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제가 해냈어요.
다음 날. 교실에 무거운 분위기가 흘렀다. 수능을 치른 학생들의 심경은 복잡하기만 했다.
“시험 잘 봤냐?”
강우가 신원주에게 물었다. 신원주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와···. 수능이 원래 이렇게 어려운 거였나? 이러다 재수하는 거 아닌지 몰라.”
“설마.”
이윽고 담임이 들어왔다. 조금은 긴장된 표정으로 들어온 담임이 강우와 연정호를 번갈아 보았다.
“다들 시험 보느라 고생들 했다. 지금부터 가채점을 시작한다. 다들 답안지는 적어왔지?”
학생들이 크게 대답을 했다. 그 와중에 답안지를 적지 않은 아이들도 있었다. 수능이 끝나자 유명 출판사와 학원들은 곧장 문제 분석과 답안을 내놓았다. 오늘은 그것을 이용해 가채점을 진행할 것이다.
“일단 언어영역부터.”
담임의 말과 함께 천천히 문제의 답안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잔뜩 집중해 채점을 진행했다. 가채점이 진행될수록 방 안의 공기가 점점 무거워졌다.
“이제 다 끝났다. 다들 점수 합산해봐.”
담임이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는 살짝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야, 몇 점 나왔어?”
강우가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400점입니다.”
강우의 말이 끝나자 곳곳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자신들의 점수보다 까마득히 높은 강우의 점수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담임의 얼굴도 실룩이기 시작했다.
“저···. 정말이니? 정말 400점이야? 제대로 채점한 거 맞지?”
“네. 정확합니다.”
담임의 입꼬리가 찢어질 듯 올라갔다. 400점은 만점이라는 어마어마한 결과였다.
“정호야, 너는?”
상기된 얼굴의 담임이 연정호를 바라보았다. 연정호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연정호가 고개를 돌려 강우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저도 398.5점입니다.”
곳곳에서 또다시 경악과 탄성이 터져 나왔다. 담임의 입꼬리가 귀에 걸쳤다.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잘했다. 잘했어.”
담임의 얼굴이 점점 더 상기되어갔다. 그리고는 신원주를 향해 물었다.
“원주, 너는?”
“저는 370점입니다.”
교실의 곳곳에서 이제는 실소가 흘러나왔다. 담임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반에서 1, 2, 3등이 모조리 서울대 지원범위의 성적이 나왔다. 그중 두 명은 전국 수석과 차석이 가능한 점수였다. 담임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후우······.”
그리고는 차분히 나머지 학생들의 점수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학생 대부분이 높은 점수를 받고 기뻐하고 있었다. 담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고3 담임에게 학생들의 대학진학은 책임감인 동시에 성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수능은 대입 눈치싸움이 치열한 시기였지.’
작년보다 비교적 쉬워진 난이도 덕분에 점수 인플레가 발생한 시기였다. 같은 점수로도 누구는 서울대를 또 누구는 연고대를 가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오늘부터 단축 수업할 거야. 다들 그동안 수험생 생활하느라 고생 많았다. 그리고 점수 못 나온 사람도 너무 낙담하지 말아라. 알겠지?”
학생들이 크게 대답했다. 가채점까지 끝내고 나니 이제는 정말 해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점수가 어찌 나왔던 기쁜 건 기쁜 것이었다.
“강우야, 정말 만점이냐?”
신원주가 멍한 표정으로 강우에게 물었다. 강우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
“한 반에 괴물이 두 명이나 있어.”
신원주가 강우와 연정호를 번갈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 사이 교실 안은 점점 소란스러워졌다. 강우를 둘러싼 친구들이 경악한 표정으로 질문을 해왔다.
“진짜 만점이야?”
“강우야, 축하한다!”
강우가 씨익 웃으며 친구들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연정호도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아깝다. 한 문제만 맞았으면.”
다른 학생들도 서로의 점수를 묻기도 했고, 수능이 끝났다며 즐거워도 했다. 그때, 앞자리에 앉아있던 연정호가 강우를 향해 다가왔다.
“강우야, 우리 답안지 비교 좀 해보자.”
“어.”
강우와 연정호가 서로의 답안지를 보며 비교 체크를 했다. 그리고 수능 문제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문제가 진짜 어렵긴 했지.”
“대단하다 하여간. 만점이라니 축하한다.”
연정호가 혀를 내둘렀다. 강우가 씨익 웃었다.
“아직 가채점이니까 모르지 뭐.”
가만히 듣고만 있던 신원주가 연정호를 보며 물었다.
“강우는 서울대 경영학과 지원할 거라고 했고. 정호 너는 어디 지원할 거냐?”
연정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난 서울대 법대 생각 중이다.”
강우와 연정호의 대화를 듣던 반 아이들이 ‘오오!’ 하는 탄성을 뱉어냈다. 서울대 법대는 그야말로 괴물들의 집합소가 아니던가.
‘역시···.’
강우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미래의 기억대로 연정호는 법대를 지원한다 했다.
“법대? 아우···. 거기에 가면 또 사시도 봐야 하고. 힘들지 않냐?”
신원주의 물음에 연정호가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강우를 보며 눈을 빛냈다.
“나는 꼭 검사가 될 거야. 그래서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돕고 싶어.”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의 연정호는 어려운 가정형편에 자신의 이상을 포기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게 법대를 자퇴하고 재수를 해 의대를 간 이유인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등록금 걱정도 없고. 서울대에서 나올 장학금도 있으니까.’
강우의 작은 도움이 커다란 변화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아직 연정호는 그 사실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너라면 꼭 좋은 검사가 될 거야.”
“너도 시험 보느라 고생했다. 그리고 네가 있어서 더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어. 고마웠다.”
강우와 연정호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신원주가 픽하고 웃었다.
“아니 도대체 너희 둘만 모이면 왜 이러냐고? 내일 당장 어디들 가냐? 아직 학기 한참이나 남았거든?”
강우와 연정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방학이나 다름없는데. 강우 너는 뭐 할 거야?”
연정호가 강우에게 관심을 드러냈다. 강우의 눈빛이 담담히 가라앉았다.
“음···. 할 일이 좀 많지. 아주 많이.”
강우의 말에 신원주와 연정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이후 수업 시간은 그야말로 놀자판이었다. 선생들도 들어와서 잡다한 이야기를 하며 학생들과 놀았다. 어떤 선생은 비디오를 직접 준비해와 영화를 틀어주기도 했다. 반 아이들은 폭발적인 환호성으로 답해주었다.
딩동. 딩동.
수업이 끝났다. 학생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하교 준비를 했다. 강우와 신원주도 가방을 정리했다.
“강우야, 바로 집에 안 갈 거지?”
“당연하지. 얼마만의 자유냐? 애들이랑 놀러 가자.”
모처럼의 해방감에 강우도 들떠있었다. 그때, 교실 문이 열리고 김춘배와 남재식이 들어왔다.
“야! 박강우! 진짜냐?”
김춘배는 입에 거품을 물며 흥분했다. 벌써 강우의 수능점수가 쫙 퍼졌나 보다. 남재식은 강우를 보며 대단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만점이 사람이 맞을 수 있는 점수냐?”
강우가 씩 웃었다.
“너네는 몇 점 나왔냐?”
김춘배와 남재식이 말없이 웃었다. 사실 공부를 그렇게 잘하는 두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 최선을 다했으면 됐지.”
강우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 * *
시끌벅적한 오락실에 강우와 친구들이 있었다. 신원주와 남재식은 횡 스크롤 게임을 하고 있었다. 용사가 파티를 이루어 악의 무리를 처단하는 게임이었다.
“야야! 마법 스크롤 먹어야지!”
“힐 반지 막 쓰면 나중에 어떡하려고?”
신원주와 남재식은 게임에 잔뜩 집중해 있었다. 조이스틱 옆으로 잔뜩 쌓인 동전을 보아하니 끝장을 볼 생각인가 보다. 반면 게임에 별 관심이 없는 김춘배는 구석에 앉아 벽돌쌓기 게임을 하고 있었다.
“재밌냐?”
강우가 동그랗게 생긴 빨간색 의자를 드르륵 끌었다. 그리고 김춘배의 옆에 앉았다.
“그냥 하는 거지 뭐.”
“오락실 끝나면 노래방 간다니까 지루해도 좀만 참아라.”
“어.”
김춘배가 씨익 웃었다. 강우가 물끄러미 벽돌 쌓는 걸 바라보았다. 김춘배는 한쪽 줄을 비워놓고 계속해서 벽돌을 쌓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몰아치듯 벽돌들을 제거했다.
“크···. 이거지. 내가 이 맛에 테트리스를 하지.”
“제법 하네.”
김춘배가 다시 게임에 집중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강우가 슬쩍 물었다.
“요즘 광웅이 소식 좀 아는 거 있냐?”
“광웅이? 박광웅?”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김춘배가 화면에 집중한 채 어깨를 으쓱했다.
“얼마 전에 실업반으로 옮겼다더라.”
“실업반?”
강우의 학교에는 실업반이 존재했다. 애초에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늦게나마 취업을 준비하는 반이었다.
“어, 광웅이네 부모님이 맞벌이하시잖냐. 그런데 요즘 집안이 좀 힘든가 보더라. 뭐···. 원래 대학 갈 성적도 아니긴 했지만.”
역시 양서고 소식통 김춘배다운 정보력이었다.
“그랬구나. 사실 수능 끝나고 가족끼리 밥 먹으러 갔다가 광웅이 만났거든. 중국집에서 배달 아르바이트한다더라.”
“배달? 박광웅이?”
김춘배가 놀란 눈이 되었다. 학교에서의 박광웅은 한때 반을 휘어잡던 존재였다. 학창 시절과 사회에서의 괴리감이 서서히 시작됨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어, 바빠 보이더라. 열심히 사는 거 같고.”
“걔네 집도 많이 어려운가 보네.”
김춘배의 얼굴에 살짝 그늘이 졌다. 잠시 후. 강우와 친구들이 오락실을 나왔다. 거리는 한산했고, 사람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남재식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와···. 거리에 사람이 왜 이렇게 없냐?”
“그러게. 평일이라 그런가.”
김춘배가 잘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강우는 이런 거리의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며칠 전 현 정권의 대통령은 ‘미국 등 우방으로부터 돈을 빌려 보겠으나 여의치 않으면 IMF로 가야 한다.’라는 내용을 국민에게 발표했다. 그야말로 충격의 도가니였다.
‘그동안 부도가 난 대기업들이 하나둘도 아니고 임금이 밀린 회사는 셀 수도 없다.’
대한민국 경제의 모든 지표가 출렁이고 있었다. 최악의 취업난과 금융시장의 불안정으로 국가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11월 20일인 오늘. 환율의 변동 폭이 2.25%에서 10%까지 확대됐다.’
환율시장은 상한선까지 폭등하고 사실상 거래가 중단됐다. 강우 가족의 방주는 날로 단단해 지고 있었다. 통장에 잠들어있는 달러의 가치는 계속해서 높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경제 침체라는 거대한 터널의 입구에 서 있었다.
“IMF가 그렇게 무서운 건가?”
남재식이 사람들의 표정을 보며 중얼거렸다. 신원주가 한숨을 푹 쉬었다.
“뉴스고 뭐고 난리가 났더라. 우리 아빠 예상이 맞았어.”
“우리 아빠 괜찮을까?”
김춘배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김춘배를 보며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빠가 납품하는 백화점이 요즘 힘들다고 하더라고.”
“그 백화점이 어딘데?”
김춘배가 잠시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응. 미도파 백화점.”
강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김춘배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아···. 이번 수능점수도 애매하고 이러다가 아빠 공장에 끌려가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김춘배가 배를 쓰다듬으며 분위기를 전환했다.
“배고프다 빨리 밥이나 먹으러 가자.”
신원주가 김춘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래, 걱정하지 마라. 어차피 실기시험이 중요하다며. 힘내라고.”
남재식도 신원주의 말을 거들었다.
“그래, 아버지 공장도 잘 풀릴 거야. 걱정하지 마라.”
사실 이 시기의 청소년들에게 IMF란 미지의 영역이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또 자신들에게 어떤 앞날이 올지 예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김춘배를 보는 강우의 표정은 무거웠다.
“뭐 먹을래?”
신원주의 말에 남재식이 빠르게 답했다.
“돈가스나 먹으러 갈까?”
“아···. 술 당기는데.”
김춘배가 주변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신원주가 김춘배의 어깨를 툭하고 치며 앞장을 섰다.
“미성년자가 무슨 술이야. 조금만 참아. 몇 달 뒤면 죽도록 마실 일이 넘칠 테니까.”
신원주와 김춘배 그리고 남재식이 앞장을 서기 시작했다. 몇 걸음 앞에 가던 김춘배가 뒤를 돌아보았다.
“강우야, 뭐 해? 빨리 와.”
“어···.”
강우가 깊은 생각에 잠긴 발걸음을 뗐다.
* * *
늦은 저녁. 강우가 집으로 돌아왔다.
덜컥.
문이 열리고 강우가 들어왔다. 거실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강우야!”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며 강우에게 다가왔다.
“가채점했어? 몇 점이야?”
아버지의 질문에 거실로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강우가 씨익 웃으며 답했다.
“400점. 만점이네요.”
정적이 흘렀다. 아버지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
어머니는 왈칵 눈물을 쏟으며 강우에게 다가왔다.
“우리 아들, 잘했어.”
“왜 울어요? 기쁜 날에.”
아버지가 코를 훌쩍이며 몸을 돌리셨다.
“강우야, 고맙다. 엄마·아빠가 해준 게 없는데, 혼자 힘으로 해냈구나.”
문득 장미여관을 들어가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의 강우는 고1이었다. 아무것도 없고, 앞날이 막막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강우 가족은 똘똘 뭉쳐 위기를 헤쳐나갔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렀다. 강우의 수능 만점은 단순한 성적이 아니었다.
“아니에요 이게 다 아버지, 어머니가 뒷바라지를 해주셔서 가능했어요.”
강우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번갈아 안아주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이 감동으로 물들었다. 강우가 할아버지의 앞쪽으로 갔다.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허허. 그럴 줄 알았어. 우리 장손이 세상을 놀라게 할 줄 알았어.”
강우가 할아버지에게 큰절을 올렸다.
“할아버지, 제가 해냈어요. 독립유공자의 손자가 전국 1등을 했어요.”
“고맙다.”
할아버지가 대견함에 눈시울을 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