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402)
  •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끼이익.

    아파트 현관문이 낡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강우와 아버지가 들어섰다. 강우와 아버지의 손에는 커다란 캐리어가 들려있었다. 두 사람이 온 곳은 할아버지의 임대 아파트였다.

    “음···.”

    방 안 가득 차 있던 짙은 외로움의 냄새에 아버지가 짧게 숨을 뱉어냈다.

    “강우야, 일단 할아버지 옷하고 자주 쓰시는 물건부터 챙기자.”

    “네, 아버지.”

    할아버지의 긴 병원 생활이 내일 끝이었다. 강우와 강용의 여름 방학이 훌쩍 지나가 버릴 정도의 긴 시간이었다. 퇴원 후 할아버지는 강우 가족의 집에서 머물기로 하셨다. 또 이곳에서 혼자 지내신다며 고집을 부렸지만, 의사의 경고와 아버지의 단호함에 백기를 드셨다.

    부스럭. 부스럭.

    강우가 할아버지의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작고 낡은 장식장 위로는 할아버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강우의 시선이 그중 작은 액자로 향했다. 그곳에는 할아버지와 돌아가신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와 형제들이 있었다.

    ‘어렸을 때 모습들이시네.’

    할아버지는 지금의 아버지 정도 나이였고, 자식들은 모두 강우보다는 어린 나이대로 보였다. 다른 곳에는 먼지가 제법 쌓여있었지만, 액자는 깨끗했다. 할아버지의 손때가 묻어 나무 액자의 한쪽이 누렇게 변해있었다.

    ‘이것도 챙기자.’

    강우가 액자를 조심히 담았다. 그리고는 다른 소지품 이것저것을 정리했다. 힐끗 아버지를 보니 옷장을 정리 중이었다.

    툭.

    할아버지의 옷에서 담뱃갑이 떨어졌다. 아버지가 물끄러미 담배를 바라보더니 집었다. 그리고는 강우가 정리하던 캐리어에 담배를 넣으려 했다.

    “음···.”

    아버지가 액자를 확인하고는 짧게 침음성을 흘렸다. 액자를 집어 든 아버지가 한참이나 사진을 바라보았다. 강우가 물끄러미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표정에는 그늘이 있었다.

    탁.

    아버지가 작은 액자를 캐리어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담뱃갑을 툭툭 쳤다. 하얀 담배 한 개비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잠시 망설이던 아버지가 담배를 꺼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육각형 성냥갑을 챙겨 베란다로 향했다.

    화악.

    불이 붙는 소리가 들렸다. 힐끗 바라보니 아버지가 망설이고 있었다. 순간 창가로 불어든 여름 바람에 성냥이 훅하고 불을 잃었다.

    “하아······.”

    화악.

    한 번 더 성냥이 켜지고 담배의 끝부분이 붉게 물들었다.

    “스읍···.”

    깊게 담배를 한 모금 마신 아버지가 살짝 쿨럭이더니 연기를 내뿜어냈다. 아버지는 금연한 지 꽤 오래된 상태였다. 아버지가 배란다 창가에 기대어 하염없이 밖을 바라보았다. 도시의 불빛과 어디론가 향하는 차량의 불빛에 아버지가 잠시 감상에 젖었다.

    ‘.....’

    강우는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이번 일을 겪으며 아버지는 큰 마음고생을 하셨다. 할아버지와 강용이를 방치했다는 죄책감이었다. 그리고 연락해도 찾아오지 않는 형제들에 대한 애증이었다. 아버지는 내심 아닌척했지만, 강우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강우야···.”

    아버지의 입에서 남은 담배 연기가 흘러나왔다. 그리고는 베란다의 창문 밖으로 아스라이 흩어졌다. 강우가 움찔하더니 답했다.

    “네, 아버지.”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고맙다···.”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진심과 안도감이 담겨있었다. 강우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거죠.”

    아버지가 담배를 한 모금 더 빨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오랜 금연 탓에 담배가 입에 영 맞지 않았나 보다.

    치이익.

    담배를 재떨이에 끈 아버지가 몸을 돌렸다. 베란다로 새어 들어오는 시원한 여름 바람에 옅은 담배 냄새가 묻어났다.

    “할아버지도 강용이도 모두 네가 구했다. 아버지라고 고맙다는 말 못 하는 거 아니다. 그게 아들이라고 해도 말이야.”

    “네.”

    강우와 아버지가 서로를 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가 안으로 들어와 강우의 앞쪽으로 앉았다.

    “이제 할아버지 집에 모시고 오면, 네가 신경 좀 써드려라. 아빠는 당분간 너무 바쁠 거 같아.”

    “네, 그럴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할아버지의 수술로 김치공장을 세우는 일은 마사토 혼자 떠맡고 있었다. 하지만 마사토도 직장에 매인 몸이었다. 혼자서는 한계가 있었고, 이제는 아버지도 나서야 할 때였다.

    “예산안부터 빨리 정리하셔야죠.”

    “그래야지.”

    “급하게 생각하실 거 없어요. 차근차근 하나씩 풀어가시면 돼요.”

    “그래, 걱정하지 마라.”

    아버지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아직 청소년티가 물씬 나는 강우였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강우는 든든한 조력자이자 상담자였다.

    “집은 저랑 엄마가 잘 돌볼 테니 아버지는 이제 일에 집중하세요.”

    “공부에 지장이 되지는 않겠니?”

    강우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아들의 자신만만한 얼굴에 아버지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강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장남.”

    “네, 아버지.”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옷장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지나가는 투로 툭 말을 했다.

    “아···. 그리고 아버지 면허 시험 본다.”

    “진짜요?”

    강우가 놀란 눈이 되었다. 별거 아니었지만, 강우의 기억 속에서는 평생을 따지 않던 운전면허였다.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빨리 면허 따서 회사 차 가지고 다녀야지. 이제 할아버지도 병원에 모시고 다녀야 하니까.”

    “네, 잘 생각하셨어요.”

    아버지가 입꼬리를 실룩이셨다. 하지만 이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짐 마저 싸자.”

    “네.”

    강우와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짐을 계속해서 쌌다. 한층 가까워진 부자의 관계만큼 수많은 대화가 오고 갔다.

    * * *

    집 안이 구수한 냄새로 가득 찼다. 어머니는 주방에서 열심히 요리하고 계셨다. 수술 후 당분간 식사 조절이 필요한 할아버지였다. 어머니는 특제 전복죽을 준비 중이었다.

    덜컥.

    문이 열리고 이재원이 들어섰다.

    “어머니! 할아버지 모시고 왔습니다.”

    “그래, 재원아. 고생했다.”

    이재원이 집안 가득한 향기에 코를 벌렁거렸다.

    “와? 이거 무슨 냄새에요? 끝내주는데요?”

    “그래? 전복죽 끓였어.”

    “오! 기대됩니다.”

    어머니가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강우야, 할아버지 모시게 나와.”

    “어.”

    강우가 이재원을 따라 현관 밖으로 나갔다. 중형차 한 대가 서 있었다. 회사에 다니면서 바꾼 이재원의 차였다.

    “아버지, 조심히 내리세요.”

    아버지는 이미 할아버지를 부축하고 있었다. 강우가 빠르게 다가가 반대편을 부축했다.

    “할아버지.”

    “강우야···.”

    할아버지는 약간 수척해져 계셨다. 하지만 건강은 어느 때보다 좋으셨다. 식단조절로 인해 살이 빠지신 것뿐이었다.

    부우웅.

    이재원이 차에 올라타 주차장에 주차했다. 그리고는 트렁크에서 할아버지의 짐을 꺼냈다.

    “들어가자꾸나.”

    할아버지가 계단을 오르셨다. 열린 현관문 사이로 강용이가 서 있었다.

    “할아버지!”

    “강용아!”

    할아버지가 강용이를 보며 눈물을 글썽이셨다. 병원에 입원한 내내 만나지 못했던 손자였다. 할아버지가 강용이를 안았다.

    “우리 강아지 이제 안 아픈 게야?”

    “응, 할아버지는요?”

    “할아비도 이제 안 아파. 건강해.”

    “다행이에요!”

    강우와 아버지가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봤다. 이재원은 코를 훌쩍이며 눈시울을 붉혔다. 강우가 그런 이재원을 툭 쳤다.

    “아니 왜 형이 울고 그래요?”

    “안 울거든?”

    할아버지가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가 빠르게 나와 할아버지를 반겼다.

    “아버님, 오셨어요.”

    “어멈아, 미안하구나.”

    할아버지는 며느리의 신세를 진다며 계속 미안해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전혀 그런 마음이 없었다. 오히려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님, 자꾸 그러시면 제가 서운해요. 이제 아버님은 제가 모실게요.”

    “그래, 고맙다···.”

    할아버지가 감동한 표정이 되었다. 잠시 후, 온 가족이 둘러앉았다. 온 가족에는 당연히 이재원도 포함이었다. 강우 가족의 비공식적 큰아들. 그것이 바로 이재원이었다.

    “뜨거워요. 다들 조심하세요.”

    어머니가 커다란 쟁반을 들고 오셨다. 그 위에는 특제 전복죽이 담긴 그릇들이 가득했다. 가족의 숫자에 맞게 놓인 여섯 개의 그릇이 하나둘씩 밥상으로 착륙했다.

    “어멈아, 수고했다.”

    “네, 아버님.”

    어머니가 자리에 앉으셨다. 커다란 교자상이 가족의 온기로 가득 찼다. 할아버지가 수저를 드셨다. 그리고는 감회에 젖은 표정으로 가족을 쓰윽 둘러보셨다.

    “먹자꾸나.”

    할아버지의 말과 동시에 식사가 시작됐다. 어머니의 전복죽은 늘 그렇듯 끝내주게 맛있었다.

    * * *

    “어머니, 그럼 가보겠습니다.”

    이재원이 조용한 목소리로 꾸벅 인사했다. 어머니가 현관으로 배웅을 나와 있었다.

    “그래, 재원아. 내일 출근인데 얼른 들어가라.”

    “네, 어머니.”

    달칵.

    강우가 방에서 옷을 챙겨입고 나왔다. 어머니가 고개를 갸웃했다.

    “강우는 어디가?”

    “엄마, 형 배웅 좀 하고 올게요.”

    “응. 알겠어.”

    강우가 신발을 신으며 이재원을 쓱 밀었다.

    “나가요.”

    “어어···.”

    밖으로 나오자 강우네 집의 배란다 창가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강우의 어깨를 툭 쳤다.

    “진짜 큰일 치렀다. 맘고생 많이 했지?”

    “형 덕분에 잘 넘겼죠.”

    이재원이 씨익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내가 한 게 있나. 네가 사전에 알고 병원 빨리 가지 않았으면 할아버님도 강용이도 큰일 날뻔한 거지.”

    “형도 어디 아프다 싶으면 버티지 말고 병원부터 가요.”

    “알겠어. 잔소리는.”

    이재원이 픽하고 웃으며 운전석 쪽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 시동이 걸리고 차가 주차장에서 스르륵 빠져나왔다.

    “강우야, 내일부터 보충수업이지?”

    “네.”

    “개학도 며칠 안 남았는데 그냥 쉬지.”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개학이 어느새 다가오고 있었다.

    “담임이 꼭 나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이재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강우가 이재원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재원이 형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 고생을 엄청 했겠지.’

    할아버지도 강용이도 최고의 시설에서 빠르게 진료를 받았다. 그것은 모두 이재원 덕분이었다. 강우가 물끄러미 이재원을 바라보았다.

    “요즘 회사는 좀 어때요?”

    “회사? 나야 뭐···. 잘 다니지. 가끔 내가 사원인지 사장인지 헷갈릴 때가 있기는 하지만.”

    이재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재원이 이철금 회장의 숨겨놓은 아들이라는 소문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럴 바에는 아예 직급을 올려달라고 해요.”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그럴 생각이다. 이게 무슨 바닥 체험이냐? 우리 팀 과장은 나만 보면 손바닥이 남아나지를 않고. 하아···. 말을 말자.”

    이재원이 한숨을 푹 쉬었다. 강우가 피식 웃었다.

    “그래도, 회장님한테 제법 신뢰를 얻기는 했나 봐요? 비서실장님까지 턱턱 부르고.”

    “저번에 삼우건설 인수 포기한 거 있지 않냐? 그게 컸지. 우리가 인수 포기하고 그냥 모래성 무너지듯 우르르 무너지더라.”

    강우의 눈빛이 담담히 가라앉았다. 삼우 건설은 시작에 불과했다. 바로 몇 개월 후인 1997년부터는 심상치 않은 기운이 대한민국을 감쌀 것이다.

    ‘당장 관보철강이랑 기우자동차가 무너진다.’

    그것이 방아쇠였다. 두 대기업의 일을 시작으로 대한민국은 IMF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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