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402)
  • 형아, 빨리 가자. 나 급해.

    찻집에서의 회동은 늦은 저녁이 돼서야 끝났다. 강우가 할아버지를 모시고 찻집을 나섰다. 하루오와 기무라 그리고 동기들이 할아버지를 배웅 나왔다. 할아버지가 중절모를 스윽 쓰며 동기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끊어진 세월만큼 자주 연락들하고 보세나.”

    할아버지의 말에 동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암. 그래야지.”

    “재봉, 무엇보다 건강해야 하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따듯하기 그지없었다. 이윽고 연락을 받은 마사토의 승합차가 찻집 앞으로 나타났다.

    탁.

    문이 열리고 마사토가 내렸다. 하루오와 기무라 그리고 동기들의 시선이 마사토를 향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부드럽게 웃었다.

    “이쪽은 일본에 세워질 김치공장을 맡을 마사토라고 하네.”

    “안녕하십니까! 마사토입니다.”

    마사토가 우렁찬 목소리를 내며 허리를 꾸벅 숙였다. 잔뜩 기합이 들어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만큼 눈앞의 인물들이 대단한 분들이긴 하지.’

    특히 일본인인 마사토는 단번에 알아볼 만큼 말이다.

    “반갑네. 하루오라고 하네.”

    “나는 기무라라고 하네.”

    마사토가 할아버지의 동기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인사가 모두 끝나자 기무라가 마사토를 향해 말했다.

    “도쿄 스파이시에 다닌다고 들었네.”

    “네, 맞습니다.”

    “거기 창업주가 나랑 안면이 좀 있지. 이번에 전무 진급 준비 중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기무가라 마사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자네의 성과만 충분하다면, 다른 이유로 진급을 못 하는 일은 없을걸세.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일하게.”

    “가···. 감사합니다.”

    마사토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기무라는 사내 정치로 마사토가 떨어질 일은 없다고 말한 것이다. 즉 든든한 뒷배가 생긴 것이다.

    ‘아버지랑 같이 올린 성과가 적지 않으니 승진은 어렵지 않겠군.’

    강우가 남몰래 미소를 지었다.

    “강우야, 할아비 좀.”

    “아···. 네, 할아버지.”

    강우의 부축을 받은 할아버지가 승합차에 올라탔다. 강우가 마지막으로 꾸벅 인사를 했다.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어르신들 건강하세요.”

    하루오와 기무라 그리고 동기들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강우가 승합차에 올라탔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마사토가 운전석에 탔다.

    지이잉.

    창문이 내려가고 할아버지가 손을 흔들었다. 할아버지의 동기들도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다.

    “출발하게.”

    “네, 어르신.”

    승합차가 출발했다. 할아버지가 멀어져 가는 동기들을 슬쩍 돌아보셨다. 동기들은 떠나는 승합차를 한동안이나 응시하고 있었다.

    “으음···.”

    멀어져가는 동기들을 보며 할아버지가 긴 숨을 뱉어냈다. 후련함과 회한이 담겨있는 한숨이었다. 할아버지가 의자에 몸을 깊게 묻었다.

    “할아버지, 피곤하시죠?”

    강우가 의자를 살짝 뒤로 젖혔다. 할아버지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아니다. 나도 긴장을 했었는데 일이 생각보다 잘 풀려서 다행이구나.”

    “할아버지가 그동안 쌓아온 걸 보상받으시는 거죠.”

    할아버지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할아버지는 항상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독립운동으로 기울어진 가문과 자신의 자존심으로 무너져내린 현실이었다. 늘 자식들과 손자들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조금이나마 그 짐을 던 것이다.

    “그런데 강우야.”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네, 할아버지.”

    “한국에 법인을 세우자는 건 미리 생각하고 있던 게냐?”

    “네.”

    할아버지가 스윽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대견한 표정을 지었다.

    “고맙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인데 말이야. 그리고 회사 이름도 고맙구나.”

    “할아버지, 저는 할아버지의 못 이룬 꿈을 제 손으로 이루어 드리고 싶어요.”

    “강우야···.”

    할아버지의 얼굴이 크게 흔들렸다. 강우가 굳은 결심이 서린 표정을 지었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할아버지의 바람을 자신의 손으로 풀어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의 염원이기도 했다.

    “경영학과에 가기로 한 것도 모두 그 이유 때문이에요. 돈은 쉽게 얻어지지만, 사람은 얻기 힘드니까요. 저는 꼭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보란 듯이 큰 사업을 할 거예요.”

    “대견하구나···. 정말 대견해.”

    할아버지는 크게 감동한 모습이었다.

    “제가 성공할 때까지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약속이에요?”

    “허허···. 알겠다. 알겠어.”

    할아버지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강우도 씨익 웃었다.

    “할아버지, 기무라 어르신한테서 돈은 얼마나 빌리실 생각이에요?”

    “아범이랑 마사토가 필요 예산을 산정하겠지.”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공장의 입지와 안쪽의 설비까지 아직은 청사진에 불과한 단계였다. 예산을 산정하기 위해서 앞으로 아버지와 마사토가 매우 바빠질 것이었다.

    “제가 꼭 부탁드릴 게 있어요.”

    “부탁?”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무라 어르신한테 돈을 빌리면 그중 일부분을 제 손에 좀 맡겨 주실 수 있을까요?”

    할아버지가 강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미 아들에게 들어 강우가 달러를 모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 아범의 성과금 통장을 네가 관리하고 있다는 건 나도 들어 알고 있다. 달러를 모으고 있다지? 혹시 그 이유를 말해 줄 수 있겠니?”

    강우가 잠시 머뭇거렸다.

    ‘할아버지에게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적당히 내 생각을 전해야겠어.’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저는 한국의 경제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해요.”

    “그게 무슨 말이야?”

    강우가 눈을 빛냈다.

    “한국의 외환 부채가 엄청 많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기업들 대부분이 무분별한 차입으로 과잉 투자 중이에요. 경상수지도 적자가 예상된다고 해요. 할아버지, 남들은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이라고 하지만, 저는 큰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해요.”

    “음······.”

    할아버지가 침음성을 흘렸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기축통화인 달러를 보유하고 있어야 해요. 혹시 모를 사태가 온다면 그게 저희의 생명줄이 될 거예요.”

    “허···.”

    할아버지가 감탄성을 터트렸다. 뛰어난 인재라고 생각은 했지만, 강우의 안목이 이 정도일 줄 몰랐다. 그리고 사실 할아버지는 동기들과 만남을 통해 알고 있었다.

    ‘분명 동기들도 한국의 경제 상황에 대해 언급했었지.’

    외국에서 한국을 더욱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할아버지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할아버지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기무라가 한국으로 보내는 돈은 모두 달러일 거다. 그럼 그 돈의 집행을 잠시 기다려 달라는 말인 거니?”

    강우가 눈을 빛냈다. 굳이 자세히 말을 하지 않아도 할아버지는 강우의 말뜻을 단번에 이해한 것이다.

    “네, 자금의 집행이 최대한 느리면 느릴수록 좋을 거 같아요. 곧 거대한 파도가 밀려올 거예요.”

    “알겠다.”

    할아버지가 강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강우야, 이 할아버지가 네 앞길을 뚫어주마. 너는 실패 없이 훨훨 날아오르거라.”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자신을 향한 믿음과 사랑이 느껴졌다. 강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허허···. 녀석···.”

    할아버지가 민망함에 고개를 돌리셨다. 강우가 잠시 할아버지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일단 후생성의 허가 절차도 복잡하고. 공장용지의 선정부터 시간이 제법 걸릴 거야. 그러니 약간의 시간만 더 끌면 아주 좋겠지.’

    강우가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할아버지가 옅은 콧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할아버지가 주신 기회다. 반드시 붙잡고 말겠어.’

    * * *

    다음 날, 아침 일찍 강우와 가족이 여관을 나왔다. 여관 앞에는 마사토의 승합차가 있었다.

    “마사토, 기다리고 있었어?”

    “아니, 나도 방금 도착했어.”

    아버지와 마사토가 인사를 나누었다. 마사토가 이번에는 할아버지를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어르신, 푹 쉬셨습니까?”

    “그래, 잘 쉬고 있었다.”

    마사토의 얼굴이 살짝 상기됐다. 일본인에게 집으로의 초대는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더군다나 상대방의 가족 모두를 초대한 것이다. 마사토의 얼굴에는 얼핏 긴장감도 엿보였다.

    “어르신을 집에 초대할 생각 하니, 벌써 긴장이 됩니다. 제 아내도 잔뜩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냥 밥 한 끼 먹으러 가는 거지. 너무 부담 갖지 말거라.”

    “네, 어르신.”

    이윽고 강우 가족이 승합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신주쿠에서 멀지 않은 마사토의 집으로 향했다. 잘 정돈된 골목을 지나자 마사토의 집이 나타났다. 마사토의 집은 총 이 층으로 이루어진 단독주택이었다. 주변의 주택들보다는 약간 큰 규모였다.

    “여기입니다.”

    마사토가 차를 멈춰 세웠다. 강우 가족이 내리자 마사토가 주차공간에 승합차를 세웠다.

    딩동.

    마사토가 대문에 있는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덜컥 문이 열렸다.

    “들어가시죠.”

    작은 마당을 지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정갈한 분위기의 집 내부가 드러났다. 그리고 마사토의 부인과 딸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료코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미나입니다.”

    단아한 분위기의 단발머리를 한 마사토의 부인이었다. 옆쪽에 있는 마사토의 딸은 긴 생머리를 한 모습이었다. 강우가 한창 유행하던 일본 농구 만화의 여자 학생을 떠올렸다.

    ‘묘하게 분위기가 비슷하네.’

    할아버지가 중절모를 벗어서 가슴에 가져다 댔다.

    “나는 박재봉이라고 하네. 집에 초대해주어서 고맙네.”

    할아버지의 유창한 일어에 마사토의 부인과 딸이 살짝 놀랐다.

    “그럼 이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마사토의 부인이 강우 가족을 음식이 준비된 곳으로 안내했다. 마사토의 집안은 무척 정결했다.

    “와아~”

    강용이가 식탁을 보고는 눈을 빛냈다. 정결한 일본 가정식으로 준비된 식사였다. 어머니도 눈을 빛내며 음식들을 이리저리 살폈다. 한국과는 다른 일본 음식에 호기심이 많으셨다.

    “어르신, 앉으십시오.”

    마사토가 할아버지의 자리를 준비해주었다. 할아버지가 앉자 나머지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준비한 게 부족할까 걱정입니다. 부디 맛있게 드셔주세요.”

    마사토의 부인인 료코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닙니다. 오랜만에 먹는 일본 가정식이군요. 맛있게 먹겠습니다.”

    할아버지의 말을 시작으로 식사가 시작됐다.

    “어머? 음식이 너무 맛있어요.”

    어머니가 깜짝 놀라며 료코를 바라보았다. 강우가 빠르게 어머니의 말을 통역해주었다.

    “어머니가, 음식이 너무 맛있다고 하십니다.”

    “정말요? 다행입니다.”

    료코가 입을 가리며 싱긋 웃었다. 료코의 옆에 앉아있는 미나가 살짝 놀란 표정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달그락. 달그락.

    식사는 금세 끝났다. 어머니와 료코는 금세 친해졌다. 서로 부족한 영어와 몸짓으로 소통했다.

    “음식이 정말 맛있네요. 요리 잘하시네요.”

    “감사합니다.”

    어머니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료코가 환하게 웃으며 연신 고맙다 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마사토는 자리를 옮겨 거실에 앉았다. 어제 있었던 일과 앞으로의 일을 심각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형아아!”

    강용이가 강우를 향해 달려왔다. 강용이의 얼굴에는 나 심심해라고 쓰여있었다. 어린 강용에게 지금의 상황은 재미가 없을 만했다.

    “응, 강용아.”

    “형아, 나 선물 사준다고 했잖아. 빨리 나가자.”

    “그럴까?”

    강용이는 일본 여행 내내 시무룩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강우까지 온통 바쁜 하루를 보냈으니 말이다. 어머니와 둘이 관광을 나가기에는 어려움이 많았으니 여관방에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강우가 거실로 나갔다. 마사토와 열변을 토해내시던 아버지가 강우를 스르륵 바라보았다.

    “그래, 강우야. 무슨 일이니?”

    강우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얼굴에는 대견함이 가득했다. 할아버지를 모시고 가 강우가 해낸 것에 뿌듯할 수밖에 없었다.

    “강용이 데리고 밖에 좀 나갔다가 올게요.”

    “밖에?”

    강용이가 아버지를 향해 쪼르르 달려왔다.

    “아빠, 나 형아랑 장난감 사러 가고 싶어요.”

    “장난감? 그래. 갔다 와.”

    아버지가 지갑을 꺼내셨다. 그리고는 강우에게 돈을 한 뭉텅이 주셨다.

    “가서, 강용이 사고 싶은 거 다 사줘. 그리고 강우 너도 사고 싶은 거 사.”

    “아싸! 아빠 짱.”

    강용이 폴짝 뛰며 아버지의 돈을 받아냈다. 그리고는 강우를 향해 내밀었다.

    “형아, 빨리 가자. 나 급해.”

    “하하. 급해?”

    “응.”

    강우가 강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모습을 보던 마사토의 딸 미나가 슬며시 아버지 마사토에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강우 상과 강용 군의 쇼핑을 좀 도와줘도 될까요?”

    “미나가?”

    마사토가 강우를 바라보았다. 미나도 강우를 보며 싱긋 웃었다.

    “괜찮을까요?”

    “아···. 그게 고맙지만, 제가 일본어도 할 줄 알아서요. 동생이랑 둘이면 충분합니다.”

    미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키하바라까지 가는 길은 멀어요. 외국인들에게 불편을 겪게 할 수는 없어요.”

    미나의 굳은 결심에 마사토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강우를 향해 머리를 긁적였다.

    “강우야, 미나가 안내를 꼭 해주고 싶다는데 같이 갔다 올 수 있을까?”

    “네, 알겠습니다.”

    강우가 강용이를 보며 물었다.

    “강용아, 저 누나가 우리 가는데 안내해준다는데 같이 가도 되지?”

    “어? 진짜? 예쁜 누나 고맙습니다!”

    강용이가 눈을 빛내며 미나에게 꾸벅 인사했다. 말은 못 알아듣지만, 미나는 강용이가 귀여워죽겠다는 듯 꾸벅 맞인사를 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강우와 강용이 그리고 미나가 집을 나섰다. 집안에서는 어른들의 술자리가 시작될 분위기였다.

    “저는 미나라고 해요. 나이는 열여섯입니다.”

    “아···. 저는 박강우입니다. 나이는 이제 열일곱입니다.”

    미나가 환하게 웃었다.

    “그럼 저보다 나이가 많네요. 편하게 미나라고 불러주세요.”

    “아···. 네.”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미나가 잔뜩 신난 걸음으로 앞장서기 시작했다.

    “가요.”

    강용이 빠르게 미나의 옆으로 다가갔다. 미나가 강용이의 손을 잡아주었다. 강우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집안에서는 말도 없이 얌전히 있던 미나였다. 하지만 밖으로 나오니 또래의 활발함으로 가득 찼다.

    “강우 상! 빨리 오세요.”

    “아···. 네네!”

    이윽고 세 사람은 지하철을 타고 일본 전자제품의 메카 아키하바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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