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402)

너 어떻게 알았어?

어두운 거실에 강우와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가 앉아있었다. 삼대가 둘러앉은 거실의 탁자 위에는 과일과 먹을 것이 놓여있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흔한 가정집의 풍경이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심상치는 않았다.

띠이.

9시 정각을 알리는 효과음과 함께 안경을 쓴 아나운서의 모습이 화면으로 떠올랐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월 23일 NBC 뉴스데스크입니다.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리던 관보 철강이 오늘 끝내 부도로 쓰러졌습니다. 관보 철강이 그동안 끌어쓴 빚은 4조가 넘습니다.-

강우가 시선을 들어 벽에 걸린 달력을 바라보았다.

1997년 1월 23일.

‘드디어 시작인가···.’

대한민국을 집어삼킬 거대한 파도의 진원지가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물론 관보 철강의 부도가 IMF의 모든 원인은 아니었다. 한국경제는 이미 대기업들의 무리한 투자와 은행들의 무분별한 대출로 인해 그 근간이 썩어가고 있었다.

‘정부도 문제다.’

1996년 말. 이미 외환 부채도 1천억 달러에 육박했다. 하지만 정부의 대처는 안일할 뿐이었다. 은행들은 동남아에 단기채권을 마구 남발하며 이익을 얻는데 정신이 없었다. 그야말로 모두가 합심해 불구덩이로 뛰어들고 있던 셈이었다.

‘그리고 그 피해는 국민이 다 떠안게 되고 말이지.’

2001년 IMF 조기 상환까지 한국은 그야말로 슬픔과 고통의 세월을 보냈다.

“강우야.”

강우가 힐끗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의 놀란 눈이 허공에서 강우와 부딪혔다.

“할아버지, 이제 시작이에요.”

할아버지의 눈가가 붉어지기 시작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독립운동을 하신 할아버지다. 닥쳐올 나라의 위기에 그리고 국민이 겪을 고통에 걱정이 크신 것이다.

“이번에는 이 할아비가 할 수 있는 게 없구나.”

할아버지가 안타까움에 탄식을 뱉어냈다. 젊은 시절처럼 몸이라도 던질 수 있다면 그럴 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총탄이 오가는 전쟁보다 무서운 것이 바로 경제 전쟁이었다.

‘그리고 총성 없는 전쟁은 점점 더 치열해지겠지.’

아버지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4조라고? 지금 4조?”

아버지가 벌게진 얼굴로 흥분했다. 4조라니 현실감마저 상실해버릴 정도의 거액이었다. 그야말로 정경유착의 결정체가 눈앞에서 폭발해 버리고 있었다. 강우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 은행들은 몸을 사릴 수밖에 없을 거예요.”

관보 철강 부도와 관련된 시중 금융사만 해도 19군데가 넘어갔다. 그 액수도 엄청나 은행들은 대출을 꺼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은 곧 기업들의 자금경색으로 이어진다.

“그동안 무분별한 대출로 문어발식 확장을 하던 기업들이 일시에 자금난을 겪기 시작할 거예요. 이제 기업들이 줄줄이 부도를 내기 시작할 거고요.”

그야말로 어음과 대출의 시대였다. 기업들은 어음을 발행하는데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다. 빚이 빚을 낳고 있는 기형적인 상황이었다. 서로가 믿음 즉 신용으로 돈을 돌려쓰는 웃지 못할 상황이다. 하지만 그 믿음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음···.”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시선이 강우의 입술을 향했다. 두 사람의 눈에는 감탄의 빛이 역력했다. 강우가 그간 강조해왔던 위기가 이제 눈앞에 벌어질 것만 같았다.

“지금의 상황이 계속 이어지다 보면 대외신용도가 바닥을 치겠죠. 외국인 투자자들은 투자를 멈추거나 투자금을 회수해 갈 거고요.”

외환 보유량도 바닥을 치며 국가가 기업들의 신용도를 보장해 줄 수 없는 사태가 이른다. 그리고 그 상황의 끝은 국가 부도였다.

‘국가 부도 사태까지는 안가지만···. IMF는 그에 못지않은 상처를 남기지.’

강우가 힐끗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여름 몇 개월만 기다려 달라는 강우의 말이 이제는 이해가 됐다.

‘이미 국내 증시도 요동치고 있고.’

일본에 있는 동기들 역시 한국경제의 이상 현상에 대해 계속해서 경고해주었었다. 1996년의 경제 호황을 넘어서며 한국경제는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아버지, 달러를 최대한 많이 모으고 있어야겠습니다.”

“그래, 정식아. 법인에 보유한 자금은 당분간 유동시키지 말고 가지고 있어라.”

“네, 아버지.”

김치공장 설립 건은 차근차근 진행 중이었다. 지난 여름방학 이후 5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었다.

‘사실 자금도 충분하고 공장용지도 확정됐고. 설비도 모두 준비가 끝난 상태지.’

단지 강우의 요구대로 자금의 집행을 미루고 있었다. 돈을 빌려준 기무라가 의아함을 표하기도 했지만, 할아버지를 믿기에 묵묵히 기다려주고 있었다.

‘재료 선정도 끝났고. 레시피도 완성 단계다.’

그사이 아버지는 중국으로 날아가 위진오와 진출공사의 진 사장도 만났다. 그리고 충분한 양의 고추를 확보해 놓으셨다. 위진오는 강우의 조언을 받아들여 현 주석의 라인에 선을 댔다. 그리고 당 내부에서 착실히 기반을 닦아가고 있었다.

‘중국 쪽 꽌시도 이상 없고.’

강우가 앞으로의 계획을 차분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IMF는 강우에게는 도약의 기회가 될 것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너무 많은 사람이 고통받는 시절이 오니까. 그리고 내 주변의 지인들도···.’

강우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이내 상념에서 벗어났다.

“잠시만요.”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강용이가 잠이 들어있었다. 강우가 잠든 강용이의 머리를 스윽 만져 주었다. 기억 속 강우 가족을 할퀴고 지나간 IMF의 기억이 떠올랐다. 잠시 우울해진 강우가 긴 숨을 뱉어냈다.

“하아···.”

미래의 기억 속 강우도 IMF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 하지만 수능을 마치고 성인이 되는 갈림길에 서 있는 시기였다. 하지만 강용이는 달랐다. 그야말로 IMF를 온몸으로 겪은 세대였다.

“으음···. 형아?”

강우의 한숨에 강용이가 뒤척였다. 강우가 이불 위로 손을 올려 강용이를 토닥여 주었다. 강용이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강용아, 이번에는 달라. IMF가 와도 우리 가족은 끄떡없을 거야. 형아가 꼭 그렇게 만들어 놓을게.’

달칵.

책상 옆의 서랍장을 열쇠로 열었다. 서랍장의 제일 안쪽을 살피자 한 개의 통장과 도장이 있었다. 바로 아버지가 강우에게 맡겼던 외화 통장이었다. 그리고 강우가 가족을 위해 수많은 유혹을 뿌리치고 악착같이 모은 바로 그 돈이었다.

스윽.

통장을 열자 그동안 쌓인 달러의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대략 육만 달러라···.’

아버지가 열심히 일해 받은 성과금들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보너스까지 고스란히 달러로 잠들어 있었다. 모두 강우가 고집을 부려 만들어 놓은 액수였다. 특히 보너스를 두고는 어머니가 살짝 서운해하실 정도였다. 적지도 크지도 않은 금액이었다. 하지만 강우 가족을 위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금액이었다.

‘법인에 묶인 자금은 아무래도 마음대로 유용할 수 없으니까 말이지.’

떠올려 보면 미래의 기억 속 아버지는 지금쯤 돈을 잘 버셨었다. 다만 그 금액을 대부분 일가친척을 위해 쓰셨다.

‘주변에서 도와달라는 가족들이 있으면 잘도 도와주시는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IMF에 커다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 돈만 있었어도 강우 가족이 막다른 길에 다다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일들은 강우가 어른이 되고 나서 아버지와 항상 논쟁을 벌이던 부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우리 가족의 행복이 먼저야. 우리가 중심을 잡아야 남도 돌아볼 수 있는 거야.’

강우가 통장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계셨다. 강우가 거실로 다가가 탁자 위에 통장을 내려놓았다.

탁.

할아버지가 궁금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아버지는 익숙한 통장의 모습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강우가 통장을 펼쳤다.

“제가 그동안 모은 달러 통장이에요. 한번 보세요.”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확인해 주세요. 저는 알고 있는 겁니다.”

“그래.”

할아버지가 통장을 보고는 살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고등학생인 강우가 들고 오기에는 큰 액수가 담긴 통장이었다.

“강우야, 이걸 어떻게···.”

“아버지 성과금이랑 보너스를 그동안 모은 거예요.”

할아버지가 탄성을 뱉어냈다. 그리고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강우에 대한 강한 신뢰가 담긴 아버지의 얼굴에 긴 숨을 뱉어냈다.

“그래, 잘했다. 부자간에 믿음이 있으니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겠어.”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떠올랐다. 아직 회복하지 못한 큰아버지와의 관계를 떠올린 탓일 것이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손을 꽉 잡았다.

“아버지, 다 잘될 겁니다.”

“그래···. 고맙구나···.”

할아버지의 눈가가 살짝 붉어졌다. 그 모습을 보는 강우의 가슴이 찌릿해 왔다. 미래의 기억과는 달리 IMF는 강우 가족을 더욱더 단단하게 묶어줄 계기가 될 것 같았다.

‘그래, 지금처럼 똘똘 뭉쳐서 헤쳐 나가보는 거야.’

그러기 위해 강우는 지금껏 노력해왔다. 중국의 꽌시를 만들고 아버지와 마사토를 도왔다. 거기에 할아버지라는 든든한 지원군도 나타났다. 강우가 알던 절망적인 미래는 이제 없었다.

“이렇게 다들 대비를 하는데 이 할아비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할아버지가 불편한 몸을 일으켰다. 강우와 아버지가 화들짝 놀라 부축을 했다.

“아니다. 이 정도는 이제 나도 움직일 수 있어.”

할아버지가 방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는 한 손에 통장 꾸러미를 들고나오셨다. 두툼한 꾸러미에는 여러 개의 통장이 있었다.

“아범이랑 강우가 한번 보거라.”

아버지와 강우가 통장을 나누어 확인했다. 아버지가 확인한 통장은 법인대표인 할아버지의 월급 통장이었다. 그곳에는 쓰지 않은 월급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아버지의 표정이 알 수 없게 변했다.

“할아버지, 이건 무슨 돈이에요?”

강우가 확인한 통장에는 딱 천만 원이 있었다. 입금된 날짜는 지난 겨울이었다.

“그건, 임대아파트 보증금 돌려받은 통장이다.”

“아···.”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네 집으로 들어오시면서 할아버지는 임대아파트를 반환했다.

“사실 말이다. 그 돈은 혹시 몰라서 가지고 있었지···.”

할아버지의 얼굴에 그늘이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가 말없이 통장을 내려놓았다.

“네···. 잘하셨어요.”

강우도 할아버지의 의중을 알 수 있었다. 그동안 강우 가족은 부족함이 없었다. 아버지는 승승장구했고, 회사에서의 입지도 탄탄했다. 고액의 연봉을 받게 된 아버지 덕분에 강우 가족은 풍족하게 지내왔다.

“미안하다. 하지만 이해해다오. 나에게 자식은 정식이 너뿐만이 아니니까···.”

할아버지의 목소리에는 불안함과 미안함이 가득했다. 할아버지는 다른 자식들을 위해 조용히 돈을 모으고 계셨다. 하지만 아버지의 표정은 오히려 후련해 보였다. 아버지는 그것이 오히려 반가웠다.

‘아버지는 그런 분이시니까.’

할아버지가 통장을 모두 모았다. 그리고는 강우를 향해 내밀었다.

“이제 이건 강우 너에게 맡기마.”

“네?”

할아버지의 뜻을 알고 있는 강우가 놀란 표정이 되었다. 할아버지가 강우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지난번에 내가 너한테 말한 것 기억하느냐? 네가 이 집안의 기둥이 되어달라던 이야기 말이다.”

“네, 기억해요.”

할아버지가 짧게 숨을 뱉어냈다. 강우와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과 어딘지 모를 후련함이 담겨 있었다.

“이 할아비가 그렇게 말을 해놓고도 내심 불안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혹시 모를 돈을 모아놓은 걸 보니 말이다. 미안하구나.”

아버지가 깜짝 놀라 몸을 들썩였다.

“아버지, 아닙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강우가 묵묵히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어디 있겠는가.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이란 이런 것이었다. 미우나 고우나 보듬고 품고 싶은 그런 존재 말이다.

“이제 이걸 강우 네게 맡기마.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강우, 네 판단에 모든 걸 맡기겠다는 말이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강우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의 얼굴에 옅은 안도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우리 장손 든든하구나.”

강우가 통장을 소중히 챙겼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연금으로도 대출을 받을 수 있을 게다. 큰돈은 아니지만, 그 돈도 조만간 전해주마.”

“아니에요. 그 돈은 할아버지 쓰세요.”

할아버지가 받는 연금은 그리 크지 않았다. 독립운동가의 연금치고는 초라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못 받는 독립운동가나 후손들도 많았다.

“아니야. 내가 요즘 부족한 게 뭐가 있겠니?”

“네···.”

사실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할아버지를 극진히 보살폈다. 퇴원했을 때보다 살집도 오르시고 얼굴에는 혈색이 가득했다. 강우의 어설픈 재롱과 강용이의 애간장 녹이는 재롱도 한몫했다. 할아버지에게 지금은 제2의 전성기나 다름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강우의 방문이 벌컥 열리며 강용이가 나왔다.

지이잉. 지이잉.

졸음에 취한 강용이의 손에는 강우의 삐삐가 들려있었다. 강용이가 눈을 비비며 하품을 했다.

“형아, 삐삐 왔어.”

강용이가 거실로 다가와 삐삐를 건네주었다. 강우가 힐끗 액정을 확인했다.

[1004 8282828282]

숫자만으로도 다급해 보이는 이재원의 호출이었다. 강우가 무선 전화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통화 좀 하고 올게요.”

방 안으로 들어간 강우가 이재원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

몇 번의 신호가 가고 덜컥 전화가 연결됐다. 그리고는 경악에 찬 이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박강우! 너 어떻게 알았어?-

강우가 짧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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