 그냥 많은 사람 정도가 아니지 않던가. 슬쩍 이재원을 바라보았다. 난간에 앉아 군고구마를 오물거리는 모습은 재벌 2세라고 보기 어려웠다.

“최대한 빨리 익혀보자.”

“어, 알겠어. 나 장작 좀 더 넣고 올게.”

박광웅이 드럼통 옆에 쌓인 장작을 드럼통에 넣었다. 살짝 시들어가던 불꽃이 열기를 찾아갔다. 일렁이는 불꽃을 보는 박광웅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강우야, 이제 고구마 다 넣어도 될 거 같아.”

“알았다.”

강우가 비어있는 화덕에 고구마를 채우기 시작했다. 촘촘히 채워져 가는 고구마를 보는 강우의 입꼬리도 스르륵 올라갔다. 이윽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저기 군고구마 주세요.”

“저도요.”

거리를 지나던 손님들이 다시 조금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강우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이내 피식 웃어버렸다. 모여든 손님 중 대부분이 여성들이었다. 난간에 앉아있는 이재원을 연신 힐끔거리고 있었다.

‘이건 뭐 CF 효과가 따로 없네.’

강우가 다시 고구마를 팔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바탕 손님들의 폭풍이 지나갔다. 여성 손님들은 품에 고구마를 안은 채 이재원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재원은 자신의 군고구마에 집중할 뿐이었다. 이윽고 손님들이 휩쓸고 지나가자 이재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멀었냐?”

“조금만요.”

강우와 박광웅은 열심히 군고구마를 만들었다. 만들어진 군고구마는 잘 포장해 다시 상자에 담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남은 고구마가 모두 군고구마가 되었다. 이재원이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김 기사님, 이제 와주셔도 됩니다.”

이재원의 연락을 받은 고급 세단이 다시 드럼통 앞으로 돌아왔다. 덜컹 트렁크가 열렸다.

“아, 됐어요. 타고 계세요.”

이재원이 차에서 내리려던 김 기사를 말렸다. 그리고는 박스를 번쩍 들었다. 난간에 앉아있던 친구들이 우르르 달려와 이재원을 도왔다. 이내 트렁크가 가득 찼다.

“뒷좌석에도 좀 실으면 돼.”

이재원이 뒷좌석에 군고구마 박스를 실었다. 박스가 모두 실리자 이재원이 두 손을 탁탁 털었다. 그리고는 입고 있는 양복의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강우야, 여기 있다.”

이재원이 품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들었다. 강우가 봉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좀 많아 보이는데.”

“어? 몰랐어? 종로에서는 원래 여기보다 비싸게 팔아.”

이재원이 씨익 웃었다. 대진 미디어가 있는 곳은 종로였다. 강우가 봉투를 받았다. 힐끗 안을 보니 과하지도 적지도 않은 돈이 들어있었다. 역시 이재원답다고 생각했다. 강우가 봉투를 박광웅에게 내밀었다.

“있다가 집에 가서 확인해 봐.”

“어어···.”

박광웅이 봉투를 받아들었다. 두둑한 봉투에 박광웅의 심경이 복잡해졌다. 이재원이 건네준 봉투는 마치 어릴 적 보았던 아버지의 월급봉투를 닮아있었다. 그리고 친구들의 진심이 담겨있었다.

“감사합니다.”

박광웅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박광웅의 두 눈가가 붉어졌다. 이재원이 박광웅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아니다. 나야말로 특별한 간식을 먹게 돼서 기분이 좋다.”

무언가를 더 말하려던 이재원이 입을 다물었다. 강우가 이재원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재원도 알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간다. 야근하는 직원들이 좋아하겠네.”

이재원이 뒷좌석에 올라탔다. 뒷좌석의 문이 닫히자 세단이 스르륵 출발했다.

“하~ 냄새 좋죠?”

차 안 가득한 군고구마 냄새에 이재원이 부드럽게 웃었다. 운전하던 김 기사가 백미러를 보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최고입니다. 도련님.”

이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차량의 뒷창문을 돌아보았다. 멀어져 가는 드럼통에는 강우와 친구들이 잔뜩 모여있었다. 이재원이 고개를 다시 돌렸다. 그리고 뒷좌석에 몸을 깊게 묻었다.

“자식들···. 부럽네.”

* * *

다음 날 아침. 강우네 집안에 옅은 긴장감이 흘렀다. 거실에 앉아있는 할아버지는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달그락. 달그락.

어머니는 걱정이 되는지 주방을 정리 중이었다.

따르릉. 따르릉.

집 전화가 울렸다. 할아버지가 수화기를 들으려다 멈칫했다. 그리고는 강우를 불렀다.

“강우야, 네가 받아 보아라.”

“네, 할아버지.”

강우가 전화기를 받았다.

“여보세요?”

-강우야, 아빠다.-

강우의 얼굴에 긴장감이 더해졌다. 오늘의 일을 확신했지만, 상황이 상황이었다.

“어떻게 됐어요?”

-그래, 네 말대로다. 아침부터 환율이 또 미친 듯이 폭등하고 있어.-

“아버지, 제 말대로 하셔야 해요. 꼭 1990원이 되면 전량 환전하셔야 해요.”

-그래, 알겠다.-

아버지가 망설임 없이 알겠다고 했다. 강우에 대한 믿음은 굳건했다. 전화가 끊어졌다. 할아버지가 기쁨 반 걱정 반인 표정을 지었다.

“환율이 2천 원대까지 가다니···. 이거 좋아해야 할지···.”

“이게 최고점일 거예요.”

“그래야지.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나라 기업들이 죄다 망하게 생겼어.”

할아버지의 근심에 강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주방 정리를 마친 어머니가 거실로 나왔다.

“강우야, 아빠야?”

“네, 지금 은행이시래요.”

“그래?”

어머니의 표정도 상기되기 시작했다. IMF라는 위기 속에서도 강우네 가족은 평화로웠다. 그리고 이 모든 게 강우의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네, 아마 금세 처리하고 들어오실 거예요.”

“오늘 점심은 조금 특별한 거로 준비해야겠네.”

어머니가 신이 나서는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냉장고를 열고는 메뉴를 고심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어머니가 메뉴를 정했다. 재료들을 모두 꺼내고는 열심히 요리를 준비했다.

“할아버지!”

그때, 늦은 잠에서 깨어난 강용이가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는 곧장 할아버지의 품으로 가 앉았다. 할아버지가 강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탁. 탁. 탁.

어머니의 요리하는 소리만이 강우네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을 때였다.

덜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칼질을 멈추고는 현관으로 갔다. 강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보, 왔어요?”

“지영아!”

아버지가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며 끌어안았다. 강우가 현관으로 다가갔다. 아버지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있었다.

“아버지, 오셨어요?”

“그래, 강우야. 일단 들어가자.”

아버지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거실에 있던 할아버지를 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아버지, 진짜예요. 모두 강우가 말한 대로 됐어요.”

“그래, 그래. 잘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맞은편으로 앉았다. 그리고는 품에서 통장을 꺼냈다.

“한번 보세요.”

“그래.”

할아버지가 약간은 떨리는 손으로 통장을 집었다. 맨 처음 확인한 것은 법인 통장이었다.

“허···.”

통장을 열어본 할아버지가 탄성을 뱉어냈다. 믿기지 않을 만큼의 액수가 찍혀있었다. 아버지가 신이 나서 설명을 시작했다.

“은행에서 달러를 판다고 하니까 눈이 휘둥그레지더라고요. 제발 팔아만 달라고 얼마나 애원하던지. 환율우대도 많이 받았습니다.”

할아버지가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한순간에 몇 배로 불어난 돈이었다. 그것도 가만히 앉아서 말이다.

“이게 다 얼마인 거야?”

“아버지, 66억입니다. 정확히는 66억 1천···.”

말을 하던 아버지도 현실감이 없었나 보다. 헛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동시에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야, 장하다. 우리 장손.”

“아들.”

강우가 환하게 웃었다. 사업을 위한 종잣돈이 크게 불어났다. 이제 김치 공장을 세우는 것은 더욱 탄력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강우가 구상해 놓은 다른 사업을 위해서도 투자가 가능할 것이다.

“아버지, 다른 통장은요?”

강우의 질문에 아버지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품에서 또 다른 통장을 꺼냈다. 그리고는 강우를 향해 스윽 내밀었다.

“여기 있다. 이건 아들이 먼저 확인해봐.”

“네.”

어머니가 강우의 옆에 앉았다. 사실 어머니에게 더 관심이 가는 것은 바로 이 통장이었다.

“엄마, 확인해 볼게요.”

“응, 아들.”

강우가 통장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통장에 찍힌 숫자에 강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1억 8천만 원이라···.’

크다면 크고 작다면 적은 돈이었다. 법인 통장에 잠들어 있는 돈에 비하면 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 돈은 달랐다. 온전히 가족을 위해 쓸 수 있는 돈이었다. 강우가 벅찬 감정을 느꼈다.

“아버지, 감사해요. 저를 믿어주셔서요.”

“아니다. 네 말대로 모든 게 됐어. 아빠가 오히려 아들한테 고맙다.”

강우와 아버지가 서로를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어머니도 앞치마로 눈가를 닦아냈다. 지나온 과거에 수많은 고생을 한 강우 가족이었다. 지금 통장에 담긴 목돈은 액수 그 이상의 느낌이었다.

“그래, 고생들 많았다. 이 할아비 때문에 모두가 고생이 많았어.”

할아버지도 눈시울을 붉혔다. 그 순간이었다.

“형아 왜 그래? 엄마랑 아빠는? 할아버지는? 돈 많으면 좋은 거 아니에요?”

강용이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강우와 부모님 그리고 할아버지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강용이가 씨익 웃었다.

“울다가 웃으면 안 되는데···.”

다시 한번 더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강우가 통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어머니가 강우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아들 이제 이걸로 뭐를 할 거니?”

가족의 시선이 강우를 향해 쏟아졌다. 강우가 집을 한 바퀴 쭈욱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씨익 웃었다.

“이사 가야죠. 더 넓고 좋은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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