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402)
  • 동양무역(東洋貿易)의 태동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찻집의 중심에 강우와 할아버지가 앉아있었다. 그 주변으로는 동기들이 둘러 앉아있었다. 하나같이 할아버지를 보며 옛 추억을 떠올리는 듯했다.

    “재봉, 다리는 많이 불편한가?”

    “늙었어도 범 같은 눈빛은 여전하군.”

    할아버지를 둘러싼 동기들의 질문 세례가 이어졌다. 할아버지는 묘한 감정에 휩싸인 채 동기들의 질문에 답해주고 있었다.

    “다들 뭐가 그리 궁금한 게 많은 건가? 마치 취조당하는 기분이군.”

    할아버지의 농담에 동기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한바탕 웃음이 지나가고 하루오가 동기들을 보며 눈을 빛냈다.

    “다들 재봉 자네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왔어.”

    “그런가···. 다들 고맙군.”

    할아버지가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셨다. 나이가 들어도 친구 사이의 우정은 그런 느낌으로 다가오나 보다.

    “재봉, 게이오대학과 야구 친선전 하던 때가 기억나는가?”

    강우의 시선이 질문이 날아온 곳을 향했다. 그곳에는 커다란 덩치의 남성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씨익 웃었다.

    “기무라, 기억나지. 기억나고말고.”

    “그래, 그날 빈볼을 맞은 내 복수를 해주겠다고 자네가 다음 이닝 때 바로 상대 타자에게 강속구를 맞췄지.”

    “원래 야구라는 게 그런 거 아니겠는가?”

    기무라라 불린 남성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근데, 그놈이 잘나가던 집안 놈이었던 게 문제였지. 이름이 토모히사였던가? 아무튼, 상대방 벤치에서 재봉 자네를 향해 우르르 달려들었지.”

    기무라가 말을 끊고는 몸을 살짝 떨었다.

    “자네가 범 같은 눈을 번쩍 뜨고는 상대방을 맞이하는데 나는 진짜 대장군을 보는 듯했네.”

    “젊은 날의 객기였지.”

    할아버지가 추억에 잠긴 표정이 되었다. 하루오가 슬쩍 말을 보탰다.

    “샌님 같은 자네들이 우물쭈물하느라 재봉의 얼굴이 엉망이 된 건 왜 빼먹나.”

    “하루오!”

    기무라와 동기들이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특히 기무라는 덩치에 안 맞게 온순한 성격인가 보다.

    “그래도, 내 손에 쓰러진 게이오 놈이 여럿이니 남는 장사였지.”

    할아버지가 주먹을 휙휙 휘둘렀다. 동기들이 또 웃음을 터트렸다. 강우는 멍한 표정이었다.

    “할아버지, 야구도 하셨었어요?”

    강우의 물음에 할아버지가 말없이 웃었다. 그러자 하루오가 흥분하며 입을 열었다.

    “그냥 한 정도가 아니었어. 왼손잡이에 엄청난 강속구를 뿌리는 거로 유명했지. 어려서부터 정식으로 야구를 배웠으면 유명한 프로선수가 됐을 게다.”

    “와···.”

    강우가 입을 멍하니 벌렸다. 그러자 또 다른 동기가 입을 열었다.

    “하루오, 재봉이 잘하던 게 어디 야구뿐인가? 축구부터 시작해서 농구 그리고 달리기까지 운동이라면 못 하는 게 없었지.”

    하루오와 기무라의 옆에 있던 또 다른 동기들이 앞다투어 입을 열었다.

    “맞아. 싸움은 또 어찌나 잘하고? 게이오 대학 놈들이랑 시비가 붙으면 꼭 재봉이 있어야 했지.”

    게이오 대학과 와세다 대학은 일본의 유서 깊은 사립대학이었다. 그리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경쟁자였다. 엘리트 중심의 교육을 하는 게이오 대학. 모두를 위한 교육이 좌우명인 와세다 대학. 두 대학은 여러모로 다른 점이 많았다.

    ‘연대랑 고대 같은 느낌이려나.’

    사방에서 할아버지의 과거가 줄줄이 흘러나왔다. 할아버지의 얼굴이 조금씩 붉어졌다. 그런 할아버지에게 하루오가 쐐기를 박았다.

    “성적도 우리 중에 제일 좋았었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

    “.....”

    “.....”

    할아버지가 민망함이 담긴 헛기침을 했다.

    “흠흠···. 이 사람들아, 다들 늙어서 창피하게 옛이야기는 뭐 하러 해.”

    할아버지의 동기들이 이제야 민망한지 헛기침들을 했다. 하루오가 웃음을 터트렸다.

    “늙었다고 추억이 없는 건 아니지. 자네를 이리 오랜만에 만나니 수없이 했던 옛 추억 이야기도 다시 살아나는 듯하네.”

    “.....”

    할아버지와 동기들이 서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강우는 멍하니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동기들의 증언으로 듣는 할아버지의 청년 시절은 말 그대로 사기급이었다.

    ‘대박이다···.’

    생각해보면 아버지도 강우도 운동신경이 좋았다. 역시 유전의 힘은 무시 못 하나 보다.

    “강우야, 인사하거라.”

    강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강우를 향해 쏟아졌다.

    “내 손자일세. 이름은 박강우.”

    “안녕하세요. 박강우입니다. 할아버지의 친구분들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강우의 유창한 일본어에 동기들의 얼굴에 호기심이 짙어졌다. 기무라가 강우를 보며 눈을 빛냈다.

    “자네 키가 얼마인가?”

    “187입니다.”

    기무라가 작은 탄성을 뱉어냈다.

    “오~ 역시 재봉을 닮아서 키도 크고 잘생겼군.”

    기무라의 말에 동기 몇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재봉이 여자들한테 인기는 어찌나 많은지. 재봉 옆에 있으면 아주 꽃밭이었어.”

    “여자를 만나고 싶으면 재봉 옆에 붙어 다니라는 말도 있었지.”

    할아버지가 흐뭇하게 웃으며 손자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우리 강우가 어디 그뿐인 줄 아나? 영어는 물론이고 중국어까지 능숙하게 하지. 그리고 공부는 어찌나 잘하는지 서울대에 갈 예정이라네.”

    동기들이 오오 하는 탄성을 뱉어내며 강우를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선 채로 해부당하는 느낌에 강우가 멍한 표정이 되었다.

    “애인은 있나?”

    “네?”

    기무라가 기습적으로 물어왔다. 그러자 하루오가 얼굴을 찌푸리며 나섰다.

    “기무라, 아직 미성년자일세. 한국 나이로 열여덟 살이라고.”

    “왜? 미성년자는 연애하지 말라는 법 있나? 강우 군, 내 손녀가 있는데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한번 만나볼 텐가?”

    하루오가 화들짝 놀라며 빠르게 말했다.

    “넘보지 말라고. 내가 찍었으니까.”

    “자네는 손녀가 없지 않은가.”

    “있네. 친척 중에.”

    기무라와 하루오가 서로를 보며 기 싸움을 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피식 웃었다.

    “둘 다 뭐 하는 건가? 장난이 심하군.”

    하루오와 기무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강우는 민망함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할아버지가 기무라를 향해 반격했다.

    “기무라, 그나저나 하루코와는 어찌 됐는가?”

    “......”

    기무라가 침묵했다. 하루코는 기무라가 대학 시절 짝사랑하던 게이오 대학의 여대생이었다. 그러자 하루오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뭘 어쩌긴 지금쯤 다른 사람의 손자 손녀 재롱 보고 살고 있겠지.”

    “하루오···.”

    기무라가 주먹을 움켜쥐며 분해했다. 할아버지도 웃음을 터트렸다.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더니. 실패했나 보군?”

    “나무가 아니라 쇠기둥이었어.”

    동기들의 폭소가 터져 나왔다.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할아버지와 동기들은 정말 나눌 이야기가 많으셨나 보다. 옆에서 듣는 강우도 옛이야기에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오늘 자네가 우리를 보자고 한 이유를 이제 알려주게.”

    하루오의 말에 기무라를 비롯한 동기들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할아버지의 눈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하루오와 기무라가 할아버지를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일본에 김치공장을 세울 생각이네.”

    하루오와 기무라 그리고 동기들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전 할아버지와 가끔 담가 먹던 김치의 맛을 떠올린 것이다.

    “김치라···.”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쿄 근처에 공장을 하나 세우고 싶네. 자네들이 좀 도와주지.”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의 당당함은 정말 대단했다. 하지만 하루오와 기무라를 비롯한 동기들의 반응은 강우를 더욱더 멍하게 만들었다.

    “그럼, 도와줘야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재봉 자네 일인데.”

    동기들의 반응에 강우가 멍한 표정이 되었다. 할아버지도 동기들의 적극적인 반응에 놀란 눈치였다. 기무라가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재봉, 기억나나? 자네가 학도병으로 끌려가기 전에 나에게 넘겨주었던 집을.”

    “기억하지.”

    할아버지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할아버지의 집안은 즉 강우의 가문은 그 당시에 엄청난 부자였다. 일본에 유학하러 간 할아버지를 위해 도쿄에 커다란 집을 샀을 만큼 말이다. 그리고 학도병으로 끌려가기 전 할아버지는 그 집의 소유권을 기무라에게 넘겨준 것이다.

    ‘어쩔 수 없으셨겠지.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학도병 차출이니까 말이야.’

    기무라가 할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 덕분이었네. 맨몸뿐이던 나에게 자네가 베푼 엄청난 은혜가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들었어. 내가 가진 모든 것의 씨앗은 자네로부터였네.”

    “아닐세. 자네의 부동산의 흐름을 보는 안목은 옛날부터 탁월했지. 그리고 그 집은 자네에게 안 줬으면 일본 정부에 압수당했을걸세. 지금의 자네를 이룬 건 자네 능력이야.”

    할아버지가 희미하게 웃었다. 기무라가 눈을 빛냈다.

    “자네가 나의 것을 모두 가져간다 해도 나는 할 말이 없네. 그러니 돈이 필요한가? 얼마면 되겠나?”

    “허허···.”

    할아버지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기무라가 잔뜩 흥분했다.

    “내 도울 수 있을 만큼은 돕겠네. 언제든지 말만 하게.”

    “고맙네. 기무라.”

    “아니야, 재봉 자네에게 내가 진 빚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기무라의 말에 하루오도 고개를 끄덕였다.

    “재봉, 우리의 이런 행동을 동정이라 생각하지 말게. 어찌 보면 우리 모두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응어리를 덜어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지.”

    하루오의 말에 동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할아버지에게 다가와 손을 잡아주었다.

    “동기 좋다는 게 무언가?”

    “재봉, 젊었을 때 자네는 우리의 자랑이자 구심점이었지. 자네가 그렇게 끌려가고 나서 다들 한동안 너무 힘들었네. 죽기 전에 딱 한 번만 우리가 자네를 도울 수 있게 해주게.”

    할아버지의 얼굴에 감동의 빛이 떠올랐다.

    “모두 고맙네.”

    하루오가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기무라가 가진 게 돈밖에 없어.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얼마든지 빌려 가게. 안 그런가 기무라?”

    “암···. 그렇고말고.”

    기무라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동기 중 한 명이 웃으며 말했다. 고위공무원 출신이라던 동기였다.

    “도쿄 외곽지역에 공장을 지을 거라면 그것도 내가 적당한 곳을 알아봐 주겠네. 그리고 허가 절차도 걱정하지 말게.”

    “고맙네.”

    강우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이곳에 와서 알게 된 할아버지의 동기들은 정말 대단한 이력의 소유자들이었다. 고위공무원은 물론 정치인 그리고 학계의 저명한 학자들 그리고 기업인들까지 다양했다.

    ‘대단하다.’

    강우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이대로 놔뒀다가는 당장 내일부터라도 김치공장이 세워질 기세였다.

    “할아버지.”

    강우가 한국어로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가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야,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게야?”

    “할아버지 제가 제안 하나 해도 될까요?”

    할아버지의 얼굴에 이채가 서렸다. 갑자기 한국어를 사용하면서 말한다는 것이 무얼까 싶었다.

    “그래, 어디 한번 해 보거라.”

    “네, 할아버지.”

    “먼저 기무라 어르신이 할아버지께 융통해 주시겠다는 자금은 투자인가요? 아니면 단순히 빌려주시는 걸까요?”

    할아버지의 눈이 살짝 커졌다.

    투자와 융통.

    두 단어는 같은 듯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할아버지가 기무라를 보며 물었다. 기무라가 단번에 손을 저었다.

    “재봉의 일에 발을 걸쳐 돈을 벌 생각은 없다. 그건 은혜를 모르는 짓이지. 나는 재봉에게 무상으로 돈을 빌려주겠다. 기한도 언제든지 갚아도 좋다.”

    “네?”

    이번에는 강우가 멍한 표정이 됐다. 김치공장을 세우는데, 얼마의 자금이 필요한지 알고 저런 호언장담인가. 기무라가 품에서 명함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할아버지에게 내밀었다.

    “언제든지 연락만 하게. 나는 최선을 다해 자네를 돕겠네.”

    “고맙네.”

    할아버지가 명함을 챙겼다. 할아버지가 다시 강우를 바라보았다.

    “하던 말을 마저 해보아라.”

    강우가 눈을 빛냈다. 자신의 계획에 날개를 달을 절호의 기회였다.

    “한국에 법인을 세우는 게 어떨까요? 도쿄에 세워질 김치공장을 위한 법인을요.”

    “법인을?”

    할아버지가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워했다.

    “네, 김치공장은 도쿄에 세우더라도. 그 공장에 원자재를 납품하고 컨트롤하는 건 아버지가 더 잘하시지 않을까요? 그러려면 한국에 법인이 만들어지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그렇지.”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일본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도쿄에 공장을 세우는 이유는 접근성 때문이잖아요. 그게 아니라면 높은 인건비를 떠안으면서까지 일본에 공장을 세울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러니 굳이 법인을 일본에 세울 이유는 없겠죠.”

    “강우, 네 말이 맞구나.

    할아버지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김치는 한국이 종주국이잖아요. 메이드 인 재팬 즉 일본에서 만들어진 김치지만 그 브랜드가 한국의 뿌리임을 강조해야 성공할 수 있겠죠.”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손자가 보여주는 견식과 결단력은 자신을 닮아있었다.

    “그래···. 그렇지···.”

    “한국에 세우는 법인의 대표는 당분간 할아버지가 하시고요. 사업이 안정되면 아버지를 대표로 하면 될 거 같아요.”

    “그래야겠지.”

    강우가 할아버지를 보며 눈을 빛냈다.

    “법인의 이름은 동양무역이 좋겠네요.”

    “으음···.”

    할아버지의 얼굴이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이내 눈가가 붉어지기 시작했다.

    동양무역(東洋貿易).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이 담겨있는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회사의 이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