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402)
  • 딱 몇 개월만 기다려주세요.

    다음 날,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강우와 김춘배의 오디션 이야기 때문이었다. 특히 남재식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 내가 있었어야 했는데.”

    신원주가 피식 웃었다.

    “크···. 그 장면을 네가 못 본 게 아쉽다. 난 처음에 사기꾼인 줄 알았다니까.”

    남재식이 크~ 하는 표정을 지으며 강우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런데 강우 너는 노래도 잘해? 도대체 못 하는 게 뭔데?”

    “나도 그걸 모르겠다니까.”

    강우의 말에 신원주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남재식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다.

    “강우가 대단하긴 하지.”

    피식 웃은 강우가 김춘배를 바라보았다.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김춘배는 활기가 가득했다.

    ‘저러다 날아가겠네. 날아가겠어.’

    결과적으로 캐스팅의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강우는 붙었고, 김춘배도 붙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일은 달랐다. 강우는 정중히 합격을 거절했다. 애초에 연예인이 될 마음은 없었으니까. 반면 김춘배는 신이 났다.

    “그래, 김 매니저님이 내가 꼭 대배우가 될 거라고 했다니까.”

    김춘배의 말에 반 친구들이 ‘오오!’ 하는 탄성을 뱉어냈다.

    “춘배야, 연예인 몇 명 봤어? 싸인 좀 받아줘.”

    “너 언제 데뷔해?”

    친구들의 질문 공세를 받는 김춘배의 콧대가 하늘 높이 올라갔다. 역시 관심받는 것을 좋아하기는 하나 보다.

    “데뷔는 아직 멀었지. 한동안은 배우 지망생 신분이라고. 그리고 사인은 내가 다 받아 줄게. 원하는 연예인 있으면 명단 적어놔!”

    김춘배의 호언장담에 반 친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김춘배가 팔짱을 끼며 씨익 웃었다. 김춘배는 그야말로 일약 스타가 되어 있었다.

    물론 학교 안에서만 말이다.

    ‘천생 관심받고 살 팔자인가?’

    김춘배는 연극영화과를 목표로 잡았다. 요즘은 연기학원을 열심히 다니고 있었다. 김춘배의 입에서 무용담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오디션을 본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 물론 강우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강우가 절대 입 밖에 내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강우야, 이번에 투고할 기사 어떤지 한번 봐볼래?”

    남재식이 가방에서 원고 뭉치를 꺼냈다. 강우가 원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남재식이 이번에 공략한 게임은 국내 게임 개발사에서 출시한 온라인 게임이었다.

    ‘그렇지 지금쯤 이 게임이 서서히 화제가 되고 있었지.’

    강우가 기사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온라인 게임이 앞으로의 게임 산업을 주도할 거라는 논조의 기사였다. 확실히 남재식은 감이 있었다.

    “좋네. 나도 네 생각이랑 같아. 앞으로 온라인 게임이 게임 산업의 주를 이루겠지.”

    “그렇지? 다들 아직은 인터넷이 불편해서 힘들 거라고 하는데. 난 다르게 생각하거든.”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조만간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의 인터넷 속도를 자랑하는 나라가 되니까.

    “기사 잘 썼네. 역시 넌 재능이 있어.”

    “고맙다.”

    딩동. 딩동.

    보충학습이 끝나는 종소리가 울렸다. 강우가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원주와 남재식 그리고 김춘배가 허둥지둥 가방을 챙겼다.

    “야야! 강우야, 같이 가!”

    친구들이 강우를 따라 교실 밖을 벗어났다. 밖으로 나온 강우와 친구들은 분식집에 들러 간단히 떡볶이를 먹었다. 물론 고맙다며 김춘배가 한턱을 냈다.

    “그럼 먼저 간다.”

    강우가 휴지로 입을 스윽 닦으며 일어났다. 남재식이 남은 떡볶이를 허겁지겁 입에 넣더니 강우를 따라 일어났다.

    “같이 가.”

    강우와 남재식이 집으로 향했다.

    * * *

    덜컥.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강우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현관을 내려다본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보다 한 개가 많은 구두가 놓여있었다. 강우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마사토가 있었다.

    마사토가 강우를 보며 반가워했다.

    “오? 강우야, 학교 갔다 왔구나.”

    “마사토 아저씨? 안녕하세요. 어떻게 오셨어요?”

    강우가 꾸벅 인사를 했다. 마사토의 옆쪽으로는 캐리어가 놓여있었다.

    “할아버지 병문안 왔지. 김치공장 건도 있고.”

    그때,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방에서 나왔다. 양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었다. 마사토와 공항에서 바로 집에 오신 듯했다.

    “강우 왔구나.”

    아버지가 강우를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마사토를 향해 말했다.

    “마사토, 들어오라고 그러셨어.”

    “알겠어.”

    마사토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어딘지 모르게 긴장한 모습이었다.

    똑똑.

    “어르신, 마사토입니다.”

    “들어오게.”

    할아버지의 유창한 일본어에 마사토가 심호흡했다. 덜컥 방문이 열리고 깔끔하게 차려입은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는 등받이 의자에 앉아 계셨다.

    “들어가겠습니다.”

    아버지와 마사토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이 금세 가득 찼다. 할아버지의 방문이 닫혔다. 안방 문이 조금 열리고 강용이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마사토 아저씨는?”

    “응, 들어가셨어.”

    그런 강용이의 뒤에서 어머니가 슬쩍 나오셨다. 어머니 역시 잘 차려입고 계셨다. 어머니는 곧장 주방으로 가셨다. 그리고 안쪽으로 들여보낼 간단한 차와 과일을 준비했다.

    “엄마, 마사토 아저씨 언제 오셨어요?”

    강우가 다가가 찻잔을 준비하며 물었다. 어머니가 과일을 열심히 깎으며 말했다.

    “조금 전에, 공항에서 곧바로 왔다고 하더라.”

    “네···.”

    어머니가 과일을 접시에 담기 시작했다. 강용이가 과일을 손으로 집어 먹으려 했다. 어머니가 강용이의 손을 찰싹하고 쳤다.

    “아야!”

    “강용아, 포크로 먹어야지. 나쁜 병균 들어가요.”

    “응, 엄마.”

    강용이가 포크를 가지러 갔다. 강우가 주전자에 뜨거운 물을 올렸다.

    “커피로 할까요?”

    “아니, 할아버지 좋아하는 우롱차로 하자.”

    “네.”

    이윽고 안으로 들일 차와 과일이 모두 준비됐다. 강우가 빠르게 쟁반을 들었다.

    “제가 안으로 가지고 갈게요.”

    “그럴래?”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방문으로 다가가 노크했다.

    “할아버지, 간단한 다과를 좀 준비했습니다.”

    강우의 입에서 일본어가 줄줄 흘러나왔다. 안에서 할아버지의 답이 들려왔다.

    “그래, 가지고 들어오거라.”

    강우가 조심히 문을 열었다. 할아버지의 앞쪽으로 두 명의 남자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마사토는 평온한 표정이었고, 아버지는 곤욕스러워 보였다.

    달칵. 달칵.

    한쪽에 있는 작은 상을 펼치고 강우가 쟁반을 내려놓았다.

    “그럼 저는 나가 있을게요.”

    “그러려무나.”

    강우가 마사토에게 슬쩍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거실에 앉았다. 강용이가 대번에 달려왔다.

    “나 심심해. 만화 볼래.”

    강용이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비디오로 다가가 테이프를 넣었다. 곧이어 다섯 명의 액션 히어로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강용이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는 히어로들의 동작을 따라 했다.

    “합! 합!”

    강용이는 요새 태권도를 다니고 있었다. 건강을 위해서 운동도 해야 한다고 해서였다. 그새 실력이 늘었는지 주먹을 내지르고 발차기를 하는 모양새가 제법이었다.

    “잘한다. 내 동생.”

    강우가 흐뭇하게 강용이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방 안쪽에서 영어와 일본어가 번갈아 가며 들려왔다. 어머니는 왜인지 모르지만, 초조한 표정으로 주방에 서 있었다.

    “강용아, 잠깐만 방에 들어가 있어 봐.”

    “엉, 형아.”

    강용이가 비디오를 끄더니 강우와 함께 쓰는 방으로 들어갔다.

    “투자금은···.”

    거실에 정적이 찾아왔다. 강우가 방 안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안쪽의 대화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김치공장과 법인 그리고 투자금에 관한 이야기였다.

    강우의 눈이 빛을 냈다.

    ‘드디어···.’

    자세한 이야기는 알 수 없었지만, 대략적인 단어들은 들렸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어르신, 건강하셔야 합니다.”

    마사토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덜컥.

    문이 열리고 아버지와 마사토가 밖으로 나왔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사토가 강우를 보더니,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야, 이야기 들었다. 네가 정말 대단한 일을 했구나.”

    마사토가 강우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정말인지 안도했다는 표정의 마사토였다. 강우가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일찍 발견해서 천만다행이었죠.”

    “그래, 일본에 있는 어르신들도 걱정이 많았다.”

    “다들 건강하시죠?”

    “그럼, 다들 정정하시지. 할아버지 건강해지시면 모시고 일본 또 와라.”

    “네, 알겠어요.”

    그 말을 끝으로 아버지와 마사토가 집을 나설 채비를 했다. 어머니가 화들짝 놀라며 다가왔다.

    “여보, 마사토 씨 식사라도 대접하고 가요.”

    강우가 마사토에게 일어로 통역을 해주었다. 마사토가 군침이 당기는지 눈을 살짝 떴다. 하지만 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나 오늘 일이 많아서 늦을 거 같아. 다들 저녁들 먹고 있어.”

    아버지가 씨익 웃으며 집 밖으로 나갔다. 마사토가 못내 아쉬운 듯 집안을 돌아보았다.

    “며칠 있다가 가니까 꼭 들르겠습니다.”

    마사토의 말을 강우가 어머니에게 전달했다. 어머니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네, 겉절이 또 담가놓을게요.”

    통역을 들은 마사토가 기대감에 찬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마사토가 강우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최대 주주님.”

    “네?”

    마사토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마사토의 장난에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방 안에서 할아버지가 강우를 불렀다.

    “강우야.”

    “네, 할아버지.”

    강우가 기다렸다는 듯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만요. 제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혀 드릴게요.”

    강우가 살뜰히 할아버지를 챙겼다. 할아버지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지의 옷을 갈아입혀 드리고 강우가 그 앞에 앉았다.

    “강우야, 드디어 김치공장 사업의 윤곽이 나왔구나.”

    “정말요?”

    강우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을 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기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일단 공장의 위치는 이바라키현의 남동쪽에 짓기로 했다. 더 정확한 장소는 이제 찾아봐야겠지.”

    “이바라키현이요?”

    강우가 곰곰이 생각했다. 이바라키현의 남동쪽이라면 도쿄에서도 많이 멀지는 않은 곳이었다. 그리고 공장들이 많이 있는 지역이기도 했다. 도쿄 외곽 중에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래, 기무라가 그곳에 땅을 조금 가지고 있다더구나. 그중 한 곳에 공장을 세우기로 했다.”

    “기무라 어르신의 땅에요?”

    “그래, 잘됐지.”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제 거품이 꺼진 이후 폭락했다고는 하지만, 일본의 땅값과 건축비용은 한국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잘됐네요. 기무라 어르신 진짜 대단한 분이신가 봐요.”

    “경제 불황 이후 땅값이 폭락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무시하지 못할 재력가지.”

    강우가 작게 감탄성을 뱉어냈다.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기무라 어르신한테 빌리는 돈은 얼마나 될까요?”

    “350만 달러다.”

    강우가 살짝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350만 달러. 지금 환율로 환산하면 대략 30억 정도네.’

    미래의 기억이 있다고는 하지만 큰 사업은 해보지 않은 강우였다. 미래의 강우는 평범한 회사원이었으니까. 물론 대기업이 벌이는 사업 규모에 비하면 푼돈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강우 가족에게는 엄청난 종잣돈이었다.

    ‘이게 우리 사업의 밑천이 되는 거지. 점점 크게 굴려 갈 종잣돈.’

    반면 할아버지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이미 예전에 광산업이라는 큰 사업을 하셨던 할아버지였다.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 30억은 작지도 크지도 않은 돈임을 알았다.

    “우리 손자가 놀랐구나? 그리 놀라지 말거라. 공장을 하나 세우면, 그 안에 들어가는 시설이며 설비며 원자재 확보까지 생각하면 그리 큰돈도 아니야.”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할아버지, 그 돈은 법인으로 입금이 되겠죠?”

    “그래, 일단 투자형식으로 받기로 했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큰돈을 개인 간 빌리듯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한국과 일본 모두 외화관리법이 그냥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정당한 절차를 걸쳐 모두 달러로 입금이 될 것이다.

    ‘그렇게 받고 나면 그 돈을 어떻게 운용하는지는 온전히 우리 몫이지.’

    강우가 최대 주주인 만큼 의사결정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강우가 할아버지를 보며 눈을 빛냈다.

    “할아버지, 지난번에 말씀드린 제 부탁은 꼭 들어주셔야 해요.”

    “그래, 걱정하지 말거라. 어차피 공장용지 확정하고 공장을 올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게다.”

    “후생성의 허가 절차도 있겠죠?”

    “그렇지.”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가 마사토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런데 마사토 아저씨, 회사 일은 어떡하고 오신 거예요?”

    “일단 휴가를 냈다고 하더구나. 아무래도 일본 쪽에서도 한국에 사람을 한 명 보낼 필요가 있겠지.”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무를 함께 풀어갈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마사토는 이제 곧 임원 승진을 앞둔 중요한 시기였다. 한국에만 붙잡아 둘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였다.

    “그런데 강우야.”

    “네?”

    강우가 상념에서 벗어났다.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확인하겠다는 듯 물었다.

    “이번에 들어오는 자금은 네 말처럼 집행을 최대한 늦출 계획이다. 그런데 집행을 늦게 하려면 기무라를 설득할 명분이 있어야 할 텐데 말이다.”

    강우가 눈을 빛냈다. 그 명분은 오래 갈 것도 없었다. 이제 곧 서막이 열릴 테니까 말이다.

    “할아버지, 딱 몇 개월만 기다려주세요. 그러면 제가 왜 자금 집행을 미루는지 알려드릴게요.”

    할아버지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할아비는 강우 너를 믿으마.”

    신뢰가 가득 담긴 눈빛에 강우가 씨익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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