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402)
  • 오목 한판 할래?

    한동안 강우는 연정호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연정호도 강우에게 말을 걸거나 하지는 않았다. 강우는 연정호에게 미안했지만, 사과의 방법이 서툴 수밖에 없는 나이였다. 하지만 강우는 계속해서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그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드르륵.

    아침 일찍 학교에 온 강우가 교실로 들어섰다. 아직 교실에는 학생 대부분이 오지 않은 상태였다. 역시 연정호는 자리에 앉아 공부하고 있었다. 기회다 싶은 강우가 연정호의 옆자리로 앉았다.

    “정호야.”

    강우의 부름에도 연정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강우가 속으로 짧게 한숨을 쉬고는 묵묵히 연정호의 옆에 있었다.

    사각. 사각.

    연정호의 손에 들린 몽당연필이 어려운 형편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연필의 끝을 힐끗 바라보니 참고서는 닳을 대로 닳아있었다. 책상 위에 가지런히 정리된 노트들에는 양하 초등학교의 직인이 찍혀있었다. 아마도 동생들의 공책을 공유하는 거 같았다.

    강우가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는 미안했다. 진심이야.”

    강우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참고서를 보던 연정호가 멈칫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더니 ‘탁’ 연필을 내려놓았다.

    “아니. 나도 미안했다. 그때는 나도 좀 흥분했었어.”

    그 말을 끝으로 연정호가 참고서로 얼굴을 묻었다. 사실 그렇게 쏘아붙인 연정호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그···.”

    강우가 무언가 더 말을 하려 하다가 멈칫했다. 더 이상의 사과는 그저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수능 얼마 안 남았네. 힘내자.”

    “어, 너도 힘내.”

    강우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슬쩍 창밖을 바라보자 운동장에 드리운 그늘이 점점 걷히고 있었다. 그렇게 해가 뜨고 주변이 환해지자 반 아이들이 하나둘씩 등교를 시작했다. 교실 안이 학생들로 가득 차자 담임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내일 수능 모의고사 있는 날인 거 알지? 다들 모의고사비 내는 거 잊지 말고.”

    학생들이 우렁차게 대답을 했다. 강우가 연정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연정호는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 그리고 강우랑 정호, 원주는 점심시간에 교무실로 올라와라.”

    담임이 교실을 나갔다. 신원주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왜 부르지?”

    “글쎄?”

    그렇게 수업이 시작되고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연정호는 역시나 빵과 우유로 빠르게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강우가 허겁지겁 도시락을 입에 밀어 넣었다.

    “원주야, 우리도 가자.”

    “어? 밥은?”

    강우가 빠르게 연정호의 뒤를 따라갔다. 신원주도 수저를 내려놓더니 헐레벌떡 따라왔다. 그렇게 세 사람이 교무실로 들어갔다.

    “이야~ 이거 우리 학교 보배들이 한꺼번에 오셨네.”

    학생주임이 미소를 지으며 세 사람을 반겼다. 안쪽을 바라보니 담임이 손짓을 하고 있었다. 강우와 연정호 그리고 신원주가 담임의 앞쪽으로 갔다.

    “그래, 왔구나. 교감 선생님께 가봐.”

    교무실의 맨 위쪽으로는 교감 선생의 자리가 있었다. 그 앞에는 이미 여러 명의 학생이 있었다. 강우와 두 사람이 교감의 앞쪽으로 갔다.

    “다 모였구나. 자리에들 앉아.”

    교감 선생의 앞쪽으로 놓인 임시 의자에 학생들이 둘러앉았다. 교감 선생이 부드럽게 웃더니 입을 열었다.

    “오늘 내가 여러분을 부른 이유는 말이지. 좋은 소식이 있어서다.”

    교감 선생의 말에 학생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공부만 하는 학생들에게 좋은 소식이 있을게 무어란 말인가.

    “대진 그룹은 알고들 있지? 참고서 만드는 대진 출판사가 속한 그룹 말이야.”

    교감의 말에 강우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신원주가 고개를 슬쩍 돌려 강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무슨 일이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는 말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대진 그룹에서 우리 양서고등학교에 장학금을 지원하기로 했단다.”

    교감 선생의 얼굴에 뿌듯함과 자부심이 떠올랐다.

    “그만큼 우리 학교가 명문이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겠지. 작년에도 서울대와 연고대를 많이 보냈고, 올해도 성적이 나쁘지 않으니까 말이야.”

    학생들은 여전히 통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장학금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크게 와 닿을 리가 없었다.

    “전교 1등부터 10등까지 차등 없이 같은 장학금을 지원한다고 했다. 장학금은 지금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지원될 거고, 대학에 가면 등록금을 전액 지원해 준다고 하더구나.”

    파격적인 내용에 학생들이 그제야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대학 등록금을 전액 지원한다니 파격 그 자체였다. 강우가 힐끗 연정호를 바라보았다. 붉게 상기된 연정호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꾹 다문 입술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 그리고 대진 출판사에서 나오는 참고서는 언제든지 무료로 받아볼 수도 있다고 했으니까. 필요한 사람은 선생님을 통해 요청하거라.”

    말을 마친 교감이 입꼬리를 올리며 자아도취에 빠져들었다.

    “다들 학교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교감 선생의 말에 신원주가 피식 웃어버렸다. 학생들의 시선이 신원주를 향해 쏟아졌다.

    “아···. 재채기가 나올 뻔해서요.”

    “흠흠···.”

    교감이 헛기침하며 신원주를 바라보았다. 신원주가 슬쩍 고개를 숙였다.

    “일단 확실히 결정된 사항이니까. 내일부터 부모님들을 학교에 한번 오시라고 해야 한다. 알겠지?”

    학생들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알겠다 대답했다. 교감이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돌아가서 마저 쉬도록 해라.”

    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교감 선생에게 꾸벅 인사를 한 뒤 교무실을 나섰다. 자리에서 일어난 강우의 시선이 연정호를 향했다.

    “.....”

    연정호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야. 정···.”

    “원주야.”

    연정호를 부르려던 신원주를 강우가 말렸다. 그리고 신원주를 끌고 조용히 교무실을 입구로 향했다. 교무실을 나서는 길에 마주친 학생주임이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야! 강우야, 이거 재원이 형이 한 거지? 그렇지?”

    “아마도?”

    잔뜩 흥분한 신원주의 말에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신원주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와···. 지난번에는 피자를 사더니 이제는 장학금이네? 재원이 형 스케일이 점점 장난이 아닌데?”

    “재벌 2세니까.”

    말을 마친 강우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이재원은 연정호의 자세한 사정을 강우에게 들었다. 그리고는 오늘과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이다. 혹시나 연정호의 자존심에 상처를 줄까 했을 것이다.

    ‘역시···. 현명한 사람이야.’

    그때였다. 교무실에서 연정호가 나왔다.

    “......”

    “......”

    강우와 연정호의 시선이 말없이 공중에서 맞닿았다. 하지만 연정호는 이내 교실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신원주가 강우의 어깨를 툭하고 쳤다.

    “정호 표정 좋아진 거 봐라. 잘됐네. 그렇지?”

    “그래, 잘됐네.”

    이윽고 교실로 돌아온 강우가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늘 공부에 쫓기던 연정호가 짝꿍과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연정호가 기분이 좋을 때만 둔다던 오목을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잘됐네. 다행이고.’

    강우가 입꼬리를 스르륵 올렸다.

    지이잉. 지이잉.

    그 순간, 강우의 가방 속에서 진동이 울렸다. 강우가 빠르게 걸어가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주변 학생들이 부러운 표정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가 핸드폰을 가지고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학교 건물 뒤편에 도착했다.

    딸칵.

    핸드폰을 열어보니 이미 전화는 끊어져 있었다. 하지만 강우는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다.

    뚜르르. 뚜르르.

    몇 번의 신호가 가고 덜컥 전화가 연결됐다.

    “형, 전화했었죠?”

    이재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맞아. 장학금 처리됐지? 나도 방금 보고받았다.-

    “네, 고마워요. 그런데 괜찮겠어요? 열 명이나 장학금을 주고요.”

    -괜찮아. 다른 그룹들도 다 하는 일이야.-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지금도 삼선이라는 대기업은 장학생 투자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키워진 장학생들은 사회 전반에서 삼선그룹에 우호적인 역할을 했었다.

    “그런데 저까지 장학금을 줄 필요는 없는데···.”

    -생각해봐라. 전교 1등을 안 주고 나머지를 준다는 게 말이 되냐?-

    “하긴···. 그렇네요.”

    -그리고 너 대학 갈 때 등록금 정도는 내가 대주고 싶었는데 핑곗거리 생기고 잘됐지 뭐.-

    강우가 피식 웃었다.

    “형, 나 등록금 안 내요.”

    -그게 무슨 말이야? 등록금을 왜 안내? 성적 장학금 받겠다 이거냐?-

    “아니요. 나 독립유공자 손자잖아요. 대학 등록금 면제에요. 몰랐어요?”

    -와···.-

    이재원이 감탄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말을 이어갔다.

    -뭐···. 어쨌든 이미 결정돼서 나가는 거니까. 장학금은 네가 알아서 사용해라.-

    “알겠어요. 주는 건 사양 안 합니다. 그리고 고마워요. 형.”

    -자식···. 고맙기는. 아무튼, 수능 얼마 안 남았으니까 열심히 공부해라.-

    “네.”

    그 말을 끝으로 통화가 끝났다. 슬쩍 핸드폰을 확인하니 아직 점심시간이 남아있었다. 교실로 돌아온 강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오목 한판 할래?”

    연정호가 멋쩍게 웃으며 바둑판이 그려진 책받침을 내밀고 있었다. 강우가 씨익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오목? 좋지. 한판 붙자.”

    연정호가 승부욕을 빛내며 강우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는 손에 들린 몽당연필을 한 개 내밀었다.

    “이걸로 해. 샤프심으로 하면 자국이 남아서.”

    “어. 알겠어.”

    강우가 몽당연필을 받아들었다. 손안에 딱 들어오는 연필의 감촉이 나쁘지 않았다. 이윽고 전교 1, 2등의 불꽃 튀는 오목대전이 시작됐다.

    * * *

    -연일 폭등을 거듭해 달러당 천 원에 육박하는 원화 환율과 급격한 등락을 계속하고 있는 증권시장. 칠 일째 오름세를 계속하고 있는 실세금리. 정부는 이토록 불안정한 금융시장을 안정시키고···.-

    시간이 흘러 수능 전날이 되었다. 뉴스를 보는 강우 가족은 묘한 설렘에 쌓여있었다.

    “강우야, 내일 수능인데 일찍 자야지.”

    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말했다. 뉴스를 보던 강우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저 긴장 별로 안 돼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뉴스를 보기 시작했다. 강용이는 옆자리에 앉아 열심히 게임을 하고 있었다.

    “엄마 아빠, 우리 형아가 1등 할 거예요.”

    강용이의 말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내심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러자 뉴스를 보시던 할아버지가 흐뭇하게 웃었다.

    “강우야, 등수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매일 하던 대로만 하면 아무 문제 없을 게다.”

    강우는 마지막 수능 모의고사에서 우수한 점수를 올렸다. 전국 석차 3등이라는 어마어마한 성적이었다. 학교가 발칵 뒤집힐 정도였다. 연정호의 성적도 마찬가지였다. 근심을 덜고 공부에 집중한 연정호는 무시무시하게 성적을 끌어올렸다. 마지막 수능 모의고사에서 연정호의 성적은 전국 석차 2등이었다.

    ‘역시 진짜 공부하는 괴물은 정호 그놈이지.’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수능 모의고사 전국 2, 3등이 양서 고등학교에서 나온 것이다. 벌써 학교에 걸 현수막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그런데, 강우야. 환율이 계속 오를까?”

    뉴스를 보던 아버지가 강우에게 물었다. 정부는 연일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정책을 내놓겠다고 하고 있었다.

    “네, 아직 더 오를 거에요.”

    강우의 말에 아버지가 탄성을 뱉어냈다. 벌써 환율이 많이 올라 보유하고 있는 달러의 가치가 폭등한 상태였다. 법인 통장은 물론이고 강우의 손에 있는 통장도 가치의 무게가 달라진 것이다. 하지만 강우가 더 오를 것이라 하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허···. 여기서 더 오르면 도대체 얼마까지 오른다는 거야.”

    아버지는 약간은 못 믿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정부가 연신 금융 대책을 내놓겠다 호언장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범아, 강우에게 맡기기로 했으니까. 우리는 조용히 지켜보자꾸나.”

    “네, 아버지.”

    이윽고 강우는 잠을 청하러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자리에 누웠다.

    띠리리. 띠리리.

    그 순간, 강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딸칵 핸드폰을 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김춘배의 잔뜩 긴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우야, 자냐? 나 떨려서 잠이 안 온다.-

    “춘배야, 하던 대로 해. 어차피 달라질 거 없다.”

    -그···. 그렇겠지?-

    “어, 넌 나중에 볼 실기가 중요하니까 오늘은 긴장하지 말고 자라.”

    -그래, 네 목소리 들으니까 좀 안심된다.-

    툭.

    전화를 끊자마자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전화를 받자 남재식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우야, 자냐?-

    “재식아, 너는 긴장 많이 하는 성격이니까. 내일은 긴장 풀려고 노력을 많이 해봐. 알겠지?”

    -어? 어어···.-

    남재식이 전화를 끊었다. 이윽고 또다시 전화가 울렸다. 강우가 한숨을 푹 쉬며 전화를 받았다. 이번에는 신원주였다.

    -야 강우야, 게임이나 좀 하다 잘래?-

    “무슨 수능 전날 게임을 해. 빨리 자라. 아침에 일어나면 과식하지 말고.”

    -사실 조금 긴장돼서···.-

    “지금껏 노력했잖아. 그냥 마음 편하게 봐.”

    강우의 전화가 계속해서 울렸다. 반 친구 중 여럿이 강우에게 전화했다. 강우는 귀찮은 듯하면서도 일일이 전화를 받아주었다. 그렇게 긴장한 친구들과 전화를 하다 보니 밤이 깊었다.

    ‘수능이라···. 떨릴만하지. 내일이 운명을 결정짓는 날이니까.’

    친구들의 긴장감을 강우는 이해할 수 있었다. 내일 단 하루의 시험으로 인생의 갈림길에 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강우는 별로 떨리지 않았다. 미래의 기억까지 합치면 무려 세 번째 수능이었다.

    ‘사실 수능은 출발점에 불과한데 말이지.’

    생각을 마친 강우가 눈을 빛냈다. 강우가 내일을 위해 굳은 결심을 내렸다.

    ‘목표는 전국 1등이다.’

    가족을 위해 그리고 독립유공자이신 할아버지를 위해 전국에 이름을 알리겠다는 다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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