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 우리가 판다고?
다음 날 강우가 학교로 통하는 시장 골목을 걷고 있었다. 수능이 끝나자 등교 시간도 여유로워졌다. 지긋지긋한 0교시도 족쇄 같았던 야간 자율학습도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오늘은 겨울 방학식을 하는 날이었다. 주변의 몇몇 학생들이 강우를 힐끗거렸다.
하지만 강우는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오늘은 12월 21일···. 이제 이틀 뒤면 환율은 최고점을 찍겠지.’
그리고 강우가 가진 달러와 법인의 달러도 그 가치가 정점에 따를 것이다. 벌써 아버지는 23일을 대비해 완벽한 준비를 끝내 놓은 상태였다. 이제 이틀 뒤면 강우 가족이 가진 재산은 크게 불어날 것이었다.
‘하지만 마냥 좋아할 수만도 없네.’
곳곳에서 느껴지는 불안함과 절망감을 강우는 느낄 수 있었다. 짧게 한숨을 쉰 강우가 시장 골목을 벗어났다. 이윽고 교문 앞에 도착한 강우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경축. 양서 고등학교 3학년 박강우 학생 수능 만점. 전국 수석.-
커다란 현수막에 강우의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적혀있었다. 벌써 학교 앞 상인들은 현수막을 보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강우가 슬쩍 고개를 내린 채 교문에 들어섰다.
“박강우!”
그 순간, 강우의 뒤를 누군가가 덮쳤다. 휘청인 강우가 뒤를 돌아봤다. 신원주가 씨익 웃고 있었다.
“이야! 축하한다. 진짜 만점일 줄이야. 가채점이라 하나 정도는 틀리겠지 했는데.”
“축하하는 거냐 아니면 아쉬워하는 거냐?”
“둘 다?”
강우가 피식 웃어버렸다. 그리고는 교실로 들어갔다.
-사랑하는 양서 고등학교 학생 여러분···.-
추운 겨울 교실에서 진행된 방학식이었다. 수능을 마치고 자유의 몸이 된 고3들이었지만, 표정이 밝지는 않았다. IMF로 가게의 경제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대학 입시를 앞둔 학생들은 천천히 그 여파를 체감하고 있었다.
‘당장 대학 등록금이라는 게 만만치 않은 액수지.’
그런 이유로 98년 대학 입시에는 특이한 현상도 나타났다. 중위권의 학생들이 국립대학으로 쏠리는 현상이었다. 사립 대학과 비교해 비교적 싸고 혜택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수많은 수험생이 대학 입시부터 IMF의 터널로 들어섰다.
“다들 지원하는 대학의 입시원서 지원 날짜는 잘 알고 있지?”
담임의 말에 학생들이 크게 대답했다.
“부모님하고 잘 상의해서 지원원서를 넣기 바란다. 그리고 선생님은 학교에 있을 테니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찾아오고.”
그 말을 끝으로 담임의 종례가 끝났다. 그리고 고등학생으로 맞이하는 마지막 겨울 방학의 시작이었다. 강우와 신원주가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연정호가 강우에게 다가왔다. 연정호는 가채점보다 한 문제가 더 틀린 397점을 맞았다.
“강우야, 너 이번에 대진 그룹에서 하는 연회에 참가할 거야?”
수능이 끝나자 대진 그룹에서 장학생들을 모아 간단한 축하연을 열어 준다고 했다. 이것도 이재원의 아이디어로 진행되는 일이었다. 이재원은 대진 그룹의 장학생들을 제대로 키워볼 생각이라고 했다.
“시간 되면 갈라고.”
“그래? 그럼 그때 보겠네.”
연정호가 씨익 웃으며 신원주를 바라보았다.
“원주, 너도 올 거지?”
“나야 강우 가면 가고.”
신원주의 말에 연정호의 얼굴로 옅은 부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강우와 친구들의 우정은 학교 내에서도 유명했다.
“그래, 그때 보자.”
연정호가 자리로 돌아갔다. 강우와 신원주가 가방을 챙겼다. 그때 교실 문이 열리고 김춘배와 남재식이 나타났다.
“가방 다 쌌냐?”
“어.”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춘배는 싱글벙글했다.
“이제 자유의 몸이라는 말이지.”
“입시원서 넣을 생각은 안 하냐?”
신원주의 말에 김춘배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점수는 나왔고, 거기에 맞춰 넣으면 되는데 어려운 거 있겠냐?”
그 말에 강우가 말없이 웃었다. 98년 대학 입시는 눈치싸움이 치열했다. 작년에 비해 쉬워진 수능으로 각 대학교에 지원 가능한 점수대의 기준이 모호해졌기 때문이다.
“실기 연습은 잘돼 가고 있냐?”
“나야 문제없지. 실전에 강한 몸이다.”
김춘배는 자신만만했다. 그리고 친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춘배의 연기 실력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아 그리고 저번에 말한 장사는 다들 할 거지?”
김춘배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특히 강우를 바라보며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피식 웃었다.
“그래, 한다고 해.”
김춘배는 방학 기간에 돈을 벌자고 했다. 그 돈으로 우정 여행을 떠나자는 원대한 계획도 세웠다. 장사 아이템도 본인이 구한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은 김춘배의 집에서 사업 설명회가 있는 날이었다.
“마침 부모님도 집에 안 계셔. 우리 집에 가서 이야기 좀 하자.”
* * *
김춘배의 집은 목동 아파트 단지였다. 강우와 친구들이 엘리베이터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진짜 집에 아무도 안 계셔?”
“어, 형도 얼마 전에 방학해서 술 먹으러 나갔을걸?”
김춘배에게는 3살 많은 대학생 형이 있었다.
띵.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김춘배가 앞장서서 내렸다. 이윽고 문 앞에 선 김춘배가 가방에서 열쇠를 찾았다. 그리고는 문을 열었다.
“들어가자.”
강우와 친구들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먼저 들어간 김춘배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아빠?”
강우와 친구들이 멈칫하며 현관에 멈춰 섰다. 신원주와 남재식이 서로를 보며 당황했다. 강우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묵직한 남성의 목소리와 함께 김춘배의 아버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적당한 키에 배가 볼록 나온 평범한 중년 남성이었다.
“춘배, 친구들이니?”
김춘배가 아버지의 뒤에서 안절부절못했다. 신원주와 남재식도 어쩔 줄을 몰랐다. 평소 김춘배에게 들은 아버지는 엄한 성격이었다.
“안녕하세요. 춘배 친구 박강우입니다.”
강우가 먼저 나서 꾸벅 인사를 했다. 김춘배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아빠, 저번에 말한 그 친구예요. 저 오디션 도와준 친구요.”
“아···. 그래? 그때 그 노래 잘한다던 그 친구?”
“네.”
김춘배의 아버지가 강우를 유심히 살폈다. 그러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게 낯이 익구나? 예전에 우리 집에 온 적이 있었던가?”
“아니요. 아빠 어저께 뉴스에 나왔었잖아요. 수능 만점자.”
김춘배의 설명에 아버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오! 그래. 아빠랑 같이 봤었지. 대단한 친구구나.”
춘배 아버지가 호감이 가득한 얼굴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신원주입니다.”
“안녕하세요. 남재식입니다.”
신원주와 남재식이 강우의 뒤를 따라 인사를 했다. 김춘배의 아버지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반갑다. 춘배 친한 친구들이라고 들었는데 이제야 보는구나. 아저씨가 오늘은 몸이 안 좋아서 집에 있었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놀다들 가.”
그 말을 끝으로 김춘배의 아버지가 안방으로 들어갔다. 김춘배가 짧게 한숨을 쉬더니 물었다.
“어떡할까? 재식이 집으로 갈까?”
강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굳이 그럴 필요 있냐. 그냥 네 방에서 놀다 가지 뭐.”
“어···. 그래.”
김춘배가 자신의 방으로 친구들을 안내했다. 김춘배의 방 안은 역시나 달랐다. 벽면 곳곳은 영화 포스터가 가득했다. 책이 있어야 할 책장에는 명작 영화들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로 가득했다.
“우와! 이게 다 뭐야?”
김춘배의 침대 위로 강우와 친구들이 둘러앉았다. 김춘배가 잔뜩 신이 나서는 자신이 모은 비디오테이프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영화의 줄거리를 소개하고 배우들의 흉내를 내는 김춘배는 진지했다.
“오? 춘배 제법인데?”
신원주와 남재식은 잘한다며 김춘배를 칭찬했다. 강우도 책상 의자에 앉아 김춘배의 연기를 감상했다. 이윽고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 좀 마시고 온다.”
“나가서 냉장고 열면 보리차 있을 거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왔다. 정적이 흐르는 거실을 지나 주방이 있었다. 강우가 냉장고에서 커다란 유리병을 꺼냈다. 그리고는 유리컵에 콸콸 보리차를 따랐다.
“어! 그래 박 부장, 뭐? 그래?”
강우가 물을 벌컥 마시는 순간 안방에서 춘배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우가 동작을 멈추고 목소리에 집중했다.
“미도파에서 물량을 더 넣어달라고 한다고? 그래? 잘됐네. 결제 대금은? 이번에도 어음···?”
어음이라는 단어를 끝으로 춘배 아버지의 목소리가 끊겼다. 강우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부도를 눈앞에 두고 있는 미도파 백화점의 어음이라니 큰일 날 소리였다.
“참나···. 매번 어음이라니 골치가 아프네.”
안방 문이 벌컥 열리고 춘배 아버지가 나왔다. 춘배 아버지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주방으로 다가온 춘배 아버지가 강우를 발견했다. 그리고는 잠시 멈칫했다.
“아···. 강우야.”
“물 마시러 나왔습니다.”
강우가 물병을 든 채 말했다. 춘배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방에서 컵을 하나 들고 왔다.
“따라드릴게요.”
강우가 춘배 아버지의 잔에 물을 따랐다.
“고맙구나. 뉴스에서 보자니 할아버님이 아주 훌륭하신 분이더구나.”
“감사합니다.”
강우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훌륭한 집안에 공부까지 잘하는 손자를 두셨으니 참 좋으시겠어.”
“네.”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춘배 아버지가 흐뭇하게 웃었다.
“우리 춘배도 공부를 좀 잘했으면 했는데 말이야.”
“그래도 성적 많이 올렸던데요? 이번 수능도 모의고사보다 더 잘 봤고요.”
춘배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연기한다고 해서 고민했는데 또 공부도 열심히 하더구나. 이게 다 네 덕분이라고 춘배가 귀에 딱지가 앉도록 이야기했다. 아저씨가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춘배가 열심히 한 거죠.”
“그래도 좋은 친구를 만나서인 건 사실이지.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하지 않더냐.”
그 말을 끝으로 춘배 아버지가 몸을 돌렸다. 강우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이내 안방으로 들어가려던 춘배 아버지를 불렀다.
“저···. 아버님.”
“응?”
춘배 아버지가 몸을 돌렸다. 강우가 심호흡하더니 입을 열었다.
“혹시 조금 전 미도파 백화점에서 어음을 받으신다고 통화하신 건가요?”
“그래. 맞다.”
춘배 아버지의 얼굴로 의아함이 떠올랐다. 이제 고등학생인 강우가 어음을 언급하니 신기하기도 했다.
“미도파에서 받는 어음이 굉장히 위험한 선택이 될 수도 있을 거 같아서요.”
“그게 무슨 말이야?”
춘배 아버지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강우가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제가 경영학과 쪽에 진학을 앞두고 있어서요. IMF에 관련된 공부를 좀 해서 알고 있습니다.”
“오? 그래?”
춘배 아버지의 얼굴로 옅은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강우가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미도파의 모그룹인 대농그룹이 부도난 건 알고 계시죠?”
“그래, 지난 8월쯤이었던가?”
“네, 맞아요.”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1996년 신동방그룹의 적대적 M&A에서 미도파 백화점이 팔릴 위기에 처했었다. 그 당시 미도파 백화점을 지키기 위해 무리한 대출을 한 것이 결정적 원인이었다.
“그럼 미도파 백화점이 대농그룹의 빚보증을 9천억 서주고 차입금도 6천억이나 있는 것도 아세요? 그 일 때문에 미도파 백화점의 재무구조가 엉망이에요.”
“그···. 그래?”
춘배 아버지의 얼굴이 살짝 경직됐다. 이 부분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춘배 아버지는 평생을 현장에 바친 분이었다.
‘대학도 나오지 않으시고 젊어서부터 온몸을 바쳐 부지런히 뛰어온 분이시라고 했지.’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쌓아온 피와 땀의 결정체가 바로 의류 공장이었다. 하지만 대학을 가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으로 남았다. 그런 이유로 춘배 아버지는 아들들의 대학진학을 그토록 원했었다.
“네, 이제 곧 IMF 체제가 시작 될 거에요. 그러면 먼저 부실기업과 부실 금융사가 먼저 정리 대상이 될 거고요. 미도파는 어음에 대한 지급 능력이 없을 거예요.”
“허···.”
IMF라는 단어에 춘배 아버지가 탄식을 뱉어냈다. 지금의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에게 미지의 공포가 바로 IMF였다.
“제가 주제넘게 아버님의 일에 간섭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친구 가족의 일이라 그냥 모른 척할 수가 없었어요.”
“그렇구나···.”
춘배 아버지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어리지만 강우의 생각과 배포는 남달랐다, 강우가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제 생각이 다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주변에 금융 쪽이나 관련된 일을 하시는 분들이 있으면 꼭 자문해보세요. 그리고서 결정을 하셔도 되지 않을까요?”
“그래, 알겠다. 고맙구나.”
춘배 아버지가 침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했으면 알아서 발을 빼시겠지.’
강우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는 춘배한테 가겠습니다.”
“그래, 놀다 가거라.”
강우가 춘배의 방으로 향했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춘배 아버지가 물을 벌컥 마시고 있었다. 이윽고 춘배 아버지가 결심을 내렸다. 안방으로 들어간 춘배 아버지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어! 박 부장, 나야. 미도파 백화점에 안 된다고 전해. 그래. 어음은 안 돼. 그리고 지금부터 납품하는 물건은 선금 아니면 보내지마. 뭐? 아니야. 내 말대로 해.”
김춘배의 방문 앞에서 그 목소리를 들은 강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주변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말라던 할아버지의 말을 떠올렸다.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해야지.’
강우가 씨익 웃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하냐?”
김춘배와 신원주 그리고 남재식이 입안 가득 무언가를 오물거리고 있었다. 입가에 하얀 가루가 잔뜩 묻은 세 사람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김춘배가 씨익 웃으며 강우에게 손짓했다.
“강우야, 너도 와서 먹어봐. 이게 우리 장사할 아이템인데 내가 조금 얻어왔다.”
강우가 침대로 다가갔다. 침대에 올려져 있는 장사 아이템의 정체에 강우가 실소를 흘렸다.
“이걸 우리가 판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