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402)
  • 오랜만이군

    여관에서의 첫날 밤. 강우 가족이 머물게 된 방은 총 두 개였다. 아버지와 어머니, 강용이가 한방을 그리고 강우와 할아버지가 한방을 쓰기로 했다.

    “.....”

    할아버지는 방에 앉아 하염없이 밖을 바라보고 계셨다. 일본 전통 여관 특유의 구조가 밖을 선명히 보이게 해주었다.

    “할아버지, 옷 편한 거로 갈아입으세요.”

    짐 정리를 끝낸 강우의 손에는 할아버지의 옷이 들려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스윽.

    강우가 할아버지의 옆쪽으로 옷을 놓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옆에 앉았다.

    “예전의 모습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구나.”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쓸쓸함이 담겨있었다. 승합차에서 눈을 감고 계셨건만, 도쿄의 모습을 어느새 눈에 담으셨나 보다.

    “네.”

    강우가 짧게 답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쿄에는 옛 모습이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전쟁 중에 받았던 대공습 당시 도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건물 대부분이 새로 지어진 현대 도시였다.

    “할아비가 독립운동을 했을 때는 말이지. 일본이라는 나라가 꼭 망했으면 하고 몇 번을 간절히 빌었는지 모를 게다. 그런데 막상 와서 변한 이곳의 모습을 보니 또 마음이 이상하구나.”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과 추억이 담겨있는 곳이 도쿄이기도 했다. 강우는 그 심정을 약간은 알 것 같기도 했다. 기억 속 미래의 모습과 다른 지금의 한국을 보면서 같은 기분을 느끼기도 했으니까.

    “오랜만에 오셔서 그러신가 봐요.”

    “그렇지. 오랜만이지.”

    할아버지가 희미하게 웃었다. 강우가 할아버지의 옆쪽으로 바싹 붙어 앉았다.

    “그래도 가족이랑 같이 다시 오셔서 좋으시죠?”

    강우의 물음에 할아버지가 작게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강우의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 주었다.

    “그래, 참 좋구나.”

    강우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였다.

    “아버지 주무세요?”

    할아버지를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식이냐?”

    “네, 아버지 들어가겠습니다.”

    드르륵.

    문이 옆으로 밀려나며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버지의 양손에는 배가 불룩 나온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다. 아버지가 멋쩍게 웃으며 봉지를 들었다.

    “요 앞에 편의점에 좀 다녀왔습니다. 맥주 한잔하시겠어요?”

    “좋지.”

    아버지가 방의 중앙에 있는 탁자에 비닐봉지를 내려놓았다.

    따칵.

    아버지가 맥주캔을 따서 할아버지 앞에 놓았다. 할아버지가 또다시 옛 추억에 잠겼다.

    “대학에 다닐 때 참 자주 마셨던 술이구나.”

    “그러셨어요?”

    40년대에 맥주를 즐기던 할아버지라니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신 할아버지가 힐끗 강우를 보았다.

    “우리 장손도 맥주 마실래?”

    “네?”

    강우가 머뭇거렸다. 아버지가 빠르게 맥주캔을 따더니 강우 앞에 놔주었다. 그리고는 씨익 웃었다.

    “아들, 알지? 외국에 나오면?”

    “네, 기억나요. 그리고 술은 어른한테 배워라.”

    강우가 슬쩍 맥주캔을 들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꿀꺽 마셨다. 목젖을 자극하는 맥주의 짜릿함에 자기도 모르게 ‘크~’ 소리가 나왔다.

    “허허. 우리 손자 술을 마실 줄 아는구나.”

    할아버지의 너털웃음이 여관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렇게 삼대가 모인 술자리가 이어졌다. 잠시 후, 잠든 줄 알았던 강용이가 방에 난입했다.

    “할아버지! 나도 나도.”

    맥주를 음료로 착각한 강용이었다. 맥주캔을 들려다가 아버지에게 꿀밤을 맞았다.

    “아야!”

    그리고는 이내 혀를 삐죽 내밀고 할아버지의 품으로 도망쳤다. 할아버지가 또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이 됐다.

    “허허.”

    “아버님, 안 주무셨어요?”

    평소 술을 잘 하지 않는 어머니도 합류했다. 강우 앞에 놓인 맥주캔을 보시고는 잠시 움찔하셨다. 하지만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우리 아들 맨날 공부만 하는데 오늘 같은 날 놀아야지.”

    “네. 조금만 먹을게요.”

    어차피 한 캔 이상은 마실 생각도 없었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앞에 맥주캔을 탁 하고 놓아주었다.

    “여보도 한잔해.”

    “알겠어요.”

    어머니가 맥주캔을 따더니 벌컥 마셨다. 그리고는 이내 터질 듯 붉은 얼굴이 되셨다. 강용이 그런 어머니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으악! 엄마 빨강 괴물 됐다!”

    “하하!”

    강우 가족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밤이었다.

    * * *

    일본에 도착한 다음 날. 강우와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가 아침 일찍 일어났다. 준비를 마친 강우가 방을 나섰다.

    “어르신.”

    입구에는 마사토가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에는 옅은 긴장감과 흥분이 흐르고 있었다. 지팡이를 짚은 할아버지가 마사토를 보며 인자하게 웃었다.

    “마사토, 너무 일찍 온 거 아닌가?”

    “어르신, 밤새 한숨도 못 잤습니다.”

    아버지가 마사토를 보며 씨익 웃었다.

    “아니 자네가 아버지보다 더 긴장하면 어쩌자는 거야?”

    “그러니까 말이지.”

    강우가 할아버지를 부축해 승합차에 앉혀드렸다. 그리고는 자신도 승합차에 올라탔다. 운전석에 앉은 마사토와 조수석에 앉은 아버지가 깊은숨을 내뱉었다. 할아버지가 희미하게 웃었다.

    “어서 가자꾸나.”

    “네, 어르신.”

    승합차가 미끄러지듯 출발했다. 거리를 가로지른 승합차가 와세다 대학이 있는 신주쿠구 니시와세다에 도착했다.

    “잠깐 세워줄 수 있겠나?”

    할아버지의 부탁에 승합차가 대학의 앞쪽에서 멈춰 섰다. 아버지가 빠르게 내려 할아버지를 부축했다. 강우도 승합차에서 내렸다.

    “.....”

    와세다 대학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이 격하게 흔들렸다. 할아버지의 입에서 짙은 회한이 담긴 숨이 뿜어져 나왔다.

    “많이 변했군.”

    할아버지가 짧은 소회를 뱉어내고는 다시 승합차에 올라탔다. 이윽고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뒤 와세다 대학의 정치경제학부로 향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학술원의 직원이 강우와 일행을 보고는 사무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일전에 연락드렸던 마사토라고 합니다.”

    마사토가 명함을 내밀었다. 직원이 명함을 힐끗 보더니 깜짝 놀랐다.

    “아. 그럼 이분이?”

    직원이 할아버지를 보며 물었다. 할아버지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바로 박재봉입니다.”

    “죄송합니다. 한국식 이름으로는 학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직원의 말에 할아버지의 눈동자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찾아보시오. 나는 분명히 내 이름으로 학적에 올랐었으니.”

    직원이 잠시 망설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리고는 사무실의 한쪽에 있는 문서보관실로 내려갔다. 마사토가 할아버지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르신, 개명을 하지는 않으신 겁니까?”

    “그래. 나는 하지 않았다.”

    마사토의 얼굴에 또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일본강점기의 창씨개명은 피해가기 힘든 수준이었다. 창씨개명을 완료한 1940년대에는 조선인의 80%가 창씨개명을 완료한 상태였다. 특히나 일본 대학을 다니던 할아버지에게는 그 압력이 거셌을 것이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학도병으로 끌려가는 순간까지 자신의 본질을 지키신 것이다.

    잠시 후, 사라졌던 직원이 돌아왔다. 얼굴 가득 놀라움이 가득했다. 직원의 손에는 오래돼 보이는 서류가 들려있었다.

    “여, 여기 있습니다.”

    직원이 할아버지의 앞쪽으로 서류를 내려놓았다. 아버지와 마사토가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서류를 확인하는 것은 할아버지의 몫이었다.

    “으음···.”

    깊은숨을 뱉어낸 할아버지가 서류를 펼쳤다. 할아버지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박재봉.

    직원이 가지고 온 서류는 할아버지의 이름이 선명히 박힌 학적부였다. 할아버지가 학적부에서 손을 뗐다. 아버지가 빠르게 학적부를 확인했다.

    “아버지···.”

    아버지의 목소리가 거칠게 흔들렸다. 말로만 듣던 할아버지의 놀라운 과거를 마주친 아들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마사토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학적부를 확인했다. 그리고는 직원에게 물었다.

    “명예 졸업장 건은 어떻게 된 겁니까?”

    “그건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기록을 보니 이미 졸업을 위한 모든 과정을 수료한 상태이시더군요.”

    학적이 확인된 마당에 상황까지 이러했다. 강우가 할아버지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졸업을 못 하신 게 아니라 하지 않으신 거였어?’

    할아버지는 정말 대단한 분이셨다. 할아버지가 유창한 일본어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졸업을 못 한 이유는 바로 창씨개명 때문이었다. 그 당시 대학 쪽에서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졸업장을 줄 수 없다고 했지.”

    마사토와 직원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물들었다. 마사토가 직원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명예 졸업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졸업으로 처리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학술원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할아버지를 향해 깍듯이 인사를 했다.

    “상부에 보고해 이른 시일 내에 졸업장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고맙네.”

    강우와 아버지 그리고 마사토가 환하게 웃었다. 할아버지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후련해 보였다.

    * * *

    와세다 대학을 벗어난 강우 가족이 여관에 돌아왔다. 아버지는 마사토의 회사를 방문한다며 따라가셨다. 강우는 어머니를 모시고 쇼핑하러 가기로 했다. 할아버지는 여관에 남으셨다. 와세다 대학을 다녀온 뒤 생각이 많은지 통 힘이 없으셨다.

    “할아버지랑 있을래.”

    강용이가 손을 흔들며 강우와 어머니를 배웅했다. 거리로 나오자 어머니가 살짝 강우의 팔짱을 끼셨다.

    “아들~”

    강우의 팔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이내 어머니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기억 속 강우는 이런 어머니의 애정표현을 참 부끄러워했었다.

    “가요.”

    어머니가 살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평소 같았으면 슬쩍 팔을 뺐을 강우였다. 강우가 어머니를 보며 씨익 웃었다.

    “엄마, 그동안 무뚝뚝해서 미안했어요. 오늘은 둘이 데이트해요.”

    “그래? 엄마는 너무 좋아.”

    어머니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었다. 1등 성적표를 드렸을 때보다 더 환한 웃음이었다. 강우가 물끄러미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간단한 걸 왜 못 했을까···.’

    강우와 어머니는 신주쿠의 백화점에 들렀다. 백화점에 들른 어머니의 표정이 날아갈 듯 밝아졌다.

    “화장품 좀 사 가야겠어. 옆집 새댁이 부탁한 게 있거든.”

    “네, 엄마. 저녁까지 시간이 있으니까 천천히 쇼핑하세요.”

    어머니가 화장품 판매대에 다가갔다. 일본에서 가장 잘나간다는 시세에도라는 브랜드였다. 직원의 입에서 일본어가 흘러나왔다.

    “어서 오세요. 고객님.”

    “네?”

    어머니가 일본어에 움찔했다. 직원도 어머니의 한국어에 움찔했다.

    강우가 빠르게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유창한 일본어로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사용할 화장품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30대 여성에게 선물할 화장품도요.”

    “가···. 강우야?”

    어머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들의 입에서 일본어가 물 흐르듯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 네네.”

    직원이 강우를 보며 살짝 얼굴을 붉혔다. 덩치가 크고 남자다운 외모의 강우였다. 직원은 열심히 물건을 추천해주었다. 강우와 어머니는 매장 몇 곳을 더 돌아다녔다. 그리고 어머니와 옆집 새댁의 화장품을 샀다. 근처의 디저트 가게에서 모자간의 오붓한 시간도 가졌다.

    * * *

    강우와 어머니가 여관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자신의 방으로 가셨다. 강우는 할아버지와 머무는 방으로 향했다.

    그 순간이었다.

    “재봉, 이제야 이렇게 만나다니.”

    할아버지의 방안에서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강우의 머리가 지끈 아파져 왔다. 그와 동시에 강우의 눈앞으로 익숙한 영상이 떠올랐다.

    거대한 건물의 앞쪽으로 건장한 체격의 청년이 서 있었다.

    [早稲田大学]

    청년의 시선이 머문 곳에 선명히 박혀있는 글자가 보였다.

    ‘이 기억은···.’

    할아버지와 마사토가 만났을 때 떠올랐던 기억이었다. 그때, 청년의 모습인 할아버지를 불렀다.

    “재봉, 꼭 고집을 부려야 하겠나? 개명을 하지 않으면 졸업은 물론이고 바로 징집대상이야.”

    강우가 스르륵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할아버지와 같은 제복을 입은 청년이 있었다.

    “하루오, 내 의지는 변함없네.”

    그 말을 끝으로 기억이 먼지처럼 흩어졌다. 그리고 방 안에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루오, 오랜만이군.”

    강우의 눈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할아버지를 찾아온 인물은 영상 속의 바로 그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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