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0/402)
  • 사실 제가 외계에서 온 외계인입니다.

    딸랑.

    카페의 문이 열리자 차가운 바람이 강하게 밀려들어 왔다. 냉기를 느낀 카페 안의 손님들이 일제히 입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열린 입구로 이재원이 들어서고 있었다. 깔끔한 정장에 짙은 갈색 무스탕을 입은 이재원은 그림 같았다. 이재원의 등장으로 카페 안이 잠시 소란스러워졌다. 특히 젊은 여성들은 연신 이재원을 훔쳐보았다.

    “여~ 수험생!”

    이재원이 씨익 웃으며 강우에게 다가왔다. 주변에서 작게 비명이 나자 이재원이 주변을 쓰윽 둘러봤다. 사방이 금세 조용해지더니 여성들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인기 짱이네.”

    “뭐가?”

    이재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요새 들어 이재원은 타고난 외모에 빛을 더하고 있었다. 마냥 장난스럽기만 했던 예전의 모습은 없었다. 세련된 외모에 잘 차려입고 자신감마저 더하니 사람이 완전히 달라 보였다.

    ‘재벌 2세의 포스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하는 행동은 털털 그 자체였다. 지금도 강우의 눈앞에서 하품을 크게 하고 있었다. 찔끔 눈물이 나오는지 그새 눈도 벅벅 비벼대고 있었다.

    “아···. 피곤해. 피곤해.”

    이재원이 물을 벌컥 마셨다. 강우가 피식 웃었다.

    “회사는 좀 어때요?”

    “난리 났지.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지. 관보 철강 부도 처리되고, 그룹이 발칵 뒤집혔다.”

    대기업들로서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은행의 자금 유동이 경색될 테니 말이다. 강우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유동부채는 정리 안 했어요?”

    “아니. 네 조언대로 최대한 정리했다.”

    “그런데요?”

    이재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는 손가락 두 개를 쫙 펼쳤다.

    “알잖냐. 나 말고 두 명의 꼴통들.”

    “아···.”

    아마 두 명의 배다른 형들을 이야기하나 보다. 이재원이 자세를 고쳐잡더니 살짝 미간을 좁혔다.

    “이 사람들은 현실 감각이 없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그러는 건지. 관보 철강이 4조 부도를 냈는데도 강 건너 불구경이야. 나는 오늘 일을 겪고 온몸에 소름이 쫙 돋던데 말이야.”

    “이제 시작이죠. 앞으로 부도나는 기업들 한둘이 아닐 거에요. 이건 신호탄이에요. 신호탄치고는 좀 거대하긴 하지만요.”

    이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눈을 가늘게 뜨며 강우를 바라보았다.

    “너 진짜 이번에는 숨기지 말고 말해. 지금 이 사태가 벌어질 거 어떻게 알았어?”

    “사실 제가 외계에서 온 외계인입니다.”

    이재원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두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리며 불신과 신뢰 사이에서 갈등했다. 그러자 강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그걸 믿어요?”

    “나 에스파일 애청자거든? 깜빡 넘어갈 뻔했네.”

    강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쭈욱 빨았다.

    “조금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간단해요. 관보 철강은 90년대 들어서면서 무분별한 투자를 했어요. 그리고 91년 수서지구 택지 특혜 분양 사건을 일으킨 후 위기도 맞이했죠. 정권의 비호로 여차여차 넘어갔지만, 그건 억지로 틀어막은 거니까요.”

    이재원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정보를 조합에 결과를 도출하는 강우의 뛰어남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거 가지고 예상했다고 하기에는 너무 정확했어. 너는 마치 때를 알고 있는 것처럼 정확히 기간을 정해준 느낌이야.”

    강우가 살짝 움찔했다.

    탁.

    주스 잔을 내려놓으며 강우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형, 잘 생각해봐요.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은행에 의존하는 비율이 높아요. 빚을 내서 덩치를 키운다니 그게 말이 돼요? 당장 일본의 경우를 봐요. 경제 호황이라며 빚잔치를 벌이다 어떤 꼴이 났는지. 그리고 관보 철강이 제철소 짓는다고 무리한 거 누구나 알잖아요? 다들 대마불사니, 뭐니 현실 외면을 한 거뿐이죠.”

    “음···.”

    이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진 그룹만 하더라도 마찬가지의 상황이었다. 무리한 은행 대출로 덩치를 키우고 있었다. 그리고 빚을 빚으로 메우는 기형적인 구조였다. 그리고 강우는 관보 철강이 부도가 난다는 말은 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간단하게 생각해서. 기업에 당장 부메랑으로 돌아올 유동부채들을 정리하라고 조언한 거죠.”

    이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가 주스 잔에 꽂혀있는 빨대를 빙글빙글 돌렸다.

    “대기업의 총수나 지배층은 커다란 울타리 안에 갇혀있는 거예요. 진실을 외면한 채 성벽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한다고요. 그러다가 그 성벽이 무너지면요?”

    강우가 목을 향해 손을 쓰윽 그었다.

    “바로 관보 철강처럼 한 방에 훅~ 가는 거죠.”

    “으으···.”

    이재원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외국 사이트에 접속해서 이런저런 정보도 많이 검색하고요. 일본에 있는 할아버지의 동기들을 통해 이런저런 정보도 얻고 있고요. 그러다 보니 더 넓은 시야로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어서 그런 거예요.”

    말을 마친 강우가 쭈욱 주스를 빨아들였다. 나름대로 이유를 잘 포장한 자신이 만족스럽기도 했다.

    ‘사실 나는 미래의 기억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지.’

    그리고 이재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강우의 말을 믿었다.

    “그래, 예전부터 네가 범상치는 않았으니까.”

    “그리고 형처럼 다른 사람의 말을 색안경 안 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총수 일가가 있으니 가능했던 거죠.”

    “칭찬 고맙다.”

    이재원은 현재 대진 미디어의 사업지원 본부장이었다. 규모가 비교적 작은 대진 미디어에서 사장을 제외하면 사실상 이인자였다. 회장의 사생아지만, 아들은 아들이었다. 하지만 이재원은 자신이 얻은 자리가 결코 혈연에서 온 것이 아님을 증명했다.

    ‘주도적으로 사업을 이끌고 있고. 여러 방면에서 좋은 아이템도 내고 있고.’

    이재원이 본부장에 오른 이후 대진 미디어는 훨훨 날아오르고 있었다. 강우가 이재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확실히 재원이 형은 그룹 총수가 될만한 자질이 있는 사람이야.’

    야생에서 자란 화초라는 강우의 말처럼 이재원은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들이 왕족인 줄 아는 다른 형제들과는 다른 인물이었다. 또한, 타인의 말을 잘 경청했다. 그리고 자기 생각과 조율을 한 뒤 유연한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을 시행하는 대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언뜻 불도저 같은 이철금 회장을 닮은 듯했지만, 또 이성적이었다.

    “앞으로 기업들의 상황은 점점 심해질 거에요. 제 말 무슨 뜻인지 알겠죠?”

    이재원이 잠시 생각에 빠졌다. 하지만 이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당장 회장님한테 찾아가야겠어.”

    “회장님은 왜요?”

    “당장 가서 꼴통들의 무모한 짓을 막아야지.”

    이재원은 배다른 형들의 무분별한 사업확장에 제동을 걸겠다 하고 있었다. 강우가 미간을 좁혔다.

    쭈욱.

    잔에 담긴 오렌지 주스가 바닥을 드러냈다. 빨대의 끝부분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주변의 시선이 잠시 쏠렸다가 다시 흩어졌다.

    탁.

    강우가 잔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 그러면 안 돼요.”

    “어? 그게 무슨 말이야?”

    이재원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경쟁자를 제거할 절호의 기회잖아요. 그냥 자기들 마음대로 하게 놔둬요.”

    “지금 형들이···.”

    반론하려던 이재원이 멈칫했다. 그리고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역시 머리가 좋은 이재원이었다. 이재원의 입에서 긴 숨이 뱉어졌다.

    “형들이 하는 짓을 놔두면 그룹이 위험해질 수도 있어.”

    “이미 돌이킬 수는 없어요. 대신 형이 일이 벌어지고 난 후를 잘 수습하면 돼요.”

    “대진 미디어는 그룹 내에서도 자금 규모가 크지 않은 곳이야. 꼴통들이 저질러 놓은 일을 수습하기 힘들어.”

    “그럼 자금의 덩치를 키우면 되죠.”

    이재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상황에서 한순간에 자금을 늘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진 미디어는 비상장 기업이라 유상증자도 힘들었다.

    “무슨 방법으로.”

    강우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형, 조건이 있어요.”

    “무슨 말이야?”

    “내가 알려주는 정보로 후계자 싸움에서 승리하면 내 부탁을 하나만 들어줘요.”

    “부탁? 하나가 아니라 열 개도 가능해.”

    이재원이 씨익 웃었다. 당장 이번 일만하더라도 강우의 조언은 천금과 같았다. 강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형이 가능한 만큼 대진 미디어의 현금 유동성을 확보해요. 이왕이면 달러로.”

    “달러?”

    “네, 이유는 묻지 말고요. 떠올리면 가슴 아프니까.”

    이재원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만든다 해도 믿을 판이었다.

    “알겠어. 이번에도 너만 믿고 간다.”

    “아주 훌륭한 선택이 될 거예요. 절대 후회할 일 없을 거예요.”

    그때, 이재원이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이재원이 커피를 후루룩 마시며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강우야, 너 이번 주말에 시간 좀 내라.”

    “주말에요?”

    이재원이 멋쩍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그렇게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어···. 그게 우리 엄마가 너 집으로 초대하고 싶다더라.”

    “어머니가요?”

    지금 이재원이 말하는 어머니는 친엄마인 김세아였다.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난 후 이재원은 다시 친엄마인 김세아와 같이 지내고 있었다.

    “그래, 내가 매일 너희 집에 가서 밥 얻어먹는다고 자기도 너 밥 한 끼 해주고 싶다네.”

    “아···. 그래요? 그럼 뭐 당연히 가야죠.”

    이재원의 얼굴이 살짝 경직됐다. 하지만 이내 원래의 표정을 되찾았다.

    “그래, 기대 너무 하지 말고.”

    “에이~ 밥 한 끼 먹는 건데요 뭐.”

    “그렇게 생각해주면 다행이고.”

    왜인지 모르게 자신감 없는 이재원이었다. 강우가 묘한 불안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와 이재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상태였다.

    스르륵.

    이재원을 태울 고급세단이 멀리서 나타났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예전부터 이재원을 수행하던 운전기사였다.

    “본부장님, 잊으신 게 있습니다.”

    “아···. 강우야, 잠깐만.”

    이재원이 빠르게 차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는 운전기사에게 무언가를 건네받았다. 강우가 힐끗 바라보니 두툼한 두께의 상자였다.

    ‘어?’

    이재원이 강우에게 다가와 상자를 내밀었다.

    “이거 선물이다.”

    강우가 피식 웃으며 상자를 받아들었다. 박스의 겉면에는 오토로라 스터텍 VIP라고 적혀있었다.

    “고등학생한테 부담스럽게 핸드폰을 선물하고 그래요.”

    “내가 답답해서 그런다. 이건 뭐 연락을 하고 싶어도 밖에 있으면 감감무소식이니.”

    강우가 품에서 삐삐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삐삐도 이재원이 선물해 준 것을 아직도 쓰고 있었다. 강우가 상자를 옆구리 사이에 툭 꼈다.

    “주는 건 거절 안 합니다. 잘 쓸게요.”

    “그래, 번호는 안에 메모해놨으니까. 앞으로 연락 좀 바로바로 받아라.”

    “넵.”

    이재원이 픽하고 웃더니 차에 올라탔다. 아직 퇴근 전인 이재원은 회사로 돌아가야 했다.

    “그럼 간다. 또 보자.”

    “연락해요.”

    강우가 손을 흔들었다. 이재원이 손을 ‘척’ 하고 들었다. 그와 동시에 차량이 스르륵 미끄러져 나가기 시작했다.

    * * *

    덜컥.

    문이 열리고 강우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방으로 곧장 향했다. 책상에 앉은 강우가 박스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와···. 이쁘긴 하네.”

    상자 안에는 반으로 접힌 핸드폰이 있었다. 손을 넣어 스윽 꺼내니 가볍기 그지없었다. 이 시절의 핸드폰들이 대부분 벽돌이라 불린 것에 비하면 충격적인 디자인과 무게감이었다.

    딸깍.

    특유의 소리와 함께 핸드폰이 반으로 열렸다. 전원 버튼을 꾹 누르니 곧 액정에 불이 들어왔다.

    띠리리. 띠리리.

    잠시 후, 핸드폰이 울렸다. 강우가 통화버튼을 눌렀다. 이재원의 목소리가 대번에 흘러나왔다.

    -어때? 좋지?-

    “네, 좋네요.”

    -나 회사 들어왔다. 그런데 강우야, 희소식이 있다.-

    “뭔 소식인데요?”

    -회장님이 나랑 형들을 오늘 본가로 다 소집했네.-

    “그게 희소식이에요?”

    -그럼, 이번 주말이 내 생일이지 않냐. 오늘 내 생일파티 한다고 다 불렀다더라.-

    강우가 속으로 움찔했다. 생각해보니 이재원의 생일이 멀지 않았다. 이재원은 빠른년생이었다.

    “축하해요. 들어가서 형들 축하받으면 기분 좋겠네요.”

    -그 인간들이 나한테 손뼉 쳐줄 생각 하니 벌써 속이 후련하긴 해. 아무튼, 그렇게 알고 주말 약속 잊지 마라.-

    “네, 알겠어요.”

    툭.

    전화가 끊어졌다. 강우가 볼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탁상달력에 동그라미를 쳤다.

    -재원이 형 생일.-

    혹시나 까먹을까 해서였다.

    똑똑.

    “강우야.”

    문밖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들어오세요.”

    문이 벌컥 열리고 앞치마를 두른 어머니가 들어왔다. 살짝 화가 난 듯한 어머니의 표정에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엄마, 무슨 일 있어요?”

    어머니가 허리에 손을 ‘척’ 하고 올렸다. 강용이가 매일 따라 하는 바로 그 자세였다. 어머니가 강우를 향해 분노를 토해냈다.

    “가서 네 동생 좀 찾아와라. 아침에 나가서 점심도 거르고 집에 오지를 않아.”

    강우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이내 피식 웃었다. 강용이가 있는 곳을 알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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